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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168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5.06.27 21:30
조회
981
추천
30
글자
21쪽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DUMMY

“예?”


위장 중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큰 목소리를 내버리는 셰르. 벤의 갑작스러운 명령에 당혹스러운 사람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뭐? 뭔 소리야?”


“검성님, 전투준비라 하셨습니까?”


리즈와 유진이 앞으로 고개를 내밀어 벤의 확실한 대답을 재차 요구한다. 복명복창이 아닌 명령의 확인은 검성의 목소리에 대한 반응이라고 하기엔 분명 무례한 행동. 그러나 유진은 명령의 출처가 제아무리 ‘그 벤’이라 할지라도 이번엔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전투준비하라니까! 오캄푸스는, 고도는 어딨어? 마법사들 전열 정비시키고 빨리-”


“진정하십쇼, 검성님. 마법사들은 전부 산속에서 대기 중이지 않습니까?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셰르가 벤의 어깨를 잡아끈다. 그제야 마주친 검성의 얼굴엔, ‘검성’과 ‘지휘관’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오직 겁에 질린 ‘청년’의 흔들리는 눈동자만이 남아있었다.

셰르의 판단은 빠르고 정확했다.

그가 계속해서 전투준비를 외치는 벤의 입을 틀어막고, 그의 머리를 겨드랑이에 구속한 채 아래로 끌어내린 것이다. 셰르의 의도를 눈치챈 유진 또한 발버둥 치는 벤의 팔다리를 뒤에서 붙잡아 제압을 돕는다. 이 이상 소란을 키워서 주목을 끌어봤자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었다.


“벤, 왜? 뭐 땜에 그래?”


그리고 셰르와 유진이 벤을 제압하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다면, 리즈는 벤의 필사적인 손짓의 방향을 읽기 위해 애를 쓰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의 떨리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엔 차가운 바위와 깎은 듯이 아찔하게 올라가는 절벽이 있었을 뿐.




“야, 너 뭐냐?”




벤의 발버둥이 멈추고, 그를 제압하고 있던 셰르와 유진의 움직임도 멈춘다.

브린타이나군의 복장으로 위장한 병사들의 행군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 차갑고 예리한 목소리는, 주변을 감싼 시간의 온기를 빼앗은 듯, 모든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셰르는 헉-하는 숨소리를 감추지 못한다. 유진 또한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경악이 흘러나오는 입술을 열고 있었고, 리즈는 굳은 얼굴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벤은,

입을 틀어막던 셰르의 손이 느슨해졌음에도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한다.


“너, 맨날 내 꿈에 나와서 지랄하던 새끼들 중에 하나지?”

무기는 들고 있지 않았지만, 렌의 목소리는 감출 수 없는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너 뭐냐니까, 이 좆같은 새끼야.”


벤보다 커다란 덩치.

벤의 머리보다 더욱 산발인 머리카락.

벤의 눈빛보다 날이 서있는 눈동자.

그러나 셰르와 유진, 그리고 리즈는, 지금 눈앞에 나타난 이 정체 모를 사나이가 자신들의 검성과 같은 얼굴을 지녔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뻗은 손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 지도.


“버러지 같은 게 방해하지 마라.”


셰르가 휘두른 검을 막아내는 데 렌은 시선을 돌릴 필요도 없었다. 검은 렌의 손가락 사이를 뚫지 못한 채 그대로 정지하고 말았지만, 그가 맨손으로 자신의 검을 막았다는 사실에 셰르가 경악할 새는 없었다. 렌이 검날을 부러트리고서 잡힌 파편을 그대로 셰르의 어깨에 박아 넣은 것이다.


“셰르!”


유진은 신음을 흘리고 있는 셰르를 재빠르게 뒤로 끌어당겨 파편이 그의 목까지 긋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셰르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사이를 가로막았을 뿐, 그 이상 어떠한 저항이나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공포에 젖어 있었다.

제아무리 자신의 모든 분노를 쏟아낼 수 있는 적이라도, 상대를 향해 검을 휘두를 땐 생명을 빼앗는 ‘순간’을 인지하게 된다. 특히 영력을 다루는 기사들은 같은 기사와 검을 맞대는 순간순간마다 그 중압감을 마음속에 새길 수밖에 없다. 그건 오랜 기간 전장에서 ‘마음’이 풍화된 기사일지라도, 눈을 감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할 커다란 무게.

그런데 이 남자는 그 ‘순간’을 인지하지 않는다.

마치 죽은 나무줄기라도 베어내듯이, 그의 말대로 자신이 바라보는 것 이외엔 모두가 ‘버러지’인 듯이

아무것도 품지 않고 생명을 거두려고 한다. 이런 끔찍한 가벼움을 유진은 평생 동안 접해본 적이 없었다.


“응?”


추위와 군홧발로 굳어있는 땅을 비집으며 수많은 나무줄기가 튀어나와 렌의 발목과 허리를 감싼다. 갑작스런 현상에 렌은 당황하여 창을 꺼낼 생각조차 못한 채 손으로 줄기들을 잡아 뜯었지만, 끝없이 튀어나오는 줄기들과 피부를 파고들기 시작하는 독으로 인해 잔뜩 인상을 구겨야 했다.


“후속대가 있는 곳까지 퇴각한다! 셰르, 유진 지휘를. 리즈는 후방을 엄호해!”


그리고 ‘지휘관’의 얼굴로 되돌아온 벤의 목소리에 세 명의 생도는 혼란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셰르는 곧바로 어수선해지기 시작한 주변을 향해 무장과 퇴각을 명령했고, 유진은 그를 부축하며 병사들 사이로 섞여 들어간다.

하지만 움직일 생각이 없는 한 그림자가 있었으니,


“벤! 너는?”


갑자기 역행하기 시작하는 병사들과, 그런 그들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 브린타이나군의 제지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하는 계곡. 리즈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따라갈게.”



살짝 뒤돌아본 벤의 옆모습에서 리즈가 무엇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벤의 대답에 이어 곧바로 내뱉으려던 말을, 그의 눈동자와 입술을 읽고서 깊이 집어삼킨다.


“.......알았어.”


리즈는 짧은 대답과 함께 활을 꺼내 들고 하얀 물결 사이로 모습을 감춘다. 이미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왕국군과 카나반군 사이에선 서서히 충돌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괴상한 마법을 쓰네.”


“.......”


벤의 귓가를 스치는 바람. 그 바람은 벤의 뺨에 얇지만 깊은 한 줄기 붉은 선을 선사한다. 그러나 벤은 뺨을 타고 흐르는 피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의 먹색 시선은 창을 휘둘러 줄기들을 파헤쳐 나오는 렌의 미소만을 향해있었다.


“배때기에 창을 쑤셔 박아야 혀를 놀리려나.”


비록 기사는 아니었지만, 벤은 자신을 향해 천천히 창을 들어 올리는 이 남자의 존재감을 전신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적의와 분노로 치장된, 극도의 호기심과 집착.

그리고 그런 그를 자유롭게 병사들 사이에 풀어놓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벤은 잠시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마른 입술을 움직인다.



“해보시지.”




============================




“빈스 경! 이게 무슨 일이오?!”

벨레이는 다급한 목소리로 빈스의 시선을 끄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연대장’의 부관은 벨레이의 등장이 마냥 귀찮기만 한 듯, 아군제복을 입은 병사를 베어 넘기는 것으로 집중을 되돌리고 있었다.

“갑자기 아군을 왜 공격하는 거요?! 상대는 제대로 된 무장조차 안 하지 않았소?!”


벨레이의 입장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풍경은 아군이 패퇴한 아군을 학살 중인 것으로밖엔 보이지 않는다. 이마저 무시했다가는 괴롭힘이 이어질 것만 같았기에 빈스는 결국 벨레이를 향해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돌린다.


“연대장님이 교전을 시작하셨습니다. 저흰 그를 따를 뿐이고요.”


“교전이라니? 그가 명령을 내린 것이오?”


“따로 명령은 없으셨습니다만, 그저 따를 뿐입니다.”


“그저 따르다니....... 지금 아군을 학살하고 있는 거잖소.......!”


처음엔 패잔병끼리 대열을 이루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 구분을 할 수 있었지만, 곳곳에서 교전이 시작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대열과 병사들이 그대로 뒤엉켰기 때문에, 전장은 이미 손 쓸 방도가 보이지 않는 극심한 혼란 속이었다.


“간단합니다. 도망치려는 놈들은 적입니다. 무기를 들고 있지 않은 놈도 적이고요.”


“그게 무슨-”


“아니면 저기 아군병사들만 골라서 쏴대고 있는 기사년이라던가.”


벨레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빈스가 가리킨 대상을 찾아 움직인다. 그 끝엔, 날렵한 움직임으로 검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병사들 사이를 휘젓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그리고 빈스의 말대로 그녀가 날리는 화살은 족족 이쪽의 부관이나 병사들의 미간을 꿰뚫는 중이었다.


“.......내가 처리하겠소.”


벨레이는 검을 빼어들고 그대로 전장을 가로질러 나아가기 시작한다. 분명 지금 이 계곡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상식 밖의 일이다. 하지만 그녀를 보는 순간, 벨레이의 군인으로서의 감각이 해답을 알려준 것이다.

아무런 기척도, 영력의 파동도 내뿜지 않으면서도 조용히 위협을 제거해나가는 여기사. 그녀의 존재야말로 벨레이에겐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정답 그 자체였다.

그는 조용히, 살의를 감추고 여인의 그림자를 쫓는다. 시선과 화살이 지닌 날카로움이나, 절대로 자신의 영력을 노출시키지 않는 치밀함에서 그녀의 감각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리고 한 번의 도약으로 검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이르렀고, 숨을 삼키는 순간-


“?!”


벨레이는 격하게 고개를 비틀어 화살을 피해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격이었기에 그는 뒤틀린 목근육에서 깊은 통증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그의 신경을 건드린 것은, 시야도, 기척도 없었던 자신을 정확하게 골라낸 그녀의 말도 안 되는 감각.

마치 시력, 또는 영력을 감지하는 능력이 아닌, 제3의 감각이 있는 것처럼.


“흐응.”


그러나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아마 오늘 처음으로 화살이 빗나간 순간이었을 테니까.


“어디 소속이냐?! 정체를 밝혀라!”


벨레이는 그녀가 다시금 화살을 뽑아들 틈을 주지 않는다. 피아를 식별할 수 없는 어느 병사를 옆으로 내동댕이치며 곧장 그녀를 향해 도약한 그였다. 벨레이의 검끝은 화살이 날아왔던 궤도를 그대로 되짚어가며 날카롭게 바람을 갈랐고, 무기와 무기가 맞부딪치는 격렬한 마찰음과 함께 마침내 그는 ‘소녀’의 미소를 볼 수 있었다.


“말해줘 봤자 못 믿을 걸.”


생각보다 앳된 상대의 얼굴에 벨레이가 당황한 것도 잠시, 소녀가 화살 대신에 꺼내든 것은 날카로운 단검이었다. 벨레이가 그에 반응을 하기도 전에 소녀는 그의 일격을 막은 활을 크게 휘둘러 시위를 통해 검을 쥔 벨레이의 손을 옭아맨다. 묘기에 가까운 손동작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검을 놓치기엔 벨레이의 영력은 만만치 않았다.

보통사람이었다면 살을 파고드는 활시위에 고통의 비명을 내질렀을 테지만, 벨레이는 그대로 검을 쥔 손을 찔러 넣어 소녀의 목을 노린다. 물론 갈라진 손등으로 피가 새어 나오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었지만, 소녀의 미소를 앗아가기엔 충분했다.


“아아- 귀찮게.”


짧은 감상만을 남기고 갑자기 모습을 감춘 여인의 그림자. 벨레이는 그녀가 혼란을 틈타 어디론가 도약을 한 것으로 파악하고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이내 그가 살펴보았어야 할 곳이 주변이 아닌 바로 아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순식간에 뒤집히는 벨레이의 시야.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기도 전에, 그는 복부에 격한 통증을 느끼며 쓰러진다. 소녀가 활시위로 그의 발목을 잡아채며 배를 가격한 것이다. 그 발차기에 담긴 영력은 그리 치명적이진 않았으나, 그가 곧바로 날아드는 단검에 반응할 신경만큼은 뺏을 수 있었다.


“큿-!”


목을 대신하여 팔뚝을 희생한 벨레이. 그는 뒤로 도약하며 일어나 팔뚝에 박힌 단검을 뽑아낸다. 하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물러가는 병사들과 그들을 뒤쫓는 함성뿐, 소녀의 그림자는 없었다.







“상황은?”

부상당한 셰르를 대신하여 후방의 상황을 살피러 온 유진이었지만, 그녀는 리즈로부터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미 눈으로 상황을 대강 읽을 수 있었다.

위장을 위해 제대로 된 무장도 없이, 반쯤 포위되다시피 한 상태에서 시작된 퇴각전이다. 전열이 정상일래야 정상일 수가 없었다. 그나마 제대로 명령이 하달되지 않은 적의 지휘체계 속에서 혼란을 틈탈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적 지휘관이 제대로 된 포위망을 구축했다면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을 것이 분명했다.


“낙오한 애들이 미끼가 되어주고 있어. 근데 아마 오래 못 버틸 거야.”


리즈는 숨을 몰아쉬며 병사로부터 새로운 화살통을 건네받는다. 빠져나온 인원은 많게 잡아도 절반이 채 되지 못한다.

그야말로 치명적인 패착. 이로써 전투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음은 물론이고 잠입하겠다는 처음의 계획도 물거품이 되었다. 게다가 전투는 아직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후발대가 숨어있는 산까지 유인해야겠어. 마법사 전력이 있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덤벼드는 한 병사의 얼굴을 그의 검과 함께 베어내며 유진이 묻는다. 그러나 리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상자가 너무 많아. 따라잡힐 거야. 매복에 성공한다고 해도 전력 차가 너무 커서 제압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게다가......., 벤이 아직 저기에 있어.”


“.......뭐어?”

검을 바로 잡는 것조차 잊은 채 리즈의 얼굴을 바라보는 유진. 이어진 그녀의 얼굴엔, 평소 온순한 그녀의 모습이라고는 남아있지 않았다.

“검성님을 놓고 오다니? 어떻게 된 거야?!”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야! 너도 봤잖아, ‘그 인간’.......”


“.......”


그와 똑같은 얼굴.

그와 똑같은 목소리.

그러나 그와는 전혀 다른 존재.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존재.


“온다.”


리즈는 곧바로 활시위를 당겨 화살 하나를 날려 보낸다. 화살은 겨울바람과 함께 한 병사의 이마를 꿰뚫었지만, 몰려드는 병사의 무리는 리즈의 화살에 무너진 병사의 존재는 티도 나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함성을 품고 있었다.


“에이 씨........”


이 정도로 순수한 리즈의 탄식을 들은 적이 있던가. 유진은 검을 고쳐 잡으면서도 그 탄식에 미소를 짓고 싶었지만, 그 의미를 알고 있는 이상 도저히 입가를 느슨히 늘어트릴 수가 없었다.




================




비명소리가 잦아들어 간다. 함성은 이미 저 멀리 계곡의 바깥쪽으로 옮겨가는 중이었다. 귀를 괴롭히는 요소들이 점점 줄어감에 따라 벤의 의식과 집중도 서서히 한곳을 향해 모여들 수 있었지만, 그것이 곧 긍정적인 상황으로 이어지진 않을 모양이다.


“알마네그로의 창 따위, 진짜 기사의 창을 모방했을 뿐이잖아.”


마력으로 이루어진 ‘악의의 창’을, 너무도 간단하게 쳐내는 렌. 벤은 그에 굴하지 않고 또다시 대지로부터 독을 품은 줄기를 소환해낸다. 그러나 그마저도 렌이 창을 한번 휘두르자 가을바람에 부서지는 낙엽처럼 흩뿌려지고 만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 그 자체를 꿰뚫을 기세로 찌르고 들어오는 그의 창끝. 벤은 간신히 몸을 날려 그것을 피해내는데 성공하지만, 경량화를 통한 순발력을 길게 버텨내기엔 그의 근육은 너무도 왜소하고 볼품없었다. 참을 수 없는 신음을 내뱉으면서도 벤은 손끝으로 마력을 집중시킨다.


“나의 기량, 그리고 그 기량을 묶어놓을 유일한 수단이 무엇인지, 너는 그 짧은 순간에 판단해낸 거겠지. 너에 대한 나의 집착. 나에 대한 너의 의문. 이상하게 전혀 공감할 수 없으면서도 알 수가 있단 말이지.”

벤은 대답하지 않는다. 짧은 주문을 외운 후에, 그는 손끝에 집중시켰던 마력을 내성의 여과를 거치지 않은 채로 분출하여 거대한 공간의 뒤틀림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는 곧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거대한 폭발로 이어졌어야 할 공간의 뒤틀림이, 자신과 같은 얼굴을 지닌 남자가 창을 한번 휘두른 것만으로 상쇄되어버렸으니까.

“내가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인내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마지막으로 다시 물을게.”

어느새 다가온,

너무도 익숙한 먹색 눈동자.

“너, 정체가 뭐야?”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영력이 담긴 창대가 그대로 벤의 옆구리를 강타했고, 부러지는 갈비뼈가 선사하는 소름끼치는 감각과 내장이 뒤집어지는 듯한 고통이 벤의 목소리와 이성 모두를 마비시킨 것이다.

“아~ 다행이다. 네가 한 번만 더 발악했으면 다음 공격에 아마 죽여 버렸을 거야.”

부러진 갈비뼈가 폐로 파고드는 바람에 벤은 격한 기침과 함께 붉은 피를 흩뿌려야 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양 다리 사이에 놓고서, 렌은 천천히 허리를 굽혀 그와 눈을 가까이 마주한다.

“.......아무리 봐도 똑같은데. 야, 너. 일로 와봐. 와서 얘좀 봐봐.”


“예, 옛!”


“봐봐, 나랑 똑같이 생겼지?”


“예! 그,그렇습니다!”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병사에게 물러가라 손짓하는 렌. 벤은 그제야 주변엔 이미 침묵뿐이며, 익숙하지 않은 얼굴들만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렌은 그런 벤의 시선을 어렵지 않게 잡아낸다.


“아, 걱정 마. 네가 데려온 애들은 곧바로 라이펠의 은총을 받게 해줄게. 넌 나랑 잠깐 깊은 대화 좀 나눠보자.”


짙은 미소와 함께, 발을 높이 치켜드는 렌.

시커먼 전투화가 자신의 얼굴을 향해 떨어지는 것이, 벤이 그날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장면이었다.







“화살!”


“없습니다! 아까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병사의 처절한 외침에 리즈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한숨을 내쉰다. 그녀는 곧바로 바닥을 나뒹구는 시체에서 낡은 검 하나를 집어내었고, 그것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적병의 얼굴을 짓뭉갤 수 있었다.


“퇴각속도가 왜 이렇게 느려? 이대론 포위당하잖아!”


리즈의 짜증 섞인 외침은 함께 후방에서 적의 접근을 저지 중인 유진을 향한 것이었다. 돌아오는 유진의 목소리도 갈라져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어! 전투 가능한 인원이 이것밖에 없는 걸! 부상자도 너무 많아!”


계곡을 빠져나오는 데엔 성공한 카나반군이었지만, 엄폐할 수단이 전혀 없는 개활지에서 화력지원 없이 두 배가 넘는 적을 떨쳐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나마 적으로부터 무기를 탈취하여 싸우고 있는 후미의 병사들이 대열의 완전한 붕괴를 막아주고 있었지만, 그 저항이 길게 이어질 수 없다는 사실은 두 진영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래선 후발대가 있는 곳까지 가지도 못하겠는데.......”


영력을 견디지 못해 부러지는 검. 리즈는 혀를 차며 새로운 무기를 찾는다. 겨울의 대지를 따스하게 적시는 붉은 물결의 주인이, 점점 카나반의 얼굴들로 편향되는 중이었다.



“리즈!! 앞에!”


“엥?”


비명에 가까운 유진의 목소리. 리즈가 고개를 들자, 자신의 얼굴을 향해 직선으로 날아드는 단검이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팔을 들어 막았지만, 얇은 가죽보호구로는 영력이 실린 단검의 날을 완벽히 차단할 수가 없었다.



“흘리고 간 물건이다.”



익숙한, 중저음의 목소리. 리즈는 고통을 씹으며 단검을 빼내었지만, 그녀의 입가를 적시고 있는 미소는 반가움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이름과 소속을 대라!”


“.......말했잖아, 못 믿을 거라니까.”


“그럼 원하는 대로 존중은 접어두겠다!”


활의 시위는 이미 지나친 영력의 파동으로 인해 늘어질 대로 늘어진 상태. 저 묵직한 검을 받아낼 유일한 수단은 이제 이 작은 단검밖에 없다. 리즈는 거친 숨을 고르고, 활은 뒤로 빗겨 메고서 천천히 단검을 치켜들었다.


물론 결과는 알고 있다.

그러나 물러날 수는 없었다.


다가오는 그림자, 그 어느 때보다도 무겁게 느껴지는 단검의 손잡이. 기사의 도약을 바라보는 검붉은 눈동자는 모든 궤도와 가능성을 읽기 위해 거센 빛을 발한다.

그의 검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의 발걸음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어야 할-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그 순간.





“어머, 재밌어 보이네.”



그 느긋한 목소리를 들은 눈동자는 리즈 혼자만이 아니었다.

분명 전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얇은 목소리였지만,

그 파동만큼은 모든 것을 뒤덮을 기세로 병사들과 기사들의 이성을 파고들고 있었다.


그랬기에,

저 멀리 있었음에도 그 출처를 향해 시선을 돌리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밤새면서 쫓아온 보람이 있었어~.”



하늘을 뒤덮고 있는 겨울바람. 그 모두를 불태워버릴 기세로 휘날리는 붉은 머리카락.

짙은 눈화장으로도 감출 수 없는 심연처럼 깊은 눈동자.

매혹이라는 단어 그 자체를 상징하듯, 시선을 참을 수 없는 얇은 미소.

추위를 가르며 김을 뿜어대기 시작하는 영력사출식경갑.


그리고,


그녀를 상징하는 세 자루의 검집.


전장을 앞에 두고 점점 벌어지는 그녀의 미소는, 그야말로 광기의 꽃잎, 그 자체였다.




“누가 우리 귀여운 왕녀를 괴롭히고 계시나~?”


라고 말하며,

엘라론 ‘패틀 오브 매드니스’ 드리브달은 자신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핥았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서버문제로 이래저래 혼란스러웠네요..

부디 문제가 조속히 해결되길 바랍니당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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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2) +6 15.11.07 867 20 19쪽
18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 +8 15.11.01 1,081 27 18쪽
183 (막간) 나의 태양에게 +8 15.10.27 886 29 11쪽
182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8) +12 15.10.22 923 28 23쪽
181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7) +8 15.10.17 1,044 27 19쪽
180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6) +8 15.10.12 950 28 22쪽
179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5) +12 15.10.07 857 25 21쪽
178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4) +6 15.10.02 923 27 24쪽
177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3) +8 15.09.27 853 23 21쪽
176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2) +6 15.09.22 842 23 20쪽
175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1) +4 15.09.17 999 25 20쪽
174 (막간) 결국 안식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8 15.09.12 919 26 21쪽
173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0) +6 15.09.07 816 24 24쪽
172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9) +6 15.09.02 918 24 19쪽
171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8) +8 15.08.28 1,003 24 17쪽
170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7) +8 15.08.24 1,148 27 22쪽
169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6) +16 15.08.18 1,022 33 20쪽
168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5) +8 15.08.13 876 24 21쪽
167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4) +10 15.08.07 991 27 26쪽
166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3) +6 15.08.02 984 23 17쪽
165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2) +6 15.07.28 966 30 28쪽
164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 +12 15.07.23 937 26 16쪽
163 (막간) 겨울에게 작별하는 방법 +10 15.07.17 1,155 28 19쪽
16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4 15.07.12 1,068 27 18쪽
161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0) +10 15.07.07 1,018 26 22쪽
160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7 15.07.02 997 22 20쪽
»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2 30 21쪽
158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2 28 24쪽
157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55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16 27 16쪽
155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3 35 24쪽
154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2 35 20쪽
153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05 35 23쪽
15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2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06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993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792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4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48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80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60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1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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