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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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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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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5.05.27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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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글자
23쪽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DUMMY

검성.

초기엔 단순히 국가를 대표하는 최강의 기사를 뜻하던 호칭.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검성은 정계와 군부를 모두 초월하는 하나의 직급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 존재 자체가 거대한 전쟁억제력으로서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전쟁의 시작과 끝은 어디까지나 병사들의 발로 시작되고 그들의 비명과 피로 끝을 맺게 된다. 그런 병사들의 최전선에서 지휘뿐만 아니라 직접 그들의 방패가 되고 검이 되는 것이 기사들의 존재 이유. 그 상대방 기사들을 압도하기 위한 더욱 강한 기사를 필요로 하게 되고, 기사들의 역량으로 인해 전장의 판도가 뒤바뀌는 것이 반도에서 수천 년간 이어져 온 반복의 역사였다.

검성은 바로 이런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존재다.

지휘관과 기사들이야말로 병사들이 비명의 벌판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의 근원이자 보험. 그런 그들이 손조차 쓸 수 없을 정도로 초현실적인 강함이 전장에 존재한다면, 병사들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한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국가는 검성을 운용하는데 있어 신중함을 기해야 한다. 하나의 전선에 검성을 투입한다면, 당연하게도 다른 전선엔 검성이 존재할 수 없다. 기사의 세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그럼 검성을 여러 명 운용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현시대 ‘검성’이라는 존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가능한 의문이다. 검성이란 국가에서 최강이어야 함은 물론, 반도에서도 최강일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 기사여야 한다. 제국과 같이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힌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최강은 오직 하나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검성의 등장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거대한 전략적 맹점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게다가 만에 하나 투입한 검성이 적국의 검성이나 다른 요인으로 인하여 공략당해버리면, 해당 전투나 전쟁뿐만이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으로 위기가 찾아올 수도 있다. 대표적인 실례가 바로 대전쟁 당시의 카나반으로, 그 후폭풍은 수도인 아르다르의 함락은 물론이고 ‘카나반의 상처’라는 비극적이고 치욕적인 대로의 탄생이었다.



“검성이라고?!”


때문에 블라르의 등장소식을 들은 크리스는 격하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미끼라고 생각했던 옥스토브라카 수비군에 어째서 그가 있는 것인지, 그리고 어째서 이렇게 담담하게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 그녀로선 쉽사리 블라르의 의도를 유추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현재 검성이라는 이름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북브린타이나의 군주노릇을 하고 있다. 그런 그가 경솔하게 초전부터 모험을 하리란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분명 노리고 있는 바가 있을 것이다. 크리스는 본능적으로 그 의도를 간파해내는 게 이번 전투의 판도를 가르는 요소가 되리란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목소리는 그녀 혼자가 아니었다.


“분명 옥스토브라카를 점령하고 있는 북군의 규모는 작아. 하지만 영감탱이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져. 이제부턴 저들을 북군의 중앙군으로 판단하고 작계를 다시 짜야 할 거야. 저 인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참모들을 불러서 의견을 나눠봐.”

장난기가 사라진 디미르의 얼굴이었다.

“동부국경에도 전문을 보내야겠지. 영감탱이가 이곳에 왔다는 건, 북브린타이나는 동부의 아실레마제국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둘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오고갔다면 제국이 우릴 향해 움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지. 오스타이나의 보급을 차단한 게 어쩌면 시작일 수도 있어.”


“디미르.”

그대로 말머리를 돌려 언덕을 내려가려던 디미르의 등을 향해 크리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리꽂힌다. 만약 주변에 다른 지휘관들이나 참모가 있었다면 평소와 다름없는 왕의 표정과 목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디미르는 알고 있었다. 저 위엄 있는 자태에서 흘러나오는 시린 냉기가, 평소와는 전혀 다른 온도를 품고 있다는 것을.

그는 천천히 자신의 왕을 향해 다가간다. 잔뜩 굳었던 얼굴은 어느새 다시 느슨함과 여유로 젖어있었지만, 그녀의 날카로운 눈동자를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죽지 마.”

짧고, 간단한 왕의 목소리. 디미르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잡을 수가 없었다.


“걱정하지 마. 죽을 생각 없어.”


“걱정 아니야. 명령이다.”


가까워지는 두 시선. 미소를 머금은 디미르의 입술을 향해 크리스는 손을 뻗는다.

하얀 영광을 향해 입을 맞추는 디미르.

왕의 손등 위로 떠오른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무게가 깃들어 있었다.


“저는 당신의 검. 브린타이나 기사의 맹세로, 저는 절대 당신보다 먼저 라이펠의 축복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제 생명은 당신의 손등에 새겨놓고 되찾으러 오겠습니다. 그 시간이 불쾌하시다면, 부디 그 이후에 불꽃으로 제 사랑을 삼켜주시길.”


“........너 게이잖아.”


“아놔, 진짜. 말이 그렇다는 거지, 분위기 좀 맞춰주라.”


허탈하게 고개를 흔드는 디미르와 마주 웃으며 크리스는 디미르가 입을 맞춘 자신의 손등을 끌어당긴다. 그리고는 남아있는 그의 온기를 입술로 탐하며, 파랗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로 ‘기사’인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시린 불꽃의 이름으로, 날 사랑하는 것을 허락하겠다. 네 생명으로 인해 나의 시간이 지루해지지 않도록 노력하라. 그 뒤에 너에게 내릴 이름은, 오열의 뒤를 잇는 영광일 것이다.”


“감사합니다, 나의 여왕, 나의 사랑.”


거친 말발굽소리와 함께 언덕을 내달리는 디미르의 뒷모습을 보며, 크리스는 아무것도 품지 않은 얼굴로 용솟음치는 전장의 노래를 듣는다.


역사가 끝나는 곳엔 언제나 새로운 역사가 탄생한다.

그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




“크읏-!”


몇 차례 충격을 견뎌내는 것엔 성공했지만, 이미 양 팔꿈치의 관절은 너덜너덜해진 뒤였고 어깨의 근육은 찢어진 지 오래다. 생각보다 깊은 상처는 없었으나, 온몸의 곳곳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출혈의 양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누구보다도 그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다음 합에 승부를 내지 못하면, 이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자신의 존재는 말끔히 지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이성을 사로잡고 있는 굴욕감은 이런 자신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몇 번 뒷걸음친 것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선봉이자 중앙군 선두의 지휘관인 자신의 뒷걸음 몇 번은, 그대로 적의 돌파를 허용하는 모양새로 이어지고 있었다. 요격이라는 단어가 민망할 정도로 적의 군세는 이쪽의 절반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중앙돌파를 허용한 남부군의 진형은 기병대가 투입되기도 전에 이미 급격하게 무너지는 중이었다.



그 중심에 그가 있었다.



검성이란 개념을 확립한 장본인이자 인류 최초의 검성이라 불리는 아실레마제국의 초대검성 ‘아론 드리브달’은 전장을 장악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기사, 즉, 훗날 ‘검성’이라 불리는 존재가 지녀야 할 조건 중의 하나로 압도적인 ‘공포’를 꼽았다. 상대방의 기사들, 그리고 또 다른 검성과 겨루기 위한 ‘대기사전’의 역량도 분명 필수적이지만, 그 전장을 휩쓰는 존재감을 통해 아군 병사들에게는 거대한 사기를, 적국 병사들에게는 압도적인 공포를 선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검성의 역할’이라 본 것이다.

‘오열의 검성’ 블라르 트리스탄테는, 이렇게 적 병사들에게 ‘공포’를 선사해주는 능력만큼은 같은 시대의 다른 검성들보다 높게 평가받는 인물이다. 유명한 일화로, 지금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아실레마제국의 ‘붉은 장미의 검성’ 델핀 드리브달은 일찍이 그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었다.


“나와 내 딸과 같은 지휘관은 일종의 불타는 ‘광기’로써 주변을 질리게 만들지. 하지만 브린타이나의 ‘오열’이나 카나반의 ‘흐름’은 조금 달라. 그 인간들은 광기와는 정반대의 공포로 병사들을 압도할 줄 알아. 시끄럽지도 않고, 경악스럽지도 않지만, 무언가 기사로서의 원초적인 근엄함이 내뿜는 공기는 일반병사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거든. 실제로 난 그들과 맞붙은 적이 있었고, 지금도 둘 모두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어. 다만 이길 자신도 없지. 둘의 차이점? ‘흐름’이 1:1로 붙기에 귀찮다면, ‘오열’은 전장에서 붙기에 귀찮다는 정도일까.”


그리고 남부군의 선봉, 반즈 스트라토스는 지금 ‘오열’ 특유의 존재감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중이었다.

만약 이 전투에서 살아남는다면, 어떤 이들은 이런 자신을 향해 ‘검성의 공격을 수차례 막아냈다’며 칭송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하고 표면적인 사실에 불과하다. 지금 자신이 살아있는 건,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계산된 검성의 의도였을 뿐이니까.


“물러나지 마라! 둘러싸란 말이다!”


누군가의 영력이 실린 목소리가 반즈의 귓가에 스친다. 그러나 그녀를 보조하기 위한 병사나 기사들의 움직임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만신창이가 된 채로 후퇴하기 바쁜 선봉지휘관의 모습은 남브린타이나군 병사들에게 일종의 거대한 경고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주지 않으면서도 접근하는 병사와 기사들을 꼼꼼히 도륙하는 ‘오열의 검성’ 블라르 트리스탄테. 반즈는 어느새 중앙군 깊숙한 곳까지 밀려버린 자신과, 검성의 뒤를 따라 그가 만든 틈을 파고들어 돌파해온 북부군을 바라보며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야 수의 우위를 이용하려던 이쪽의 진형이 쓸모가 없게 된다. 마법사들은 아군의 품으로 들어온 적을 향한 포격을 머뭇거릴 수밖에 없고, 파고들 시기를 놓친 기병대는 외곽을 배회하며 전전긍긍하고 있을 것이다. 적은 숫자로 진형의 한가운데로 들어선 적군을 포위하기는커녕 도리어 유린당하고 있는 양상.


“다음 한걸음에 모든 것을 걸어보려 하는군. 훌륭한 판단이오, 조던. 지금 모습을 본다면 그대의 아버지도 자랑스러워하시겠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모습으로 그녀의 심장을 향해 창끝을 겨누는 ‘오열의 검성’ 블라르. 반즈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나.”


“물론. 옥스토브라카의 조던 스트라토스와 그의 딸 조던 반즈를 모를 리가 있겠나. 비록 다른 깃발 아래에 서게 되었지만, 기사로서의 그대 아버지는 나의 존경을 받을만한 인물이었지.”


“북부의 반역자는 존경을 창에 피를 묻히는 것으로 표현하나보군.”


가시가 돋힌 반즈의 목소리에, 블라르는 잠시 창을 거두고 그녀를 내려다본다.


“그의 죽음은 분명 나의 책임. 그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 다만 그를 존경한다는 말은 진심이오. 그대의 아버지는 나와 함께하자는 제의에 ‘기사는 자신의 자리를 지킬 뿐’이라며 거절했지. 그의 선택을 지지한다는 것은 아니나, 그를 존중한다는 뜻에 변함은 없었소. 때문에 최대한 그를 예우하려 했으나, 내 미진한 제자놈이 일을 그르쳤군. 대신 사과드리오.”


“제자.......? 그럼 그 렌이라는 새끼가 당신의 제자였단 말인가?”


“일단은 제자라고 할 수 있겠지. 그 아이의 존재를 책임지겠다고 맹세했으니.”


별다른 억양이나 뜻을 담고 있지 않은 검성의 목소리였지만, 반즈는 어느새 온몸을 괴롭히던 고통도 잊은 채로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말은....... 그놈이 당신의-”


“맞소.”

천천히 반즈를 향해 다가서는 블라르. 수만 명이 모여 있는 평원이었지만, 그의 시린 눈동자를 제지할 수 있는 목소리는 없었다.

“그는 내 양아들이오.”



“오호, 그 이야기 자세히 좀 듣고 싶은데.”

요동치는 병사들의 비명과 어지러운 금속의 파열음을 뚫고 반즈와 검성 사이를 가로지르는 목소리. 그 익숙한 느긋함에 반즈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검성의 간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동생이 생겼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다니,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

겨울의 햇빛을 받아 회색으로 빛나는 에페검. 그 얇고 늘씬한 검신만큼이나 가벼운 몸짓으로 나타난 디미르였다. 말에서 뛰어내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아들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검성의 눈엔 그 어떠한 감정이나 의도도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눈동자가 맘에 들었는지, 디미르는 비죽 웃으며 반즈의 곁을 스쳐지나간다.

“대열을 재정비하고 포위망을 구축하는 걸 도와줘. 아직 적의 의도를 모르기 때문에 2진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어. 이 병력만으로 저들을 잡아야 한다는 뜻이야. 기병대는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데 쓸 거야.”


“단장님, 하지만-”


“단장? 아아, 너 엑스클라마트의 단원이었구나. 걱정 마. 저 영감탱이는 내가 막을 거야.”

부드러운 어투였지만, 반즈는 디미르의 목소리 속에 깃들어 있는 ‘명령’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나 디미르가 타고 온 말 위에 몸을 싣는다. 비록 이미 검을 들고 싸우기엔 어려운 몸이었지만, 이렇게 어지러운 전황 속에서 영력이 실린 목소리는 분명 가치가 있다. 그렇기에 반즈는 지금 자신의 역할, 그리고 기사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 나이에 힘도 좋으셔? 갑자기 동생이라니. 당황스러운데.”


“.......말했듯이, 양아들이다. 전에 있던 아들이 갑자기 사라져서 말이지.”


“하하, 이젠 아예 없는 셈 치는 거야?”


서슴없이 검성의 간격으로 들어서는 디미르. 그러나 블라르의 창은 영력을 품고 있지 않았다. 디미르의 간격으로 좁혀질 때까지도, 검성의 창은 움직이지 않는다.

디미르의 얇고 긴 머리카락이 전장의 바람에 휘날리기 시작한다. 그 푸른 눈동자와 가느다란 턱선이 검성의 눈동자를 가득 채웠고, 노인의 깊은 주름과 피로 얼룩진 제복이 디미르의 눈동자를 가득 채운다.

전장에 서있는 ‘오열’은, 디미르로서는 처음 접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생소하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상상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기에.

그리고 자신이 언젠가는 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아버지라는 존재 그 자체의 모습이었기에.


‘오열의 뒤를 잇는 영광.’


왕의 마지막 말을 곱씹으면서도, 디미르는 좀처럼 미소를 거둘 수가 없었다.




=================




“어째서냐?! 어째서 막지 못하는 것이냐?! 적은 고작 이쪽의 절반이란 말이다!”


그러나 지휘관의 외침에 답하는 목소리는 찾을 수가 없었다. 코앞까지 들이닥친 카나반군의 함성이 모든 사고를 집어삼킨 덕분이었다.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계곡에 배치시켰던 척후로부터 받은 보고에 따르면 적의 규모는 이쪽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3천. 계곡에서 빠져나오는 그들을 포위하여 한꺼번에 섬멸하려던 간단한 계획에 균열은 없었다. 진형조차 이루지 않고 이쪽의 포위망을 향해 파고드는 그들을 바라볼 때까지도 얼굴에서 느긋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문제는, 수십 명으로만 이루어진 그들의 선두와 충돌한 그 직후 벌어졌다.


화력전에서 밀려버린 것이다.


분명 척후와 매복조가 공격을 퍼부었음에도 그들은 반격은커녕 빠져나가기 바빴다고 들었다. 그것으로 카나반군의 마법사전력이 부족함을 간파하고 만들어낸 포위 진형이었는데, 교전이 시작되자마자 이쪽을 향해 퍼부어대는 포격의 규모는 도무지 준연대급의 마법사전력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그 공격마법들의 첫 목표가 이쪽의 마법사들이었으니, 시간이 지나면서 약해져 버린 보호막 사이로 쏟아지는 그들의 마법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 포격전의 중심에 한 신참전투마법사 소녀가 있었다는 사실을, 북브린타이나의 지휘관은 알 수 없었다.



“바로 그겁니다. 적의 마력을 먼저 느끼세요. 그 안에 깃든 속성을 간파하고, 내재된 마력의 조합을 통해 가장 효율적인 마법을 연성해내는 겁니다.”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오캄푸스의 잔소리. 그러나 고도는 더 이상 그 망자의 목소리에 짜증을 내지 않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기분에 도취된 덕분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희열에 가까웠다.

일찍이 그녀는 대규모로, 그것도 연속된 광역마법이나 공격마법을 시전해 본 경험이 없었다. 여태까지 자신이 ‘전투마법사’로서 다뤄왔던 모든 마법들은, 어디까지나 혈마법에 의존했던, 타인의 힘을 빌려왔던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오캄푸스로부터 균등한 내성을 조합하여 공격마법을 연성하는 방법을 배울 때까지도 그녀는 그 실효성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악마의 힘을 빌리면 간단하게 발현할 수 있는 파괴력을, 굳이 내재된 마력을 조합하고 주문을 외우면서까지 해야 할 ‘상식적인’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만의 마력을 혼합하여 마법을 만들어내고, 그것으로 상대방의 보호막을 찢고 마법을 내리꽂는 기분은 그녀 스스로도 놀랄 정도의 쾌감이었다. 혈마력을 분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감각으로, 진정으로 자신만의, 자신의 안에 품고 있는 힘만으로 마법을 연성하고 그게 효과적으로 발동하는 현상 자체가 그녀에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더욱 많은 마법을 연성해보고 싶다. 그것으로 더욱 두꺼운 보호막을 찢는, 더욱 강력한 마법을 내보이고 싶다.

얼마 전까지는 상상해보지도 못했던 욕망이 그녀의 입가로 새어 나온다. 그걸 부추기고 있는 것은 물론 스승의 신비로운 목소리.


“숨기지 마십시오, 억누르지 마십시오. 그건 당신이 가지고 있는 본능입니다. 하나의 정점에 만족할 수 없는 자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권입니다. 분출하세요. 혈마력 따위에 의존할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까지 집어삼킬 기세로 욕망을 키우세요!”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고도는 행동으로 스승의 조언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를 위해서도, 혈마법을 위해서도, 그리고 지금 이 마법들을 보고 있을 어느 멍청한 동기를 위해서도 아닌, 오직 자신을 위해서.

그것이야말로 고도에게 있어선 초심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전투마법사들은 그런 고도와 오캄푸스를 경의에 찬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 수십 명분의 마력을 내뿜어대고 있는 고도의 존재는 분명히 카나반군 화력의 중심에 있었다. 양과 질 모든 분야에서 상대방을 압도하고 있는 그녀의 포격마법을 통해 선두의 기사들은 손쉽게 활로를 뚫을 수 있었고, 카나반군의 측면을 압박해야 하는 북브린타이나군은 임무는커녕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전장을 주도하고 있는 존재는 고도 한 명만이 아니었다.



“크악!”


셰르의 검이 왕국기사의 하얀 제복을 붉게 물들이고, 그의 바로 뒤를 따르고 있던 유진이 그의 숨통을 끊는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선두에서 전장을 휘젓는 두 기사의 호흡은 생도라고는 믿기지 않는 능숙함이었다. 거기에 리즈는 혼란이 가득한 와중에도 적재적소에 화살을 꽂아 넣으며 그 두 명을 보조하고 있었다. 조그마한 영력의 기척도 내뿜지 않으며 조용히 빛나는 왕녀의 화살은, 전장에 익숙한 왕국의 기사들로서도 좀처럼 피해낼 수 없는 치명적인 존재였다.


“전투마법사들에게 좌측의 견제는 느슨하게 유지하고 화력을 전방에 집중해달라고 전해줘요. 어차피 이 상황에선 쉽사리 측면으로 들어오진 못할 테니까. 전방의 기사들은 이대로 쭉 가라고 하고, 후방의 기사들은 양 측면을 두텁게 유지할 수 있도록 말해주세요. 이대로 적의 지휘관을 무너트릴 겁니다.”


거기에 전장을 읽는 벤의 먹색 눈동자까지.

화력, 기사, 지휘.

이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카나반군에 의해 북브린타이나군의 대열은 속절없이 무너지는 중이었다.


“대령님! 중앙이 뚫립니다! 양쪽의 아군이 적의 허리를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성으로 후퇴하셔서 전군을 재정비하는 것이!”


북브린타이나의 부관들은 초조한 얼굴과 목소리로 자신들의 지휘관을 향해 소리를 내지른다. 그러나 잔뜩 뒤틀린 표정의 대령은 고개를 저으며 도리어 호통을 치고 만다.


“무슨 소리냐! 고작 이 숫자의 적에게 꼬리를 말고 성에 틀어박히란 말이냐?! 왕국의 기사로서 생각할 수도 없는 추태다!”


혼란스러운 전열만큼이나 흥분한 대령은 방금 자신이 저지른 중대한 실수 하나를 전혀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복받쳐 오르는 분노와 당혹함 덕분에, 목소리에 그만 영력이 실려 버린 것이다.

물론 지휘관으로서 전장에서 영력을 실은 목소리를 외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

다만, 극도의 혼란 속에서도 그 영력의 냄새와 그 냄새가 품고 있는 ‘지위의 향’을 간파해내는 시선이 카나반군에 있다는 사실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


“아앗-!”


“대령니임!!!”


처음에 대령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전신에 힘이 빠지고, 하늘이 격하게 흔들린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부관들의 얼굴에 경악이 떠오르고 있다.

그 근원이, 자신의 목에 박혀있는 화살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오래 지나지 않아 깨달았지만, 이미 시야는 어두워지고 있었다.




지휘관을 잃은 데다 대열이 무너진 군대는 결국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카나반의 병사들은 호쾌한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고, 생도들은 그제야 첫 실전의 떨림이 찾아오는 손을 붙잡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웃는다. 승리에 도취되지 않은 얼굴은 벤과 그 근처의 부관들뿐이었다.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토우칸 대군이 이끄는 군의 소식을 기다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온몸을 왕국의 피로 적신 셰르의 질문이었다. 그에 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주변의 황량한 겨울풍경을 먹색 눈동자에 담는다.


“아아뇨, 이대로 집결지로 갑니다. 토우칸이라면 분명히 돌파했겠죠.”


“.......그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계신 게 아닌지요. 그는 군인도 아닌 데다가, 야전지휘경험도 전무하지 않습니까?”


생도의 신분으로 대군에게, 그것도 지휘관에게 의심을 품는 행위가 용납될 리가 없다. 하지만 벤은 그런 셰르의 무례함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양.


“제국의 해병대가 아르바티앙을 침공할 당시, 그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인 것이 바로 토우칸 대공이었죠. 기사도 아니고 보기에 어리숙하긴 하지만, 그에겐 분명한 군재(軍才)가 있어요. 그러니까 믿고 균등하게 전력을 나눈 거예요. 부관도 한 번 믿어보세요.”


“.......검성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뭐 그건 그렇고, 일단 성은 점령하는 게 낫겠죠? 우리가 이곳에 왔다는 걸 북부군에게 빨리 알릴 필요도 있고.”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벤. 이번엔 유진이 그에게 다가서며 묻는다.


“알리다니요? 경로를 들켜버리면 기습의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아군의 규모가 알려지면 손쉽게 토벌당할 텐데요.”


“기습? 우리의 목적은 기습이 아닙니다. ‘무려 8천이나’ 되잖아요?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비죽- 뒤틀린 미소를 지어 보이는 벤. 그의 먹색 눈동자는 어느새 하늘이 아닌 북쪽의 구름을 향하고 있었다.




“우린 지금 남부군 최초로 북브린타이나를 침공한 겁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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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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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0) +4 15.12.17 923 16 22쪽
192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9) +4 15.12.12 873 20 16쪽
191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8) +6 15.12.07 884 24 17쪽
190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7) +4 15.12.02 868 24 18쪽
189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6) +6 15.11.26 992 20 16쪽
188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5) +6 15.11.21 866 23 18쪽
187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4) +10 15.11.16 913 25 17쪽
186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3) +10 15.11.11 856 22 20쪽
18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2) +6 15.11.07 867 20 19쪽
18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 +8 15.11.01 1,081 27 18쪽
183 (막간) 나의 태양에게 +8 15.10.27 886 29 11쪽
182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8) +12 15.10.22 923 28 23쪽
181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7) +8 15.10.17 1,044 27 19쪽
180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6) +8 15.10.12 951 28 22쪽
179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5) +12 15.10.07 857 25 21쪽
178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4) +6 15.10.02 923 27 24쪽
177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3) +8 15.09.27 853 23 21쪽
176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2) +6 15.09.22 842 23 20쪽
175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1) +4 15.09.17 999 25 20쪽
174 (막간) 결국 안식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8 15.09.12 919 26 21쪽
173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0) +6 15.09.07 816 24 24쪽
172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9) +6 15.09.02 918 24 19쪽
171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8) +8 15.08.28 1,003 24 17쪽
170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7) +8 15.08.24 1,148 27 22쪽
169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6) +16 15.08.18 1,022 33 20쪽
168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5) +8 15.08.13 876 24 21쪽
167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4) +10 15.08.07 991 27 26쪽
166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3) +6 15.08.02 984 23 17쪽
165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2) +6 15.07.28 966 30 28쪽
164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 +12 15.07.23 937 26 16쪽
163 (막간) 겨울에게 작별하는 방법 +10 15.07.17 1,155 28 19쪽
16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4 15.07.12 1,068 27 18쪽
161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0) +10 15.07.07 1,018 26 22쪽
160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7 15.07.02 997 22 20쪽
159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2 30 21쪽
158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2 28 24쪽
157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55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16 27 16쪽
155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3 35 24쪽
154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2 35 20쪽
»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06 35 23쪽
15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2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06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993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792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4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48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80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60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1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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