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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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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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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5.04.21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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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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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글자
21쪽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DUMMY

“저게 뭐야?”


구불구불 산의 허리를 휘감으며 험준한 계곡과 높은 바위산을 동시에 끼고 있는 진입로.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도로상태와 지루한 여정에 잔뜩 미간을 구기고 있던 보급대장의 표정이 한층 더 굵게 뒤틀린다. 길이 점점 좁아진다 싶더니 난데없이 전복된 트럭과 반파된 마차가 길목을 틀어막고 있었던 것이다. 트럭에 새겨진 하얀 문양을 통해 그는 어렵지 않게 그것이 왕국의 군용트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분명 정해진 경로가 아닌 샛길을 통해 무리해서 운행하다가 민간마차와 충돌한 것이리라.


“책임자가 누구냐?!”


그는 낼 수 있는 모든 짜증을 담아 소리치며 트럭에서 뛰어내린다. 선두에서 나아가던 그의 트럭이 멈췄기 때문에 뒤이어오던 수십 대의 보급차량들도 덩달아 모두 운행을 멈춰야 했다. 보급장교 15년 차에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는 잔뜩 골이 나있었다. 이 보급품들이 향해야 하는 오스타이나 성의 성주는 길이 험하든, 도적무리를 만나든 변명은 일체 듣지 않고 무조건적인 시간준수를 요구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오는 중에 길이 막혀서’라는 변명은 변명 축에도 들지 못하리란 것을 알고 있는 보급대장이었기에, 그는 저 뒤집힌 트럭의 선탑자가 자신보다 상관이라도 당당하게 대들 준비가 되어있었다.


“응?”


그가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전복된 트럭 가까이 다가간 순간이었다. 운전석과 선탑석은 비어있었고, 주변에 어떠한 부상자나 후속 조치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주변을 더럽히고 있는 것은 모두 마차의 파편들일 뿐, 어떠한 적재물도 보이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도로는 흔히 교통사고현장에서 보이는 급제동의 흔적조차 없이 말끔했던 것이다.


“이건 무슨.......”


보급대장은 위장막으로 가려진 트럭의 후미로 다가선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그림자는 예상과는 너무도 다른 존재였다.


“안녕.”


어둠 속에서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빛이 번뜩이고, 보급대장은 그 발랄한 인사에 대답할 새도 없이 창에 목이 꿰뚫리고 만다.

그와 동시에 절벽 위에서 마력포격이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한다. 저마다 담배를 물고 짧은 휴식을 음미하고 있던 보급병과 운전병들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대응할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곳곳에서 포격에 적중당한 트럭들이 굉음을 내뿜으며 화염에 휩싸였고, 병사들은 변변한 기사나 마법사가 없는 상태였기에 다가온 혼란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무기를 빼어들고 대응하라는 어설픈 외침, 비명소리와 도망가라는 절규가 뒤섞여 보급대는 빠르게 와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선두에, 느긋한 몸짓으로 창을 휘두르며 미처 피하지 못했거나 대항하는 병사들을 도륙하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의 창은 보급대장의 피를 시작으로 수많은 피를 머금은 뒤에야 춤을 멈추었고, 그 압도적인 위용에 질겁하며 도망치는 병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남자의 입가엔 묘한 미소가 피어나는 중이었다.


“렌 님, 후방의 놈들이 도주하기 시작합니다만, 추격하시겠습니까?”


어느새 렌의 곁으로 다가온 기사. 그가 들고 있는 검도 렌의 창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피로 적셔진 상태였다.


“아, 수고했어, 빈스. 근데 모조리 죽여 버리면 보급로가 차단당했다는 소식을 들려줄 수가 없잖아.”


“그럼 남은 보급품은 어쩌시겠습니까?”


“타고 있는 건 냅두고, 멀쩡한 건 다 계곡 아래로 버려.”


“예? 하지만.......”


분명 포격에 의해 많은 타격을 입긴 했지만, 온건한 보급품의 양도 상당하다. 빈스는 당분간 유랑군으로 지내야할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하여 그것들을 취할 필요를 느낀 것이었다. 하지만 렌의 느슨한 미소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걸 훔쳐가 버리면 단순히 도적단의 소행으로 보일 수도 있잖아. 어디까지나 북부군이 ‘보급로를 차단’했다는 사실이 퍼져야 한다고. 그리고 여기 오래 있을 것도 아닌데 뭣 하러 무겁게 챙기고 다니냐?”.


“검성께서 당분간 남동부에 머물면서 유랑군으로 활동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좆까라 그래. 그 노망난 할배는 그냥 북부장군들한테 눈치 보이니까 날 잠시 치우려고 했던 거야. 내가 미쳤다고 그 말을 듣냐? 이제 좀 있으면 가장 재밌는 일이 중앙에서 벌어질 건데 여기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으라고?”


“.......”


검성의 명을 거역하고 복귀한다면 어떤 처분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빈스는 검성도 이런 렌의 기질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흥미가 없는 일엔 절대 발을 담그지 않는 렌이다. 재편이다 뭐다해서 따분한 중앙군을 벗어나 피를 찾을 수 있는 일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일 뿐, 렌에게 그 이상의 의무감은 없을 터.


“내일 해가 뜨는 대로 복귀할 거라고 애들한테 말해놔. 아, 그리고 포로 중에 반반한 년 있으면 밤에 나한테 보내는 거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병사들의 보급은 신경 쓰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아랫도리 보급만큼은 절대로 잊는 법이 없는 자신의 지휘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창을 빙글빙글 휘두르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빈스는 짧은 한숨을 내쉰다.





==================




왕국이 남과 북으로 분열되고 대대적인 내전에 돌입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런 안쪽의 상황과는 별개로 묵묵히 모습이나 태도를 바꾸지 않는 국경의 성주들이 있었다. 5대에 걸쳐 브린타이나 남동부의 유지를 이어오고 있는 할라시드 로쿠베 또한 그중 한 명이었는데, 그것은 그가 정치권에 뜻이 없다기보다는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구역의 특수성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구역이, 카나반과 아실레마 제국과 동시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왕국 남동부의 중요거점인 오스타이나 성, 바로 그곳이었기에.

론크리스 국왕은 그가 남부에 협력하든 북부에 동조하든 상관하지 않고 지원과 보급을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카나반과 협력관계가 확실시된 지금, 아실레마가 오스타이나 성을 통해 디팔루와 팔루뎀으로 이어지는 카나반과 왕국의 국경지대를 파고든다면 늘어난 전선으로 인해 병력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고, 더불어 카나반과의 동조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따라서 론크리스로서는 로쿠베가 자신의 남부에 협력하기를 원하더라도 할라시드군의 병력을 차출할 수가 없으리란 사실을 알기에 그들을 아군도, 적도 아닌 ‘의무’라는 족쇄로 묶어두는 편이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로쿠베가 이런 론크리스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가능했다면 론크리스의 깃발아래에 군화를 딛고 싶은 마음이었다. 다만 그는 처음부터 지방색이 강한 자신의 부하들을 내전 따위에 소모할 생각이 없었다. 론크리스가 복권하여 왕위를 되찾든, 검성이 론크리스를 몰아내고 그녀의 동생을 완전하게 왕으로 옹립하든, 그로서는 저 좆같은 제국군이 이곳을 통과하지만 못하게 하면 되는 거다. 그것이야말로 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문의 숙명이라는 걸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그였다.

그나마 그의 불편한 가슴을 풀어주는 사실은, 아실레마보다도 좆같은 저 베르달의 늑대가 적어도 당분간은 자신을 괴롭힐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베르달의 크라트 니바르토로부터 전문입니다. 약간의 지원병과 와인을 보내니, 부디 국경방어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합니다.”


“약간의 지원병은 지랄....... 와인만 받아와라. 지원병들은 그냥 본궁 숙소에 짱박혀 있으라고 해. 어차피 생색만 내려고 보낸 잡군, 별 도움 안 되는 새끼들이겠지.”


로쿠베는 혀를 차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짙은 눈썹과, 굵은 콧날에 대비되는 갸름한 턱선. 치렁치렁 내려온 푸르스름한 머리를 뒤로 묶어 넘긴 탓에 곳곳에 자리 잡은 흰머리가 더욱 눈에 띈다. 그러나 그에 비해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얼굴에서, 그가 아버지로부터 성주의 자리를 물려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베르달과 얽힌 역사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오래되고 깊은 그였기에, 동맹의 증거로 크라트가 보내오는 호의에 반감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단순히 크라트가 몸을 담고 있는 카나반과 동맹을 구축했다는 이유만으로 론크리스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는 걸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였으니.


“한데 지원병의 대장이라는 자가 면담을 요청해왔습니다만, 그냥 무시할까요?”


“.......면담? 하아, 씨발 귀찮게...... 그냥 와인이나 처먹고 갈 것이지 뭔 면담이야. 일단 올려보내.”


“옛.”


마음 같아서는 지원병을 모두 길거리에 나앉게 하고 싶은 로쿠베였으나, 그는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전선을 줄일 수 있는 지금의 상황을 깨트릴 정도로 멍청한 지휘관은 아니었다. 형식적인 감사의 대화 몇 마디만 나누면 될 것이다. 그가 제일 마음에 들지 않은 건, 이런 형식적인 호의에 자신 또한 형식적으로 답례를 해야 한다는 현실이었다.


“적당히 답례인사랑 술 조금 보내. 아, 숲의 복구를 도와줄 수 있는 자연계 마법사 몇 명도 딸려 보내고.”


“알겠습니다.”


“씨이발.......”


부관이 자리를 비우고 혼자 남게 된 상황실에서 그는 담배 하나를 빼어 물며 욕을 머금었다. 대대로 검성이 아닌 국왕에게 충성을 다했기에 론크리스를 지지하는 것, 그리고 북부와의 결전을 위해 모든 물자를 끌어모으는 와중에도 이쪽의 보급을 잊지 않는 그녀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카나반과의 동맹이라니?

외적으로 본다면, 아실레마의 위협이 거세지는 와중에 이중전선을 유지해야 하는 오스타이나로서는 카나반이라는 전선이 사라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득이다. 그뿐이 아니다. 만약 아실레마가 이곳을 침공한다면 카나반은 기꺼이 지원을 해줄 것이다.

문제는, 그 지원이 바로 베르달의 늑대로부터 이루어진다는 점이었다.

베르달의 늑대, 크라트 니바르토와는 자신의 할아버지 대부터 악연이 깊다. 직접 몸으로 그 증오와 피의 현장을 겪어온 그로서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동맹이었다. 할아버지의 유언은 ‘저 좆같은 늑대새끼 좀 어떻게 해봐라’였으며, 아버지의 유언은 ‘저 좆같은 늑대를 쳐죽일 수 있다면 미친 꽃잎도 삼킬 수 있었다’였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중앙정보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베르달을 치기 위해 제국의 ‘광기의 꽃잎’과 협력까지 했었으니까.

그런 늑대에게 표면상이라도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는 사실이 로쿠베의 위장을 뒤틀고 있던 것이다.



“자, 장군님!”


이번엔 다소 다급한 얼굴로 상황실의 문을 여는 부관. 로쿠베는 한숨과 담배연기를 동시에 내뱉는다.


“이번엔 또 뭔데? 베르달 놈들이 복도에 똥이라도 싸재끼디?”


“폐하로부터의 보급대가 북부군의 습격을 받아 궤멸당했다는 소식입니다!”


“뭐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로쿠베. 그를 경악케 만든 것은 북부군이 이런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왔다는 사실보다도, ‘보급대’가 습격당했다는 부분이었다.

“피해는?”


“그........ 이번 분기치 모든 보급품이.........”


“뭐어어어어?!”

로쿠베는 담배가 떨어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는 듯 크게 입을 벌리며 소리쳤다. 그가 그 정도로 충격을 받은 것엔 이유가 있었다.

주변에 험준한 산맥과 계곡으로만 이루어진 오스타이나 성. 그건 성과 서쪽으로 통하는 진입로를 지켜내기엔 최적의 지형적 요건이지만, 동시에 자체보급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때문에 할라시드군은 줄곧 중앙군으로부터의 보급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기에 론크리스는 무리해서라도 오스타이나로 이어지는 분기단위의 대규모 보급을 유지했던 것인데, 부관은 지금 그 모든 보급품이 파괴당했다고 보고를 하고 있다.

“.......전부?”


“네, 전부입니다.”


“.......남은 건?”


“하나도 없습니다. 다 포격으로 불타거나 계곡 아래로 떨어뜨려 버렸답니다.”


“........”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몸을 무너트리는 로쿠베. 시선은 멍했지만, 그의 머릿속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폐하께선 최대한 남부군을 중심으로 운용하셔야 할 터, 이런 규모의 보급을 다시 해달라고는 할 수 없어. 게다가 보급로를 미리 파악하지 못한 우리 쪽의 책임이 크다. 폐하로부터의 전언은?”


“아직 없습니다만, 아마 말씀대로 재보급은 힘들 것으로.......”


“.......하아.......”


로쿠베는 머리를 감싸 쥐며 다른 손으로는 상황판 위에 떨어트렸던 담배를 다시 입으로 가져간다. 그의 심정만큼이나 어지러운 짙은 연기가 공중으로 흩어졌고, 로쿠베는 복잡한 머리와 그 연기 때문에 새롭게 상황실로 들어온 인물을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듣자하니 문제가 생긴 거 같은데.”


달콤한 여인의 목소리.

그러나 로쿠베는 뒤틀린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집무실의 입구를 향해 거친 연기를 내뿜는다.


“누구냐.”


그리고 대답은, 후드를 눌러쓴 여인보다 부관의 입에서 먼저 튀어나온다.


“아, 베르달 지원군을 이끌고 오신 분입니다. 잠시 나가서 대기하시라고 할까요?”


“흐흥, 베르달의 늑대는 꽤나 당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데, 직접 보니까 소심하기만 한 꼬꼬마잖아?”


자신을 무시하고서 한걸음 상황실로 걸음을 옮기는 여인에게 부관은 경악하고 만다. 적어도 지금 장군에게는 내뱉어서는 안 될 이름과 말을 동시에 지껄이고 있지 않은가. 그는 로쿠베가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검을 휘둘러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군주는 다행히 긴 한숨으로 분노를 정리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여인을 향해 입을 열고 있었다.


“그럼 내가 어째야겠나, 베르달의 조무래기?”


“당연히 추격해서 잡아 족쳐야지. 그리고 보급을 약탈당했으면, 똑같이 약탈하면 될 거 아냐? 뭘 그리 끙끙 앓고 앉아있는지 모르겠네.”


“허어, 자신 있다는 말투인데? 그럼 너와 네가 데려온 베르달군에게 그 일을 맡겨도 되겠나? 우리의 주목적은 어디까지나 오스타이나의 방위. 약간의 지원은 해줄 수 있지만 대규모로 추격대나 약탈을 위한 군을 꾸릴 수는 없다.”


“물론. 뭐 그런 일 하려고 몰래 빠져나온 거니까. 요새 베르달은 너무 심심해서 말이지.”



두 시선과 미소가 교차한다. 영력은 꽁꽁 싸매고 있었기에 기사로서의 기싸움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상대방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한 탐색전은 충분히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 긴 침묵의 끝에서 먼저 입술을 움직인 것은 로쿠베.


“부관. 숙부님께 잠시 성의 지휘를 맡기겠다. 일단 병사들에겐 보급이 오지 않는다는 말은 흘리지 마라. 보급실패의 책임은 어디까지나 내가 우선적으로 져야 하니, 추격대의 지휘를 내가 직접 맡도록 하지.”


“장군! 하지만-”


“이봐, 늑대 조무래기! 네 이름이 뭐냐?”


자리에서 일어나 여인에게 다가서는 로쿠베.

그러나 그의 걸음은 여인이 후드를 벗는 것과 동시에 경직되고 만다.

후드에 의해 구속되었던 새빨간 머리가 길게 흘러내렸고, 그 매혹적인 빛과 부드러움 위로 떠오른 여인의 붉은 미소는 로쿠베의 호흡조차 잊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웠던 것이다.




“궁금해?”


벙찐 로쿠베의 표정이 만족스러웠는지,

엘라는 새하얀 이를 내보이며 교태 넘치는 웃음을 지었다.





================





리즈와 유진, 그리고 셰르는 군장을 내려놓는 것도 잊은 채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본다.

끝이 보이지 않는 천막의 행렬. 여기저기서 다양한 깃발들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고, 그만큼이나 다양한 문양을 가슴에 새긴 병사와 기사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아르다르라는 대도시에서 생활하던 그들조차도 이런 숫자의 인파가 한곳에 모여 있는 광경은 접한 적이 없었기에, 순간적으로 사고를 빼앗기고 멍하니 그 압도적인 광경을 감상하고 있던 것이다.


“카나반 원정군은 일단 여기서 숙영해주십시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지휘관회의를 통해 군을 재편할 것입니다.”


“아, 네, 아, 알겠.....습니다.”


당황한 것은 지휘관인 토우칸도 마찬가지였다. 론크리스가 브린타이나의 남부군을 모두 모으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이 정도 규모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생도와 지방군의 연합이라고는 하지만, 꽤나 많은 수를 모았다고 생각한 카나반의 원정군도 이곳에 놓고 보니 전체의 1할도 되지 않는다.


“숙영준비를 하겠습니다.”


“아, 아! 예, 옛. 그, 그래주세...요.”


토우칸을 대신하여 천막에서 나와 지휘관들에게 명령을 전파하는 여기사는 부관으로서 원정에 참가한 카논이었다. 아르다르를 떠나 아르보리스, 디팔루를 거쳐 이곳 팔루뎀 대평원에 도착할 때까지 몇 번이고 토우칸에게 말을 낮추라고 요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일단 태생부터가 군인이 아닌 그였고, 그 소심한 성격을 파악한 카논은 그 이상 그에게 위엄을 요구하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걱정이 앞서는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토우칸에 대한 벤과 로빈의 평가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군을 지휘함에 있어 자신의 역할이 중대하다는 사실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아아, 한참 찾았네. 오느라 고생했어요.”


하지만 그런 그녀의 근심 어린 표정도, 인파를 헤치고 나타난 얼굴을 알아보고 금세 해맑게 피어난다.


“벤 님!”


황급하게 벤을 향해 달려나가는 카논. 만약 벤이 악수를 위해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그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를 껴안았을지도 모른다. 카논은 벤의 손을 맞잡으며 커다란 실수를 할 뻔한 자신에 대한 책망과, 그 실수가 실제로 벌어졌을 때를 상상하며 얼굴을 붉히고 만다.


“토우칸 님은요?”


“아, 지휘천막에 계십니다. 아직 멀미기운이 남아 있으셔서.......”


“그래요? 와주셔서 감사해요. 카논이라면 든든하니까.”


“아, 그, 저.........벼, 별말씀을.......”


그의 칭찬에 카논은 벌린 입을 뻐끔거리며 별다른 반응을 하지 못한다. 결국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멀어져가는 벤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있던 그녀는 곧 정신을 되찾고 영력을 실은 목소리로 지휘관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아.”


“응? 뭐야?” “왜 그래?”


갑자기 군장을 푸는 것을 멈추고 천막을 빠져나가는 리즈를 향해 유진과 셰르가 동시에 입을 열었지만, 리즈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의 검붉은 눈동자는 존재감이 옅은 그림자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수많은 병사와 목소리, 그리고 혼란이 가득한 냄새의 바다를 뚫고 성큼성큼 걸어나갔고, 마침내 흐릿한 손목을 잡아채며 그 이름을 부른다.


“벤.”


“어, 리즈?”


좀처럼 당황하지 않는 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린다. 왕녀가 이번 원정에 동참한다는 사실은 그 오빠로부터 미리 들었기 때문에 알고 있었지만, 웬만해서는 얼굴을 마주치지 않길 바랐던 그였다. 왕녀라는 신분이나, 가장 친한 친구의 숨겨진 동생이라는 표면적인 사실 때문이 아니다. 그가 이 소녀를 거북해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리고 리즈는 어김없이 그 이유를 몸소 보여준다.

비실비실한 검성의 멱살을 끌어당겨, 목 언저리에 코를 가져다 대고 킁킁 냄새를 맡는 왕녀.


“.......여전히 아무런 냄새도 안 나네.”


“여전히 무례하구나, 너. 근데 나 샤워 안 한 지 꽤 됐는데?”


“그런 냄새가 아니라니까.”


리즈는 멈추지 않고 그의 가슴, 겨드랑이, 배꼽으로 코를 가져다댄다. 그리고 그 아래를 향해 머리를 숙이려는 왕녀를 벤은 왕실의 도덕관념과 대외적인 시선을 위해 필사적으로 저지해야 했다.


“야야, 나도 반가워. 그러니까 그만 좀 해줄래? 남이 보면 심각하게 오해할 수가 있는 모양새거든?”


“........”


리즈는 뾰로통한 표정이다. 아르다르에 있던 시절에는 반강제적으로 그의 발끝까지 냄새를 맡아야 적성이 풀렸으니까.


“그나저나 깜짝 놀랐어. 그렇게 귀찮아하더니 어쩐 일로 네가 입대를 다했냐?”


마침내 왕녀의 마수에서 벗어난 벤이 느슨해진 옷을 여미며 물었다. 그러자 리즈는 검붉은 눈을 크게 뜨며 걸음을 이어가려던 벤의 앞을 막아선다.


“오빠한테 못 들었어?”


“뭘?”

불안이 짙어지는 벤의 표정.



“오빠가 나 입대하면 벤이랑 결혼시켜준다고 약속했는데.”



“뭐어?!” “뭐어?!”


경악하는 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위화감을 느낀다. 자신의 경악스러운 목소리가 겹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리즈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겹쳐온 목소리를 쫓아 시선을 돌렸고,



그곳엔 군장을 짊어진 고도가 벤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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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6) +8 15.10.12 950 28 22쪽
179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5) +12 15.10.07 857 25 21쪽
178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4) +6 15.10.02 923 27 24쪽
177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3) +8 15.09.27 853 23 21쪽
176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2) +6 15.09.22 842 23 20쪽
175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1) +4 15.09.17 999 25 20쪽
174 (막간) 결국 안식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8 15.09.12 919 26 21쪽
173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0) +6 15.09.07 816 24 24쪽
172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9) +6 15.09.02 918 24 19쪽
171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8) +8 15.08.28 1,003 24 17쪽
170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7) +8 15.08.24 1,148 27 22쪽
169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6) +16 15.08.18 1,022 33 20쪽
168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5) +8 15.08.13 876 24 21쪽
167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4) +10 15.08.07 991 27 26쪽
166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3) +6 15.08.02 984 23 17쪽
165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2) +6 15.07.28 966 30 28쪽
164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 +12 15.07.23 936 26 16쪽
163 (막간) 겨울에게 작별하는 방법 +10 15.07.17 1,155 28 19쪽
16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4 15.07.12 1,067 27 18쪽
161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0) +10 15.07.07 1,018 26 22쪽
160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7 15.07.02 997 22 20쪽
159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1 30 21쪽
158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2 28 24쪽
157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54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16 27 16쪽
155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3 35 24쪽
154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1 35 20쪽
153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05 35 23쪽
15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2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06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993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792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4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48 28 21쪽
»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80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60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1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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