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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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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5.10.12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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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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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글자
22쪽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6)

DUMMY

사방이 군청색으로 물든 깊은 새벽의 하늘. 서너 시간 뒤 그 하늘에 떠오를 빛을 눈동자에 담고 있는 여인의 땀방울이 얇은 선을 따라 턱 끝에 방울로 모인다. 하지만 여인은 그 땀방울을 훔쳐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에페검의 회색빛 끝자락만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검을 휘두르진 않는다.

자세를 고쳐 잡지도 않는다.

보이지 않는 상상 속의 적을 형상화하지도 않는다.


그저,


조용히 온몸과 검을 따라 흐르는 자신의 영력을 다스린다.

검격을 위한 방출. 그리고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전개.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영력의 흐름은 심장의 박동에 따라, 여인의 의식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리고 조용히 흐른다.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결혼식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굳이 근위대 숙소로 돌아온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강요하지도, 가르쳐주지도 않은, 자신의 핏줄 속에서 스스로 터득한 그녀만의 수련방법. 아무리 고된 하루였다 해도 매일 밤 잊지 않고 이어왔던 이 수련을 본궁에서는 눈치가 보여 좀처럼 할 수 없었던 그녀였다. 오로메를 비롯한 ‘신부담당’ 귀족들과 신부의 관리를 명받은 시녀들의 잔소리가 전장에서도 주눅 든 적이 없었던 그녀를 매섭게 몰아쳤던 탓이다.

그들의 요구는 오직 하나.


“제발 결혼식까지만이라도 ‘신부’로서 있어 주세요!”


결혼이라는 인생의 전환점을 겪어본 목소리들도, 그리고 아직 겪어보지 못한 목소리들도 공통적으로 이렇게 호소한다. 물론 그녀도 이 결혼식과, 그 결혼식에서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대중 앞에 서는지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이해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게, 그리고 행복한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섰을 때 그가 지을 표정이 어떨지 내심 기대되기도 한다.


하지만.



“.......”



집중이 흐려진 탓인지 그녀는 끊임없이 갱신해오던 ‘유지시간’의 최대치에 이르지 못하고 영력을 거두어들인다. 동시에 탄식에 가까운 숨소리가 그녀의 연분홍빛 입술 사이에서 새어 나왔고, 그녀는 그제야 막 바닥으로 떨어지려 하던 턱의 땀방울을 훔칠 수 있었다.

미닫이 형식의 거대한 창문을 열어 상쾌하고 시원한 새벽의 바람을 들이마시는 여인. 그녀는 땀으로 흠뻑 젖은 민소매 셔츠를 벗을 생각도 않고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진다.

익숙한 푹신함과, 익숙한 천장.

그와 사랑을 속삭이며 온기를 나누었던 장소.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근위대 숙소 623호는 지나에게 있어 너무도 특별한 공간이었다.


바로 그녀가 ‘기사로서’,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한걸음 다가섰음을 알려주었던 그 발판이었으니까.


이곳을 떠난다는 사실은 단순히 자신의 신분이 바뀌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그와의 결혼에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세상 누구보다도 소중한 할아버지의 꺼져가는 불꽃은 그녀에게 조급함을 심어주었다.

가장 위대했던 할아버지. 그런 그를 평생에 걸쳐 옭아맸던 죄책감의 굴레. 그를 그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망설임 없이 검을 잡았고,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길’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이기심 때문에 끝나버리는 것이 아닌지 그녀는 불안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를 사랑하는 만큼 그녀를 사랑하는 그는, 절대 그녀의 불안을 방치하지 않았다. 그는 길을 찾아내었고, 그것이 비록 그녀가 생각했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의 길은 아니었지만 구원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지나는 그런 로빈이 고마웠다.

어찌 보면 자신의 고집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작정 달려들지 않았고,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자신을 존중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지나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아직도 복부로 만져지는 가장 거대한 상처의 흔적. 그는 고통을 함께 받아들여 주었다. 모든 이들의 반대와 눈총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자신과의 시간을 버리지 않았다. 자신과의 미래를 버리지 않았다.


이제는 떠나야 할 방을 천천히 둘러보던 지나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검 때문이 아니었다.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의 이름이 걸려있지 않을 방문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의 얼굴이 너무도 보고 싶을 뿐이었다.


“-!”


신속한 움직임으로 침대에서 일어나는 지나. 그리고 그새 사라진 눈물을 대신하여 번뜩이는 경계의 빛이 그녀의 태양과도 같은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온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방의 입구였다.


노골적으로 기척을 숨긴 채 다가오는 그림자가 느껴진다.

치밀하게 감추고 있는 영력, 자신이 아니라면 느낄 수도 없을 정도로 능숙한 잠입이다. 지나는 방금 전까지 침대 위에 처져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재빠르게 자세를 고쳐 잡고서 문을 향해 다가선다.


하지만 어째선지,

그녀의 입가엔 미묘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밤하늘도 잠들어있는 이런 시간에 대담하게도 근위대 숙소로 숨어들어오는 존재의 정체를 그녀는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크도 없이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동시에 지나는 망설임 없이 몸을 날린다.



“우왓-!”



오히려 당황한 건 침입자 쪽이었다. 갑자기 샛노란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득 채우더니 가슴에 거대한 충격이 밀려왔으니까. 겨우 뒤로 나자빠지는 것을 견뎌낸 침입자는, 이내 가슴의 충격이 지나가 얼굴을 묻어왔기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오, 놀래라. 역시 여기 있었구나.”

로빈은 얇게 웃으며 축축한 지나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러나 지나는 어떤 대답도 없이, 그대로 로빈의 가슴 속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그를 안고 서있었다.

“응?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잠시만.......”


‘이렇게 있게 해줘’라고 말을 맺을 필요가 없었다. 이미 로빈이 미소의 색을 더욱 진하게 띄우며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아주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 포근함에 지나는 마침내 요동치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가 이 시간에 이곳까지 찾아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필요할 때 어김없이 나타나 주는 그가 지나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지나.......”

부드러운 로빈의 목소리. 그 뒤로 어떤 달콤함을 품고 있을지 기대하며, 지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의 검붉은 눈동자를 마주한다.

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눈동자.

마주하는 입술.

천천히 이끌리는 그 사이로,

마침내 로빈의 목소리가 흐른다.

“너 땀 냄새 개쩐ㄷ.....커헉!”








“야, 그렇다고 정강이를 걷어차냐? 부러지면 결혼식 네가 책임질 거야?”


“거길 안 깐 걸 다행으로 여기렴.”


수증기가 가득한 욕실에 목소리가 울린다. 본래 개인용도로 만든 욕탕이었기에 두 남녀는 무릎을 맞대고 마주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굳이 나까지 목욕을.......”


“왜,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닌데.”


히죽이며 촉촉한 지나의 무릎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는 로빈. 결국 장난스런 그녀의 발길질에 턱을 얻어맞고 만다.


“그나저나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네 방에 몰래 기어들어갔는데 없길래. 거기 없으면 네가 있을 곳이야 뻔하지, 뭐.”


“나는 왜? 새벽에 손님들 오신다고 하지 않았어?”


“응.......”


둘 사이를 진한 수증기가 가로막고 있긴 했지만, 지나는 순간 로빈이 옆으로 시선을 흘리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


처음에 자신이 받았던 질문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지나. 하지만 그 질문에 담긴 무게만큼은 확연하게 차이를 보인다. 물론 그의 등장이 반갑긴 하지만, 이런 시간에,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은 분명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일 테니까.


“.......뭐 별건 아니고. 결혼에 대해서 말인데.”


“결혼이 뭐? 이제 와서 다른 여자가 생겼다느니 그런 얘기면 불알을 뽑아버릴 거야.”


“야,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좀 하지 마라. 소름 끼친다.”


“농담인 거 같지?”


새빨간 혀끝을 살짝 깨물어 웃어 보이는 지나. 그녀의 오른손이 수면 아래로 자취를 감추자, 로빈은 식겁하며 다리를 오므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결혼식에 대해서 너한테 부탁한 거 기억하지?”


닫힌 무릎에 저지당한 오른손이 아쉽다는 듯 손가락 끝을 할짝대던 지나는, 로빈의 말에 잠시 시선을 수증기 속으로 흘리고 나서 고개를 끄덕인다.


“아아, 그거? 근데 그거 아직 허가 나지 않았잖아? 아마 오로메 경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걸? 그렇지 않아도 요새 나한테 드레스 입혀보는 재미에 빠지신 것 같던데.”


“응, 그래서 너만 괜찮다면 우리들끼리 비밀로 진행하려고.”


“으와, 그래도 되는 거야?”


“그러니까 말했잖아. 너 만 괜 찮 다 면.”


비죽 웃어 보이는 로빈. 그리고 그 미소는 빠르게 지나의 입가로 전염된다.

그가 요구하는 것은 간단하다. 하지만 이것은 꽤나 많은 사람의 기대를 배신하는 일이 된다.


평생에 걸쳐 단 하루, 가장 여자가 아름다워야 하는 날.

오로메도, 귀족들도, 시녀들도 이렇게 말했고, 이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이 남자는 그런 모두를 배신하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의 제안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이 결혼에 두고 있는 의미를 그 누구보다도 이해하고 있는 그의 제안이었으니까. 물론, 그녀 자신이 ‘아름다운 신부’ 따위에 흥미가 없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지만.


“그래서, 그거 말하려고 이 새벽에 몰래 숨어들어온 거야?”


본래 둘은 결혼식 전까지 살을 맞대기는커녕 얼굴을 마주해서도 안 되는 처지다. 만약 이 밀회를 들킨다면 마누앙과 오로메를 비롯하여 전통을 중시하는 모든 이들의 질책을 피할 수 없을 터. 그 모든 귀찮음에 대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곳을 찾아온 부담치고는 다소 가벼운 주제라고 지나는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순간 흐려지는 로빈의 표정이, 지나의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


로빈은 말없이 몸을 밀착하여 지나의 무릎에 손을 올려놓는다. 이어서 그 손은 그녀의 하얀 허벅지를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고, 수면 아래 잠긴 복부에 이르렀다.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던 지나는, 마침내 그의 손이 어디에 닿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지울 수 없는,

눈물의 상처.


바로 그곳이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도 전에 말했었지.”


로빈의 말이 아니었어도 이미 지나의 표정은 그의 손길이 상처에 닿는 순간부터 잔뜩 굳어있었다.


“말했잖아, 나는-”


“알아. 기억하고 있어.”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삼키는 로빈.

“우리들의 부모, 그리고 리반나와 드렌턴 아저씨까지 끌어들였던 그 모든 비극. 조금이라도 그들과 비슷한 길을 걷기 싫다고 했지.”


“그래, 잘 기억하고 있네. 그리고 알겠지만, 아직도 그 생각만큼은 바뀌지 않았어.”


“.......응.”


“알면서 갑자기 이 이야기를 또 꺼내는 이유가 뭔데?”


그녀에게만큼은 그 어떠한 일도 숨기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떠한 비밀도 나누리라 다짐했기에 로빈은 순간적으로 목 아래까지 목소리가 차올랐지만, 간신히 삼킬 수 있었다.

욘의 대통령이 끌고 온 하나의 거대한 진실을 아직 완전하게 신뢰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이 말을 그대로 지나에게 전해줄 수는 없다고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었지만,


만약,


만약 그륜의 말이 진실이라면,


그녀의 상처, 그리고 이 결혼은-



“단순히 교회의 견제 때문이 아니야. 너만큼이나 나 또한 나의 아버지가 불러온 파란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 그러기 위해선 왕실의 기틀을 다져놓을 필요가 있어. 물론 그 가장 확실한 방법이 뭔지는 너도 알고 있겠지.”


“.......”


정당한 왕.

정당한 왕비.

그리고 정당한 후계자.


간단해 보이면서도 이루기 어려운 세 요소를, 오랜 기간 이 공화국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때문에 교회와 의회 모두가 표면적으로는 이 결혼을 축복하면서도 의문과 불안을 입속에 품고 있을 터.


“그들은 어차피 뭘 해도 납득하지 않을 거야. 어떻게든 널 깎아먹고 자신들의 위상을 드높이려고 하겠지.”


가시 돋친 지나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로빈은 그 방향이 엇나가는 것을 바로잡아야 했다.


“그들의 입장은 상관없어. 내 위신이 깎이는 것도 상관없어. 하지만.......”

지나의 손을 조심스럽게 끌어당기는 로빈.

“네가 괴로운 것만큼은 참을 수 없어. 그것만이 내가 너에게 요구하고 싶은 유일한 점이야.”


“.......”


“지나, 마지막으로 물을게. 그리고 맹세할게. 이 대답 이후로는, 다시는 너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겠다고. 하지만 그만큼 너도 가장 확실한 답을 들려줘야 해.”


수증기를 밀어내는 짧고 강한 한숨.

무릎 위로 교차하는 시선 속에서도,

로빈의 검붉은 눈동자엔 흔들림이 없었다.




“나의 아이를 낳아주지 않을래?”




뜨거운 욕조는 좀처럼 식을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뿌연 수증기가 지나의 얼굴을 흐릿하게 뒤덮었기에 로빈은 가만히 기다릴 뿐, 어떠한 반응도 보일 수가 없었다.

거칠어지는 숨소리.

무거운 침묵.



그 끝에서,


지나는 몸을 일으킨다.


물방울 외엔 그 어떤 것도 걸치지 않은 그녀의 가녀린 몸이 ‘상처’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지만, 로빈은 그 어떠한 아름다운 굴곡에도 시선을 두지 않고 그녀의 태양처럼 빛나는 눈동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걷어 차버린다 해도, 그대로 욕실 밖으로 나가버린다 해도,

로빈은 그녀를 이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녀가 어떠한 대답을 내놓아도 수용하기로 작정하고 찾아온 이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지나는,

그의 얼굴을 걷어차지도,

욕실 밖으로 도망치지도 않았다.


한걸음 크게 수증기를 가로질러,

그의 품속으로 몸을 내려놓은 것이다.


“.......지나.”


그 어떤 목소리도 없었다. 그리고 등을 진 채 자신의 무릎 사이로 파고든 그녀였기에 표정을 바라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욕조의 수온보다도 따스한 그녀의 체온과, 강하게 마주잡은 자신과 그녀의 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로빈은 알 수 있었다.


“.......고마워.”



그런 그녀에게

로빈은 새하얀 목덜미에 입을 맞추어 감사를 표한다.

그것은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키스보다도 진한 뜻을 담고 있었다.




그렇게,


‘로빈’과 ‘지나’로서의 마지막 밤이 끝나간다.




==================




구름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화창한 봄의 하늘. 그러나 흩날리는 꽃잎은 그 따스한 바람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축복하기 위해 온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거리마다 상기된 표정의 시민들이 저마다 무료로 제공되는 술병을 들고 왁자지껄 거리를 점령하는 바람에 지상전차가 마비될 지경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들 모두가 같은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그 종착지는 바로 아스트로바톰 왕립마법대학, 그중에서도 캉페온 광장이었다.


이미 그곳은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인파가 북적이는 중이었다. 귀족들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에게까지도 제한 없이 개방되었기에 온갖 신분과 인종, 종족이 뒤섞여 있었다. 그곳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모두에게 자리가 주어졌고, 모두에게 술과 음식이 주어졌으며, 모두에게 웃고 떠들 권리가, 아니, 의무가 주어졌다.


“야야! 저기 또 취한 놈 식장으로 넘어오려고 하잖아! 오즈카 임마! 안 막고 뭐하냐?!”


그 와중에 웃음기 없이 땀을 뻘뻘 흘리는 이들은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근위대들뿐. 드렌턴의 호통에 오즈카는 어떤 귀족여인이 내미는 술잔을 물리치며 취객을 붙잡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개방이라는 로빈의 고집에 결국 항복한 드렌턴이었지만, 식장만큼은 양보할 수가 없다며 필사적으로 외부의 유입을 막아서는 중이었다. 물론 그런 근위대들을 밀치며 무작정 식장으로 난입하려는 이들은 없었다. 그들을 힘들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술과 음식을 권해오는 시민들이었다. 향긋한 술과 먹을거리들. 심지어 집에서 직접 만들어온 음식을 권하는 시민들도 있었기에 근위대로선 난처할 수밖에.


“떠들썩하군요.”


몇몇 시민단체 대표와 함께 식장 안에 자리를 잡는 영광을 누리게 된 마누앙의 감상. 그의 말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맞은편에 몸을 내려놓는 오로메를 향해 있었다.


“예에, 즐겁긴 하지만 너무 정신없기도 하네요.”


“신부는 어떻습니까?”


“드레스 두 벌까지는 좁혔는데, 마지막까지 고민해보겠다고 하셔서 그냥 나왔습니다. 개인적으론 하얀색이 좋은 것 같은데. 말을 들으셔야죠, 어휴.”


“하핫.”


마누앙답지 않은 커다란 웃음은, 그 또한 이런 분위기엔 어쩔 수 없이 들뜰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웃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에 배치된 모든 원형탁자들엔 이미 왕당파와 귀족파를 가리지 않고 모든 귀족과 시민대표들이 뒤섞여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갈라진 자리로 있지 말아 달라는 로빈의 부탁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였다.




“이 새낀 시작하기도 전에 뻗었냐?”


그리고 마누앙과 오로메의 탁자에서 멀지 않은 곳, 신랑 측 하객이란 특혜로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벤은 벌써부터 술에 취해 뻗어버린 덴쿠레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행정보급관 아버지를 둔 덕분에 함께 자리를 할 수 있었던 유라가 그런 덴쿠를 깨우기 위해 애를 써보지만, 얼굴도 모르는 시민들과 거하게 달린 탓에 이미 그의 이성은 저 먼 곳으로 떠나버린 뒤였다.


“그러고 보니, 같이 다니던 마법사 아가씨는 안 보이네?”


벤의 바로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여인은 다름 아닌 시즈키치 가문의 가주이자, 로빈의 형수로서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된 카니아였다. 마구잡이로 뒤섞은 하객 좌석 배치였기에 이처럼 흥미로운 조합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도요? 걔는 일이 좀 있어서요. 토우칸이야말로 어디 버려놓고 오셨어요?”


‘버렸다’라는 표현이 재미있었는지 와인향의 웃음을 터트리는 카니아.


“그 인간은 저 뒤에서 시민들이랑 마시느라 정신없어. 원정 뒤로 은근히 인기가 생긴 모양이야.”


“아아, 인기하면 지지 않는 분이 저기에도 계시는데.”


벤의 시선이 향한 곳은 식장 밖, 광장입구 쪽에 유난히 떠들썩한 천막이었다. 그곳은 입장하는 시민들에게 무료로 술을 나눠주는 장소였는데, 어느 왕녀 하나가 거나하게 술에 취해 탁자 위로 올라서 제복을 벗어 던지려는 것을 셰르와 유진이 필사적으로 저지하고 있었다. 폭소와 함께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는 시민들을 위해 왕녀는 직접 술을 나눠주기도 하고, 그들이 내미는 잔을 거리낌 없이 받아 마시며 웃고 떠드는 중이었다. 벤은 그 광경을 보며 머리를 감싸 쥐었고, 카니아는 유쾌하게 웃으며 탁자를 내리친다.


“그래도 저건 낫지. 누구는 애도 내팽개쳐놓고 처마시느라 정신이 없는데.”


불만 가득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늑대의 딸’ 올리. 크라트는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베르달의 재정비를 위해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의 본래 의도는 ‘두 딸’과 부인을 보내어 최대한의 존중을 담아 축하를 전해주려는 것이었지만, 정작 그 부인이라는 작자는 기사들과의 술싸움을 벌이며 주변 객석을 초토화시키는 중이었다. 처음엔 그녀의 출신에 불만을 품은 기사들의 견제로 시작한 술내기였으나, 엘라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열 명의 기사들을 먼저 쓰러트리며 카나반 기사들의 알콜분해능력을 비하하자 발끈한 기사들이 너도나도 달려들기 시작하는 바람에 판이 커져 버린 참이었다.


“언니! 로즈 배고파!”


덕분에 로즈의 모든 칭얼거림은 그녀를 품에 안고 있는 올리의 몫이 되어버렸다.


“.......너 방금 닭 한 마리 다 해치웠잖아.”


“배고파아! 배고파아!!!”


“어어 아아아아 알았어! 알았다고!! 야야, 부러진다! 부러져!!”


살짝 짜증을 내는 것만으로 의수가 박살 날 위기에 이르자 올리는 결국 로즈를 안고 다시금 음식을 나눠주는 천막을 향해 뛰어가야 했다.





“개판이구만.”


“뭐? 고기라고?”


“넌 그냥 자라.”


벤은 침을 주욱 늘어트리며 고개를 드는 덴쿠레의 머리를 그대로 다시 쑤셔 박는다.





“아, 아, 모든 시민 여러분과 하객분들께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곧 신랑신부의 입장이 있을 예정이니, 모두 정숙하고 이들을 축복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모두 정숙하고 신랑신부를 맞이해주시기 바랍니다.”


광장 곳곳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한 목소리에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던 떠들썩한 분위기가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정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귀족들은 물론이고, 시민들도 같은 표정으로 식장을 향해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근질거리는 입술과 손발은 가장 크게 터트릴 환호를 참고 있다는 증거.

여인들은 저마다 신부의 아름다움을 기대하며 상기된 미소를 공유하고 있었고, 남자들은 우렁찬 함성을 복부에 모아둔다.




“.......잠깐, 원래 신랑신부가 같이 입장하는 거예요?”

모두가 기대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가운데, 벤만큼은 의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카니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을 뿐, 만족스러운 답을 내어주지 않았다. 결국 벤은 건너편 탁자에 위치한 오로메의 얼굴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그녀의 얼굴에도 잔뜩 의문이 꽃피어 있었다.

“아, 이 새끼, 또 뭔 짓을-”








“신랑신부 입장.”





입장에 맞춰 예정되어 있던 악단의 연주도 없었다.

그들을 축복하기 위해 흩날릴 예정이었던 꽃잎들도 없었다.





“.......갈까.”


“응.”





손을 꼭 맞잡은 두 남녀가,

당당한 걸음으로 하얀 꽃들로 치장된 길을 따라 식장으로 들어섰을 뿐이었다.



신부의 드레스를 향한 여인들의 감탄도,

남정네들의 환호성도 없었다.



무거운 침묵만이 식장과 광장에 내려앉았고.

그 침묵은 경악하는 대사제의 앞으로 두 남녀가 다가올 때까지도 계속된다.




“저 미친놈.”



모두가 환호를 준비할 때 의구심을 품었던 벤.




이번엔 오직 벤만이 웃음을 터트리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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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0) +4 15.12.17 923 16 22쪽
192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9) +4 15.12.12 873 20 16쪽
191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8) +6 15.12.07 884 24 17쪽
190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7) +4 15.12.02 868 24 18쪽
189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6) +6 15.11.26 992 20 16쪽
188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5) +6 15.11.21 866 23 18쪽
187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4) +10 15.11.16 913 25 17쪽
186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3) +10 15.11.11 856 22 20쪽
18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2) +6 15.11.07 867 20 19쪽
18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 +8 15.11.01 1,081 27 18쪽
183 (막간) 나의 태양에게 +8 15.10.27 886 29 11쪽
182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8) +12 15.10.22 923 28 23쪽
181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7) +8 15.10.17 1,044 27 19쪽
»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6) +8 15.10.12 951 28 22쪽
179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5) +12 15.10.07 857 25 21쪽
178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4) +6 15.10.02 923 27 24쪽
177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3) +8 15.09.27 853 23 21쪽
176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2) +6 15.09.22 842 23 20쪽
175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1) +4 15.09.17 999 25 20쪽
174 (막간) 결국 안식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8 15.09.12 919 26 21쪽
173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0) +6 15.09.07 816 24 24쪽
172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9) +6 15.09.02 918 24 19쪽
171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8) +8 15.08.28 1,003 24 17쪽
170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7) +8 15.08.24 1,148 27 22쪽
169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6) +16 15.08.18 1,022 33 20쪽
168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5) +8 15.08.13 876 24 21쪽
167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4) +10 15.08.07 991 27 26쪽
166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3) +6 15.08.02 984 23 17쪽
165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2) +6 15.07.28 966 30 28쪽
164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 +12 15.07.23 937 26 16쪽
163 (막간) 겨울에게 작별하는 방법 +10 15.07.17 1,155 28 19쪽
16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4 15.07.12 1,068 27 18쪽
161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0) +10 15.07.07 1,018 26 22쪽
160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7 15.07.02 997 22 20쪽
159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2 30 21쪽
158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2 28 24쪽
157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55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16 27 16쪽
155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3 35 24쪽
154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2 35 20쪽
153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05 35 23쪽
15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2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06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993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792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4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48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80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60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1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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