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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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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5.06.07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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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2
추천
35
글자
24쪽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DUMMY

“허, 검성이?”


“예. 직접 옥스토브라카에서 군을 이끌고 요격했다고 합니다.”


전문의 내용을 읽어주는 셰르를 향해 벤은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을 내뱉는다.


“이래서야 주도권은 완전히 북쪽으로 넘어가겠네요. 크리스가 어떻게 대처할지 걱정되긴 해도, 그나마 다행이에요. 내심 검성이 북쪽에 있으면 어쩌지-하고 생각했었는데. 이러면 우리가 북진한 게 오히려 중요한 전략적 이점이 될 수 있겠어요. 토우칸 대군은요?”


“바르사이파 계곡을 돌파하고 주둔 중이던 적을 물리쳤다고 합니다. 아마 집결지로 향하고 있을 텐데, 뭐라고 답신을 보내시겠습니까?”


“대군께선 계획대로. 라고만 보내세요. 도청당할 위험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으니까. 대군께선 그것만으로 충분하실 겁니다.”


벤은 어둠이 내리깔린 숲을 둘러봄과 동시에 같이 어둠을 공유하고 있는 불빛들을 찬찬히 살펴본다. 생도로만 편성된 장교들은 이번이 초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후속 조치까지 마무리한 상태였다. 사상자를 분류하고, 노획한 보급품을 빠르게 재분배하였으며, 벤의 요구가 있기도 전에 미리 숲의 지형을 이용한 진까지 구축해 놓은 그들이었다.


“그럼, 검성께서는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리고 그런 장교들을 통제하는 것에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생도가, 바로 벤을 직접 보좌하고 있는 셰르 시즈키치와 유진 가슈펠라르였다. 중간평가에서 1,2위를 다투는 둘이 허투루 점수를 받은 게 아님을 그들 스스로 입증한 것이다. 그리고 장교들을 다루는데 셰르와 유진이 힘을 쓰고 있다면, 각지에서 모인 ‘잡군’이나 다름없던 사병들의 마음을 모으는 것은 왕녀인 리즈의 몫이었다.

왕녀라는 신분으로 직접 원정에 동참한 것만으로도 꽤나 병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었는데, 자신들과 스스럼없이 식사를 하고 같이 잠자리에 들며 같이 보초를 서는 리즈의 처세가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본인은 그저 ‘재미있으니까’라는 이유로 하고 있는 행동이었지만, 그녀의 그런 ‘행동’들이 병사들의 사기와 불안을 지우는 데에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일단 해가 뜨는 대로 움직일 준비를 해주세요. 자세한 사항은 새벽에 회의를 소집하여 전파할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예에 쉬세요.”


물러가는 셰르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벤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숲의 그림자를 등진 채 다가오는 발걸음. 그 주인의 얼굴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꽤나 가까운 거리가 필요했다.


“바빠?”


망설임이 느껴지는 고도의 목소리. 벤은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확연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 이제 쉬려고. 그러는 넌 안 피곤해? 아까 마스터에게 듣기론 오늘 꽤나 화려하게 날뛰었다며?”


“.......날뛰다니, 누가 들으면 야생마라도 된 줄 알겠다?”


무례한 검성의 볼을 꼬집기 위해 손을 뻗는 고도. 하지만 그녀는 묘한 위화감에 사로잡힌다. 자신이 다가선 만큼, 벤이 뒷걸음질 치며 물러난 것이다. 단순하고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고도는 허공을 내젓는 자신의 손끝으로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스침을 느끼고 있었다.


“다친 데는 없고?”


그러나 곧바로 이어지는, 평소와 다름없이 메마르고 담담한 벤의 상냥함에 고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거두었다.


“응. 마스터가 계속 옆에 계셨으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악마로부터 혈마력을 주입받은 게 오히려 다른 내성을 운용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고.”


“.......혈마력을 주입받아?”


“아, 응. 그게-”


순간,

고도의 머릿속에 재구성되는 그때의 기억.

보르케의 몸을 빌린 악마가 자신에게 혈마력을 주입한 방법은 그녀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기억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혔던 그 기억과, 그 당혹스러웠던 입술의 감촉이 되살아나 버린 탓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술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보르케도 원정에 참여한 것 같던데 도통 보이질 않네. 토우칸 대군 쪽으로 빠진 건가? 근데 걘 감옥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나?”


“어? 어? 그, 글쎄에.”


벤의 입에서 먼저 보르케의 이름이 나오자 화들짝 놀라고 마는 고도. 어둠이 자신의 당황하는 얼굴을 제대로 가려주었기를 빌 수밖에 없었다.


“몰라? 만난 적 없어?”


“어? 어. 몰라. 학교에서 본 뒤론 만난 적 없는데.”


그러고 보니 벤은 데로가 보르케의 몸을 빌려 원정에 몰래 참여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물론 그에게 이 사실을 숨길 그 어떠한 이유는 없었지만, 고도는 어째서인지 차마 사정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


“왜, 왜?”


“아냐, 아무것도.”


탐탁지 않은 벤의 목소리를 향해 고도는 괜히 신경질을 부려보지만, 그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었다. 순간적으로 고도는 화제를 돌릴 필요성을 깨닫고 입을 열었지만, 그 방향은 그녀가 의도했던 것과는 다르게 뒤틀리고 만다.


“그, 리즈는 어때? 잘 하고 있어?”


“어. 생각보다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 왕녀라기보다는 동생같이 병사들에게 다가서고 있긴 하지만.”


“다행이네........ 그......., 그건 생각해봤어?”


“뭐.”


“.......리즈가 너랑 결혼하겠다고 한 거 말이야.”

스스로 꺼낸 말이었음에도 고도는 작게 새어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 워낙 생뚱맞은 아이라서 로빈도 걱정이 많겠-”



“뭐어, 너랑 별로 상관없잖아?”



“......응?”

어둠을 타고 흘러오는 차가운 목소리. 그리고 어느새 자신에게서 벗어나 있는 벤의 시선. 고도는 순간적으로 둘 사이에 흐르는 이상기류를 감지해내고는 웃음소리로 분위기를 무마시킨다.

“아아, 뭐 그렇긴 하지만-”


“네 걱정이나 해. 마력소모가 많았으니 내일 두통도 심할 거 아냐. 다시 제대로 날뛰려면 조절은 잘 해야지.”


그리고 끊어지는 이성의 끈. 고도는 성큼 벤의 그림자를 향해 다가서며 눈을 부라린다.


“야, 너는 뭔 말을 그딴 식으로 하냐?”


“내가 뭘?”


“아니, 기껏 사람이 걱정해주는데 왜 그렇게 말하냐고?”


“내 걱정해줄 필요 없으니까 네 걱정이나 하라는 건데, 그게 뭐 문제라도 있어?”


“아- 그래. 존나 미안하게 됐네요, 괜히 쓸데없는 걱정이나 해서!”


결국 거친 발걸음으로 뒤돌아 사라지는 고도. 밤의 가운데로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벤은 가만히 그 흔적을 눈으로 뒤쫓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화를 낸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거짓말을 한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에게 ‘두통’이란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런 ‘이해할 수 없음’을 되씹고 있는 자신에 대한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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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규모는 7천. 그 7천에 아군 선봉대는 와해 되었고 중앙돌파를 허용하였으며 사상자는 3천에 이른다. 그럼에도 후퇴하는 적을 추격조차 못 했다고?”

아무것도 품지 않은 얼굴로 읽고 있던 보고서를 전술지도 위에 내팽개치는 크리스.

“내가 가지고 오랬던 건 전투보고서지 이런 웃기지도 않은 소설이 아니다만.”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왕의 푸른 눈동자를 향해 변명의 입술을 움직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휘천막에 모인 모든 지휘관들은 아직 피와 땀으로 얼룩진 전투복을 벗지도 못한 상태였지만, 전장을 물들이던 위엄과 광기는 왕의 무거운 목소리와 함께 차분히 가라앉은 뒤였다.

“‘오열’은 언젠가는 상대해야 할 벽이었다. 유일한 변수라면 조금 일찍 만난 것뿐. 그러나 협의했던 내용대로 대응하기는커녕 어버버거리다가 이렇게 치욕스러운 꼴을 보였다. 내가 짜증나는 건 이 종이에 써져 있는 단순한 숫자놀음 때문이 아니야. 로엔 중령, 이번 전투에서 우리가 입은 가장 커다란 손실이 무엇인 줄 아나?”


“옛.......?”


제대로 집중하고 있지 않는 지휘관을 귀신같이 꼽아내는 크리스의 시선에, 지목받은 당사자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오열이 이곳에 남아있었다는 건, 직접 우리의 의도를 꿰뚫어 보기 위한 일종의 기습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린 그의 의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모든 치부를 드러내 보였지. 그 치부가 무엇인지 알고 있냐, 이 말이다.


“아, 그....... 죄,죄송합니다.......”


“누가 사과하라고 했나? 나는 질문을 했고, 너는 그 대답을 하면 된다.”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크리스는 자리에서 벗어나 성큼성큼 중령이 앉아있는 자리를 향해 다가선다. 그는 호된 질책을 각오하고서 입술을 깨물고 있었는데, 이어진 크리스의 행동은 그를 비롯하여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지휘관들을 경악케 만들기에 충분했다.


“생각하지 않는 장교는 전장과 내 곁에 필요 없다. 단순히 영력으로 검을 휘두를 줄 안다고 해서 그게 지휘관이냐? 제대로 생각을 할 때까지 병장으로 강등이다. 다음 전투 때 최전방에서 분대를 지휘하도록. 지통실에서 나가라.”


크리스는 잡아 뜯은 계급장을 마치 쓰레기처럼 바닥에 던져버린다.


“폐, 폐하-”


“나가라고.”

영력을 느낄 수 있는 기사라면 모두가 크리스의 목소리에 깃들어 있는 진심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 이상 한마디라도 더 자신의 뜻에 거역한다면 그 자리에서 목을 내리칠 것이라는 암묵적인 경고를 전신을 통해 내뿜고 있었다. 결국 ‘병장’은 굴욕과 수치심보다도 공포에 짓눌려 도망치듯 천막을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데이먼 대령. 이번 전투에서 우리가 내보인 치부가 무엇인지, 너는 알고 있나?”


모든 지휘관들의 시선이 새롭게 지목을 받은 중년의 여인에게로 모여든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적시며 왕의 시선을 마주했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예, 블라르 트리스탄테가 직접 이곳에 남은 의도는, 우리가 ‘어째서 자신이 의도한 대로 움직인 것인지’ 확인하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거기에 이쪽은 허둥지둥 제대로 대처도 하지 못하고 2진까지 노출시키며 그에게 폐하께서 이곳에 전력을 집중시킨 이유에 대해 확신을 주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이번 전투에서 우리가 내보인 가장 치명적인 패착입니다.”


“정답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크리스.

“카나반의 검성과 함께 내가 생각해낸 것은, 옥스토브라카를 향해 우리가 중앙군을 동원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 후, 북쪽의 적이 병력을 분산시켜 남하하려는 징조가 보이면 곧바로 2진을 움직여 옥스토브라카를 제외한 모든 바스엘라드 산맥의 경로를 물리적으로 봉쇄한다는 작전이었다. 산맥을 통해 오고 가는 교역량을 생각해보면, 모든 경로를 틀어막는 건 분명 일시적이라도 심각한 손해가 될 테지. 하루만 교역이 멈춰도 도산하는 기업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북쪽은 물론이고 남쪽의 지방귀족과 도시들, 성들에서 원성이 자자할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객관적인 전력이 열세인 만큼 ‘주도권’만은 우리가 가져가야 한다고 판단했으니까.”

크리스가 벤에게 요구했던 것은 자신의 지휘관들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어디까지나 ‘실리’만을 추구하는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에 맞춰 벤이 내놓은 답이 바로 ‘모든 경로의 봉쇄.’

왕국의 허리를 이루고 있는 바스엘라드 산맥은 수천 년에 걸쳐 개척된 끝에야 인공계곡을 비롯한 수많은 교역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벤은 바로 그 ‘경로’들을 모두 파괴하라고 제안한 것이다. 이 조치가 경제적으로 가져올 파급력은 따로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뿐이 아니다. 크리스를 자신의 복권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광기의 군주라 선전할 기회도 주게 된다. 많은 기업과 귀족들, 그리고 영주들이 반발하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이야기. 하지만 크리스는 자신이 받을 평가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이 작전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2진의 존재를 철저하게 숨길 필요가 있었다. 적들이 무시할 수 없을 수준의 본대를 움직이면서도, 애매한 숫자의 나머지 병력을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운용할지 절대 노출해서는 안 되는 거였지. 그랬다면 적들은 본대를 제외한 2진이 예비대로서 후방에 남아있을 것이라 판단했을 테니까. 그런데 ‘오열’은 본대도 아닌 작은 성의 수비군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우리의 이런 의도를 간파했음은 물론 마땅히 이쪽이 가져갔어야 할 ‘주도권’을 처참히 박살 내버렸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작은 전투에서 잃어버린 거다.”

저마다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는 기사들. 자신들의 왕이 말한 ‘주도권’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모두가 알고 있다. 1진과 2진 모두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통해 ‘오열의 검성’은 군을 움직이는 일에 있어 한 수 앞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대로 옥스토브라카 성을 방치한 채 자신은 북으로 돌아가도 되고, 곧바로 산맥 너머에 준비된 군을 움직여 전력의 절반에 달하는 이쪽 2진을 흩트려버릴 수도 있다. 남부군의 2진이 그 의도를 의심하여 움직이지 못하면 본래의 계획대로 산맥의 모든 경로를 통해 남침을 성공시켜 남브린타이나 중앙군을 포위하거나 그대로 남하하여 점령전을 펼칠 기회를 얻게 된다. 반대로 남부군이 병력을 나누어 모든 경로를 봉쇄하기 위해 움직인다면 북부의 중앙군을 옥스토브라카로 남하시켜 약화된 남부군의 본대를 직접 공략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주도권, 즉 첫 번째 공격으로 옥스토브라카를 함락하지 못하고 병력편성을 노출시킨 대가.

“자,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움직여야 할 것인가. 그걸 논의하는 것에 앞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한 가지가 있지. 노아 장군.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나?”


“카나반의 검성이 움직이는 8천의 별동대입니다.”


“맞아.”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전술지도를 향해 옮긴다.

“나에게 별도로 언급도 안 하고 나간 이유는 모르겠지만, 전문에 따르면 그는 파견 나온 카나반군을 이끌고 동쪽의 바스단 계곡을 돌파, 북쪽에 대기하고 있던 북군을 궤멸시켰다.

8천이란 숫자는 굉장히 애매하지. 압도할 수 있는 군을 동원하여 제압하기엔 기동력에서 부족하고, 그렇다고 자유롭게 북쪽을 휘젓고 다니게 둘 수는 없으니까. 우리가 주도권을 다시 되찾기 위해서는 그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따라 맞춰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거대한 벽이 우리의 앞을 틀어막고 있지. 블라르 트리스탄테가 바로 그 벽이다. 제르노 대령, 본래 우리가 그를 제압하기 위해 강구했던 대책이 무엇이었나?”


“오열의 검성은 자신이 이끄는 군대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빛을 발하는 기사. 따라서 아군은 최대한 전선을 넓게 형성하여 그의 영향력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는 것이 아군의 의도였습니다.”


“그래, 하지만 이번 전투에선 그의 등장과 돌파를 예상하지 못했기에 너무도 허무하게 중앙을 내어주고 말았지. 내일 있을 공격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계획했던 대로 움직여야 할 것이다. 각 지휘관들은 소대 단위로 미리 산개위치를 전파해서 오늘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준비해라.”


“예엣!”


우렁찬 대답으로 마침내 차가운 구속에서 풀려나는 것을 자축하는 지휘관들. 밖은 이미 짧은 낮을 버티지 못한 해가 서서히 모습을 감추는 중이었다. 야전에 새겨진 치욕의 상처는 빠르게 수습할 수 있었지만, 분명 병사들 사이에서 흐르는 기운은 ‘선수를 빼앗겼다’는 불안감. 이런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서라도 크리스는 공격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전장에서 가장 위협적인 ‘오열의 검성’을 장시간 방치시키는 게 과연 현명한 대처일까요?”

지휘천막에 남아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국의 대통령을 대신하여 파견 나와 있는 경호대장, 재규.

“불과 만 명도 되지 않은 군대를 지니고서 4만 군대의 품으로 가볍게 들어온 자입니다. 그가 오늘과 마찬가지로 요격을 나온다는 보장도 없고, 성에 틀어박힌 검성을 공략하기는 매우 힘들다고 봐야겠지요.”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욘의 기사.”


여전히 전술지도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크리스의 시선이었다. 하지만 재규는 그런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무게를 읽어내고서,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서며 재차 천막 안에 다른 그림자가 있는지 확인한다.


“카나반은 그 악명 높은 ‘붉은 장미의 검성’을 잡아내는데 모든 최고전력의 기사와 마법사를 집중적으로 동원하였습니다. 꽤나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적재적소에 위치했어야 할 기사와 마법사를 무리해서 차출한 대가로 카나반의 최정예라고 일컬어지던 베르달 군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만약 내가 붉은 장미의 부관이었다면, 그녀의 죽음과는 관계없이 무리해서라도 예비군까지 몽땅 투입하여 베르달 전체를 불태워버렸을 것이다. 검성을 잡기 위해 전쟁에서 패배해버리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검성은 기사를 대표하는 직함이지, 군대와 국가를 대표하는 존재가 아니다.”


“흐음, 그것이 폐하의 ‘검성을 바라보는 시선’이로군요. 마치 지금 브린타이나의 상황을 빗대어 생각하고 계신 듯합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열등감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느슨한 재규의 목소리에 크리스는 결국 그의 반듯한 얼굴을 향해 푸른 눈동자를 움직인다.

‘열등감’

제3국의 기사로서 감히 내뱉어서는 안 될, 불경한 말이었음은 분명하다. 만약 주변에 남아있는 지휘관이나 장교가 있었다면 고함을 내지르며 검을 뽑았을 터.

그러나 크리스는 자신의 사고를 관통하는 재규의 발언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검성이란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기사로서의 인품과 존재감은 지금의 내가 얻을 수 없는 가장 큰 자산이자 위협이기도 하지. 허나, 나마저 그것을 인정해버린다면 누가 나를 따르겠나? 그가 왕을 거역하고 왕좌를 강탈한 반역자라는 사실은 벗겨 낼 수 없는 진실이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그 상징성을 먼저 무너트리셔야지요. 거꾸로 생각해보세요. 만약 전쟁에서 이기고 복권하신다 하더라도 블라르 트리스탄테라는 존재를 잡아내지 못한다면 이 왕국에 불꽃은 꽤나 오랫동안 고통받을 겁니다. 영주와 귀족이야 갈아치우면 그만이지만, 기사들의 마음은 그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요. 단장이 폐하의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속근위대인 ‘엑스클라마트’ 단원들의 대부분이 검성의 휘하에 남아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나도 알고 있다. 기사들은 ‘정당한 후계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블라르를 계속해서 받들겠지.”

정당한 후계자.

크리스는 이 단어를 내뱉으면서 굳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블라르가 전선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듣는 순간 그녀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바로 이 기회에 분명하게 왕국의 모든 기사에게 오열의 시간은 끝났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크리스의 욕심으로 끝나고 말았다.

“.......디미르는 어디에 있나?”


“모릅니다. 전투 후에 찾아뵈려고 했는데 보이질 않더군요.”


“.......”


재규의 대답을 듣자마자 빠르게 걸음을 옮겨 천막을 빠져나가는 크리스. 그녀의 등장에 천막 주변을 지키고 있던 ‘엑스클라마트’ 기사들이 경례를 올렸지만, 그녀는 그들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말을 가져와라.”






“역시 여기 있었군.”


“아, 뭐야. 너냐.”


어느새 어둠이 집어삼킨 겨울의 하늘. 그러나 환한 달빛 아래로 모든 진영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잠을 청하던 디미르는 왕의 등장에 허탈하게 웃는다. 그는 전투복도, 검도 벗어던진 가벼운 차림이었다. 마치 모든 것을 저 아래에 두고 왔다는 듯이.


“왜 전투보고에 참석하지 않았어?”


“야, 난 지휘관이 아니라 근위대일 뿐이라고. 내가 회의에 참가해서 뭐하냐?”


“쪽팔려?”


“뭐어?”


디미르는 어이가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크리스를 올려다본다. 그녀는 이미 말에서 뛰어내려 그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내가 이 자리에서 명령했던 것은 ‘죽지 말라’는 거였지, ‘지지 말라’는 게 아니었어. 물론 네가 오열을 잡아줬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그에게 네가 결코 만만치 않은 존재라는 걸 확인시켜 준 것만으로도 만족해.”


“.......만조옥?”

상체를 일으켜, 자신의 그림자를 밟고 서있는 크리스를 돌아보는 디미르.

“네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올 리가 없잖아. 날 동정할 생각이라면 그만둬. 애초부터 나는 ‘아직’ 그 영감탱이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넌 그렇게 무기력한 말을 하는 인간이 아니잖아.”


“무기력한 게 아니야. 현실적인 거다.”


디미르는 탄식에 가까운 목소리를 내뱉으며 다시 딱딱한 바닥 위로 드러눕는다. 평소와 다름없이 가볍고, 미련 없는 표정과 어투였지만, 크리스는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다른 감정을 잡아낼 수 있었다.


“이상하네. 왜 그렇게 초조해하는 거야?”


“초조하다고? 내가?”

허탈하게 웃어버리는 디미르.

“난 평생을 초조해하면서 살아왔어. 내가 대를 이을 수 없는 장남이라는 걸 영감탱이에게 들킬까봐 초조했고, 나이가 들면서도 그와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것에 초조했어. 하지만 그 초조함은 네가 ‘트리스탄테’라는 이름을 버리라고 하는 순간 구원받을 수 있었어. 아직 나는 그 영감의 아들이자 그 영감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내 안에선 이미 그의 이름은 지워져 있다고. 그런 내가 초조해할 이유가 뭐 있어?”


“글쎄. 그가 양자를 들였기 때문이라든지.”


디미르는 무심코 자신의 곁에 풀썩 엉덩이를 내려놓는 왕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본다.


“.......들었구나.”


“‘들었구나’는 무슨, 이미 병사들 사이에서 소문이 쫙 퍼졌는데.”

크리스는 기지개를 켜더니 그대로 디미르의 곁에 누워버린다. 디미르완 달리 제복을 입고 있긴 했지만, 겨울바람을 머금은 땅의 한기는 꽤나 시렸기에 그녀는 살짝 몸서리를 치고 만다. 그 작은 반응을 놓치지 않은 디미르는 살며시 그녀를 끌어안아 온기를 나눠준다.

“.......네가 동성애자이긴 하지만 이런 광경을 들켰다간 모욕죄로 처형당할지도 몰라.”


“그럼 네가 먼저 성추행했다고 둘러대지 뭐.”


피식 웃어버리는 디미르와, 마주 웃으며 그의 품으로 파고드는 크리스. 둘 사이로 차가운 입김은 더 이상 피어오르지 않는다.

이어지는 온기 속에서 먼저 입술을 움직인 것은 디미르였다.


“모르겠어. 난 더 이상 그 영감탱이와 아무런 인연도 없다고 자신해왔는데, 양자라는 소리에 왜 이렇게 동요하는 걸까.”


“그는 너를 부정하려 했지만, 결국 너는 그를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그의 이름을 버렸다고, 그의 그늘에서 벗어났다고 너는 스스로 믿고 싶었겠지. 하지만 결국 너와 그를 묶고 있는 굴레는 네가 그에게 인정을 받아야 끝날 수 있으니까.”


“.......”


크리스는 자신을 끌어안고 있던 디미르의 구속을 풀어버리고, 오히려 그의 얼굴을 가슴으로 끌어당긴다. 그의 살갗은 두터운 제복 너머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차갑게 식어있었다.


“디미르.”

그리고 그녀는, 그의 귓가로 ‘불꽃’을 흘려 넣는다.




“이제 창을 잡아.”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바르샤의 트레블을 축하합니다 :)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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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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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0) +4 15.12.17 922 16 22쪽
192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9) +4 15.12.12 873 20 16쪽
191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8) +6 15.12.07 884 24 17쪽
190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7) +4 15.12.02 868 24 18쪽
189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6) +6 15.11.26 992 20 16쪽
188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5) +6 15.11.21 865 23 18쪽
187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4) +10 15.11.16 913 25 17쪽
186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3) +10 15.11.11 856 22 20쪽
18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2) +6 15.11.07 867 20 19쪽
18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 +8 15.11.01 1,081 27 18쪽
183 (막간) 나의 태양에게 +8 15.10.27 886 29 11쪽
182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8) +12 15.10.22 923 28 23쪽
181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7) +8 15.10.17 1,043 27 19쪽
180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6) +8 15.10.12 950 28 22쪽
179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5) +12 15.10.07 857 25 21쪽
178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4) +6 15.10.02 923 27 24쪽
177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3) +8 15.09.27 853 23 21쪽
176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2) +6 15.09.22 842 23 20쪽
175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1) +4 15.09.17 999 25 20쪽
174 (막간) 결국 안식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8 15.09.12 919 26 21쪽
173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0) +6 15.09.07 816 24 24쪽
172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9) +6 15.09.02 917 24 19쪽
171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8) +8 15.08.28 1,003 24 17쪽
170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7) +8 15.08.24 1,148 27 22쪽
169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6) +16 15.08.18 1,022 33 20쪽
168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5) +8 15.08.13 876 24 21쪽
167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4) +10 15.08.07 991 27 26쪽
166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3) +6 15.08.02 984 23 17쪽
165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2) +6 15.07.28 966 30 28쪽
164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 +12 15.07.23 936 26 16쪽
163 (막간) 겨울에게 작별하는 방법 +10 15.07.17 1,155 28 19쪽
16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4 15.07.12 1,067 27 18쪽
161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0) +10 15.07.07 1,018 26 22쪽
160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7 15.07.02 997 22 20쪽
159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1 30 21쪽
158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2 28 24쪽
157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54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16 27 16쪽
»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3 35 24쪽
154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1 35 20쪽
153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05 35 23쪽
15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2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06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993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792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4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48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79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59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1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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