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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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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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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5.08.13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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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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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글자
21쪽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5)

DUMMY

“초소가 공격당할 때까지 관측반은 뭘 하고 있었나?!”


검은 제복 위로 대령 계급장을 비롯해 온갖 휘장과 훈장들을 번쩍거리며 지휘통제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서는 제국군 장교. 격앙된 표정이나, 부하들의 경례에 제대로 된 반응조차 하지 않는 다급한 걸음이 그가 전해 들은 급보의 긴박성을 짐작케 해주고 있었다.


“7개 초소에 대한 동시다발적인 야습이었습니다. 들어오는 정보의 통일성은 물론이고, 개중엔 망자를 보았다는 신빙성 떨어지는 내용도 있었는지라.......”


참모의 보고에, 변명 따위는 듣기 싫다는 듯 혀를 차며 상황판을 바라보는 대령.


“적의 규모는? 현재 위치는 파악됐나?”


“모든 보고를 종합해보면 대략 2천에서 3천 정도의 규모로 추정됩니다. 모든 국경초소와 중대본부의 보급품을 약탈하고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동작을 멈추고, 서서히 참모를 향해 고개를 드는 대령.


“.......남쪽? 왜 굳이 침투경로를 개척해놓고 다시 남쪽으로 돌아가는 거지?”


그리고 그제야, 참모는 대령을 향한 보고서에 거대한 사실 하나가 누락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천천히 대령이 앉아있는 상황판으로 다가가, 손가락으로 대령의 시선을 북쪽을 향해 돌려놓는다.


“연대장님, 침투해온 적들은 남브린타이나군이 아니라 북브린타이나군입니다.”


“.......뭐?”


격하게 뒤틀리는 대령의 표정.


“공격당한 아군의 초소의 위치는 바스엘라드 산맥의 이북지역입니다. 게다가 모든 보고에서 공통적으로 그들의 군복에서 북부군의 휘장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확실한가? 남부군의 기만책일 가능성은?”


“북부군이 협조라도 하지 않는다면 소수의 남부군으로는 여기까지 침입할 수 없을 겁니다. 북부군으로서는 현재 남부군의 주력이 옥스토브라카에서 발이 묶여있고, 서쪽이나 동쪽 경로를 통해 남하하려던 그들의 계획이 저지되자 우리 제국의 땅을 빌려 남쪽을 침공하려는 속셈일 겁니다. 만약 놈들이 제국군으로 위장하여 남브린타이나의 국경을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꽤나 골치 아파질 수도 있습니다.”


“.......”

참모의 분석은 타당했다.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에 비해 ‘알고 있는’ 대령으로서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도 혼란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만약 참모의 말대로 제국의 국경을 침범해온 자들이 진짜 ‘북부군’이라면, 이 일은 고작 국경수비연대장인 자신의 손을 벗어나는 일이었기에.

“군단장님께 전문을 보내라.”


“.......군단장님.......말씀이십니까?”


참모의 얼굴이 의문으로 물든 것은 당연했다. 고작 2-3천의 적군이 국경을 침범한 일이다.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음은 분명하나, 군단장까지 언급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와는 달리, 연대장의 얼굴과 목소리엔 확신이 가득했다.


“그래.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내용은.......?”


겨울바람에 말라붙은 대령의 입술 사이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그의 시선이 내리꽂혀있는 상황판은 바스엘라드 산맥을 중심으로 나뉜 3국의 국경이 어지럽게 얽혀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그 가느다랗게 퍼져있는 선의 연속은, 거대한 폭탄의 심지나 다름없었다.



“ ‘오열이 협정을 위반했다.’ ”




=============




“검성님, 어째서 퇴각을 명령하신 겁니까?”


“조금만 더 버텼으면 놈들은 스스로 무너졌을 겁니다!”


“디나스아리얼에서 전문이 내려왔다고 들었습니다. 퇴각의 원인과 책임이 누구인지 묻고 있다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마치 우리가 패전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일방적인 퇴각명령 이후 처음으로 열린 군부회의. 그러나 블라르를 향한 지휘관들의 목소리에 원망이 담겨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분노는 아직까지도 검성의 뜻을 모르고 있는 자신들을 무지와, 이번 퇴각을 단순히 패배로 치부하는 수도의 각료들에게 향해 있었다.

모든 일의 원인이지만, 장군들로부터 그 어떤 의심도 사지 않고 있는 검성. 평소 그의 인망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


그러나 멈추지 않는 그의 침묵은 모든 지휘관들의 지지를 희미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무도 그의 뜻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알려주질 않는다. 이 침묵이 그 어떤 상황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다른 누구보다도 검성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입을 열지 않는다.

이 회의실 안에는, 그의 진실을 이해할 수 있는 눈동자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거, 검성님!”

노크도 없이 들어선 부관의 얼굴엔 장군들과 검성에 대한 무례를 뒤엎을 정도의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덕분에 그는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고, 거침없이 목소리를 뿜어낸다.

“남부에서 사신이 도착했습니다! 검성님과 회담을 나누고 싶다고.......”


“사신?”


“성 하나도 빼앗지 못해서 쩔쩔매던 놈들이, 아주 기고만장해졌구나!”


“당장 목을 쳐서 되돌려 보내야 합니다!”


지휘관들의 반응은 역시나 격했다. 남부의 입장에서도 검성의 무조건적인 퇴각은 예상하지 못한 바였을 터. 이쪽의 의중을 알아보고자 하는 의도가 너무도 뻔히 보였던 것이다.


“누가 왔던가?”


욕지거리로 소란스러운 사이를 파고드는, 묵직하고 점잖은 검성의 목소리. 그가 침묵을 깼다는 사실과, 그의 목소리를 통해 새롭게 떠오른 궁금증으로 인해 지휘관들은 덩달아 입을 다물고 부관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그게.......“

그러나 검성의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망설이는 부관의 입술. 잠깐의 공백 이후 이어진 그의 대답으로 인해, 지휘관들은 부관의 망설임이 그가 내뱉을 이름에 대한 호칭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디미르.......경입니다.”






“안녕하신가아. 변함없이 칙칙하시구만.”


여자보다도 얇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집무실로 들어선 디미르는 오랜 야전생활로 인해 푸석하게 자라난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는다. 모든 지휘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버지와 독대를, 그것도 검을 찬 채로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오열의 의지’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비아냥거림은 책상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의 푸른 눈동자에 집중되어 있었다.


“용건만 말해라. 어차피 내 의도를 찔러보기 위해 찾아온 것일 테지.”


“알면서 왜 독대를 허락하셨어?”


“크리스야말로 어째서 내 반응을 알고 있으면서 너를 보낸 건가?”


“글쎄에. 혹시 모르지. 나라면 당신을 암살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비죽 웃으며 자신의 에페검을 쓰다듬는 디미르.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적의에 대한 적의가 아닌, 아버지의 비웃음뿐이었다.


“터무니없는 소리는....... 차? 아니면 와인?”


“아, 와인으로.”

노인은 온갖 서류 더미로 복잡한 책상 위에 잔 두 개와 낡은 와인병 하나를 올려놓는다. 난로 위에서 뜨끈하게 덥혀진 와인은 코르크 마개를 뽑는 순간 빠르게 은은한 향을 집무실 전체로 퍼트린다. 보통 와인이나 술을 뜨겁게 덥혀서 먹는 것은 니에브 공국에나 있을 법한 풍습이었지만, 어째선지 이 부자는 같은 입맛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내 ‘형제’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서로 두세 모금의 와인을 나눈 후, 갑자기 디미르가 웃으며 잔을 내려놓는다. 그런 그를, 블라르는 다소 뜻밖이라는 듯 눈썹을 치켜들고 마주한다.


“.......알고 있었나?”


“댁이 후계를 이을 수 있는 대상을 찾고 다닌 거? 당연히 알고 있지. 나도 귀가 있고 눈이 있으니까. 뭐어, 보통 나한테 그런 소식을 가져다주는 사람들은 그저 내가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후계자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말이야. 하긴, 틀린 말은 아닌가? 정작 나는 그 ‘형제들’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고.”


“.......”


“우리가 알고 있는 건 우리 군의 별동대가 북부의 동쪽을 돌파했다는 내용뿐이야. 그 별동대의 지휘관이 무슨 목적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우리도 몰라. 그런데 그것만으로 당신은 군을 물렀지. 그건 즉, 당신에게 그 별동대의 존재가 꽤나 거대했다는 것이고, 그 정도로 중요하니 분명 자신이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존재에게 그 처리를 명령했을 거란 말이지. 근데 그게 실패했으니, 결과적으로 내 ‘형제’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 테고.”


“.......”


검성은 대답 대신 김이 피어오르는 와인으로 입술을 축인다. 여기서 부인해봤자 아들의 눈을 속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노인은 알고 있었다. 비록 그 아들이 자신의 창을 이어받길 거부한 존재라 해도, 피는 속일 수가 없으니까.


“이봐 영감탱이. 뭐가 그렇게 조급한 거야?”

그런 아버지의 잔을, 디미르는 능숙한 움직임으로 다시 채워 넣는다. 돌아오는 노인의 깊은 눈동자를 향해, 그는 여전히 느슨한 웃음만을 흘릴 뿐.

“평생을 당신의 창을 받아오는데 바쳐온 나야. 그 창끝에 뭐가 서려 있는지는 금방 알 수 있다고. 말해봐. 내가 당신의 창에서 느껴진 그 조급함은, 진짜로 내가 알고 있는 그 조급함인가? 그렇다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될 수 있겠는데.”


“그런 소리나 지껄이려고 온 거라면, 잔을 비우고 당장 꺼져라.”


“당신답지 않게 도망가는군. 그 모습도 만약 작전이라면, 정말이지 소름이 끼칠 정도야.”


“집안 문제일 뿐, 외부인과는 할 이야기가 아니다.”


“하핫, 외부인이라.......”

달아오른 잔을 격하게 내려놓으며 디미르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회담이라고 할 것도 없는 짧은 담화였지만, 그 표정은 더할 나위 없는 소득을 품고 있었다.

“아, 크리스가 그러더라. 나더러 이제 창을 잡으래. 나에게 창을 잡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걔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어. 그런데 문제는, 나는 진짜로 창을 잡을 생각이란 거야. 이게 무슨 뜻인지는 지금의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겠지?”


“.......너야말로 다음번에도 봐줄 거라 생각하지 마라.”


“하하, 그거 기대되네!”


과장된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디미르. 그의 그림자가 사라진 이후에도, 블라르의 입술은 와인 품기를 멈추지 않는다.


“.......조급함인가.”


평생 동안 자신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그 단어. 그리고 한때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이의 입에서부터 흘러나온 그 단어.

블라르는 그 단어를 쓴 안주 삼아 달콤한 과일향을 마저 비운다.

몸은 따스하게 덥혀 지고 있었지만, 그의 이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냉기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




“척후의 보고에 따르면 더 이상의 추격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진행경로에는 아직 많은 초소가 남아있습니다. 몰래 움직이기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작전지도를 내려다보는 셰르의 목소리에선 숨길 수 없는 피곤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 피곤은 그의 찢어진 눈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책상을 대신하고 있는 간이침대를 둘러싼 모든 표정은 좀처럼 활기를 품지 못한 상태였다. 이번 원정을 나온 뒤로 줄곧 장난과 미소를 유지하던 리즈조차도 지금은 영혼이 빠진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틀간 이어진 철야 행군.

그것도 그냥 행군이었다면 모를까, 경로에 있는 모든 제국군의 경계초소를 격파하며 추격군을 물리치고 경로를 들키지 않기 위해 산과 계곡 사이를 구불구불 오가는 지옥의 행군이었다. 병사들은 물론이고 기사들마저도 진이 빠진 게 무리는 아니었다.


“이제 몰래 움직일 필요도 없어요. 제국군은 이미 우리가 국경을 따라 남하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테니까. 그래도 이 속도만 유지하면 오늘 밤엔 남브린타이나 국경으로 복귀할 수 있을 겁니다.”


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즈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온다. 이 지옥의 여정이 끝난다는 사실보다 행군을 하루 더 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가혹했던 것이다.


“그나저나, 제국군의 대응이 이상하리만큼 신속하군요. 첫 번째 초소에서도 소속을 북군으로 밝혔음에도 곧바로 경계태세를 취하지 않았습니까? 공격명령이 조금만 늦었어도 수비대대 전체를 상대해야 했을 뻔했습니다.”


유진의 말처럼, 이런 강행군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제국군의 태도에 있었다. 분명 북브린타이나와 아실레마제국은 불가침의 협력 관계에 있을 터. 그러나 국경으로 나타난 ‘북브린타이군’을 향한 그들의 경계심은 마치 적국을 향한 반응이었던 것이다.


“말했잖아요. 공격할 거라고.”


아무런 감흥도, 만족감도 없는 벤의 얼굴. 모두가 피곤에 찌든 와중에도 평상심을 유지하고 있는 그를 처음에는 신기하게 여겼던 생도들이었지만, 이내 그것이 벤의 얼굴이 원래부터 항상 귀찮음과 피곤에 찌든 모양이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예, 검성님께선 분명하게 제국군이 우릴 적대시할 거라 말씀하셨죠. 하지만 그에 확신을 가지고 계셨더라면, 굳이 북군으로 위장할 필요가 없었던 것 아닙니까?”


자신의 눈초리만큼이나 날카로운 셰르의 질문에, 벤은 이제야 그걸 물어보냐는 듯 얇게 웃으며 턱을 쓰다듬는다.


“아니죠. 중요한 건 ‘북군’으로서 제국의 국경에 침범하고, ‘북군’으로서 그들에게 공격받고 그들을 공격한다는 거였어요.”

“.......예?”


여전히 혼란스러운 셰르와 유진의 눈동자. 벤은 미소를 유지한 채로 작전지도를 향해 손가락을 짚는다.


“생각해보세요. 비록 ‘붉은 장미의 검성’이라는 거대한 패를 잃긴 했지만, 카나반의 방패역할을 하고 있던 베르달을 반쯤 궤멸시켰고 공동전선을 형성하려던 브린타이나 왕국은 반으로 쪼개져서 내전을 벌이고 있죠. 니에브공국과는 소규모 국지전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 대대적인 마찰은 없었어요. 그리고 그건 블라고슬로바와도 마찬가지고요.

제국에게 있어 이보다 전쟁을 벌이기에 좋은 시기가 있을까요? 제국 내부의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대대적인 영토 확장을 벌일 수 있는 기회였음은 분명하죠. 게다가 진짜로 그들이 북부와 군사협력관계라면, 왜 남브린타이나를 침공하지 않고 있는 걸까요? 이 모든 호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어요. 저는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직접 몸으로 부딪혀보기로 했고, 대충 결론은 나왔습니다.”


“어떤 결론?”


줄곧 잠자코 있던 리즈가 검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머리를 들이민다. 비록 그녀는 지도를 보는 것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벤의 손가락에 의해 저지당했지만, 그곳에 있는 참모들 모두가 그녀와 한뜻으로 벤의 입술을 기다리고 있었다.


“북브린타이나는 제국과 동맹이 아닌 일종의 협정을 맺은 겁니다. 내전이 종식될 때가지는 서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협정 말이죠.”


“.......하지만 제국으로선 협정을 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검성님의 말씀대로라면, 지금보다 움직이기에 좋을 시기는 없을 텐데.”


셰르의 의문에 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를 품는다.


“바로 그거에요! 처음엔 저도 내전으로 인해 전력이 소모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봐도 좀 이상하단 말이죠. 그래서 전 좀 더 근본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바꿔봤어요.

애초에 지금 내전을 벌이면 심각한 국력손실은 물론이고 제국에게 틈까지 내어주는 상황인데,

어째서 오열의 검성은 굳이 이 시기에 나라를 둘로 갈라놓은 것일까- 하고요.”


“그거야, 단순히 수도에서 론크리스 국왕을 죽이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본래 계획대로 론크리스가 도망치기 전에 그녀를 잡아내었다면, 내전으로 이어지지도 않았을 테지요.”


“과연 그럴까요?”

좀처럼 벤에게서 볼 수 없었던 즐거운 미소에 셰르는 숨을 삼킨다. 도대체 이 남자가 어디를,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 그로서는 감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뭐어, 오열의 검성이 협정의 대가로 제국에게 무엇을 약속했는지, 그리고 그 협정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저도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번 우리 군의 행동으로 인해 그는 걷잡을 수 없는 곤란에 빠질 거란 사실이에요. 그리고 그 곤란함은 내전은 물론이고 향후 이어질 반(反)제국전선에도 꽤나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겁니다.”


단순히 북군으로 위장하고 제국의 국경을 침범하는 움직임이 이토록 크고 멀리 내다본 수가 될 수 있을까. 참모들은 직접 확신에 가까운 설명을 듣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 와중에 오직 다른 방향의 표정을 품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안타깝네.”




작은 천막을 물들이는 명랑한 목소리. 벤을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리즈의 뾰로통한 표정으로 모여든다.


“.......안타깝다니?”


“안타깝잖아. 공화국에서 조금만 더 여유롭게 지원을 해줄 수 있었으면, 남 눈치 따위는 안보고 병권을 휘두를 수 있었다면, 만약 벤이 ‘진짜로’ 검성이었다면, 이런 고생은 물론이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아군의 희생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악평을 듣지 않고도 충분히 일을 진행시킬 수 있었을 텐데.

알고 있지? 아직도 몇몇 귀족나부랭이들은 벤이 검성직을 유지하고 있는 걸 단순히 오빠랑 어렸을 적 친구라는 이유에서 오는 특혜라고 생각하고 있어. 마땅한 출생은커녕 얻어걸린 마법대학생일 뿐인 벤이 정부의 요직을 맡고 있는 걸 탐탁치 않아하고 있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오빠가 아델의 법안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는 건 벤을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정작 공화국을 위해 제일 개고생을 하는 건 벤이랑 우리들인데. 오빠 말곤 아무도 모르잖아?”


“.......흐음.”


언제 적이 습격해올지 모르는 적진의 한복판, 게다가 중요한 작전회의 중에 나올법한 이야기가 아님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리즈의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벤은 그에 다소 흥미롭다는 듯이 리즈의 얼굴을 바라본다.


“.......관계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 단단한 굴레야. 그것만큼은 ‘그 녀석’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겠지. 하지만,”

벤이 언급한 ‘그 녀석’이 어딘가에 묶여있을 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리즈는 곧바로 고개를 들었지만, 벤의 목소리에 의해 저지당하고 만다.

“왜 다들 내가 그 관계라는 것에 의문을 품기를 바라는지 나로선 이해할 수가 없어. 내가 불만을 품지 않는 이유? 죄 없는 병사들을 희생하면서 내가 이곳까지 나와 있는 이유? 내가 욕을 들어도 해명하지 않는 이유? 어딘가 뒤틀린 녀석이 나한테 쌍둥이라 고집을 피워도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 이유? 간단하잖아.”


벤은 웃는다.

그것은 체념의 웃음에 가까웠지만, 셰르와 유진은 물론이고 리즈마저도 그의 먹색 웃음에 차마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내가 다섯 살 때 녀석이 ‘나의 관계’에 발을 디딘 그 순간부터, 나는 이렇게 되도록 설계된 거야.

고물을 주워다 팔던 그때 시절도, 병사들의 비명과 피를 주워다 파는 지금 시절도,

나는 주어진 상황에 따라 대충대충 시간을 보내고 해결을 할 뿐이야. 그게 내가 로빈에게 줄 수 있는 ‘관계’의 유일한 형태니까. 그 사이에 대가라는 개념이 생긴다면 나는 물론이고 그 녀석도 비웃겠지.

그냥 그런 거야. 그러니까, 안타까워할 필요 없다고, 리즈.”



“.......바보 같아.”

리즈의 목소리엔 질책성이 진하게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만큼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여있었다.

“역시 벤은 가만히 냅두면 오빠한테 손해만 보는 성격이야. 내가 계속 붙어서 감시해야겠어.”


“.......아, ‘그 일’ 말인데....... 그것만큼은 네 오빠가 헛소리한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아아! 왜애! 그럼 난 왜 여기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 거냐구!”


“시끄러. 내 알 바냐. 더 이상 헛소리 금지. 셰르, 유진. 걔 입 좀 틀어막아요.”


아무리 야생성으로 똘똘 뭉친 리즈라고해도 두 기사의 압력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결국 저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번진 미소만을 남긴 채, 참모들은 다시 벤의 손가락과 지도에 집중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벤의 덤덤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자, 그럼. 제멋대로인 우리 왕님의 면상에 주먹을 꽂아주기 위해 오늘도 힘내서 도망칩시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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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3) +8 15.09.27 853 23 21쪽
176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2) +6 15.09.22 842 23 20쪽
175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1) +4 15.09.17 999 25 20쪽
174 (막간) 결국 안식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8 15.09.12 919 26 21쪽
173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0) +6 15.09.07 816 24 24쪽
172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9) +6 15.09.02 917 24 19쪽
171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8) +8 15.08.28 1,003 24 17쪽
170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7) +8 15.08.24 1,148 27 22쪽
169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6) +16 15.08.18 1,022 33 20쪽
»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5) +8 15.08.13 876 24 21쪽
167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4) +10 15.08.07 991 27 26쪽
166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3) +6 15.08.02 984 23 17쪽
165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2) +6 15.07.28 966 30 28쪽
164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 +12 15.07.23 936 26 16쪽
163 (막간) 겨울에게 작별하는 방법 +10 15.07.17 1,155 28 19쪽
16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4 15.07.12 1,067 27 18쪽
161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0) +10 15.07.07 1,018 26 22쪽
160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7 15.07.02 997 22 20쪽
159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1 30 21쪽
158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2 28 24쪽
157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54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16 27 16쪽
155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2 35 24쪽
154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1 35 20쪽
153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05 35 23쪽
15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2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06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993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792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4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48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79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59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1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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