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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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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5.09.27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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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3
추천
23
글자
21쪽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3)

DUMMY

“셰르, 손님이다.”


“.......손님?”


햇볕조차 들지 않는 초라한 침대 위에서 책을 읽던 셰르는 노크도 없이 들이닥친 목소리를 향해 미간을 구긴다. 하지만 굳은 표정은 문을 열고 들어선 집사도 마찬가지였다. 시즈키치 가문의 가택이라고는 하나, 셰르가 받을 수 있었던 공간이라곤 창고에 가까운 이 좁은 방이 전부였기에 집사는 저택 3층을 전부 뒤지고 나서야 간신히 셰르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야노르 시즈키치가 가주를 맡고 있던 당시, 셰르와 그의 아버지 같은 가문의 말단들은 야노르와 가문을 위해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는, 이른바 ‘가문의 그림자’로서 시즈키치라는 이름을 받들어야 했다. 불법무기거래, 반강제적인 기업의 합병, 길거리 상권에 대한 무력행사는 물론이고 더 깊게는 살인과 암살까지. 동시에 그런 자신들의 행동이 절대 야노르라는 ‘빛’에 해가 되지 않도록 그들은 암묵적인 희생과 침묵을 미덕으로 삼아왔다. 셰르의 아버지도 그렇게 조용히 사라져간 목소리 중 하나였다.

그러나 카니아 시즈키치가 가주가 된 이후로 이런 ‘가문의 그림자’들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선대로부터 아버지까지 내려왔던 모든 병폐를 없앤다는 것이 카니아의 취지였지만, 셰르를 비롯한 많은 ‘그림자’ 가원들은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 대한 첫 번째 대책으로, 카니아는 여태까지 철저하게 소외되어왔던 이들을 시즈키치 본가, 그것도 가택에 직접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없던 공간을 새로 만들어야 했던 탓에 셰르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창고나 휴게실을 개조한 방에 머물러야 했지만, 문제는 협소한 공간이 아니었다. 손에 피를 묻히고 살아온 더러운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들과 같은 지위로, 자신들과 같은 지붕 아래 살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존 시즈키치 가원들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한쪽에선 쓰러트릴 수 없는 거대한 벽.


“이것만큼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다. 내가 너희에게 지위의 평등을 보장해주었으니, 이제 너희가 스스로 그 평등을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내야 하겠지.”


카니아는 그 벽을 상대편이 먼저 나서서 쓰러트리게 만들라고 주문했다. 그랬기에 셰르는 자신에게 날아온 영장에 망설임 없이 응할 수 있었다. 비록 비슷한 나이 또래의 가원들과 비교해보면 터무니없이 늦은 출발이었지만, 자신감은 충분했다. 누구보다도 더러운 길바닥에서 내공을 쌓아온 자신이 아니던가.


“.......”


그러나 결국 그 더러운 길바닥에서 쌓은 ‘내공’이 문제였다.

전달할 내용만을 내뱉은 뒤 문을 닫고 나가는 집사의 태도와 어투에선 가원에 대한 존경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저택의 고용인에게조차도 인정받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훌륭한 성적으로 훈련소를 수료하고 이제 임관을 앞두고 있지만, 저택 그 어디에서도 자신을 향한 칭찬이나 격려의 목소리는 없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자신의 ‘창고’, 그곳에 쌓여있던 먼지와 쓰레기들도 직접 정리해야 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아무도 호의적이지 않은 ‘셰르 시즈키치’라는 존재.

그런 자신에게 손님이라니?

배치 전에 부여받은 꿀 같은 휴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책과 함께 보내기로 정한 그였기에 손님이란 단어는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책을 덮은 뒤에도 한참을 침대 위에서 고민해봤지만 딱히 마땅한 얼굴이 떠오르질 않는다. 결국, 그는 긴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켜 자신의 공간을 뒤로해야 했다.





“.......뭐야 이거.......?”


구겨 신은 신발을 질질 끌며 대합실로 내려온 셰르는 예상치 못한 풍경에 그렇지 않아도 찢어진 눈을 더욱 가늘게 떠야 했다. 드높은 천장의 대합실, 그 중앙에 위치한 손님용 소파를 중심으로 때아닌 인파가 몰려있었던 것이다. 몇몇 가원들의 그림자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셰르는 그 중심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이내 곧 흥미를 잃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어차피 이 저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자신과는 상관이 없을 테고, 찾아온 손님이 누구인지가 그의 유일한 관심사였으니까.


그런 그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직감한 것은 코를 훌쩍이며 마지막 계단을 내려선 순간이었다.


“야, 쟤 아냐?”


“대단하다, 대단해.”


평소엔 유령보다도 희미한 존재처럼 자신을 대하던 그들의 시선이 똑바로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셰르는 그에 살짝 당황하여 뒤를 돌아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있는지 확인했지만, 계단을 내려온 그림자는 그 혼자뿐이었다.


그리고 확인사살은,

인파 사이에 묻혀있던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아, 셰르!”


셰르의 등장과 그 목소리로 인해, 대합실을 틀어막고 있던 인파의 그림자가 양옆으로 갈라지기 시작한다. 그제야 셰르는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을 바라볼 수 있었다.

허리까지 뻗어 내려오는 찬란한 금발. 약간 구불구불한 머리끝은 소녀가 입은 검은색 치마와 맞물려 발랄한 느낌을 선사해준다. 치마의 길이가 짧은 것은 아니었으나 새하얗고 건강미 넘치는 다리를 보여주기엔 충분했고, 굽이 높은 구두도 그녀의 각선미를 더욱 부각시켜 주었다.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는 새빨간 눈동자. 그리고 저 자두빛 도톰한 입술에서 나온 것이 자신의 이름임에는 분명하나, 셰르는 좀처럼 반응할 수가 없었다. 프릴이 가득한 하얀 민소매 셔츠로도 숨길 수 없는 풍만함이나 얇은 목소리는 분명 익숙하다. 그럼에도 그가 곧바로 그녀의 이름을 내뱉을 수 없었던 것은, 줄곧 그의 의식 속에서 존재해왔던 ‘그녀’와는 너무도 느낌이 달랐던 탓이었다.


“.......유진?”

어색함의 끝에서 간신히 읊은 이름. 상대방의 입가로 수줍은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아하니 틀리진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틀리지 않았기에 셰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야, 여긴 어떻게-”


“유진? 유진 가슈펠라르? 진짜로 가슈펠라르 잡년이었어? 와~ 나 진짜 어이가 없네. 하하하하.”

인파 사이에서 들려오는 노골적인 여인의 비웃음. ‘잡년’이라는 단어에도 불구하고 유진은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셰르가 날카롭게 눈빛을 머금는다. 그러나 비웃음의 주인공인 여인은 그런 셰르의 시선을 가소롭다는 듯이 마주한다.

“그래, 고귀하신 가슈펠라르 가의 영애께서 이 누추한 시즈키치 가택엔 어쩐 일로 오셨나요?”


“아, 저는 셰르의 동기로서-”


“동기? 아 그 잘난 기사훈련소 말씀이세요? 아이고 못 알아봬서 죄송합니다. 근데 어쩌죠? 난 이미 몇 년 전에 수료했는데? 따지고 보면 내가 기수선배니까, 경례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극에 달하기 시작한 여인의 비웃음이 점차 주변의 가원들에게 전염되기 시작한다. 낮게 깔리는 웃음들과 시선 사이에서 유진은 어쩔 줄을 몰라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그런 그녀의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를 확인하는 순간, 셰르는 자신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뒤틀리는 것을 느낀다.



“적당히 하지?”


웃음 사이를 날카롭게 가로지르는 묵직한 목소리. 비웃음을 주도한 여인은 자신의 어깨 위로 올라온 셰르의 손가락을 바라보더니 순식간에 표정을 굳힌다.


“더러운 손 치워, 거지같은 새끼가.”


“그 거지같은 새끼의 손님이다. 신경 끄시고 평소처럼 한가롭게 차나 마시러 가는 게 어때?”


“손니임?”


적의를 숨기지 않는 수많은 가원들 사이에서도 셰르는 위축되지 않는다. 여인은 거친 손짓으로 자신의 어깨를 더럽히고 있는 그의 손을 내치려고 했지만, 셰르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건 마치 거대한 바위와도 같은 무게를 지닌 영력이었다.

정적과 함께 마주치는 싸늘한 시선.

그러나 먼저 침묵을 깨고 움직인 쪽은 셰르였다.


“나가자.”


유진의 곁을 막아서고 있는 서너 명의 가원들을 밀치며 셰르가 유진의 손목을 잡아 밖으로 이끈다. 그러나 여인의 목소리는 그들이 문을 박차고 나서는 걸 곱게 방치하지 않는다.



“사람 구실 좀 하라고 보내놨더니 가슈펠라르 년이랑 붙어먹어? 니들이 그래서 안 되는 거야!”





=============





셰르와 유진은 대화 없이, 10분이 넘도록 시가지를 거닐고 있었다. 셰르로서는 그저 흔들리는 유진의 얼굴을 지켜볼 수가 없어 무작정 가택을 빠져나왔던 것이었기에 그 걸음에 목적성이 없는 건 당연했다. 그의 걸음이 멈춘 것은, 그때까지 붙잡고 있던 유진의 손목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였다.


“아, 미안.”


“.......”


미세한 고통이 남아있는 손목을 매만지며 고개를 숙이는 유진. 셰르는 한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공원 입구에 마련된 작은 분수였다.


“잠깐 앉자.”


그의 손에 이끌려 분수로 다가선 뒤에도 유진은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는다. 셰르는 그런 그녀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려 해보지만, 좀처럼 벌린 입술 사이로 마땅한 말이 튀어나오질 않았다. 입을 벌리다가 다시 한숨을 삼키고, 어색함에 머리만 벅벅 긁기를 수차례.


“.......미안해.”


마침내 열린 목소리는 셰르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유진의 목소리에 대꾸하지 않는다. 그녀의 목소리가 젖어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마를 뒤덮고 있는 금발을 쓸어 넘겨주었고, 마침내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붉은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뭐야, 왜 울어?”


“.......미안해서.”


“네가 뭐가 미안해? 쟤들이 이상한 거지.”


“아니, 나 때문에 네가.......”


“내가 뭘? 나도 쟤들도 원래 그러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언제나 서로의 가문을 욕하며 티격태격하던 그들이었지만, 유진은 셰르가 자신을 ‘아무것도 모르는 귀족자제’ 취급을 했을 때만큼은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막연하게 귀족파의 대표가문, 왕당파의 대표가문이라는 공통적인 틀만으로 셰르의 지위를 판단해왔던 것이다. 그가 스스로를 ‘말단’이라 깎아내리며 ‘너와는 다르다’라고 했을 때도 그녀는 도통 그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 대표가문의 귀족이란 모두 자신과 비슷한 존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직접 겪은 현실은, 그녀의 막연한 생각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자신을 향하던 시즈키치 가원들의 시선들. 그리고 그보다도 더욱 가혹했던, 셰르를 향한 그들의 시선들. 저택을 빠져나오면서 들려오던 여인의 마지막 외침.

그 모든 것들은, 그녀가 생각해오던 귀족이란 개념을 완전히 비틀어버린 증오였다.


셰르의 말대로,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다.

자신의 순진함을 넘어선 멍청함 때문에 결국 셰르가 모욕을 듣고 말았다.

그 사실이 너무도 미안해서, 유진은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미안해, 바보같이 아무것도 몰랐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동안 너한테-”


“네가 멍청한 거 알았으면 됐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얇게 웃으며 유진의 머리를 잔뜩 헝클이는 셰르. 유진은 눈물조차도 잊은 채 그답지 않은 미소를 올려다본다.

“근데 도대체 얼마나 멍청해야 가슈펠라르 가주의 동생이라는 년이 멋대로 시즈키치 가택에 쳐들어오는 거냐? 네 오빠는 알고 있어?”


“.......아니.......”


“그렇게 차려입고 내 동기라고 하면 어서 오라고 환영이라도 해줄 줄 알았냐?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


그녀의 기운을 강제로라도 끄집어내기 위한 충격요법이었지만, 유진은 버럭 화를 내기는커녕 다시금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셰르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훌쩍이는 유진의 앞에 서서 잠시 허탈한 웃음과 한숨을 내보이더니, 무릎을 꿇고 마주앉아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걱정했잖아, 멍청아.”


“.......미안.......”


미안하다는 말 좀 그만하라며 장난 섞인 역정을 내려던 셰르는 순간 손끝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와 촉촉하게 젖은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말을 삼켜야 했다. 햇빛을 그대로 받아 반짝이는 소녀의 눈망울, 약간 젖어있는 눈가가 그 어느 때보다도 요염하게 빛을 발한다. 부드러운 볼을 따라 입술까지 손가락을 가져가고 나서야, 셰르는 순간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멍하게 그녀와 마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을 거둘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진짜 여기까지 왜 온 거야?”


“.......네가 연락을 안 받아서........”


“연락? 아 혹시 가택으로 했어?”


“응.”


허탈한 웃음과 함께 셰르는 몸을 일으킨다.

‘답장이 없으니 직접 찾아온다.’

참으로 그녀다운 방식이다. 좀처럼 연락이 닿질 않으니, 순진한 그녀 입장에선 자신이 무슨 사고라도 당했나 걱정이 됐을 테지. 그러나 진실은 그녀의 걱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 당연히 답장 못하지. 그 저택에서 나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 내 이름으로 오는 모든 전문이나 연락은 나한테 오기 전에 폐기처분 되거든.”

이전의 유진이었다면 셰르의 이 대답에 말이 되는 소릴 하라며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 그의 진실을 확인한 지금, 그녀는 또다시 고개를 숙이는 것밖엔 할 수 있는 반응이 없었다.

“아무튼, 뭐 때문에 날 찾았는데?”


“이거.......”


침울한 표정으로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하는 유진. 그녀가 꺼내든 것은 작은 전문이었다. 셰르는 곧바로 그것을 받아들어 눈으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고, 이 종이가 단순한 전문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핵심단어에 도달하자 가느다란 시선을 유진의 눈동자로 되돌린다.


“폐하의 결혼식?”


“응. 리즈가 너한테도 초대장을 보냈다는데 대답이 없어서.......”


“.......이 새끼들, 이제 내용이나 보낸 사람도 확인 안 하고 버려버리는 건가? 리즈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줘. 말했듯이, 지금 내가 무슨 연락을 받을 수가 없거든.”


셰르는 허탈한 표정으로 전문을 되돌려주며 유진의 곁에 앉는다. 그러나 유진은 끝까지 전문을 읽지 않은 그가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안 갈 거야?”


“응? 아니, 이미 늦었잖아? 당장 다음 주에 결혼식인데.”


“.......”


유진은 말없이 전문을 펼쳐, 가장 아래에 새겨진 글귀를 셰르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셰르는 무슨 짓이냐고 따지기 위해 그 전문을 치우려고 했지만, 물러나지 않은 유진 덕분에 결국 그 내용을 입으로 읊어야 했다.


“.......1인 1명의 동반자 허용?”


“.......응.”


셰르는 전문을 내려놓고 유진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다시금 고개를 숙여 그의 시선을 피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눈물을 감추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셰르도 알고 있었다.


“.......나랑 같이 가고 싶다는 거야?”


“.......응.”


“너,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아느냐- 까지는 말을 맺지 못하고 셰르는 입을 다문다.

단순히 동기로서, 그리고 지인으로서 결혼식에 동반하는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왕의 결혼식에, 그것도 귀족가문의 남녀가 함께 나타난다는 것은, 표면적으로도 의미하는 바가 너무도 명백하다.


“.......”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일까.

유진은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순진하다고는 해도, 자신의 위치와 셰르의 위치, 그리고 그들이 품고 있는 이름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거리감은 물론이고, 그 높낮이까지도.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셰르에게 자신과 함께할 것을 권유하기 위해 직접 적대시되는 가문의 가택으로 찾아왔다.


이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해줄 것인가-는

이미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야.”


다시금 유진의 머리를 헝클이며 그녀의 시선을 유도하는 셰르. 아직 덜 식혀진 얼굴로 유진이 그의 목소리를 찾아 얼굴을 들었고,


그곳엔 어울리지 않는 남자의 부드러운 미소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





“폐하, 케타가 급히 면담을 요청해왔습니다만.”


“.......급한 거래요?”


“그 인간은 모든 게 다 급하다고 합니다.”


“밥은 좀 먹고 싶은데.......”

그렇지 않아도 뒤늦게 식당으로 내려온 탓에 태하 행보관과 식당 아주머니로부터 잔소리를 들은 로빈이었다. 드넓은 직원식당에 남아있는 것은 몇몇 근무자들뿐이었기에, 마누앙은 자신과 로빈만이 알고 있는 존재의 이름을 거리낌 없이 내뱉을 수 있었다.

“그녀를 본궁으로 초대할 순 없겠죠?”


“안 됩니다.”


예상대로 단호한 마누앙의 대답. 결국 로빈은 마늘향이 섞인 한숨을 내뱉으며 검붉은 머리를 쓸어 넘긴다.


“퇴근하고 케타르디노 상회로 찾아뵙겠다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퇴근을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로빈의 마지막 말은 식당을 빠져나가는 마누앙의 뒷모습을 향한 푸념이었다.

한센의 문병 이후 결혼식은 물론이고 모든 일들이 탄력을 받아 급격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로빈의 시간은 퇴근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지난 삼 일간 집무실에서 밤을 새다시피 했으며 접대용 소파에서 잠을 청했다. 밥을 먹는 도중에도 동기들과 근위대로부터 수많은 축하 인사를 받고 있었지만 좀처럼 실감이 나질 않은 것은 바로 이런 피로감 때문이었다.



“와, 심각하게 피곤해 보이시네?”



소스라치게 놀라긴 했지만 간신히 숟가락을 떨어트리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로빈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맞은편에 자리 잡은 여인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케타?! 여긴 어떻게-”


“아아, 허락받고 들어온 거니까 걱정 말아요. 아무리 나라도 그렇지 멋대로 본궁에 들어올까 봐?”


“허락? 누구요?”


“누구겠어요.”


“.......총리님?”

능글맞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케타. 로빈은 그 순간 자신이 마누앙에게 당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업무에 치이는 로빈을 위한 그 나름대로의 깜짝 선물이었던 거겠지. 답지 않은 귀여운 총리의 배려에 로빈은 허탈한 웃음을 내뱉으며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그래서, 급한 일이란 게 뭐길래 전문도 없이 직접 찾아오셨어요?”


“그냥 급한 일이 아니죠. 전문도 신뢰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거든요.”

분명 케타가 신분노출이라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직접 본궁으로 찾아온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그러나 입으로는 중요성을 언급하면서도 줄곧 헤실헤실 풀어져 있는 그녀의 표정은 로빈을 반신반의하게 만들고 있었다. 로빈은 인내심 있게 그녀의 ‘보고’를 기다렸고, 케타는 더 이상 왕의 얼굴에서 초조함을 읽어낼 수가 없자 미소를 거두고 몸을 앞으로 숙여 그의 검붉은 눈을 마주한다.

“폐하, 혹시 최근 들어 바쁘게 움직이는 자들에 대해서 들으신 거 없나요?”


“바쁘게 움직이는 자들? 당장 다음 주에 결혼식이 있어서 바쁜 사람은 하나 아는데요.”


“그거 말고, 좀 더 넓은 시각에서요.”


“으음.......”

어느새 케타의 수수께끼 놀이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기엔 로빈은 너무 지쳐있었다.

“어디 보자, 우선 브린타이나가 내전수습으로 바쁘죠. 팔루뎀 양도 건에 대해서 브린타이나의 국왕이 직접 정상회담을 요청하기도 했고요. 저는 되도록 결혼식 이후로 잡고 싶었는데, 욘의 대통령은 당장이라도 만나고 싶은 눈치고. 뭐 이 정도네요.”


“헤, 그렇군요.”

뭐지? 라는 표정으로 로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품는 케타를 바라본다. 그러나 그녀의 미소 끝에서 새어 나온 말은, 더 이상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폐하의 암살을 시도한 세력을 잡아냈습니다. 그 수장으로 의심되는 인물도 직접 눈으로 확인했고요.”


“.......누구죠?”


마주하는 두 표정 사이로 웃음기가 말라버린다. 여유가 사라진 눈빛으로, 케타는 조심스럽게 펜을 꺼내 뜯어낸 냅킨 위로 하나의 이름을 새겨 넣어 로빈의 식판 아래로 밀어 넣는다.


이름을 확인한 로빈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무표정을 확인한 케타의 입가로는 다시금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사람을 결혼식에 초대해보세요.”


후드를 눌러쓰고, 사라질 준비를 마친 케타. 그녀는 걸쭉한 웃음소리와 함께 왕에게 거대한 숙제하나를 던져주었다.





“그럼 답이 나올 겁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추석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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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4) +6 15.10.02 923 27 24쪽
»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3) +8 15.09.27 854 23 21쪽
176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2) +6 15.09.22 842 23 20쪽
175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1) +4 15.09.17 999 25 20쪽
174 (막간) 결국 안식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8 15.09.12 919 26 21쪽
173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0) +6 15.09.07 816 24 24쪽
172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9) +6 15.09.02 918 24 19쪽
171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8) +8 15.08.28 1,003 24 17쪽
170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7) +8 15.08.24 1,148 27 22쪽
169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6) +16 15.08.18 1,022 33 20쪽
168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5) +8 15.08.13 876 24 21쪽
167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4) +10 15.08.07 991 27 26쪽
166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3) +6 15.08.02 984 23 17쪽
165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2) +6 15.07.28 966 30 28쪽
164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 +12 15.07.23 937 26 16쪽
163 (막간) 겨울에게 작별하는 방법 +10 15.07.17 1,155 28 19쪽
16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4 15.07.12 1,068 27 18쪽
161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0) +10 15.07.07 1,018 26 22쪽
160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7 15.07.02 997 22 20쪽
159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2 30 21쪽
158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2 28 24쪽
157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55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16 27 16쪽
155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3 35 24쪽
154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2 35 20쪽
153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06 35 23쪽
15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2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06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994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793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4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48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80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60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1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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