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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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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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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5.11.11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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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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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글자
20쪽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3)

DUMMY

“오스타이나의 함락은 이미 예상했던 바. 아니, 알면서도 대처할 수 없었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네요.”

긴급소집된 참모진의 굳어있는 얼굴들. 그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위함이었는지 지휘봉을 잡은 지나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가벼웠다.

“오스타이나를 포함한 브린타이나의 남동부 국경은 우리가 팔루뎀을 양도받으면서 공동방위에 합의한 지역이었죠. 그런데 그곳 영주인 할라시드 로쿠베가 협의는커녕 카나반의 도움 따윈 필요 없다면서 베르달군을 거부해왔어요. 제국으로선 그 틈을 찔러왔을 뿐이죠.”


“나이트 마제스티, 그럼 이제 우린 어떻게 합니까?”


가느다란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신의 목소리만큼이나 경박한 인상을 지니고 있는 남자였다. 헤실헤실한 입가나 아무렇게나 늘어트린 밤색의 머리카락에서 느껴지는 무법성은 일반적인 기사의 위엄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놀랍게도 그는 ‘왕실참모진’의 일원으로서 지나를 보좌하라는 명령을 받은 기사.


“별다른 건 없어, 레이쇼 중위. 우리의 상대는 어디까지나 제국2군단이고, 팔루뎀엔 검성이 있으니 어떻게든 움직여 주겠지. 뭐 이런 사태를 대비해서 북부군도 아르보리스에 대기하고 있는 거니까.”


“북부군이라....... 지금 거기 사령관이 자히르 경이죠?”

레이쇼는 잠시 기억을 되짚고 나서,

“그 인간, 선출식에서 왕비님께 키스했다는 게 정말이에요?”


“푸웃!”

레이쇼의 천진난만함에 지휘천막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다. 특히 예상치 못한 곳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들은 카논은 들이켜던 물까지 탁자 위로 뿜을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레, 레이쇼! 지금 왕비님 앞에서 무슨 말을-!”


“아니 소문이 그렇다는 말이죠. 근데 진짜에요? 만약 진짜라면 우리 폐하가 대단한 거네. 나라면 북부사령관은커녕 변방으로 좌천시켜버렸을 텐- 아아, 아야야야야야! 아, 진짜 아퍼요! 그만! 그만!”


“자, 또 쓸데없는 얘기하고 싶은 분?”

해맑게 웃는 지나. 그러나 그녀의 양손은 자비 없이 레이쇼의 관자놀이를 짓뭉개는 중이었다. 물론 영력까지 깃든 왕비의 무자비한 철퇴 앞에서 ‘키스사건’의 전말을 알고 싶은 사람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레이쇼는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머리를 감싸 쥔 채 신음을 흘려야 했고, 지나는 개운한 얼굴로 다시 지휘봉을 잡는다.

“북쪽 얘기는 이쯤하고, 지금 베르달의 상황을 봅시다. 저랑 특작대가 대부분의 전진초소는 정리했지만, 아직까지도 이전의 국경선을 되찾지 못한 상태에요. 감시구역이 확립되지 못하다보니 이번처럼 쉽게 적 사냥조의 침입을 허용한 거고.”


“엘론족과 드루이드들은 어떻습니까? 이번에도 그들의 협력을 받을 수 있다면 숲에서 제국군을 몰아내는 건 수월해질 텐데.”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셰르 시즈키치의 질문. 그러나 지나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숲의 회복과 수호뿐이야. 벤, 아니, 검성도 그런 이해관계를 통해 협력을 얻어낼 수 있었던 거고. 숲을 넘어선 인간들의 다툼에 끼어들 이유는 없지.”


“아니, 솔직히 지금 놈들의 반응을 보면 찔끔찔끔 간만 보고 있잖아요? 그냥 이 틈에 우리가 먼저 밀고 올라가면 안 되나? 베르달의 전력도 어느 정도 회복됐고.”


아직 고통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레이쇼가 머리를 감싸 쥔 채 시선만을 들어 물었다. 이번엔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조하고 있었다.

왕의 이름을 대신하여 참모진과 근위대를 이끌고 온 지나와, 완벽에 가까운 모습으로 재편된 베르달군. 이런 전력이라면, 무너진 국경선의 회복은 물론이고 그 너머까지 진출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 그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지나의 대답은, 그런 그들 사이를 흐르고 있던 자신감이라는 맥을 탁 끊어버리고 만다.


“아, 그 점에 있어선 저도 크라트 경과 의견이 같아요. 지금 적들이 간 보듯 우릴 툭툭 찌르고 있는 건 놈들에게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베르달 침공 당시 제국의 2군단 또한 많은 피해를 보았지만, 제국군의 보급규모를 우리와 똑같이 봐서는 안 돼요. 아무리 독자적인 군이라고 해도 그들은 군단장의 요청만 있으면 언제든지 중앙으로부터 편제보충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지난 기간 동안 2군단이 중앙에 보급을 요청하지 않은 건, 어디까지나 군단장과 중앙군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지금 우리가 움직이지 않고 있는 이유가-”


“응, 맞아.”

셰르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는 천천히 지휘봉의 끝을 전술지도, ‘마즈다힐’이라 적힌 지점으로 옮겨놓는다.

“다들 아시겠지만, 우리에겐 지금 제국 2군단장이 누구인지, 그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어요. 엘라론 드리브달과 ‘붉은 장미의 검성’까지 이어지는 2군단의 계보는 분명 제국의 중앙과는 거리가 멀었죠. 침공 이후 2군단을 도맡아 재정비한 건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 댄 스파인.”

지나가 내뱉은 이름에 몇몇 시선이 구석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오즈카에게 향했지만, 그는 어떠한 반응도 없이 계속해서 지휘관의 입에 집중하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대로 군단장직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실력이나 위엄을 떠나서, 귀화한 장군에게 요직을 맡겨야 할 정도로 제국이 인재에 허덕이진 않을 테니까요. 지금 우리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반드시 파악해야 하는 게 바로 이겁니다. 제국 2군단의 지휘관이 누구인지, 그걸 알아내기 전엔 나아갈 수 없어요.”


지나의 선언에 납득하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최근 활발해지기 시작한 2군단의 움직임은 분명 새로운 군단장의 취임과 더불어 생긴 현상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그 군단장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의도로 도발을 해오는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예전의 전력을 회복했음에도 크라트가 섣불리 국경을 수복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였다.


“나이트 마제스티, 비전하!”


천막의 입구를 꿰뚫는 다급한 여인의 목소리. 모두의 시선을 받은 이는 다름 아닌 유진이었다.


“유진? 너 어제 당직이었잖아? 왜 아직도-”


“폐,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엉?”

뒤틀리는 지나의 눈썹과 태양빛의 눈동자. 그녀는 잠시 유진이 가져온 말을 곱씹어보더니, 깊은 한숨과 함께 이마를 감싸 쥐었다.

“하아....... 전원 제 위치에서 대기하고, 참모진만 따라와.”


지휘봉을 내던지듯 내려놓고 천막을 빠져나가는 지나의 얼굴엔, 새신랑을 맞이하러 가는 새신부의 홍조 따위는 서려 있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두가 다가오는 폭풍을 예감한 순간이었다.






지나와 왕실참모진이 바크달룬성에 다다랐을 땐 이미 성문은 왕의 환영을 위해 활짝 입을 벌린 상태였다. 로빈이 이끌고 있는 행렬은 불시시찰이라는 표면적 이유에 걸맞게 상당히 단조로웠다. 드렌턴을 비롯해 왕을 수행하는 근위기사 몇몇이 그와 함께한 인원의 전부. 그 사실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지나의 인상은 한층 더 굳어버렸으며 그녀의 발걸음도 거칠어지고 만다.


“아, 마침 오시는군.”


숲속에서 빠져나오는 지나와 참모진을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은 막 로빈과 악수를 나눈 크라트였다. 이어진 왕의 시선을 받자 카논과 레이쇼를 비롯한 참모진들은 동시에 허리를 숙인다. 국가의 수장이자 사령관인 존재를 향한 최소한의 예의.


그러나


지나는 고개를 숙이지도, 허리를 굽히지도 않고 걸음의 속도를 높여 로빈의 앞에 이른다. 해맑게 웃던 로빈도, 다가온 왕비의 표정을 보고는 흠칫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이런 전방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아....... 그, 최전방 시찰을-”


“굳이 이 시기에 시찰이 필요한 이유를 모르겠군요. 게다가 아직 이 주변은 산발적인 전투가 진행 중입니다. 폐하께서 개인적인 이유로 들락날락할만한 곳이 못됩니다.”


“개인적인 이유라니, 나는-”


차가운 소리와 함께 그 장소에 있던 모든 이들이 숨을 삼킨다.

로빈이 무심코 내민 손을, 지나가 매몰차게 내친 것이었다.


“저는 당신을 대신하여 이곳에 왔습니다. 폐하께선 제게 전권을 위임하셨죠? 그럼 이 자리에서 폐하께서 가진 권한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시찰이든 뭐든 실컷 하고 가세요. 다만 병사들에게 폐를 끼치진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참모진, 따라와. 크라트 경, 초소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으니 집무실로 가시죠.”


“아......., 그래.”


전장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 ‘늑대’조차 이런 왕비의 반응은 다소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는 매몰차게 돌아선 왕비의 뒤를 두어 걸음 따라가다가 문득 로빈을 향해 몸을 돌렸지만, 왕은 그런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얇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아무도 남지 않는 바크달룬의 성문 아래에서, 로빈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으며 한심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드렌턴을 향해 웃어버린다.



“이런, 혼나버렸네.”




=====================




어둑한 그림자를 걷어내는 형광등. 그 밝은 빛을 더럽히며 움직이던 기사의 걸음이 멈춰 선다. 자신의 목적지에 먼저 도달해있는 그림자의 존재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 또한 이쪽의 존재를 알아채고,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 온다.


“쥬넨! 이 시간엔 어쩐 일인가?”


“.......안녕하십니까, 댄 장군님.”


“님은 무슨, 이제 같은 직위 아닌가. 경어는 생략해도 좋아.”


“아닙니다.”


“뭐, 아니면, 아직도 카나반에 있을 때랑 헷갈리는 건가? 하핫.”


한때 붉은 나뭇잎과 함께 그들을 품고 있었던 남색의 흔적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오직, 그 어떠한 색도 품을 기색이 없는 칠흑빛의 제복만이 두 기사가 유일하게 공유하고 있는 시간.

그럼에도, 어째선지 쥬넨은 눈앞의 남자가 영 껄끄럽기만 했다.


“군단장님은 계십니까?”


쥬넨은 곧바로 자신의 먹색 시선을 댄이 앞에 서있는 문으로 옮긴다.


“음, 나도 찾아뵈려는 중이었네만, 아무리 노크를 해도 답이 없으시군. 아마 또 취해서 곯아떨어진 거 아닐까.”


“.......”


쥬넨은 곧바로 댄의 앞으로 다가서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댄의 말대로, 안에선 그 어떠한 반응도 들려오지 않는다.


“취했을 때 방해받는 걸 싫어하시니, 아무래도 내일 다시 와야 할 듯싶군.”


“하지만 내일도 취해계시겠지요. 군단장으로 부임하신 지 이제 한 달이 넘는데, 그분이 취해계시지 않은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쥬넨은 대답을 끝내기도 전에 잔뜩 미간을 찌푸려야 했다. 자신의 가슴으로 파고든 댄의 손가락 하나 때문이었다.


“나는 상관없네만, 다른 보좌관이나 장교들 앞에서 그런 발언은 참아주시게. 전임 군단장들의 배려 덕분에 이런 계급과 대우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야. 그들에게 우린 어디까지나 조국을 배신하고 빌어먹으려고 붙은 기생충에 지나지 않으니까.”


“.......”


“난 그런 놈들 비위나 맞추려고 모든 것을 저버리고 이곳에 온 게 아닐세. 그런 놈들 때문에 자리에서 쫓겨나려고 이 자리까지 온건 더더욱 아니고 말이야. 그러니 자네에게 부탁하나만 하지.

제발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말게.

우린 어디까지나 같은 편이야. 같은 처지에 공존을 위해서, 생존을 위해서 힘을 합쳐야지, 안 그래? 자네도 저번 침공에서야 비로소 조금이나마 이들의 믿음을 얻을 수 있지 않았나. 그런 기회는 쉽게 오는 게 아니야. 하지만 그 기회로 얻은 결과물을 모조리 불태울 위기는 너무도 쉽게, 그리고 많이 찾아오지.”


쥬넨은 노크를 위해 들었던 손을 천천히 내려놓는다. 댄이 그런 그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는 거라곤, 오직 차가운 분노 하나뿐이었다.


“저는 공화국에서 아무것도 될 수 없었기에 이곳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그곳에서 저의 검은 갈 곳을 잃은 채 방황하여 무뎌지고 있었고, 영광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회주의자인 왕과, 그런 기회주의자를 옹호하여 가문의 신념을 저버린 아버지. 그들에게 제가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제가 니바르토라는 이름, 그리고 근위대장이라는 직책에 묶여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요.”

추락하는 그의 손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문의 손잡이였다.

“저는 침묵과 수긍만이 미덕이었던 그런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을 겁니다.”


댄이 말릴 틈도 없었다. 만약 잠겨있었다면 문 그 자체를 박살 낼 기세로 열어젖힌 쥬넨이었기에 경첩이 내지르는 비명은 몹시 날카로웠다.


“.......” “.......”


그러나 쥬넨의 목소리는 군단장을 부르지 않는다. 그리고 댄 또한 사과의 말을 내뱉지 못한다.


그들이 맞이한 것은,


쓸쓸하게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책상과 비어있는 침대뿐이었다.


“.......군단장님 오늘 밤 일정이 있으셨나?”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밖에서 쏟아지는 형광등의 빛을 등지고, 댄은 깊은 한숨과 함께 턱을 쓰다듬는다.




“그럼 도대체 어딜 가신 거지?”




====================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지만, 지나의 태양은 멈출 생각이 없다. 그녀는 침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원형탁자 위에 전술지도와 그날 들어온 정찰보고서를 모두 올려놓고 면밀히 살펴보는 중이었다. 원래 이 시간이라면 척후대와 함께 숲속을 돌아다녔을 테지만, 삼일 가까이 제대로 된 휴식도 없이 숲의 그림자를 누빈 그녀를 참모진들이 애써 만류하여 본궁에 들여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참모진과 병사들의 걱정과는 달리, 그녀는 별다른 피로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왕비인 자신을 걱정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이해한다. 하지만 스스로를 몰아붙여야 했던 과거와는 다르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의무와 관념을 떠나, 순수한 불길로 전장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소중했던 사람이 남겨준 유산이었으니까.


“.......”


듀라와 올리가 작성한 정찰보고서를 읽던 지나의 눈동자가 멈춘다.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허리춤의 흑도로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곧 자신이 있는 곳이 숲속이 아니며, 지금 기척을 숨긴 채 문밖으로 다가온 존재도 적의 자객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자 짧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큰 발소리를 내며 다가가 문을 열어젖힌다.


“아.......안녕.”

잔뜩 풀죽은 왕의 검붉은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야, 너 지금 혀 찬 거야? 사랑스러운 신랑의 얼굴을 보고 혀를 찼어?”


“시끄럽고, 들어오기 싫으면 말던가.”

세차게 닫히는 문틈 사이로 간신히 몸을 비집고 들어온 로빈. 그가 너무하네-라며 푸념을 늘어놓기도 전에, 지나의 잔소리가 먼저 울려 퍼진다.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불시시찰? 퍽이나!”


“진짠데? 승인도 받았어. 정식 절차라고. 베르달 뿐만이 아니라 아르보리스랑 팔루뎀까지도 들를 거야.”


“승인이고 뭐고, 의원들이랑 병사들이 널 뭐라고 생각하겠어?!”


“뭐라고 생각하긴. 왕이 마누라 좀 보러 오겠다는데.”


“야! 너는 내가-!”


“알아. 그러니까 아까 오후에도 그렇게 화냈던 거잖아. 나 때문에 억지로 그런 거 안다구.”


“.......”


어느새 다가온 로빈은 자신의 가슴을 향해 내지르려던 지나의 주먹을 붙잡고, 서서히 그녀의 손목을 감싸기 시작한다.


“내가 업무도 팽개치고 너 얼굴이나 보러온 양아치처럼 보일까봐 일부러 그랬던 거잖아.”


“.......아닌데.”


“아, 그래? 내 착각이었으면 미안하고.”


욕을 내뱉으려던 입술은 안타까움으로 굳어버리고, 주먹을 내지르려던 손은 그의 온기에 붙들려 힘이 빠진다. 차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 고개를 숙인 지나의 머리 위로, 로빈은 웃으며 작게 속삭인다.


“미안, 늦었지.”


“.......”


“혼자서 힘들었지.”


“........”


“보고 싶었어?”


“.......응.”


흔들리는 대답. 결국 로빈은 웃음을 터트리며 지나의 두 손을 자신의 가슴팍으로 모아놓는다.


“미안, 대신 부탁 있으면 말해봐. 해줄게.”


“.......쓰다듬어줘.”


로빈은 망설이지 않고 위로 묶여있던 그녀의 찬란한 금빛의 머리칼을 풀어헤치고,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그 손길에 힘이 실린 덕분인지, 지나는 마침내 고개를 들어 그의 미소를 마주할 수 있었다.


“또?”


다가오는 검붉은 눈동자와, 그와 함께 흘러들어오는 감미로운 목소리. 지나는 천천히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속삭인다.


“.......키스해줘.”

저돌적인 로빈의 움직임에 지나는 뒷걸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회피는 침대에 종아리가 걸리며 짧게 끝나고 말았고, 푹신한 솜털 위로 쓰러진 그녀의 입술에, 로빈은 곧바로 자신의 입술을 겹쳐놓는다.

깊은 숨을 나누는 입맞춤이었다. 살짝 젖은 지나의 눈동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땐, 이미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친 숨이 분홍빛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느새 제복 상의의 단추와 벨트는 풀어헤쳐진 상태였다.

“.......이건 아직 부탁하지 않았는데.”


강화복과 피부 사이로 파고들기 시작한 로빈의 손을 내려다보며 지나가 웃었고, 그런 그녀의 미소에 다시금 입을 맞추며 로빈은 이마를 맞댄다.


“싫음 말고.”


“.......멍청이.”









“너 많이 굶주렸구나.”


익살스러운 로빈의 비웃음에, 그의 팔을 베고 누워있던 지나는 손가락으로 로빈의 코를 튕겨버린다. 그러나 그 고통마저도 사랑스러운 듯, 로빈은 다시 한 번 더 그녀를 잡아당겨 깊은 입맞춤을 남긴다.

얇은 이불을 공유하고 있을 뿐 둘은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지만, 서로의 체온이 침실의 온도를 그 어느 때보다도 후끈하게 덥혀놓았기에 한기는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보고 싶었어.”


로빈의 가슴에 이마를 묻은 채, 그의 존재를 만끽하려는 듯 큰 숨을 들이마시는 지나. 로빈도 지지 않고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춘다.


“그러게. 신혼을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생이별을 해버렸어. 뭐, 이걸 신혼여행이라고 칠까?”


“헤헷.”


새빨간 혀끝을 살짝 깨물어 보이며 지나는 더욱 더 깊이 그의 품속으로 파고든다. 이제 그의 가슴만이, 그녀가 애교를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으니까.


“.......괜찮아?”


“응.”


“아니, 내 말은, 정말로 괜찮냐고.”


지나는 고개를 들어 로빈을 얼굴을 바라본다. 곧바로 자신을 향하긴 했지만, 그의 시선이 침대 옆에 세워져 있는 흑도에 있었음을 지나는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할아버지 말이야?”


“응. 그게....... 지금 와서 말하는 건데, 너 장례식 때 한 번도 안 울었잖아. 그게 좀 걱정이 돼서.”


아, 이것이 그의 말투가 조심스러웠던 이유였나.

지나는 이불로 가슴을 가린 채 몸을 일으켜, 희미한 미소로 사랑하는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난 괜찮아. 할아버지가 말씀하셨어. 마침내 구원을 받았다고. 그러니 이제 행복해지라고. 그리고 너는 이런 나를 구원해줬잖아. 그러니까....... 나는 앞으로 행복해질 거야.

너와 함께.......”


지나의 부드러운 손이 로빈의 얼굴을 매만진다. 로빈은 잠시 그 부드러움을 만끽하고 나서, 그녀의 손을 붙잡고, 천천히 입술을 움직인다.




“방금 솔직히 조금 쪽팔렸지?”


“아, 몰라 미친놈아!”


지나의 손바닥을 잡아채어 다시금 그녀를 품으로 끌어안는 로빈. 그 뒤에 진한 키스가 이어진 것은 물론이었다.


“반드시 행복하게 해줄게. 그러니까, 제발 다치지 말고.”


“.......응.”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혹시 그거....... 물어봤어?”


로빈이 말한 ‘그것’이 무엇인지, 지나는 따로 기억을 되짚어볼 필요도 없었다.


“응. 그녀한테는 말해봤는데, 아직 크라트 경한테는 물어보지 못했어.”


“음....... 하긴 그런 말 꺼내기가 좀....... 그렇긴 하지?”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지나의 눈동자. 끄덕이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로빈은 작게 중얼거린다.






“그럼, 내가 내일 직접 말씀드려볼게.”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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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0

  • 작성자
    Lv.99 니푸르
    작성일
    15.11.11 21:30
    No. 1

    이 커플 고도가 보면 혈마법 쓰고 싶을 정도로 염장질 하고 있네요 ㄷㄷ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11.13 18:46
    No. 2

    괜찮아요. 지나가 막아줄 겁니다....?
    라루사님 언제나 감사드려요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연두초록
    작성일
    15.11.11 22:50
    No. 3

    벤과 고도는 저런 상황이 그려지지 않는다는... 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11.13 18:46
    No. 4

    네 저도.....
    불의검님 오늘도 감사드려요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evolutio..
    작성일
    15.11.13 13:28
    No. 5

    아 달달하네 ㅎㅎ 여자친구 보고 싶다 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11.13 18:47
    No. 6

    전 그런 거 없습니다 하하
    에볼루션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1 바람별무리
    작성일
    15.11.13 21:28
    No. 7

    1. 지나에게도 이렇게 하려나요.

    불임여성 치료 신기원되나…"사망자 자궁 불임여성에 이식"
    송고시간 | 2015/11/13 14:21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11/13/0200000000AKR20151113092200009.HTML?input=1195p

    2. 역시 로빈은 정력왕이군요. 지나가 한 번 먹어보더니, 맛을 못 잊어서 계속 먹었고, 아예 평생 먹기로 했네요. 공식 칭호도 정력왕으로 하면 되겠습니다. 지나는 전선에 나가있으다가 로빈이 오면 좋아하면서 못 먹은 거, 못 먹을 거까지 다 먹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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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11.14 20:55
    No. 8

    엌 이 익숙한 관점은.......? ㅋㅋㅋㅋ
    별무리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7 통금시간
    작성일
    16.03.26 12:17
    No. 9

    2군단장도 '그냥'씨 일련지ㅎㅎ 렌 꿈속엔 년놈이 나온다니 한명 더 있겠죠?
    잘봤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3.26 18:32
    No. 10

    통금시간님 계속해서 감사드립니다!
    으잌 예리하시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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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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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0) +4 15.12.17 923 16 22쪽
192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9) +4 15.12.12 874 20 16쪽
191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8) +6 15.12.07 884 24 17쪽
190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7) +4 15.12.02 868 24 18쪽
189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6) +6 15.11.26 992 20 16쪽
188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5) +6 15.11.21 866 23 18쪽
187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4) +10 15.11.16 914 25 17쪽
»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3) +10 15.11.11 857 22 20쪽
18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2) +6 15.11.07 867 20 19쪽
18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 +8 15.11.01 1,081 27 18쪽
183 (막간) 나의 태양에게 +8 15.10.27 886 29 11쪽
182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8) +12 15.10.22 923 28 23쪽
181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7) +8 15.10.17 1,044 27 19쪽
180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6) +8 15.10.12 951 28 22쪽
179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5) +12 15.10.07 857 25 21쪽
178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4) +6 15.10.02 923 27 24쪽
177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3) +8 15.09.27 854 23 21쪽
176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2) +6 15.09.22 842 23 20쪽
175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1) +4 15.09.17 999 25 20쪽
174 (막간) 결국 안식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8 15.09.12 919 26 21쪽
173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0) +6 15.09.07 818 24 24쪽
172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9) +6 15.09.02 918 24 19쪽
171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8) +8 15.08.28 1,003 24 17쪽
170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7) +8 15.08.24 1,148 27 22쪽
169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6) +16 15.08.18 1,022 33 20쪽
168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5) +8 15.08.13 877 24 21쪽
167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4) +10 15.08.07 991 27 26쪽
166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3) +6 15.08.02 984 23 17쪽
165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2) +6 15.07.28 966 30 28쪽
164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 +12 15.07.23 937 26 16쪽
163 (막간) 겨울에게 작별하는 방법 +10 15.07.17 1,155 28 19쪽
16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4 15.07.12 1,068 27 18쪽
161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0) +10 15.07.07 1,018 26 22쪽
160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7 15.07.02 997 22 20쪽
159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2 30 21쪽
158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2 28 24쪽
157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55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16 27 16쪽
155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3 35 24쪽
154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2 35 20쪽
153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06 35 23쪽
15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2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06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995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793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4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48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80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60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1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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