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51,390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5.11.07 01:34
조회
875
추천
20
글자
19쪽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2)

DUMMY

“다음은 베르달국경 전투보고서입니다.”

마누앙의 예상대로, 그가 종이 하나를 꺼내들자마자 줄곧 죽은 생선처럼 썩어있던 로빈의 눈동자가 마침내 빛을 발하며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런 터무니없는 왕의 모습에 마누앙은 짧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그의 마른 입가엔 어째선지 희미한 미소가 피어있었다.

“소대, 또는 중대 규모의 적군이 산발적인 도발을 반복해오고 있지만, 아직 본격적인 움직임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숲의 복구로 인해 베르달군의 전력이 회복단계에 이르렀다고는 해도, 아직 서로 정보가 부족한 상황인 것을 감안한다면 방심할 수 없다는 것이 크라트 경의 입장입니다.”


“네, 그리고요?”


금방이라도 일어날 듯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되물어 오는 로빈.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듣기 전까진 그가 이런 자세를 유지할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결국 마누앙은 두 단락을 건너뛰어 왕이 원하는 목록으로 먹색 시선을 옮겨야 했다.


“나이트 마제스티, 왕비께선 기대했던 대로 훌륭하게 대리기사의 직무를 수행 중인 듯합니다. 직접 소대를 이끌고 국경을 침범한 적의 척후대를 요격하고, 지난 침공 이후 신설된 제국의 전방초소와 전초기지에 침투하여 경계망을 무력화시켰다는군요. 게다가 저번 주엔 대베르달 특작부대소속의 분대를 혼자서 전멸시키기도 했답니다.”


“대베르달 특작부대라면....... 엘라가 2군단장시절에 만들어놓은 ‘사냥꾼’말이죠? 그 분대를 혼자서 처리했다구요? 흐으음.......”


로빈의 마지막 목소리는, 근심이나 불만이 아닌 자랑스러운 미소에 가까운 울림이었다.


“예. 크라트의 최종임무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검과 영력을 다루는 능력이나 상황을 파악하는 시선 자체가 눈에 띄게 성장했다. 자진하여 작전에 투입되면서도 조급함은 보이지 않는다. 까다로운 베르달 병사들과 능숙하게 연계를 이룰 정도로 지휘관으로서의 역량도 탄탄해졌다.’ 라고.”


“크라트 대장이 그렇게 누군가를 가시 없이 칭찬하는 건 처음 보네요.”


“예, 저도 그렇습니다.”


“흠흠.......”

최대한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지만, 결국 헤실헤실한 웃음이 새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로빈은 알고 있을까. 그러나 그의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조급함은 보이지 않는다-라....... 대장의 말이니까 믿음은 가지만.......”


“여전히 걱정되십니까?”


마누앙의 그답지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에 로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새 눈썹까지 내려온 자신의 검붉은 앞머리를 만지작거린다.


“본인은 ‘시험해보고 싶을 뿐이다’라고 했지만....... 예, 걱정되죠.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버팀목이셨던 분이 돌아가신 거잖아요?”


“그리고 그녀는 새로운 버팀목을 위해 검을 들겠다 맹세를 했지요.”


총리의 말처럼, 지나는 이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닌, 로빈만을 위해 검을 들고 로빈만을 위한 기사가 되겠다고 맹세했다. 이번 파견 또한 그 맹세의 일환으로, 지금 자신이 ‘어느 정도까지 로빈의 이름을 대신할 수 있는가’를 확인해보기 위해 그녀가 자청했던 일.

로빈이 망설임 없이 그녀의 부탁을 들어준 것은, 크라트의 보고처럼 더 이상 그녀에게서 ‘조급함’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제 서둘러서 자신의 이름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검을 드는 것으로만 구제할 수 있는 영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피로써 지울 수 있는 얼룩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그렇기에,


그녀는 마침내 순수한 ‘힘’을 추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한, 순수한 목적의 힘을.


“.......외람된 말씀이오나, 한센 경의 타계야말로 그녀를 구속하고 있던 굴레를 털어준 계기가 아니었는지요. 아뮤르 일가가 대대로 겪어온 거대한 비극의 홍수 속에서 고조부를 구원하기 위해, 그녀는 필사적으로 손에 피를 묻히고 스스로를 혹사시켰습니다. 그런 그녀의 조급함이 그녀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마저도 상처를 입히게 되자, 결국 보다 못한 한센 경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지요. 왕비께선 그런 자신의 실패를 견딜 수가 없어 더욱 자신을 몰아붙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절망에 빠져 익사해가던 그녀를, 바로 폐하께서 구원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


영혼이 버텨온 시간에 비해 너무나도 짧았던 한센의 유서. 그 시작은 로빈을 향한 깊은 감사였다. 자신의 고손녀를 끔찍한 그림자로부터 빼내어 주고, 동시에 행복을 불어넣어준 것에 대한 감사. 그리고 자신이 마지막으로 그 행복의 미소를 보고 갈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한 감사였다.

그러나 정작 지나를 향해 그가 남긴 말은 짧은 두 마디뿐.


더 이상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지 마라.

그리고,

이제는 너만의 검을 잡아라.


“지금 왕비께선 태어나서 처음으로 ‘행복한’ 검을 잡고 계십니다. 자신을 증명하기 위함도, 누군가를 넘어서기 위함도 아닌, 자신의 행복과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준 사람을 위해 검을 들었습니다. 본인은 ‘시험해보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 그녀에게 더 이상의 ‘시험’이나 ‘증명’은 필요 없습니다. 이제는 보여주는 일만 남은 것이죠. 그러니 폐하, 그녀를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네에.”


총리의 말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로빈. 하지만 검붉은 그의 시선 끝에는 여전히 흔들리는 무언가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마누앙은 그 ‘무언가’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간파해낼 수 있었다.


“.......외로우신 거군요.”


“아니, 우리 아직 신혼이잖아요! 아니 이제 좀 알콩달콩 지낼 수 있나 싶었는데 멋대로 휭 날아가 버리고! 틱틱 보고서만 날려 보내고! 이게 뭐예요!”

국가를 짊어지고 있는 왕의 투정이라기엔 너무도 가벼웠지만, 마누앙은 그를 질책하지 않는다. 신혼생활을 얼마 지내보지도 못한 채 부인을 전장에 내보낸 새신랑의 참담한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던 그였다.

“꼬박꼬박 연락하겠다더니, 보고서에 딸려서 편지 몇 장 보내는 게 전부고. 이쪽이야 원래부터 바쁘니 그러려니 싶은 거겠죠 뭐. 다아아- 제가 이해해야죠. 뭐 왕인데 어떡해? 쪼잔하게 복귀 명령 내릴 수도 없고. 안 그래요?”


.......어느 정도‘만’ 이해하고 있었다.


“왕비께서 국경소식을 듣자마자 급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군부와 의회의 시선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번 검성의 임명과 더불어서 국왕대리기사직까지도 실력이나 업적이 아닌 폐하와의 친분관계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냐는 비판이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성장도 실험해볼 겸, 이런 불만의 목소리도 잠재울 필요를 느낀 것이겠죠.”


“.......에휴.”


이렇게 합리적인 공격을 해오면 로빈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 납득과 미련만을 남긴 채, 그녀가 무사히 복귀하기만을 기다리며 서로 이를 세우는 의원들 사이에 파묻혀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역할.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었기에, 결국 그는 긴 한숨을 남기고 보고서 아래에 서명을 휘갈긴다.

평소였다면 일찍 오전업무를 마친 것에 만족하며 가벼운 몸짓으로 식당에 내려갔을 테지만, 로빈은 그대로 미끄러지듯 반쯤 의자 위에 누워버린다. 차마 지켜보기 힘든 처참한 표정이었지만 마누앙은 더 이상 이 불쌍한 왕에게 해줄 것이 없었다. 그가 머리를 숙이고, 그대로 등을 돌리려는 순간, 가만히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새로운 목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붙들고 만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폐하.”


나긋나긋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오로메였다.


“예?”


벌떡 허리를 세우는 로빈을 향해 오로메는 다시 한 번 싱긋 웃어 보이고는, 자신이 앉아있는 소파를 지나치려던 마누앙의 얼굴을 슬쩍 올려다본다. 그리고 그 순간 오로메는 눈치챌 수 있었다. 지금부터 자신이 하려는 이야기를, 총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폐하께서는 통합군의 지휘관으로서, 작전지역에 대한 긴급검열을 수행할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물론 그 작전지역이란 통합군소속의 부대가 활동 중인 모든 지역이 포함되지요.”


“......네, 그렇죠.”


아직까지도 오로메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감을 잡지 못한 로빈. 그 불쌍한 새신랑을 향해, 오로메는 차향이 깃든 친절함으로 다시금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녀를 부르지 못한다면, 반대의 방법을 택하셔야지요.”





====================





“으아악!”


침묵을 찢는 비명과 함께 마법사로브를 두른 남학생 한 명이 엉덩방아를 찧는다. 가지런히 모은 두 손바닥 사이에서 그의 비명을 이끌어낸 범인인 마력이 눈에 띌 정도로 일렁이는 균열을 만들어내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 소란에도, 주변에 모여 있는 다른 마법사들은 그에게 눈길 한번 줄 수가 없었다. 만약 지금 집중을 풀어버린다면 그와 똑같은 꼴이 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신아! 오드식으로 마력운용하는 버릇을 못 버리니까 그 꼴이 나는 거야! 손끝에 마력을 집중하지 말고, 내성으로 여과시키라고! 못 알아들어?”


살가죽이 벗겨지고 인대가 뒤틀렸지만, 그에게 주어진 것은 의무병의 손길이 아닌 소녀의 날카로운 욕설이었다.


“하, 하지만 양손의 균형이-”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글씨는 오른손으로 쓰되, 밥 먹는 거랑 양치질은 왼손으로 하라고! 의식이 안 따라주면 몸으로라도 익혀놓으라니까! 아오, 답답해!”

의무병의 부축을 받아 멀어져가는 마법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소녀의 짜증은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결국, 그녀의 화살은 다른 마법사들을 향해 촉을 빛낸다.

“시간 다 됐어. 근데 제대로 발현한 놈년이 하나도 안 보인다? 근육이 녹든 뼈가 부러지든 내일까지 합성마력발현 시켜서 가져와. 알았어?!”


대답은 듣지 않겠다는 듯, 그대로 뒤돌아 연병장을 빠져나가는 소녀. 그녀의 그림자가 사라지자마자 연병장을 뒤덮기 시작하는 욕과 비명은 이젠 익숙한 광경이다.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연병장을 뒤로하고, 소녀는 걸음을 재촉하여 본궁 안으로 들어선다.

과거 카나반의 영토였던 만큼, 팔루뎀의 성벽이나 본궁에는 아직도 공화국 특유의 고풍스러운 양식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때문에 새로운 이주민들과 병사들이 하얀 외벽, 그리고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이 연속되는 본궁에서 그리 괴리감을 느끼지 못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소녀에겐,

이 모든 환경이 너무도 낯설었다.

소녀의 짜증은 식지 않는다. 수많은 계단을 오르고 회전문을 지나치며 몇몇 마법사들에게 인사를 받았음에도 그녀는 대꾸는커녕 눈을 마주치지도 않은 채 대합실에 들어선다. 그녀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본궁 지하에 마련된 임시숙소. 햇볕은 들지 않고 창고를 개조한 탓에 아직 곰팡내마저 가시지 않은 비좁은 장소였지만, 그곳엔 소녀의 뒤틀린 심기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리스으으으으~!”


고도는 방문을 열어젖히며 치유천사의 이름을 불렀고, 그녀의 침대 위에서 뒹굴며 과자를 오물거리던 천사는 벌떡 일어나 고도를 향해 달려든다. 물론 그게 상응하는 반가움을 품고 있긴 했지만, 인형 특유의 육중한 무게를 견디기에 고도의 팔다리는 너무도 얇았다. 결국 고도는 둔탁한 신음과 함께 문밖으로 튕겨져 나가야했다.


“아흑....... 야, 내가 언니 침대 위에 과자 흘리지 말랬지.”


“.......”


“.......그렇게 시무룩하면 언니 마음이 찢어진단다. 아유! 요 귀여운 것!”


하루의 모든 짜증과 화를 풀어내려는 듯, 고도는 이리스의 은빛 머리칼을 마구 휘저으며 부드러운 뺨 위에 입술을 퍼붓는다. 붉은빛과 푸른빛이 함께 소용돌이치는 몽환적인 소녀의 눈동자는 고도에게 있어선 피로회복의 거울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애 질식하겠다.”


고조되던 고도의 기분을 한순간에 무너트려 버리는 무심한 목소리. 고도는 반사적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리스를 만끽(?)하느라 눈치채지 못했던 그림자를 올려다본다.


“누추한 곳엔 무슨 일로 오셨나요, 검성님?”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장난이 섞여있는 건 이미 익숙했기에, 벤은 덥수룩한 먹색 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이리스를 품에 안는다.


“무슨 일은요, 중간보고 좀 받으려고 왔지요, ‘통합군 선임전투마법사’님.”


오히려 호칭에 큰 정신적 피해를 입은 것은 고도 쪽이었다. 그녀는 이리스덕분에 잠시 회피했던 현실이 다시금 자신을 관통하는 것을 느끼며 잔뜩 미간을 찌푸려야 했다.

고도의 방은 침대와 책상, 그리고 이리스를 위해 모아온 과자상자만으로도 가득 찰 정도로 비좁았기에, 문을 닫고 들어선 그녀가 앉을 곳이라곤 정해져 있었다. 침대 곁으로 의자를 끌어와 엉덩이를 내려놓는 고도. 의자의 방향을 바로잡을 기력도 없는지, 그녀는 그대로 등받이 위로 턱을 올려놓는다. 그녀의 피곤에 지친 바닷빛 눈동자를 마주하며, 벤은 곧바로 본론을 꺼내든다.


“어때, 진척은 있어?”


“무슨 진척? 내 인내심고갈도? 아니면 마법사들의 야전병원 점유율?”


“.......”


고도가 머리를 고정하고 있던 끈을 신경질적으로 풀어 그녀의 눈동자 색과 똑같은 바닷빛의 머리카락을 늘어트린다. 어느새 어깨를 뒤덮을 정도로 길어져 있었지만, 그 자르기는커녕 빗질조차 하지 못해 푸석푸석한 머릿결이야말로 그동안 그녀가 얼마나 거친 시간을 보냈는지 증명해주는 흔적이었다.


“나름 균등내성에 가까운 녀석들로만 뽑아놨는데도 저 모양이라고. 응용은커녕 혼합속성이란 개념도, 발현도 못해. 차라리 길거리 지나가는 다섯 살 꼬마 붙잡고 전투마법사로 키우는 게 더 빠를걸.”


“그래서 상용화는 언제쯤 될 거 같은데?”


“.......내 말 제대로 들었어?”


“불가능하다는 건 아니잖아?”


결국, 고도는 머리를 들고 낑낑거리며 의자를 바른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바른 자세와, 흔들림 없는 시선. 나름 눈앞의 남자에게 굳건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아니, 분명하게 말할게. 불.가.능.해. 복수의 속성을 다루는 전투마법사집단을 만들겠다는 의도 자체는 신선했어. 다 좋아. 근데 애초에 나처럼 균등하게 내성이 분포된 신체조건을 찾는 게 말처럼 쉬운 줄 알아? 나쁜 버릇 같은 게 아니야. 이제 와서 강제로 끼워 맞추려고 해봤자 이미 쟤들은 기존방식에 너무 물들어있다고.”


“음, 그러니까 네 말은 마력운용법을 주입시키기 전에 신체의 균형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뜻이지?”


“그래. 인간의 신체가 완벽한 균형을 이룰 수 없는 것처럼, 마법사들의 내성 또한 똑같은 균형을 유지할 수는 없는 법이야. 나처럼 선천적인데다가 혈마력이라는 외부요소까지 더해 반강제적으로 내성이 억눌리지 않는 이상.”


“.......음.......”


마침내 이 새끼의 고집을 꺾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도는 속으로 승리의 환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여태까지 수없이 많은 벤의 미친 짓을 봐온 그녀였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마법사들의 ‘진로’에 있어선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균등내성. 그 균등내성의 마법사들을 양산하여 다속성의 마력을 운용할 수 있는 전투마법사집단을 육성하자니, 지금 생각해봐도 어떻게 총장과 로빈의 승인을 받아낸 건지 이해할 수 없는 계획이다. 애초에 고도는 균등내성을 지닌 마법사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그 발상부터가 글러먹은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마법사들의 내성은 선천적인 부분도 물론 크지만, 마법사 본인의 신체발달상황, 그리고 어떤 속성의 마법을 공부하고 연마했는가에 따라 그 농도는 일종의 개성처럼 변칙적으로 발달된다. 즉, 균등내성의 마법사를 인위적으로 양성하기 위해서는 유년기에서부터 신체발달에 대한 통제를 가해야 하며, 마력이 발현된 이후에는 조금의 오차도 없이 균등한 마력을 연마해야 한다.

고도의 말처럼, 이제 와서 아무리 다양한 속성의 마법을 억지로 연마시키고 양손의 균형을 맞추는 것 따위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부족한 기사전력을 심화된 마법사전력으로 메우려는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아. 하지만 모든 마법사들이 나처럼 타고난 전투마법사 체질로 태어나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마법사들 대부분이 전투마법사를 거쳐 가는 과정 정도로 생각하지, 대학에서의 미래를 포기하면서까지 뼈를 묻고 싶은 직장으로 여기지는 않는다고. 유년기부터 관리를 할 수 있는 전문적인 육성기관이라도 있지 않는 한-”


“바로 그거야.”


“엉?”


흐리멍덩하던 벤의 먹색 눈동자가 허공을 향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 빛이야말로 고도가 질색하는 현상이었지만.


“전문적인 육성기관. 마법사들의 신체와 내성을 주기적으로 관리하면서 최적의 다중속성전투마법사를 육성할 수 있는 기관. 그게 필요해.”


“.......뭐 말리지는 않겠는데. 말했잖아. 유년기부터라고. 마법사가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애들 잡아다가 격리라도 시키자는 말이야? 그렇게 키워서 언제 써먹으려고-”


“아니, 유년기 때부터 조정할 필요는 없지.”

희미하게 웃으며 이리스의 과자를 한 조각 뺏어먹는 벤. 그에 소녀는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리며 벤의 얼굴을 잡아당겼지만, 그의 미소를 빼앗기엔 역부족이었다.

“신체발달의 방향성과 내성의 균등작업. 이 모든 과정을 집단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관리해줄 기관. 어디서 많이 들어본 거 같지 않아?”


“.......지금 전투마법사 훈련소를 만들자는 얘기야? 기사훈련소처럼?”


고도는 울먹이며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이리스를 위로하며 되물었지만, 이미 벤은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든 뒤였다.


“아스트로바톰과의 연계가 중요하겠네. 일단 인원을 어디서 끌어 오냐가 중요해....... 기사동원령처럼 마법사도 의무입대를 추진해볼까? 예산은? 예산은 의회에서 승인받을 수 있나? 이건 로빈과.......”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문으로 다가서는 벤을 고도는 다소 경계심이 돋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침내 의미 없는 선임전투마법사직에서 해방될 것이란 기대 또한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는,

문을 닫기 직전, 돌아본 벤의 시선으로 인해 완전히 박살 나고 만다.



“아 맞다. 빨리 군장 싸.”


“뭐? 군장? 왜?”



불안으로 뒤덮이는 고도의 표정.

벤은 문을 닫으며, 그런 고도의 희망 또한 함께 닫아버린다.





“오스타이나 성이 함락당했어.”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변수의 굴레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93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0) +4 15.12.17 929 16 22쪽
192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9) +4 15.12.12 883 20 16쪽
191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8) +6 15.12.07 889 24 17쪽
190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7) +4 15.12.02 872 24 18쪽
189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6) +6 15.11.26 997 20 16쪽
188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5) +6 15.11.21 877 23 18쪽
187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4) +10 15.11.16 922 25 17쪽
186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3) +10 15.11.11 864 22 20쪽
»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2) +6 15.11.07 876 20 19쪽
18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 +8 15.11.01 1,085 27 18쪽
183 (막간) 나의 태양에게 +8 15.10.27 893 29 11쪽
182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8) +12 15.10.22 929 28 23쪽
181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7) +8 15.10.17 1,049 27 19쪽
180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6) +8 15.10.12 956 28 22쪽
179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5) +12 15.10.07 866 25 21쪽
178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4) +6 15.10.02 929 27 24쪽
177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3) +8 15.09.27 862 23 21쪽
176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2) +6 15.09.22 848 23 20쪽
175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1) +4 15.09.17 1,007 25 20쪽
174 (막간) 결국 안식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8 15.09.12 924 26 21쪽
173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0) +6 15.09.07 823 24 24쪽
172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9) +6 15.09.02 924 24 19쪽
171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8) +8 15.08.28 1,010 24 17쪽
170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7) +8 15.08.24 1,155 27 22쪽
169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6) +16 15.08.18 1,030 33 20쪽
168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5) +8 15.08.13 882 24 21쪽
167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4) +10 15.08.07 996 27 26쪽
166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3) +6 15.08.02 989 23 17쪽
165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2) +6 15.07.28 974 30 28쪽
164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 +12 15.07.23 945 26 16쪽
163 (막간) 겨울에게 작별하는 방법 +10 15.07.17 1,160 28 19쪽
16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4 15.07.12 1,076 27 18쪽
161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0) +10 15.07.07 1,026 26 22쪽
160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7 15.07.02 1,007 22 20쪽
159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7 30 21쪽
158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7 28 24쪽
157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61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21 27 16쪽
155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9 35 24쪽
154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7 35 20쪽
153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11 35 23쪽
15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9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12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1,001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801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8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56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87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66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9 34 2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