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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325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5.08.24 04:13
조회
1,148
추천
27
글자
22쪽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7)

DUMMY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바르사이파와 바스단 계곡을 통해 북진한 후, 적의 경계를 뚫고 동부국경으로 빠져나와 그대로 여기까지 남하했다-. 그 말씀입니까?”


“예, 정확한 경로라도 말씀드릴까요?”


“.......”

입 안 가득 음식물을 구겨 넣고 있는 벤을 향해 로쿠베는 더 이상 추궁을 들이밀 수가 없었다. 처음엔 자신을 ‘임시지휘관’이라 밝힌 이 젊은 남자의 보고를 듣고서 이게 뭔 미친놈 헛소린가 싶었지만, 그가 이끌고 온 병사들과 장교들, 그리고 ‘미친 꽃잎’의 증언까지 그의 주장과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뭐, 그래. 그 말도 안 되는 침투가 사실이라고 칩시다.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요?”


“모르죠. 저야 명령을 받아서 수행하는 일개 지휘관일 뿐인데요.”


벤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같은 자리에서 빵을 씹고 있던 유진과 리즈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야했다. 하지만 빵조각과 와인으로는 좀처럼 새어나오는 그들의 미소를 가릴 수 없었기에, 셰르가 대신 나서서 로쿠베의 관심을 돌려놓는다.


“옥스토브라카는 어떻게 됐습니까? 저흰 계속 적진에 있었던 탓에 전황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아, 그러게. 모르고 있나 보군.”

집중되는 시선들. 로쿠베는 잠시 그 빛나는 눈동자들을 둘러보고 다시 입을 연다.

“남부군은 그저께 계곡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했다. 주력은 옥스토브라카 계곡, 그리고 2진은 동부의 바르사이파와 바스단 계곡을 통해 올라가기 시작했어. 바로 너희가 올라갔던 그 경로 말이다.”


“예? 그럼 남군이 옥스토브라카를 탈환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무혈입성이었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열의 검성’이 갑자기 전군을 이끌고 산맥 너머로 퇴각했다더군.”


모두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게걸스럽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벤을 바라본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런가보다’라는 표정으로 열심히 말린 고기를 씹고 있을 뿐. 그 집중되는 시선의 의미를 모르는 로쿠베로서는 별다른 첨언 없이 와인을 홀짝이며 참았던 숨을 내쉰다. 그가 숨을 참아야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밀폐된 초소덕분에 이들에게서 풍기는 악취가 코를 찌르고 있었던 것이다.

중간에 몸을 씻을 기회는 한번 있었지만, 타인의 피와 살점으로 얼룩진 군복을 모두 세탁할 시간은 없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겨울이라지만 전장이라는 특수성이 내뿜는 피비린내는 물론이거니와, ‘망자’와 함께 살을 부비며 산을 넘어 다녔던 그들이었으니.


“어쨌든 이렇게 식량을 나눠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무리 동맹국의 병사들이라고해도 이렇게 선뜻 보급품을 나눠주기는 쉽지 않으셨을 텐데.”


“감사는 내가 아니라 아까 만난 라지라는 장교에게 해. 나눠준 음식들 모두 근처 국경수비대에서 차출한 거니까. 여긴 내 담당구역도 아니고, 난 그저 사람하나 찾으려고 산책 나왔던 거 뿐이야.”

셰르의 감사를 튕겨낸 로쿠베의 불편한 시선은 초소의 구석에서 의자 4개를 이어 붙여 잠을 청하고 있는 엘라에게 향해있었다.

“당신들은 이제 어쩔 거지? 이대로 카나반에 복귀할 건가?”


이번엔 시선이 집중되기도 전에 벤의 대답이 먼저 나온다.


“그래야죠. 이제 할 일은 다 했고, 더 이상 우리의 전쟁이 아니니까요.”


“허, 차갑구만.”


“제 상관도 납득하실 겁니다.”


그가 말한 ‘상관’이 누구인지는 로쿠베를 제외한 그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덕분에 리즈는 입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 ‘상관’의 정체가 이 나라의 국왕이라는 사실을 알면 로쿠베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리즈는 곧바로 들고 있던 빵을 떨어트려야했다. 로쿠베의 입에서 튀어나온 무심한 한마디가, 모든 계획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북에 남아있는 카나반군은 어떻게 되는 건가?”


“.......예?”

벤의 되물음을 신호로 모든 움직임이 정지한다.

“그 인간들, 아직 복귀하지 않았습니까?”


벤이 이끄는 부대가 국경을 넘는 것을 직접 확인하거나, 중간에 통신이 두절되어 상황을 확인하기가 어려워진다면 즉시 점령에서 물러나 계곡 아래로 복귀하라는 것이 토우칸과 사전에 협의한 내용이었다. 생각 외로 빠른 북군의 대응에 통신은 처음부터 두절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아직까지 토우칸이 퇴각하지 못한 이유는 오직 하나.


“그래. 듣기로는 바르사이파 성에 그대로 고립됐다고 하던데. 애초에 버리는 패였으니 상관없지 않나?”


그들은 버리는 패 따위가 아니다.

로쿠베는 그들의 지휘관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에 하나 왕의 형제가 적지에서 전사라도 해버린다면, 브린타이나와의 정세는 물론이고 참전을 반대했던 카나반 내 야당이 거세게 물어뜯을 것임은 불 보듯 뻔했다.

벤이 제멋대로 군을 차출할 때도 군말 없이 따라나선 토우칸이다. 그건 그가 벤을 믿고 있었기에 가능한 결정이었고, 벤도 토우칸의 능력을 믿고 있었기에 적진 한복판에서 버텨주기를 요청할 수 있었다. 벤에게 있어 토우칸은 버리는 패가 아니라 ‘믿는’ 패였다.


“하지만, 바르사이파와 바스단으로도 남브린타이나 군이 북진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째서 아직도 그들이 고립되어 있는 겁니까?”


모두가 공유하고 있던 의문을 대표하여 유진이 입을 열었다. 그에 대한 로쿠베의 대답은 코웃음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말했잖나. 동부경로를 통해 북진하는 건 2진이야. 그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북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것이지, 정말로 적과의 대대적인 교전을 위해 움직이는 게 아니다- 이 말이다. 오히려 너희 카나반군이 동북부에 위치한 모든 북군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으니, 남군으로선 움직이기 쉬웠을 테지.”


“.......그건.......”


“차갑다고 생각하나?”


비웃음에 가까운 로쿠베의 미소가 가지고 있는 의도는 명백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상관도 납득할 것이다.’ 라고.

최선의 의도를 지니고 구원하러 온 동맹군이라고는 하나, 그들의 안위까지 보장해 줘야할 의무는 없다. 그것이 설령 동맹국 왕의 형제일지라도, 론크리스의 입장에선 그들의 책임으로 돌린 후에 마음껏 이용만 하면 되는 일이다.


어디까지나, 카나반군을 이끌고 멋대로 뛰쳐나간 것은 벤의 선택이었기에.


실로 ‘크리스’다운 판단.



무거워지는 분위기 속에서 벤은 한 눈동자를 찾는다.

자신의 친구와 꼭 닮은 검붉은 빛의 눈동자였다. 그리고 그 눈동자가 품고 있는 답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의 확신이었다.


“로쿠베 경, 부탁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음?”


로쿠베는 어느 정도 이어질 내용을 예측한 채로 벤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지금 당장 병사들을 배불리 먹였다지만 카나반으로 복귀하기 위해선 더욱 많은 보급품이 필요할 터.

그러나,

이어진 벤의 목소리는 로쿠베가 생각한 것과 정반대의 방향을 지니고 있었다.




“다시 산맥을 넘어 올라가봐야겠습니다. 일주일. 딱 일주일분의 보급을 빌릴 수 있을까요?”


그리고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한 것인지 로쿠베가 제대로 이해를 하기도 전에, 벤은 짤막하게 한마디를 더 붙인다.



“물론, 대금은 베르달의 늑대께서 지불해 주실 겁니다.”




=================




산을 등지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바르사이파 성은 다른 계곡의 성들과 마찬가지로 방위를 목적으로 한 거점이라고 하기엔 부족함이 많았다. 낮고 허술한 성벽과 교역을 위해 무리해서 확장한 성문, 거기에 부족한 예비물자까지.

그랬기에 기습만으로도 성을 점령할 수 있었던 카나반군이었지만, 반대로 그곳에서 포위당한 채 수성전을 펼쳐야하는 지금의 상황은, 간단했던 공격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마법사들은 마력을 보존하는 데에만 신경을 써라! 맞포격은 절대로 하지 마!”


비루한 성벽을 대신하여 적군 포격의 대부분을 대신 막아주는 건 뿜어낸 마력을 통해 전개한 마법사들의 보호막이었다. 그러나 전투마법사전력만 비교해 봐도 그 차이는 배 이상. 제대로 된 화력전은커녕, 교대로 방어에만 급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카논의 외침은 그런 마법사들의 집중력을 붙들기 위한 명령이었다.

그러나 마법사들도, 카논도 알고 있었다.

이런 수비적인 반응이야말로 적군이 원하고 있는 흐름이라는 사실을.


마법사들의 화력으로 적을 저지하지 못한다면 대신 그 역할을 수행해야하는 건 병사들의 개인화기다. 그러나 문제는, 화살이나 탄약은 마력처럼 휴식을 취한다고해서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탄약을 아끼자니 적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고, 막상 사격을 집중해도 적 마법사들의 보호막을 뚫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지루하지만 치명적인 공성은 북브린타이나군으로선 급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정공법이었다.


처음 카나반군이 이곳을 점령했을 때, 북브린타이나의 방위군은 이들의 등장을 남군의 북부 침공을 위한 거점개척이라 판단했다. 따라서 그들은 곧바로 바르사이파 성을 탈환하고 계곡을 틀어막기 위해 군을 결집시켰지만, 근방인 바스단 계곡을 통해 올라온 또 다른 적의 별동대가 방위군을 격파하고 한복판으로 파고들자 상황은 급변하고 말았다. 예정에 없었던 국경수비대의 차출에, 갑작스러운 동원령까지. 오고가는 명령덕분에 지휘선에 혼란이 왔던 것이다.

그렇게 벌어진 틈을 통해 바르사이파를 점령하고 있던 카나반군은 쉽게 그곳을 벗어날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다. 때맞춰 벤과의 통신도 두절됐으니, 협의한 대로 빠르게 군을 물러 남쪽으로 귀환하면 됐을 터.

그러나 토우칸은 물러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너....너무 빠르게 토,통신이 두절...됐어요....... 지, 지금 우리가 후..퇴하면....... 적의 혼선을 저,정리해주는 꼴이 될...겁니다. 그,그럼 적들은 곧...곧바로 검..성님의 부대에 벼,병력을 집중시킬 거..겁니다. 우,우리가 조금 더..... 이곳에서 버텨주어야 하,합니다.”


토우칸은 벤의 부대가 가지고 있는 전략적 무게감과, 그의 성공으로 인한 북군과 남군의 움직임까지 날카롭게 계산하고 있었다. 즉, 벤의 움직임으로 인해 북브린타이나의 중앙군이 이북으로 후퇴하리란 사실과, 그 직후 남군이 옥스토브라카를 중심으로 자신과 벤이 뚫어놓은 동부경로를 통해 북진할 거라는 점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벤의 후방을 지키며 시간을 끌다가 재정비를 마친 적군에 의해 포위당한다고 해도, 조금만 버티면 계곡을 통해 올라온 남군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예상이었다.

그의 예측은 놀랍게도 모두 들어맞았다. 다만 한 가지, 그가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하나 있었다.

바로 론크리스라는 왕이 지니고 있는 지휘관으로서의 ‘냉철함’이었다.


자신이 개척한 바르사이파 계곡과 벤이 개척한 바스단 계곡을 통해 남군이 진출하기 시작한 것까지는 토우칸의 예상대로였다. 그러나 그들의 우선적인 목적은 고립된 카나반군의 구원이 아니었다. 오히려, 토우칸군이 1만에 달하는 북부방위군의 발을 묶어놓고 있는 사이 남군은 우회를 통해 북군의 우측면을 압박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런 남군2진의 움직임이 지닌 의미를, ‘오열의 검성’으로부터 동부방위군의 지휘권을 위임받은 카스나 벨레이가 간파해내고 만다. 동부로 북진해온 남군이 공격의 의미라기보다는, 서부로 침투해온 용병들과 마찬가지로 견제에 목적을 두고 있음을 꿰뚫어본 것이다.

남부군의 수장인 론크리스에게 있어 바르사이파를 점령하고 있는 카나반군과, 그들을 구원하는 대신 우회하여 동부의 중심부로 침투해온 2진은 이른바 ‘버리는 패’였던 것이다.

물론 읽혔다고는 해도 그녀의 수가 허위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당장 바르사이파 성만 하더라도 2개연대의 병력을 묶어두고 있었고, 나머지 모든 방위군은 옥스토브라카 이북의 중앙군으로 편입되는 대신 동부지역방어를 위해 별개로 운용되기 시작했으니까.

직접 바르사이파 탈환의 지휘를 맡은 카스나 벨레이가 급할 것 없이 지공을 택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곳을 지원할 남부군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거점을 탈환함으로써 보급로를 끊게 된다면, 깊숙이 침투해온 남군2진은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오열’의 중앙군으로 합류하는 건 그 이후라도 상관없다. 블라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후퇴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은 벨레이도 마찬가지였지만, 직접 동부방위군의 지휘권을 양도받은 이상 기대에 보답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기에.



“적의 지휘관이 누구인지 아직도 파악하지 못했나?”


진지구축을 위해 주변의 숲을 모조리 밀어버린 상태. 덕분에 벨레이는 그리 높지 않은 언덕 위에서도 훤히 공성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그의 계획대로 이어져가고 있었지만, 단 하나, 적의 저항이 생각보다 단단하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그였다.

처음에 그는 이런 정공법도 필요 없이 바르사이파를 탈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알려진 정보에 의한 바르사이파 성은 수성의 이득이라고는 조금도 볼 수 없는 상태였던 데다가, 자살임무나 다름없는 이런 곳에 정예병과 제대로 된 지휘관을 파견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적은 그의 예상보다 더욱 견고하게 성을 방어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벨레이는 이것이 성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의 질이나 보급상태 때문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처음부터 작정했다는 듯 수비적으로 운용하는 전투마법사들. 그를 간파하고 이쪽이 탄약소모를 유도하기 위해 거짓공격을 내보이면 제대로 반응하지 않다가, 본격적으로 공격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면 거세게 저항하기 시작한다. 그 미묘한 완급 차이를 적의 지휘관은 제대로 집어내고 있다.

사지의 최심부에서도 능숙하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그 대담함과 판단력.

벨레이도 결국엔 한 명의 기사이자 지휘관이었다. 적의 특작부대를 저지하고 렌을 보좌하라는 임무를 실패한 지금, 새롭게 받아들인 임무를 위해서 그 누구보다도 다급하고 절실한 그였음에도 군인으로서의 순수한 호기심이 먼저 고개를 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군복으로 봐서는 파견된 카나반군인 것 같습니다만, 지휘관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얻지 못했습니다.”


벨레이의 부관으로서 마찬가지로 방위군에 편성된 빈스였다. 그러나 실패로부터 빠르게 회복한 벨레이와는 달리, 빈스는 좀처럼 충격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는 중이었다. 줄곧 굳어있는 표정. 전투에 임하면서도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 벨레이는 다그치는 것만으로는 평생을 모셔온 주인을 잃은 그를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부관으로 삼아 가까이에 두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중앙으로부터 별다른 소식은?”


“검성께선 적들이 계곡을 넘는 걸 그대로 지켜보실 생각이십니다. 일부 지휘관들은 남군이 계곡을 넘어 제대로 전개하기 전에 저지하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입장입니다만, 검성님의 태도는 변함이 없으십니다. 아마 남군의 선공으로 곧 교전이 일어날 듯합니다.”


“흐음....... 그분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군.”


빈스가 벨레이의 혼잣말에 동조하여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거대한 폭음이 산맥을 뒤흔든다.

높게 솟구치는 흙과 먼지. 그리고 군데군데 붉게 번지는 안개와 뒤틀린 비명. 그 처참한 광경에 움찔하면서도, 벨레이의 입가엔 묘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하, 이번엔 저곳인가? 대단하군.”





“공병들은 성벽의 상태를 확인하라! 각 분대장 피해상황 보고해! 마법사들! 집중을 유지해라!”


참모의 역할을 물론이고 현장지휘권까지 양도받은 카논이었기에, 이곳에 온 뒤로 그녀의 하루는 고함으로 시작해서 고함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물론, 지금의 고함은 조금 더 다급한 색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성벽에서 솟아난 폭발은 카나반군의 전투마법사들이 사전에 응집해놓은 마력, 즉, 마력지뢰였다. 다만 그 지뢰를 심어놓은 위치야말로 모든 ‘공격자’들의 예상과 상상을 때려 부수는 요소였다.

방어하는 입장에서 해자를 포함한 성벽 밖에 마력지뢰를 심어놓는 것은 통상적인 절차다. 물론 지금처럼 적이 성을 공략함에 있어서 급할 것이 없는 때엔 쉽사리 감지되어 해제당하는 것이 보통. 그렇기에 토우칸은 파격적인 대안을 내놓는다.

바로 성벽안쪽과 성문 내부에 마력지뢰를 심어놓는 방안이었다.

아무리 볼품없다하더라도 수성에 있어서 성벽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그 성벽을 이용하여 어떻게 화력을 유도하고 어떻게 수비군을 배치하는가에 따라 버틸 수 있는 정도의 차이가 크게 벌어질 수 있다. 그런 성벽에 마력지뢰를 숨겨놓는다는 건, 이른바 진내사격과 다름없는 발상인 것이다. 물론 그 위력과 방향을 조절하여 성벽자체나 수비병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피해가 누적된다면 허름한 바르사이파의 성벽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직접 현장에서 지휘를 하고 있는 카논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그녀는 다급하지 않았다. 처음엔 반신반의했던 그녀도, 이제야 그 효과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박에 가까운 지뢰운용을 통해 토우칸이 노린 것은 단순한 적병의 퇴치가 아니었다. 바로 성벽을 올라 공격해야하는 적군의 공포심이었다.

마력의 보호막으로 결계가 이루어진 성문과 성벽을 공략하기 위해선 병사와 기사들이 직접 발을 벗고 뛰어들 수밖에 없다. 그런 그들의 앞에 자폭과 다름없는, 어디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었으니, 공격하는 브린타이나군의 입장에선 섣불리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머뭇거림이 쌓이고 쌓여 전체적인 공성속도에 분명하게 영향을 주고 있었다.


“카...카...카논 경.......! 사, 상황은 어떻..습니까?”


“토우칸님?!”

쉴 새 없이 적의 총탄과 마법이 날아드는 성벽 위의 망루. 카논은 지뢰의 폭발로 인해 잠시 포격이 잠잠해진 틈을 타 망루로 모습을 드러낸 토우칸을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맞이한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위험합니다!”


그녀의 외침에 토우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웃음을 머금는다.

위험하다고 외치는 그녀야말로 갈색 피부 위를 하얀 먼지로 뒤집어쓴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적갈색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기에, 토우칸은 다소 안심할 수 있었다.


“거,거..걱정 마..세요.. 보기만 하,할 겁니다.”

남색 군복이 이처럼 어울리지 않는 지휘관도 드물 것이다. 카논은 비대한 몸집을 움직여 망루 밖으로 얼굴을 내미는 토우칸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몰려드는 적의 움직임. 공격의 방향과 강도.


성벽을 휩쓸고 있는 먼지와 뒤틀린 마력의 잔재가 가라앉기도 전에 토우칸은 그 모든 것을 검붉은 눈동자에 담을 수 있었고, 그가 내린 결론은 실로 간단하면서도 치명적인 한마디였다.

“.......슬슬 고비네요. 저,적의 지휘관이 이쪽의 약점을 제대..로 짚어낸 것 같습니다.”


토우칸의 혀는 그가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더듬거리는 버릇을 잊는다는 사실을 카논은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그의 ‘올바른’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낀다.


“어떤 약점말씀이십니까?”


“어제 오후까지만 해도 적 후방에 위치한 막사에선 끊임없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죠. 공격을 교대하기 위한 예비대를 준비시키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 움직임도 없어요. 그것은 즉, 일부 병력을 떼어내어 별동대로 움직이게 하고 있다는 뜻이고, 지금으로선 그 별동대가 침투할 위치는 오직 한 곳뿐입니다.”


그곳이 어디냐고 카논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이미 토우칸의 눈동자가 그 장소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뒷산입니까.......”


“예. 아마 적은 최대한 가볍게 무장시킨 별동대로 절벽을 올라 이곳의 후방을 치겠다는 심산이겠죠.”


카논은 입술을 깨문다.

비록 숫자에선 밀리고 있으나, 제대로 된 편제를 갖추고 있었다면 적의 모든 침임 경로에 대해 미리 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바르사이파를 수비하고 있는 카나반군은 정상적인 편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기사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정면공격에 대한 수비야 적재적소에 병력을 배치하고 마법사들의 보호, 그리고 마법지뢰 등의 편법을 통해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다. 그러나 그 규모와 자세한 경로를 알 수 없는 후방공격, 그것도 기사를 중심으로 한 교란에 대처할 수 있는 수단이라곤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말을 내뱉으면서 카논은 자신의 무력함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아무리 여기까지 자신들을 버티게 해준 토우칸이라 할지라도 이 이상의 요행을 바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카논은 그 사실이 너무도 괴로웠다.




“뭐, 뭐어....... 버, 버텨 봐야죠.......?”


순박한 웃음이었다.

도무지 전장의 한복판, 그리고 죽음의 가시권에 들어와 있는 왕족의 얼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푸근하고 순진한 웃음이었다.

카논은 토우칸의 그 얼굴을 바라보며 확신하게 된다.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이 미소만큼은 지켜내야겠다고.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머리 조금 아프다고 뒹굴거리다 일어나보니 주말이 사라져버렸네요 ㅠ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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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4) +10 15.11.16 914 25 17쪽
186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3) +10 15.11.11 857 22 20쪽
18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2) +6 15.11.07 867 20 19쪽
18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 +8 15.11.01 1,081 27 18쪽
183 (막간) 나의 태양에게 +8 15.10.27 886 29 11쪽
182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8) +12 15.10.22 923 28 23쪽
181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7) +8 15.10.17 1,044 27 19쪽
180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6) +8 15.10.12 951 28 22쪽
179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5) +12 15.10.07 857 25 21쪽
178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4) +6 15.10.02 923 27 24쪽
177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3) +8 15.09.27 854 23 21쪽
176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2) +6 15.09.22 842 23 20쪽
175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1) +4 15.09.17 999 25 20쪽
174 (막간) 결국 안식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8 15.09.12 919 26 21쪽
173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0) +6 15.09.07 818 24 24쪽
172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9) +6 15.09.02 918 24 19쪽
171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8) +8 15.08.28 1,004 24 17쪽
»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7) +8 15.08.24 1,149 27 22쪽
169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6) +16 15.08.18 1,022 33 20쪽
168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5) +8 15.08.13 877 24 21쪽
167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4) +10 15.08.07 991 27 26쪽
166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3) +6 15.08.02 984 23 17쪽
165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2) +6 15.07.28 966 30 28쪽
164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 +12 15.07.23 937 26 16쪽
163 (막간) 겨울에게 작별하는 방법 +10 15.07.17 1,155 28 19쪽
16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4 15.07.12 1,068 27 18쪽
161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0) +10 15.07.07 1,018 26 22쪽
160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7 15.07.02 997 22 20쪽
159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2 30 21쪽
158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2 28 24쪽
157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55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16 27 16쪽
155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4 35 24쪽
154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2 35 20쪽
153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06 35 23쪽
15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2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06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995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793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4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48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80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61 31 17쪽
144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2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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