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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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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1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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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DUMMY

각자 동떨어진 자리에 앉아있는 표정들. 교차하지 않는 시선들은 느긋함과는 거리가 멀다. 실로 오랜만에 모인 얼굴들이었지만 이제 그들 사이에 남아있는 것은 동지애가 아닌 불편한 공생의 흔적.


“이후 정보원에게 직접 욘으로 가서 해당 군수회사의 자금을 추적하도록 의뢰했습니다.”


말을 마친 로빈이 케타의 보고서를 내려놓는다. 그 ‘정보원’이 누구인지는 이들의 반응이 귀찮아질 것 같아 비공개로 두었지만, 다행히 보고를 들은 사람들의 관심은 그 정보원의 정체보다는 내용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군수업체의 이름이 뭡니까?”


로빈의 집무실에 들어서면서부터 줄곧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란다였다. 그의 미간은 로빈이 보고서를 내려놓은 때를 기점으로 구겨짐이 정점에 이르렀고, 로빈은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다국적 군수산업체 ‘마르트’의 계열사입니다. 물론 잘 알고 계시겠지요?”


모를 리가 없다. 마르트의 카나반지부 경영권을 인수한 장본인이 바로 란다 가슈펠라르 그였으니.


“계열사라고는 해도 상호명도 없는 병기개발과 아닙니까. 저는 그런 계열사가 있는 줄도 몰랐고, 그런 의혹이 있을 줄은 더더욱 몰랐습니다.”


“압니다. 지금 란다 경의 책임을 논하고자 하는 게 아니에요. 단지 개인적으로 파고 있는 상황에 대해 여러분께 중간보고를 드리기 위해 이 자리를 만든 겁니다. 이제 막 시작한 단계입니다. 아직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구의 사주인지, 누구의 돈인지, 아무것도 몰라요.”


다소 볼썽사납게 연루를 부인하는 란다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힘겹게 자리 잡은 가주의 위치. 그로서는 불미스러운 일로 꼬투리를 잡히는 것만큼 짜증나는 일도 없다. 그렇지 않아도 가문의 더러운 일 따위나 도맡아 해오던 말단이 갑자기 가주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을 아니꼽게 바라보는 내부의 시각이 따갑다. 그 중심을 다잡기 위해 귀족파대표가문의 가주임에도 전력을 다해 로빈을 보좌하면서 의회에서의 영향력을 키워왔는데, 이런 의혹에 흔들려서는 안 되는 시기인 것이다.


“배후라면, 당연히 욘을 먼저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계열사가 욘으로 이주했다고 하셨지요. 기업과 용병에 있어서는 철저하기로 유명한 욘의 금융위원회가 그런 불명확한 기업의 이주를 허가해줬다는 사실부터가 의심스럽습니다만.”


이어진 오로메의 발언에 란다는 다소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녀의 주름진 입술을 바라본다. 비공식적인 자리이긴 하지만, 그토록 의회에서 서로 날을 세운 그들이었기에 조금은 견제의 공격이 날아들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자신이었다면, 분명 그 진의는 제쳐두고서라도 좋은 비난의 패로 썼을 테니까.


“이미 욘에도 지부를 가지고 있는 마르트이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대통령에게 묻는 쪽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긴 합니다만-”


“대통령도 용의 선상에 놓고 싶으신 거군요.”


줄곧 와인만 축내고 있던 카니아 시즈키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물론, 그녀 또한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모든 사건의 근원이 자신의 가문이자 아버지인데다가, 웬만해서는 의회에 출석하지 않는 그녀를 수도로 불러들인 이유가 귀찮은 과거를 끄집어내기 위함이라니, 그녀의 성격상 분명 심기가 뒤틀려있으리라.


“예. 표면적으론 우호협력관계에 있지만,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니까요. 그럼 일단, 따로 덧붙이실 내용이 없으시면 이 이야기는 추후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다시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에, 다음은 그라우치 장군과 그의 아들인 보르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로빈은 자연스럽게 오로메를 향해 시선을 옮긴다. 다른 귀족파 의원들처럼 사촌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라우치 장군과 그의 아들 보르케의 행각이 ‘죄’인지조차 불명확한 상황이니까.

“사전에 통보한 대로 장군은 어떠한 군이나 호위 없이 단신으로 아르다르에 입성한 상태입니다. 곧바로 저와 면담을 하고 싶다는 그의 요청에 따라 별관에서 근위병들이 지키고 있는 중인데요. 앞서 말했듯이 일단 제 암살기도나 야노르 시즈키치의 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개인적인 조사에서는 판별이 났습니다만, 재판보다 앞서 저와 면담하고 싶다는 그 이유는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먼저 비웃음과 함께 입을 연 것은 란다.


“그들이 모든 사건들과 관련이 없다는 것은 폐하의 사견일 뿐이지, 아직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기사후보생들을 회유하려고 했는지는 재판이 되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재판에서 증언하기도 전에 폐하와 면담이라니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절대 허락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곧바로 그에 반박하는 오로메의 주름진 입술.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폐하와 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몸으로 보여준 그라우치입니다. 그가 북부를 담당하고 있었기에 혼동의 내전 속에서도 폐하가 왕위에 오르고 공화국을 다스릴 수 있었음을 잊으셔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가 폐하에게 거역할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윌리안 가슈펠라르나 야노르 시즈키치와 동조를 했겠지요. 모든 것이 드러난 지금 상황에서도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홀로 수도로 입성한 모습이 그 증거입니다.”


“웃기는군요. 마치 그가 아니었다면 폐하가 왕위에 오르지도 못하셨을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란다가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소파에 반쯤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세운다.

“윌리안이나 야노르에게 동조하지 않았다고요? 하지만 동시에 그 둘이 폐하께 대항하는 와중에도 움직이지 않고 도움을 드리지도 않았잖습니까? 그는 그저 자신의 세력을 보존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지금 와서 그 진상이 밝혀지려고 하니, 그것이 두려워 이제야 폐하께 충성을 바치려는 척을 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지요.”


온도가 치솟기 시작한 두 귀족대표의 언쟁을 중재한 목소리는 로빈의 만류도, 총리의 호통도 아니었다. 그들 사이를 흐르기 시작하는 낮은 웃음소리가 모두의 시선을 잡아끈 것이다. 그 이해하기 힘든 웃음은 카니아의 목에서 뻗어 나오고 있었다.


“아 웃기네. 언제부터 다들 그렇게 왕에게 충성이니 뭐니 중요시했다고 그러시나?”


“무, 무슨 말씀이오, 카니아 경!”


당혹스러운 란다의 되물음에도, 카니아의 웃음소리는 그 농도를 더해만 간다.


“왕당파고 귀족파고 의회의 귀족이라는 작자들이 다들 왕의 똥꼬나 빨려고 안달이 나있잖아요. 충성이라니, 웃겨서 말이 안 나오네. ‘대표’라는 이름이 부끄럽지도 않나? 애초에 귀족 중에서 폐하가 진정으로 ‘아군’이라는 단어를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이 베르달의 늑대 말고 또 누가 있지?”


“말이 지나치오!”


“안 지나쳐. 윌리안이나, 좆같은 내 아버지나 당신들이나 다 똑같아. 아직도 ‘공화국’이라는 명칭에 얽매여서 구닥다리 생각을 지우지 못하고 있잖아. 가치판단에선 무조건 가문의 이득이 우선이고, 또 그걸 누가 얼마나 ‘티가 나게’ 했는지를 가지고 서로 싸우고 앉았지. 정작 ‘붉은 장미’의 그림자엔 벌벌 떨면서 다들 숨기 바빴지? 생색이나 내면서 사병을 빌려주는 것 말고, 직접 나서서 그녀와 맞붙은 건 나와 늑대, 그리고 그라우치 장군뿐이었어. 그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병사들이 흘린 피를, 마치 자신의 희생인양 포장하는 너희가 무슨 충성을 운운할 자격이 있다는 거야?”


“........”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다무는 란다. 그리고 그 표정은 오로메와 마누앙, 그리고 로빈까지 공유하고 있었다. 줄곧 와인으로 입술을 축이고는 있었다지만 그녀가 취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멀쩡한 얼굴빛과 곧게 핀 혀에선 어떠한 술의 기운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폐하, 그와 만나세요.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아마 그는 자신과 자신의 아들을 향한 어떠한 판결도 겸허히 받아들일 작정으로 왔을 겁니다. 그런 그에게 한 번의 기회는 줘보세요. 납득하지 못하시겠다면 그대로 재판을 열면 그만입니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북부는 훌륭한 지휘관을 영영 잃게 되겠지만.”


더 이상 할 말은 없다는 듯, 카니아는 다시 와인잔을 붉게 채운다. 어색한 침묵이 찾아온 집무실의 표정들을 로빈은 천천히 한 번씩 눈을 맞추며 의견을 확인했고, 긴 한숨을 시작으로 그 얼굴들의 의견을 정리한다.


“좋습니다. 이견이 없으시다면 그를 만나보는 걸로 하죠. 근데 카니아 경, 비공식적인 자리이기는 합니다만 어디까지나 같은 귀족대표끼리 의견을 나누는 곳입니다. 부디 과격한 언행은 삼가주세요.”


“예이 예이.”


반성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대답. 로빈은 그런 형수의 대담함에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 마지막으로 원정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총리님?”


왕의 부름을 받은 마누앙이 모든 이의 시선을 받으며 일어선다.


“원정군의 구성은 언론에 발표한 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장교는 훈련 중인 기사후보생들로 채울 것이며, 사병들은 모든 귀족 및 유지들에게 자율적으로 차출 받을 예정입니다. 다만, 저번 ‘붉은 장미’의 침략 당시 중앙군으로 편성되어 큰 손실을 입은 시즈키치가와 베르달군은 의무에서 제외할 생각입니다만, 이에 반대하시는 분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이를 각 귀족가주들에게 숙지시켜주시길 바랍니다.”


‘자율’이라는 단어와 ‘의무’라는 단어를 은근슬쩍 같이 사용한 마누앙의 저의는 분명했다. 편제는 가까스로 회복하긴 했지만 중앙군의 상처는 완벽하게 여물지 못한 상황. 이런 때에 발 벗고 스스로 나서는 자야말로 진정한 애국자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함이었고, 붉은 장미라는 거대한 그림자가 두려워 좀처럼 앞으로 나서지 못했던 이들이 중앙군의 놀라운 승리 이후에 갑작스레 열정을 불태우며 모여들기 시작한 분위기를 이용한 조치였다. 그리고 그의 기대에 보답하듯, 과거 적국이었던 브린타이나를 구원한다는 다소 불편한 명목 아래서도 꽤나 많은 지방귀족들이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원정군에 자원을 해왔다.

즉, 총리가 내민 ‘공지’는, 새로운 얼굴인 이들에게 영광의 자리를 빼앗기기 싫다면 의회의 귀족들도 알아서 처신하라는, 일종의 협박. 원정군의 편성과 중앙군의 회복이라는 양립하기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면서도 지방에서 썩고 있는 전력을 중앙으로 불러들일 방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풋내기 훈련생도들이 장교인데다가 여기저기서 모은 잡군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특히 우리 사정을 이해하고 있는 크리스를 제외한 브린타이나의 관료들은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 거예요. 말이 좋아서 구원군이지 그저 구색만 맞추려는 수작아니냐-는 거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그들과의 협력관계를 생각하면 우리 쪽에서 좀 더 성의를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성의라니....... 내전 따위에 구원을 보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에.”


로빈의 첨언에 란다는 혼잣말과 함께 와인을 삼킨다. 구원군에 성의를 더해야 한다는 로빈의 의견을 떠나서, 애초에 그는 구원을 보낸다는 생각 자체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로빈이 아실레마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선 반드시 브린타이나와의 연합이 필요하다는 논지로 의회를 설득하기는 했지만, 란다를 필두로 한 귀족파의 일부는 사병의 차출을 허락하면서도 여전히 그런 왕의 생각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카니아 경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네? 저요?”


로빈의 지목이 뜻밖이었는지, 카니아는 음미하던 와인을 잔에 도로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사병의 차출도 면제받은 상태에서 자신이 원정군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남아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로빈의 말은, 모두의 표정을 경악과 납득으로 동시에 물들이기에 충분했다.




====================




“엥? 마스터도 따라오시는 거예요?”


고도는 바닷빛 눈동자를 커다랗게 뜨고 망자를 바라본다. 소집령이 떨어진 후, 모든 군장을 챙기고 마지막으로 학회장에게 받은 ‘연애소설’을 찾아 동아리방을 찾아온 고도에게 오캄푸스가 뜻밖의 선언을 해온 탓이다.


“당연하지요. 애제자를 그런 난장판에 홀로 보낼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학회장님에게 말씀 안 드렸죠?”


“당연하지요. 애제자를 그런 난장판에 홀로 보낼 수 없다는 일에 따로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소집대상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따라오려고 그래요?”


“뭣하면 절 분리해서 군장 속에 넣어주시겠습니까? 좀 답답하겠지만 그 정도야 감수하지요.”


“아니, 그건 제가 싫어요........”

지친 한숨과 함께 머리를 감싸는 고도.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얼굴근육마저 이젠 모두 떨어져 나갔기에 오캄푸스의 표정을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었으나, 분명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있으리라.

“.......학회장님께 여쭤볼게요.”

여기서 무시했다가는 진짜로 군장 안에서 뼛조각들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아 고도는 어쩔 수 없이 스승의 ‘사랑’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빼곡한 군장 속에 가까스로 책들을 욱여넣으며, 그녀의 시선은 마지막으로 여전히 변함없는 악마를 향한다.

“넌 어쩔 거야, 데로?”


“뭘 말이냐.”


“따라올 거야 말 거야?”


책을 덮고,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고도를 올려다보는 악마.


“선택권이 있나? 저기 저 빌어쳐먹을 시체새끼가 그 지랄을 해놨는데.”


“그럼 빨리 준비해. 소집령 떨어졌어. 두 시까지 캉페온 광장에 집합해야 돼. 너, 그런데........ 그 모습으로 갈 거야?”


고도는 불안한 눈으로 데로의 조그마한 전신을 훑는다.

길이에 비해 터무니없이 얇은 팔다리, 그 안쓰러운 육신을 가리고 있는 것은 헐렁한 셔츠와 짧은 바지가 전부다. 하지만 그 차림새보다도 고도가 더욱 걱정하는 것은, 바로 검은 혀와 기다란 귀. 그를 원정에 대동하라는 학회장의 의도는 알 수 없었으나 그도 분명 데로가 이런 악마의 모습 그대로 외부에 노출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 안 되나?”


“야, 아무리 그래도 카나반은 아직 사도국이라고. 너 같은 악마를 아무렇지도 않게 데리고 다닐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인간으로 변신 같은 거 못해?”


“지금 이 허약한 모습도 최대한 인간으로 맞춘 것이다만, 모자르냐?”


“응, 모자라.”


“흐음.”

날카로운 턱을 짚고 잠시 고민하는 악마.

“그럼 의식의 전이밖엔 방법이 없군.”


“의식의 전이......?”


“그래, 내가 파동을 알고 있는 마법사의 의식으로 나의 존재를 전이하여 기생하는 방법이다. 길게 이어지진 못하겠지만, 내 존재를 지우면서 이동하려면 그 수밖에는 없겠지.”


경악하며 군장을 떨어트리는 고도.


“잠깐, 네 말은 나한테 빙의한다는 뜻이야?”


“굳이 니 새끼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여기 들렸던 마법사 중에 하나로 전이하면 돼. 그럼 잠시, 전이한 후에 이곳으로 다시 찾아오겠다.”


“잠, 잠깐! 적어도 누구인지는 알려주고 가야 할 거 아니야?!”


그러나 고도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악마는 그림자 속으로 형상을 감춘 채였다. 제멋대로인 그의 행동은 그렇다쳐도, 자신을 제외하고 이 동아리방에 들렀던 마법사 중에 전투마법사로 차출된 인원은 없을 터. 남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멋대로 행동하는 데로는 과연 악마라 부를만하다.


“.......어째 굉장히 불안한데.......”






“.......뭐야, 여기는?”


익숙한 마법사의 파장을 쫓아 의식을 전이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데로는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어두운 조명. 곰팡내가 은은한 벽돌들. 팔다리를 구속하고 있는 것은 이 육신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 족쇄다. 결정적으로,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쇠창살은 데로로서는 굉장히 어색한 풍경.


“........”


그는 어색한 육신을 이끌어 족쇄를 벗겨내고, 쇠창살을 박살 내어 밖으로 나선다. ‘구속’이라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악마는 그 장소를 벗어나는 것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몸의 주인이 왜 그런 상황에 처해 있던 것인지는, 그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인간의 몸을 빌려서 동아리방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관심사. 방금 자신이 한 행동이 어떤 여파를 몰고 올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15분 후,

구금 중이던 라즈텔라무스 보르케가 경비병들을 기절시키고 탈출했다는 소식이 본궁에 도달한다.




===================




‘절규의 광장’이라 불리는 기사훈련소의 연병장. 모든 훈련생도들은 출격 전 마지막 사열식을 갖는 중이었다. 갑작스럽게 생도의 신분으로 실전에 투입된다는 상황은 모든 생도들의 얼굴에 긴장감을 박아 넣었고, 덕분에 별다른 통제가 없음에도 생도들은 깊은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직, 한 명을 제외하고.


“아아 훈련 안 받으니까 좋네.”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는 리즈를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동기들. 그나마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유진과 셰르만이 허탈한 미소를 짓는다.


“너는 이 상황에 훈련이 문제냐?”


“힘들게 구르는 것보다는 좀 빡세게 싸우는 게 낫지.”

익살스럽게 웃는 리즈. 셰르는 그런 그녀에게 물었던 자신이 바보였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러나 리즈는 오히려 그런 그에게 역공을 가한다.

“그나저나, 너네 분위기가 왜 그래? 복귀하고 나서 한 번도 안 싸우네?”


“어, 뭐, 뭐? 벼, 별로?”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젓는 유진. 셰르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게양대로 피한다.


“서로 알몸으로 부비고 있었던 거 때문에 그래? 걱정 마.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쉬, 쉬잇! 목소리 좀 죽여! 누가 들으면 오해한다고!”


작게 절규하는 유진의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리즈는 킥킥 웃기 시작한다.


“오해할 게 뭐있어? 사실이잖아?”


“아니, 그렇긴 한데.......”


유진의 얼굴은 이미 금방이라도 터질 듯 눈동자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셰르 또한 대답이 없었을 뿐이지 난감한 듯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뭐어, 나야 너네가 사이좋게 지내면 좋지만.”


“사이가 좋기는, 누가 이런 가슈펠라르 찌끄러기랑.......”


“........”


평소와는 달리 전혀 냉정함이 실리지 못한 셰르의 도발. 유진 또한 평소처럼 곧바로 대들지 못하고 달아오른 얼굴을 그대로 숙일 뿐, 별다른 말이 없다. 그런 둘의 모습에 더욱 크게 미소를 지으며 리즈가 물어뜯으려는 순간-


“주목!”

게양대 위로 모습을 드러낸 카논. 모든 생도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어제 공지한 대로 원정군의 중심은 바로 여러분이 될 것이다. 장교로서, 그리고 기사로서 첫 실전인 만큼, 카나반의 기사다운 모습으로 훌륭하게 직무를 수행하길 바란다! 배운 대로만 하면 된다, 배운 대로만.”

이 이상 형식적인 격려가 필요할까.

그 누구보다도 카논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이들에게 ‘교관으로서의’ 조언은 필요 없다는 사실을.

“검성님의 요청으로, 이번 원정엔 우리 교관들도 기사의 자격으로 같이 파견을 나가게 된다. 더불어 원정군의 총지휘관은 폐하께서 직접 임명하셨다. 지금 그분을 이 자리에 모셨으니, 모두 의젓한 모습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한다. 알겠나?”


“옛!”


도시 전체로 퍼져나가는 생도들의 힘찬 목소리. 카논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단상에서 물러난다.


“총지휘관님 입장하십니다.”


절도 있는 박수가 연병장을 뒤덮었고, 카논의 안내에 따라 게양대 위로 한 남자가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박수 소리가 잦아들면서, 동시에 생도들의 표정도 점점 의문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덕분이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어떠한 장군도, 기사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 비대한 몸집은, 군인인지 아닌지조차 구별이 힘든 상황.

카논의 손짓에 의해 완전히 박수 소리가 끊긴다. 그리고 남자는 머뭇머뭇 조심스럽게 단상 뒤로 다가선다. 흔들리는 그의 검붉은 눈동자. 그 속엔 생도들보다도 더한 불안이 깃들어 있었다. 입술을 떼었다 붙이기를 한참, 마침내 남자의 목소리가 연병장에 울려 퍼졌고, 생도들의 표정은 모든 교관이 지켜보고 있음에도 뒤틀리기 시작한다.





“바,바....반갑...습니다. 이, 이번에 총지....휘관을 마,맡게 된....... 토우칸이라고....하,합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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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5) +12 15.10.07 858 25 21쪽
178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4) +6 15.10.02 923 27 24쪽
177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3) +8 15.09.27 856 23 21쪽
176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2) +6 15.09.22 843 23 20쪽
175 (17막) 새로운 흐름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1) +4 15.09.17 1,001 25 20쪽
174 (막간) 결국 안식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8 15.09.12 919 26 21쪽
173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0) +6 15.09.07 818 24 24쪽
172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9) +6 15.09.02 919 24 19쪽
171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8) +8 15.08.28 1,004 24 17쪽
170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7) +8 15.08.24 1,150 27 22쪽
169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6) +16 15.08.18 1,024 33 20쪽
168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5) +8 15.08.13 878 24 21쪽
167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4) +10 15.08.07 991 27 26쪽
166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3) +6 15.08.02 984 23 17쪽
165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2) +6 15.07.28 967 30 28쪽
164 (16막) 회색빛의 철, 그 끝에 맺힌 눈송이를 (1) +12 15.07.23 938 26 16쪽
163 (막간) 겨울에게 작별하는 방법 +10 15.07.17 1,155 28 19쪽
16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1) +4 15.07.12 1,070 27 18쪽
161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0) +10 15.07.07 1,018 26 22쪽
160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9) +7 15.07.02 998 22 20쪽
159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8) +8 15.06.27 982 30 21쪽
158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7) +10 15.06.22 832 28 24쪽
157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6) +8 15.06.17 1,055 28 20쪽
156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5) +10 15.06.12 1,216 27 16쪽
155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4) +6 15.06.07 874 35 24쪽
154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3) +6 15.06.01 922 35 20쪽
153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2) +8 15.05.27 907 35 23쪽
152 (15막) 마침내 마주치는 눈동자 속에서 (1) +8 15.05.22 832 31 20쪽
151 (막간) 와인보다 진한 것 +8 15.05.17 1,106 31 13쪽
150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1) +6 15.05.11 995 34 19쪽
149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10) +8 15.05.06 793 34 21쪽
148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9) +11 15.05.01 1,004 33 17쪽
147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8) +15 15.04.26 1,148 28 21쪽
146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7) +12 15.04.21 980 33 21쪽
145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6) +8 15.04.16 1,061 31 17쪽
» (14막) 나의 파도가, 너의 파동을 집어삼키리라 (5) +8 15.04.11 1,133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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