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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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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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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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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1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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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글자
19쪽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DUMMY

검푸른 밤하늘 속으로 하얀 입김이 솟아오른다.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겨울의 흔적은, 가녀린 숨소리와 함께 가로등의 빛이 닿지 않는 깊은 골목의 어둠 속에서 더욱 확연히 달빛을 머금고 있었다.


“.......”


아델은 걸음을 멈춘다. 소녀의 숨소리와 발걸음이 동시에 멈추자 골목은 시린 바람만이 가득 남게 되었지만, 기사가 아닌 몸일지라도 그 바람에 섞여 흘러들어오는 불온한 그림자의 기운만큼은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스친 길. 그리고 그녀의 발걸음이 스쳐야 할 길. 각각의 끝에서 나타난 그림자가 아델의 시선을 봉쇄한다. 그리 좁은 골목은 아니었지만, 건장한 두 남자의 그림자만으로도 소녀에겐 거대하고 두꺼운 장벽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에게 어떠한 움직임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무언의 압박감을 내뿜는 그들을 향해 아델이 할 수 있는 반응은 정해져 있었다.


“누구시죠? 저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그러나 역시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앞을 막아선 남자가 한 걸음 크게 어둠의 거리를 좁혔고, 아델은 자신도 모르게 그에 맞추어 뒷걸음을 치려고 했지만 마찬가지로 뒤에서 거리를 좁히는 그림자를 깨닫고는 그대로 몸이 굳고 만다. 단순히 그들의 시커먼 존재감 때문이 아니었다. 건물 그림자에 묻혀있었던 그림자가 걸음을 옮기며 달빛아래 노출되었고, 그 전까지는 눈치챌 수 없었던 시퍼런 단검이 아델의 붉은 눈동자를 향해 치명적인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이 명백해지는 순간이었다.


“-!”


먼저 움직인 쪽은 아델이었다. 그녀가 앞에서 다가오던 남자를 향해 가방을 내던진 것이다. 의도적으로 입을 벌려놓았기 때문에 가방은 수많은 서류뭉치와 필기구를 포함한 내용물을 흩뿌렸고, 그 혼란과 어둠을 틈타 아델은 재빨리 남자의 시선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꺄악-!”


그러나 남자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아델의 얇은 손목을 낚아챈다. 그녀는 뼈가 으스러질 듯한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남자의 손을 할퀴고 정강이를 걷어찼지만, 느껴지는 건 거대한 돌덩이와도 같은 단단함뿐. 그녀는 곧 차가운 바닥으로 거칠게 내동댕이쳐지고 만다. 부어오르는 손목을 끌어안고, 찢어진 무릎 아래로 자신의 눈동자보다도 진한 피를 흘리면서도 아델은 표정을 흩트리지 않는다. 겨울 밤하늘보다 차가운 단검의 날이 턱 바로 아래로 다가왔음에도, 그녀는 두려움의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커다란 눈동자를 깜빡이지도 않고 있었다.


“이미 변화의 파동은 퍼지고 있어요. 내가 죽어도 내 뜻을 이어줄 사람이 많이 있죠. 이걸로 끝이라고, 이겼다고 생각하지는 말라고, 당신들 고용주에게 전해주세요.”


물론 그들이 자신의 유언을 들어줄 의무는 없다. 자신의 죽음은 내일 아침신문 1면을 한 번 장식할 뿐, 빠르게 사람들에게서 잊혀갈 수도 있다. 하지만 아델은 자신을 옥죄는 모든 폭력과 억압에게서 절대 도망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비록 ‘그’를 위한 속죄를 완성하지 못하더라도, 죽음만큼은 그에게 부끄럽지 않고 싶었다. 그렇기에 단검이 밤하늘을 향해 치솟는 그 순간까지도 그녀는 눈을 감지 않고 정면을 바라본다.



“뭐하는 짓이냐?!”


갑작스럽게 골목을 강타한 목소리에 놀란 것은 아델보다는 두 그림자 쪽이었다. 아델의 시선이 목소리의 출처를 쫓아가기도 전에 날카로운 총성이 울려 퍼졌고, 아델을 찌르려던 그림자는 훌쩍 뒤로 도약하여 그것을 피해낸다.

아델은 그 사이에 몸을 추슬러 최대한 그들에게서 벗어났는데, 구원의 주인공을 확인한 그녀의 눈동자는 단검을 봤을 때보다도 더욱 크게 확장되고 있었다.


“.......란다 경?”


호위기사 둘을 데리고 골목에 나타난 남자는 다름 아닌 란다 가슈펠라르. 뜻밖의 장소에서 가주를 만난 아델은 위급함과 두려움도 잊은 채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호위기사들에게 도망치는 자객들을 추격하라 명하며, 란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델에게 다가서는 중이었다.


“아델, 괜찮아? 다친 곳은?”


“아, 아뇨,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색한 아델의 인사에 안심했다는 듯이 미소 짓는 란다. 아델은 처음 보는 그의 부드러운 미소와,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상황 모두를 제쳐두고서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근데, 어째서 이곳에.......?”


“법안과 북부사령관 임명에 관련하여 너와 상담을 좀 하고 싶은 게 있어 네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날이 빠르게 저물어서 마중이나 갈까하고 나왔지.”


“아....... 그,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란다는 웃으며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피로 얼룩진 아델의 무릎을 닦아준다. 그녀는 말없이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다시금 그와 눈이 마주친 후에야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하하, 뭔가 납득하기 힘들다는 얼굴이네?”


“예? 아아.......네에.”

실례임을 깨닫고 말을 한번 씹었지만, 아델은 결국 가주의 붉은 눈동자를 향해 입술을 움직인다.

“습격당하면서 가주님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긴 했는데, 구원자라기보다는 배후자에 가까웠거든요.”


“뭐어? 하하하핫!”

모든 고통과 긴장을 한꺼번에 날려버리는 란다의 호쾌한 웃음. 기껏 도와주었더니 자신을 용의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가원의 말에도 란다는 화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어,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가문의 입장에서 보자면 넌 같은 이름을 쓰고 있는 적이나 다름없으니까.”


“........”


이렇게 시원하게 인정해버리면 아델 입장에선 오히려 할 말이 없어진다.


“하지만 그건 다른 수도권의 귀족가문들도 마찬가지야. 여태까지 중앙정부의 요구에 따라 순순히 사병을 내놓으면서 증세에도 불평하지 않은 몇몇 귀족들의 야망을, 어디선가 나타난 네가 순식간에 백지로 되돌리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오늘 너와 이야기하려는 것도 비슷한 주제였다. 마침 시기가 맞아떨어져 다행이야.”


“.......예.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란다의 도움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흩뿌려진 서류들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하는 아델. 그것을 도와주는 란다를 향해 연거푸 감사의 인사를 내뱉던 그녀는 마지막 서류를 가방에 넣은 것과 동시에 골목의 반대쪽에서 나타난 두 그림자를 깨닫고 화들짝 놀란다. 하지만 그들은 자객이 아닌, 란다와 함께 왔던 호위기사들이었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놓쳤습니다.”


“놓쳐?”

처음으로 일그러지는 란다의 미간.

“공화국 대표가문의 정예기사가 정체도 모르는 자객들보다 뒤쳐졌다는 말이냐? 내 가문의 일원이 습격을 당했다. 이건 내 가족의 일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단순히 놓쳤다는 말로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죄, 죄송합니다.......”


“근위대에 사건을 통보해라. 아델의 신변을 보호할 수 있도록 조치를 요청하란 말이다. 그리고 헌병대나 근위대보다 먼저 범인을 잡지 못하면, 너희 둘 모두 절반으로 감봉이다. 알겠느냐?”


“옛!”


빠르게 사라지는 두 기사의 그림자. 아델에게 돌아서는 란다의 표정은 어느새 다시 부드러워져 있었다.


“미안하다. 많이 놀랐을 텐데,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진정될 때까지 가슈펠라르 본가에서 머물지 않을래? 근위대보다는 그쪽이 더 안전할 수도 있어.”


“감사합니다만, 괜찮아요.”


“그럼 적어도 여관까지만이라도 따라갈 수 있게 해줘. 가주로서의 부탁이다.”


아델은 욱신거리는 손목을 끌어안은 채로 란다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곳엔 귀족대표가문의 가주가 아닌, ‘가족’이라는 틀에서나 볼 수 있었던 존재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와 나란히 걸음을 옮긴다.






“바래다주셔서 감사해요. 들어가 보세요.”


“정말 괜찮겠어?”


“예. 괜찮아요.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란다는 탐탁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깊이 머리를 숙이는 아델의 위로 더욱 고집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그래, 그럼 푹 쉬고. 본궁에서 보자.”


손을 흔들며 허름한 여관을 나서는 란다. 아델은 비틀린 탕나무문의 소음이 사라질 때까지 계단 아래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늦은 시간이었고, 그리 북적이는 여관도 아니었기에 1층은 이미 꾸벅꾸벅 졸고 있는 주인 외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 자신의 방문을 열 때까지도, 그녀 주위는 완벽한 침묵으로 가득했다.


“예상대로?”


아델이 방문을 걸어 잠그자마자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 그러나 아델은 놀라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그 목소리에 대꾸를 한다.


“네. 예상대로였어요. 본인이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요. 조금 놀랐어요.”


“본인이 직접? 란다가 직접 등장했다고? 녀석, 꽤나 극적인 연출을 꾸며냈네.”


여성은 침대에서 일어나, 아직 입구에 기대서있는 아델을 향해 다가온다. 연륜이 느껴지는 표정, 단정하게 자른 짧은 머리와 강인한 인상의 눈썹과 눈동자. 그리고 허리를 감싸고 있는 슈테인울프 가죽허리띠는 분명한 카나반 왕실근위기사의 상징.

아델은 여인의 얼굴을 보면 생각나는 이름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리즈 소식은 들었어요? 제발 사고치지 말고 무사히 돌아와야 하는데......”


“그 년은 걱정 마. 날 닮아서 지 살길은 귀신같이 찾을 테니까.”


푹신한 웃음을 터트리는 리반나. 그 아늑한 얼굴을 보고 나서야 마침내 아델은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자신과 조엘, 그리고 그 모든 시간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임과 동시에, 지금 자신이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준 은인.


외부엔 왕녀의 존재만 부각되었을 뿐이지 리반나에 대한 이야기는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녀를 비롯한 주변 상황이 지닌 특수성 때문이었다.

우선적으로 리반나 본인에 대한 책임론 공방이 있었다.

사명을 저버리고 탈주한 근위대이자, 왕녀의 생모. 그 미묘한 위치에 있는 그녀를 향해 귀족파는 강력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했지만, 로빈은 왕가의 핏줄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그녀를 변호해주었다. 또한, 그녀가 리즈를 임신하게 된 경위도 선대왕과의 불순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근위대’로서의 직무 때문이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 법원에 받아들여져 결국 리반나는 반역과 관련된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대외적인 시선을 우려하여 언론을 비롯한 외부에는 ‘왕녀의 생모’라는 존재를 숨기기로 합의한 의회였으나, 리반나의 계급상 위치에 대해 혼란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되도록 왕녀와 가까이에 있고 싶다는 그녀의 도의적 바람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녀가 ‘왕녀의 어머니’로서 존재해야 할지, 아니면 ‘복직한 기사’로서 존재해야 할지 애매해진 것이다.

접점을 찾지 못한 의회를 향해 로빈이 내놓은 해결안은, 바로 본인의 희망에 따라 결정하자는 것. 그 정도가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하는 편이 리반나 본인이나 왕녀에게도 좋을 거라는 그의 말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리반나의 선택은, 다름 아닌 왕실직속근위대로의 복직이었다.

결국엔 로빈과 왕녀, 그리고 왕당파에게만 좋은 방향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냐는 일부 귀족파의 불만이 있었지만, 리반나는 기나긴 시간을 대가로 다시 붉은 조끼를 입을 수 있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렴. 폐하와 리즈가 나에게 특별히 너를 부탁한 건, 이렇게 아슬아슬한 지경까지 지켜보고만 있으라고 한 건 아니니까.”


“아뇨, 정말 괜찮아요. 잘 참으셨어요.”


“1초만 늦었어도 쏠 뻔했어. 계산된 거라기엔 너무 아찔하다고 생각했는데, 등장한 게 란다 본인이었을 줄은.”


“치밀한 사람이니까요.”

리반나는 아델의 손을 잡아 허름한 침대로 이끌어 준다.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아델의 부은 손목과, 까진 무릎.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아델은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먼저 미소를 지어 보인다.

“살짝 삔 거예요. 걱정 마세요.”


“........”

그러나 리반나의 불신 어린 표정을 지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러다간 그녀가 밤 내내 자신의 곁을 지키겠다고 우길 것만 같아 아델은 결국 반강제로 그녀를 문밖으로 쫓아내야 했다. 묵직한 장궁을 동여맨 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아델을 마주하는 리반나.

“.......괜찮니?”


“아아, 진짜. 조금 까진 거 가지고. 괜찮다니까요!”


“아니, 내 말은.......”


“안녕히 주무세요!”


미소를 유지한 채로 문을 닫아버리는 아델. 하지만 근위대의 전투화는 그 뒤로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소리를 내며 멀어진다. 아델은 그제야 가방을 내려놓고 묵혀두었던 깊은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다시 찾아온 침묵.

작은 창문 밖으론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델은 흐릿한 전등의 끈을 당겨 완벽한 어둠을 끌어들였으나 그건 잠을 청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벽을 등지고, 침대 위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는 아델. 그녀는 조심스럽게 부은 손목을 가슴으로 품는다.


“........흑.....”


몰려오는 눈물은, 손목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그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




지평선 끝과 끝을 잇고 있는 거대한 산맥. 한겨울을 벗어나지 못한 하얀 산머리들은 그 위용만으로도 자연의 벽을 실감케 한다. 산을 다스리는 사도 ‘바스엘’의 축복이 만연한 ‘바스엘라드 산맥’은 지리상 브린타이나왕국의 남부와 북부를 가르는 허리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이곳이 진짜로 국경의 역할을 하게 될 줄은 브린타이나 국민 중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웅장한 자연이라도 인간에게 3천 년의 시간이 주어지면 하나의 개척대상이 된다. 땅과 땅의 단절, 그 자체나 다름없었던 산맥을 깎고 길을 만들어 지금에 와서는 수많은 인공계곡이 만들어졌는데, 옥스토브라카 계곡은 그중에서도 산맥의 정중앙을 관통하는 대표적인 진입로였다. 이곳으로 모든 국도의 경로가 집중되는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옥스토브라카 영지 전체가 통행세만으로 운영된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그 규모나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는 명백한 것이다.

이곳을 점령하여 진형을 꾸리고 있는 ‘검성’의 북브린타이나군과, 탈환을 위해 평원에 모습을 드러낸 ‘국왕’의 남브린타이나군 사이에 날카로운 긴장감이 흐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척후의 보고입니다. 현재 옥스토브라카 성은 임전 태세에 돌입해있으나, 주둔 중인 북부군의 규모는 파악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알겠다.”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전술지도에서 시퍼런 눈동자를 떼지 않는다.

옥스토브라카는 계곡 길을 따라 남하하면서 공격하기엔 번거로운 지형이지만, 남쪽에서 공격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성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편이고, 뒤로는 대규모의 병력이 한꺼번에 퇴각하기엔 무리가 있는 계곡뿐. 북부 입장에서도 요충지이긴 하나 주력을 투입해 방어하기엔 까다로운 조건인 곳이었다. 그에 비해 남부군의 입장에선 북부로 진출하기 위해 반드시 탈환해야 하는 길목.

벤의 설명에 따르면, 북부군이 저곳을 점령한 이유는 완벽한 방어에 자신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이쪽이 주력을 투입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상황을 유도하기 위함이다. 전반적인 군의 규모나 전쟁수행능력에 있어서 남부군이 북부보다 열세인 것은 사실. 그러나 본대와 본대가 맞붙는 ‘총력전’의 양상으로 흘러간다면 북부로서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기에, 옥스토브라카로 남부의 주력이 몰려있는 때를 노려 다른 모든 경로를 통해 대대적인 남침을 할 것이라는 그의 예상이었다. 만약 그들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남부군의 주력이 옥스토브라카에 묶여있는 사이 북부군은 다른 ‘바스엘라드 산맥’의 경로들을 점령하고 그를 통해 남하하여 중앙에 몰려있는 남부군을 포위할 수 있게 된다.

벤은 그 사실을 꿰뚫어 보았으면서도 그들의 생각대로 움직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를 묻는 크리스에게 벤은-


“이 자리에서 말했다가는 옆에 있는 지휘관들이 달려들 것 같으니 나중에 말해드리죠.”


라고 대답하여 남부 지휘관들의 경악을 이끌어내었다.

문제는, 그 말 또한 캐묻는 크리스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변명이었다는 점이었다.

옥스토브라카 남부 평원에 진을 꾸린 뒤 처음으로 맞는 아침, 지휘막사로 날아든 보고는 줄곧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던 크리스조차 당황스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카나반의 검성께서 카나반군을 이끌고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폐하께 이것을.......”


아무리 파견된 카나반군이라고는 하지만 지원군에 대한 지휘권은 이쪽에 위임했을 터. 어찌 보면 중요한 결전을 앞두고 군권을 혼란시키는, 용납할 수 없는 독단적 행동이라 판단할 수 있었지만, 크리스의 신경은 벤에 대한 분노보다는 그가 남긴 봉인된 편지에 집중되었다. 이른 아침 비어있는 지휘막사였기에 그녀는 거리낌 없이 그 내용을 살펴볼 수가 있었는데,

내용을 모두 읽고 나서야 그녀는 어째서 벤이 모든 지휘관, 그리고 자신의 앞에서까지 자신 있게 그의 생각을 내보일 수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만약 이 내용을 직접 앞에서 들었더라면, 아무리 벤의 두뇌에 호의적인 자신일지라도 허락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으니까. 벤은 그녀가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해주길 바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상황보고 및 마지막 작전계획을 다듬으며 벤과 카나반군의 소재에 대해 묻는 지휘관들에게 크리스는 자신의 명령으로 개별행동을 하게 두었다고 변호해 준 것이다.


그리고 방금 들어온 척후의 보고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신중해야 할 이유는 사라졌다.


남은 것은, 벤의 말처럼 ‘뜻대로’ 움직여주는 것.


크리스는 지도에 집중하고 있던 눈동자를 들어 자신을 향하고 있는 모든 얼굴을 향해,

나지막하지만 곧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왕의 깃발을 올려라.”


그에 흥분이 가득한 표정으로 미소 짓는 지휘관들.

왕의 푸른 눈동자와 거대한 목소리는,

그들의 본능을 돛으로 삼아 파도처럼 전장을 향해 전운을 이끈다.




“지금부터 불충한 저들의 목소리를 모조리 집어삼킬 것이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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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막간) 겨울에게 작별하는 방법 +10 15.07.17 1,155 28 19쪽
16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4 15.07.12 1,068 27 18쪽
161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0) +10 15.07.07 1,018 26 22쪽
160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7 15.07.02 997 22 20쪽
159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2 30 21쪽
158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2 28 24쪽
157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55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16 27 16쪽
155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3 35 24쪽
154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2 35 20쪽
153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06 35 23쪽
15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2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06 31 13쪽
»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994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793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4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48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80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60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1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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