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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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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5.05.06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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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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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글자
21쪽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DUMMY

로쿠베는 자신과 어떠한 동의도 없이 먼저 앞으로 나서는 엘라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본다.


“잠깐잠깐, 아는 사람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그 사람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똑같이 생겼다면 보통 그 사람이 맞겠지. 어떻게 아니라고 확신하는데?”


“걔가 여기 있을 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내가 아는 그놈은 마법사이지, 기사가 아니거든.”

그러나 엘라의 대답은 단호했다. 마지막 말을 혼잣말처럼 흘리기는 했지만, 기계식 검집으로 손을 가져가는 그녀의 얼굴은 마냥 즐거워 보였다.

“그놈도 유쾌한 인간은 아니지만 저 정도로 기분 나쁜 수준은 아니란 말이지.”


“오오, 이건 또 대단한 물건이네. 이런 미인이 있는 줄 알았다면 오스타이나 근처에 조금 더 머물걸 그랬나.”


렌은 자신을 앞에 두고 오고 가는 대화엔 신경을 주지 않고 있었다. 그의 눈을 자극하는 존재는 오직 당당하게 앞으로 나선 여인의 자태뿐. 흑심이 가득한 그의 아첨이 싫지는 않은지, 엘라는 한껏 미소를 짙게 머금으며 입술을 움직인다.


“어머, 여자를 보는 눈은 제대로 되어있네? 근데 아까워서 어쩌나, 이미 애 딸린 유부녀인데.”


“아, 그건 유감이네에. 이상하게 애 딸린 년들한텐 서질 않는단 말이지.”


미친 꽃잎의 웃음소리가 초원에 내리깔린다. 태양보다 거칠게 타오르는 붉은빛 머리칼을 초원을 가로지르는 바람에 그대로 맡긴 채, 엘라는 검집의 단추를 눌러 세 자루 중 가장 기다란 회색 장검을 뽑아낸다. 보통 창을 상대로 파고들기 위해선 짧은 검이 유리하나, 그녀가 머릿속에 그려 넣은 흐름에 ‘파고들 틈’ 따위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 대응하여 입맛을 다시며 창을 다잡는 렌의 발걸음을, 부관 빈스의 목소리가 붙든다.


“렌 님, 섣불리 창을 맞대지 마십시오. 저 여자는 ‘광기의 꽃잎’ 엘라론 드리브달입니다. 그녀가 왜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일단 물러나는 것이-”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는 렌의 먹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빈스는 마침내 어째서 렌이 당당히 나서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게 누군데?”


“.......”

분명 검성께선 그를 임관시키며 기본적인 기사판도에 대해 교육시켰을 터이다. 그럼에도 ‘드리브달’이라는 이름에 반응이 없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교육에 불성실했는지 예상되는 증거.

그러나 문제는 렌이 불성실했다는 점이 아니다. 여기서 눈앞의 저 여자가 가진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어떤 기사인지 알려준다고 해서 그가 흥미를 거둘 일은 절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오히려 그는 더욱 눈을 빛내며 달려들겠지.

검성으로부터 ‘녀석이 무모한 짓을 하지 않도록 부탁한다’는 명령을 받을 때만 해도 존재 자체가 섣부른 그가 여기서 더 무모할 수 있겠나 싶었지만, 검성조차도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렌 님의 창이 가진 날카로움을 아는 자로서 부탁드리겠습니다. 저 여인은 장담할 수가 없는 상대입니다. 당신의 미래가 위태로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보인다면 저는 당신을 막아야 한다고 검성께 명받았습니다. 부디 제 목으로 대신 기분을 푸실 수는 없으시겠는지요.”


말 그대로 목숨을 건 간언이었다. 최대한 렌의 자존심을 긁지 않는 선에서 말을 골라냈지만, 눈치가 빠른 그가 자신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했을 리 없다. 당장 무자비한 창끝이 목을 꿰뚫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

그러나 렌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느라 빈스의 목숨을 건 목소리를 흘려듣고 있었다.


“드리브달....드리브달.... 어디서 들었더라.......아, 아아! 맞다! 영감탱이가 그랬지! 아실레마제국의 좌검성 델핀 드리브달! 그럼 저 여자가 그 ‘붉은 장미’의 꽃잎?”


“.......예. 카나반으로 귀화한 그녀의 딸입니다. 하지만 렌 님-”


“검성의 딸과, 검성의 제자. 이런 외딴곳에서 벌어지기엔 아까운 사건이지 않아?”

씨익- 마른 웃음을 지어보이는 렌. 빈스는 그의 말과 웃음에서 마침내 안도를 읽을 수 있었으나, 다시 움직이는 렌의 입술은 그런 그의 기대를 무참히 짓이기고 만다.

“그러니까 좆 잡고 잘 보고 있으라고.”


모두의 예상과 기대를 배신하며 두 기사는 천천히 거리를 좁힌다. 빈스의 당혹스러운 입장은 물론이고, 반대쪽의 로쿠베도 엘라의 개인적인 욕망 때문에 추격대의 발이 멈춘 상황이 불편했던 것이다.


“너, 이름은?”


영력을 싣지 않아도 목소리가 닿을 거리에 진입하자 먼저 입을 연 쪽은 엘라였다. 흐리게 빛나는 그녀의 장검에 질세라, 렌은 크게 창을 휘두르며 웃는다.


“렌.”


“렌? 성은?”


“그냥 렌이다. 당신은 엘라론 드리브달 맞지?”


“응, 맞아. 창이나 그 자세를 보아하니, 너는 블라르 영감의 제자인가보네?”


“뭐어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리고 둘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말에 뛰어내린다. 두 마리 모두 잘 훈련받은 군마였지만, 두 인간 사이에서 흐르는 거칠고 불길한 영력의 압박을 견뎌내지 못하고 그대로 줄행랑을 치고 만다.


“모든 전운이 왕국의 중앙으로 기우는 와중인데, 이런 변방에 있기엔 아까운 이름이네.”


묶어두었던 영력을 흘려보내며 비웃는 엘라. 렌도 그에 지지 않는다.


“어차피 이 창에 얽매여있는 건 내 이름도 아닌데 뭐.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


“하아, 그놈의 드리브달 드리브달. 슬슬 남편 성을 따라가던가 해야지 원.”


“당신 자식이 있다고 그랬지? 혹시 딸이야? 몇 살? 15살만 넘었으면 내가 귀여워해 줄-”

잔뜩 긴장의 날을 세우고 있었음에도,

그 순간 초원에 있는 모든 기사와 병사들은 흠칫하며 전신의 털을 빠듯하게 세울 수밖에 없었다.

철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육중한 파열음과 함께 거센 영력의 파동이 돌풍처럼 그들을 덮친 것이다.

그 발원지에선 두 미소 사이에 장검과 창의 몸이 밀착하고 있었다. 이스누시아산 연철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둘 중 하나는 그대로 박살이 나버렸겠지만, 그 어떤 금속보다도 영력의 흐름이 자유로운 재질이었기에 둘 모두가 엄청난 영압 속에서도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무지막지하구만, 아줌마.”


떨리는 미소를 유지하며, 렌은 창 너머로 다가온 엘라의 얼굴을 향해 나름대로의 경의를 표한다.


“흐흥, 너도 멋으로 스승의 이름을 달고 다니는 건 아닌가 보네.”


그 경의에 대한 대답으로 대신 발차기를 내지르는 엘라. 영력사출식 경갑의 탄력을 이용한 위협적인 공격이었지만, 렌은 재빨리 뒤로 도약하며 그 살의에서 벗어난다. 날렵한 동작으로 인해 순식간에 벌어지는 간격. 그 간격이야말로 엘라가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었다.


“으아앗-!”


멀리서 지켜보는 이들의 눈에는 엘라가 단순히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두른 것으로밖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회색 날의 장검과, 그 장검을 통해 발산되는 믿기 힘들 정도로 응축된 영력의 파동은 그 어떤 무기보다도 날카로운 물리력을 지니고 있었다. 일찍이 그녀가 카나반을 침공할 당시, 수많은 병사와 기사들의 피로 베르달의 숲을 적신 바로 그 힘, 그녀의 어머니와 검을 맞대며 ‘붉은 장미’의 전신에 생체기를 새겼던 그 힘이었다.


“.......흐음.”


그러나 엘라의 얼굴엔 떠오른 표정은 만족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검 끝에 스미는 미세한 위화감은 그녀가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불신을 가져다주었고, 그 예감대로 눈앞의 상대는 피를 내뿜으며 쓰러지는 대신 환희에 찬 얼굴로 엉덩이를 털어내며 일어서고 있었다.


“와, 죽을 뻔했네! 영감탱이한테서 받아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생생한 살의가 담긴 건 처음이야!”


피보다 짙은 영력의 농도를 가진 자들에게만 허락된 ‘검성기(劍聖技)’.

그중에서도 무기 자체의 흐름을 따라 실체화된 영력의 날을 폭풍처럼 내뿜는다하여 아실레마제국 초대검성 아론 드리브달으로부터 ’템페스타스‘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검기. 그것을 어떤 상처도 없이 상쇄시키며 받아낸 렌을 향해, 마침내 엘라는 여유로웠던 표정을 거두고 길게 숨을 들이마신다.

엘라의 머릿속에서 그에 대한 위협수준이 크게 증가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이해할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상대의 영력과 기량을 읽어내는 ‘감각’엔 자신의 어머니보다도 자신이 있던 그녀다. 그런 자신의 ‘감각’으로 파헤친 눈앞의 상대는, 미묘한 향기의 영력을 지니고 있긴 했어도 이 공격을 받아낼 정도의 농후한 두께를 지니고 있진 않았다. 그리고 흥분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창을 내지르는 공격들에게서도 그다지 위협적인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검 끝에 남아있는 위화감은 확실하게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급소들을 노리며 찔러 들어오는 창의 날. 느슨했던 표정이나 말투와는 달리, 렌의 자세나 중심은 훌륭하게 균형이 잡혀 있었다. 거대한 영압을 전신으로 맛보았음에도 창을 내지르는 손에 망설임은 없었으며, 엘라가 집중을 놓았다면 분명 상처를 허용했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쉴 새 없이 찌르고 들어오는 공격들을 살짝 검신으로 쳐내어 경로를 뒤트는 것만으로 막아내던 엘라가, 별안간 심장을 향해 찌르고 들어오던 렌의 창을 비어있던 손으로 재빠르게 낚아챈다. 뒤이어 크게 반원을 그리는 그녀의 장검.


“........”


그러나 이번에도 검 끝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다. 렌이 미련 없이 자신의 창을 포기하고 뒤로 도약한 덕분이었다.


“아, 그거 비싼 건데, 돌려주지 않을래?”


능청스러운 렌의 목소리. 그러나 엘라는 대답하거나 미소도 짓지 않고 가만히 손안의 창을 내려다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느낀’ 그는 분명 이 갑작스러운 일격을 피해낼 수 없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전신이 이스누시아 연철로 도금된 이 귀중한 무기에 어떤 미련도 없이 간격에서 벗어났다.


“저기, 너 혹시 계약자야?”


렌에게 창을 던져주며 엘라가 물었다. 그에 고맙다고 말하면서도, 렌의 얼굴은 무슨 소리냐는 듯 뒤틀린다.


“계약? 뭔 소리여? 영감탱이랑 계약했냐고 묻는 거야?”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건 그렇고 네 부하는 더 놀게 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인데.”


“뭐? 으앗-?!”


말을 타고 달려온 빈스에게 목덜미를 낚아채인 렌이 비명을 내지른다. 지나치게 엘라에게 집중하고 있던 렌은 어느새 서로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한 양쪽 군대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어지럽게 날아드는 마법사들의 포격과 기병대의 돌격 속으로 렌의 그림자는 빠르게 모습을 감추었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던 엘라의 곁으로 수많은 기병들이 스쳐지나간다.


“광기의 꽃잎이 상대를 놔주다니? 지나치게 놀고 있는 거 아닌가?”


적의 지휘관을 놓아준 것에 대한 질책을 담은 로쿠베의 비아냥거림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말에 대한 엘라의 반응을 시원한 미소로 기대하고 있던 그는,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짧게 숨을 삼키고 만다.

군데군데 찢어진 엘라의 강화복.

그 사이로 흐르는 붉은 선혈을 손으로 닦아내며, 엘라는 로쿠베가 기대한 것과는 다소 다른 온도의 미소를 짓는다.


“놔준 게 아니야. 잡을 수 없었을 뿐이지.”




==================




“척후로부터의 보고입니다! 적의 본대가 옥스토브라카 남부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지휘천막으로 들어서는 부관을 향해, ‘오열의 검성’ 블라르 트리스탄테는 모여 있는 지휘관들의 표정을 대신하여 묻는다.


“이곳으로 향하는 것이 남부군의 본대가 확실한가?”


“1개 군단, 적어도 2개 사단 급의 병력입니다. 남부군 전체의 규모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주력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 전략기획본부의 판단입니다.”


“알았다. 정찰장교에게 자세한 보고서를 올리라고 명해라.”


검성의 명령에 부관은 절도 있는 경례와 함께 천막을 빠져나갔고, 그 뒤 먼저 입을 연 것은 검성 바로 옆에 있던 지휘관이었다.


“이곳을 우리군의 주력이라고 생각한 것 아니겠습니까? 검성님의 생각대로 움직여주는군요. 이제 계곡으로 퇴각하여 방어전을 펼치는 사이, 나머지 모든 경로를 통해 남하를 시작하면 됩니다.”


“차례차례 거점을 점령하고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적 주력을 포위하여 섬멸. 검성께서 계획하신 그대로 아닙니까? 훌륭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지휘관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검성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2개 사단이면 분명 우리가 예측한 범위에서 주력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숫자.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정직합니다. 마치 그 예상을 예상하고 적절하게 맞춘 듯한 숫자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그러나 검성님, 2개 사단규모로 교란을 해올 정도로 남부군이 여유롭지는 않잖습니까? 전략분석반이 예상한 적의 규모는 많아야 8만. 그 절반에 가까운 숫자를 함부로 움직이진 않았을 겁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가 신뢰하는 모든 부관과 지휘관의 의견, 그리고 당장 눈에 보이는 전황까지도 그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표정이 개운해지지 않은 것은, 백 년이 넘는 세월을 전장에서 보낸 그의 지휘관으로서의 ‘감’ 때문이었다.

“일단 계획대로 하겠습니다. 느긋하게 군을 움직이세요. 오늘 상황보고는 여기까지입니다.”

저마다 예를 표하며 천막에서 빠져나가는 지휘관들. 넓은 지휘천막에 검성 혼자 남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입구가 펄럭이며 겨울의 한기가 비집고 들어왔음에도 검성은 한동안 깊은 눈동자를 전술지도에 집중한다.

“부관!”


“옛.”


그의 부름에 신속한 움직임으로 천막에 들어서는 장교.


“렌의 소재는 파악했나?”


“옛, 오스타이나 북부에서 추격대에게 뒤를 잡혀 교란군 대부분을 잃고 퇴각 중이란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일주일 내에 복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블라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전술지도를 내려다본다. 경직된 몸으로 그의 곁에 서있는 장교가 무안해질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마침내 노인은 다시 입을 연다.


“동쪽 국경수비사단에게 공문을 보내라. 예비대 중에 대대 규모로 정예군을 편성해서 렌에게 주라고.”


“.......그 말씀은, 렌 경에게 대대 지휘를 맡기시겠다는.......?”


일개부관으로서 검성의 의견에 의혹을 갖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부관은 검성의 명령에 확답을 받아야 했다. 부대 내 장교들에게 렌이라는 존재가 어떤 식으로 입에 오르내리는지 알고 있기에.

그러나 검성의 표정과 어투는 단호했다.


“그 아이야말로, 이번 전투에서 내가 가진 가장 커다란 패가 될 것이다.”




========================




“폐하께서 전적으로 받쳐주고 계시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언론의 지지를 받는 것이 중요해요. 후원금도 어느 정도 모였으니, 신문에 광고를 내는 것 외에 무언가가 더 필요한 시점입니다. 다른 주요 신문사들에도 평론을 올리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다만 의원님, 이렇게 빠르게 진행해도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비교적 한산한 시내의 카페. 아직 겨울의 기운이 완연함에도 야외에 마련된 탁자에 앉아 입김을 내뿜고 있는 아델과 보좌관이었다. 아델은 보좌관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향해 안심하라는 듯 그 어떤 보석보다 반짝이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웃었다.


“네, 정말 괜찮아요. 자금은 넉넉하니까.”


“예산을 말쓰드리는 게 아니라......., 다른 귀족파 가문도 그렇지만 특히 의원님 가문이 영 꺼림칙한 모양이던데요. 가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의원님은 자기들 이름을 내세운 이단아나 다름없잖습니까.”


“하하, 그걸 걱정해주시는 거예요? 고마워요. 근데 진짜진짜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천연의 웃음을 피우는 아델. 보좌관은 그녀와 공적인 수직관계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웃음에는 수줍게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그에겐 그녀와 일하며 겪는 다른 모든 곤욕보다도 이 금빛 웃음이 제일 파괴력있었던 것이다.

아직 앳된 티를 마저 벗지는 못했지만, 말끔한 정장과 곱게 말아 올려 묶은 금발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매력은 그녀와 스쳐 지나가는 모든 남성들의 시선을 빼앗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 그럼 더 이상 논의할 게 없으시면, 이만 사무실로 가보겠습니다.”


“아, 그냥 퇴근하셔도 되는데. 급한 건 아니니까 먼저 들어가 보세요.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옛, 의원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황급히 허리를 숙이고 골목을 빠져나가는 보좌관. 아델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그의 그림자를 배웅해준다. 그리고 남은 것은 그녀와 탁자 위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보고서들. 가슈펠라르 가문의 사저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와야 했던 그녀로선, 피곤에 지친 머리를 차갑게 식혀줌과 동시에 따스한 차를 제공받으며 보고서를 읽기에는 이런 구석진 카페보다 적절한 장소가 없었다.

퇴근한 뒤에 가로등의 불빛마저 잦아들 때까지 이곳에서 잔업의 시간을 보내고, 조촐한 여관에서 쪽잠을 잔 뒤에 다시 출근. 이것이 의원직을 받은 뒤 그녀가 갖는 일상의 전부. 단조로우면서도 머리는 복잡하고, 무엇보다도 가녀린 몸으로 받아들이기엔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그’를 향한 속죄의 여정이 시작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아, 감사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비어있는 찻잔을 채워주는 사람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아델.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곧바로 겨울하늘보다 차갑게 식어버린다. 찻잔을 채워준 사람은 그녀가 알고 있는 점원이 아니었다.


“.......오랜만이네요, ‘아버님.’”

그를 향한 호칭에 강하게 힘을 싣는 아델. 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으며, 올란은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는다.

“폐하의 배려로 가슈펠라르 가문 내에 자리를 잡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잘됐네요. 그렇게 본가에 다시 귀속되기를 원하시더니. 바람대로 되셨잖아요.”


“혀에 가시가 돋쳐있다. 감히 아비에게 그따위 태도로 말하라 누가 가르쳤더냐?”


과거의 그녀였다면 올란의 거친 목소리에 곧바로 시선을 내리깔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가문이라는 온실에 갇혀있는 꽃이 아니었다.


“당신은 아직도....... 변함이 없네요. 그 모든 일을 겪었으면서도.”


“일? 무슨 일? 딸년과 아들놈이 더럽게 붙어먹는 광경을 봐야 했던 거 말이냐?”


“감히 그 입으로 조엘을 말하지 마세요.”


“너야말로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라! 네가 형제와 근친상간을 벌였던 사실이 알려지면,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보느냐?”


일그러지는 아비의 얼굴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는 아델. 그녀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마침내 왜 갑자기 그가 찾아왔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것 때문에 오셨나요? 가주님이 시키시던가요? 절 협박하라고? 제가 그따위 저열한 압박에 굴할 것 같나요?”


“네가 의원직을 하고 있는 것도 모두 가슈펠라르라는 이름과 핏줄 덕분이다! 그 은혜를 직접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에 반하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 자체가 네가 가진 사상과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당신이 위선이라는 단어를 내뱉을 줄은 몰랐네요.”

모멸감에 가득한 눈빛으로 아비를 내려다보며, 아델은 펼쳐놓았던 보고서들을 빠르게 가방에 주워담기 시작한다. 더 이상 그와의 자리를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문에서 쫓아내든 파문을 하든 마음대로 하세요. 그것만으로 저에게서 의원직을 빼앗을 수는 없을 거예요. 설사 의회에서 물러나더라도, 전 끝까지 할 거니까 란다 경에게 그리 전해주세요. 충직한 심부름꾼이시니, 그 정도는 확실하게 전할 수 있죠?”


“.......후회할 거다. 넌 약해. 가문의 이름을 버텨낼 수 없을 거다.”


탁자 위에 지폐를 올려놓던 아델이 잠시 행동을 멈추고 올란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와 마주하고 있는 굳건한 눈동자는 분명 예전의 아델 가슈펠라르가 아니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거침없는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가는 아델.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끝까지 자신의 뒤를 쫓고 있는 아비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 시선에 담겨 있는 감정까지도.


그러나

자신의 뒤를 따라붙은 또 다른 그림자들의 존재까지는 눈치챌 수가 없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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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6) +8 15.10.12 951 28 22쪽
179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5) +12 15.10.07 857 25 21쪽
178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4) +6 15.10.02 923 27 24쪽
177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3) +8 15.09.27 853 23 21쪽
176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2) +6 15.09.22 842 23 20쪽
175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1) +4 15.09.17 999 25 20쪽
174 (막간) 결국 안식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8 15.09.12 919 26 21쪽
173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0) +6 15.09.07 816 24 24쪽
172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9) +6 15.09.02 918 24 19쪽
171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8) +8 15.08.28 1,003 24 17쪽
170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7) +8 15.08.24 1,148 27 22쪽
169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6) +16 15.08.18 1,022 33 20쪽
168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5) +8 15.08.13 876 24 21쪽
167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4) +10 15.08.07 991 27 26쪽
166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3) +6 15.08.02 984 23 17쪽
165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2) +6 15.07.28 966 30 28쪽
164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 +12 15.07.23 937 26 16쪽
163 (막간) 겨울에게 작별하는 방법 +10 15.07.17 1,155 28 19쪽
16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4 15.07.12 1,068 27 18쪽
161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0) +10 15.07.07 1,018 26 22쪽
160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7 15.07.02 997 22 20쪽
159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2 30 21쪽
158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2 28 24쪽
157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55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16 27 16쪽
155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3 35 24쪽
154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2 35 20쪽
153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06 35 23쪽
15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2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06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993 34 19쪽
»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793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4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48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80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60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1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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