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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마지로의 만려일작(萬慮一作)

낙조십일영

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일반소설

완결

견마지로
작품등록일 :
2022.05.11 10:12
최근연재일 :
2022.08.29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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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9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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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결미(結尾): 조선 태종 십삼년 음력 십일월 스무 엿새

DUMMY

임금은 오랜만에 익선관 아래 이마를 문질러대었다.

왕자시절 이미 없어졌다고 생각하던 버릇이 다시 튀어나온 것이었다. 지금 그의 앞에는 사소하면서도 난감한 문제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솔직히 표면적으로는 왕의 앞, 상참에 올라올 만큼 중한 안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안건 안에는 예전 자신과 자기 부친 태조 대왕의 결단이 같이 섞여 있는 문제가 들어 있었다. 임금은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별로 보고 싶은 내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 부복한 채 앉아있는 만조백관들은 모두 왕의 옥음(玉音)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 이미 전날, 스무하루에 답을 내렸는데 아직도 대신들은 답을 원하는 것인가.”

이제 수염이 하얗게 세기 시작하는 왕의 눈매는 주름이 진 것을 제외하고는 젊은 시절과 다름없이 날카로우면서도 사나웠다.

신하들은 여전히 늙은 왕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왕은 그렇게 신료들을 주르륵 노려보면서 그들의 태도를 보는 것을 즐겨하였는데, 오늘은 그의 앞에서 다른 의견을 내 놓은 결기있는 신하는 보이지 않았다.

이 일에 대해서 왕의 의견이 맞다고 여기거나 때가 되었다고 여긴다 봐도 될 터였다. 왕은 심중이 정리되자 조용하고 낮은 소리로 말을 내었다.

“이미 날이 추우니 판결나지 않은 이들을 옥에 계속 둘 수는 없소. 즉시 왕거을오미를 석방하고 관련자를 파직하오. 그것으로 족하오.”

왕의 탁자 위에 올라가 있는 상소는 공주(公州)에 사는 한 백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왕거을오미(王巨乙吾未).

공주에 사는 미천한 농부이자 고려 왕가 순흥군 왕순의 손자였다.

일전 태조시절 일어났던 왕씨 왕족들의 참극에서 모든 이들이 칼날 아래 죽은 것은 아니었으니, 왕거을오미의 부친인 왕휴 역시 가까스로 살아나 공주로 피신하였고, 그곳에서 여인을 만나 왕거을오미를 얻은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왕거을오미는 공주에서 평생을 살다가 호패를 받을 나이가 되자 집안이 그 일을 아뢰었고, 이 일의 연유를 알게 된 지신사 김여지가 조정에 직접 발고를 한 것이었다.

이 일이 조정에 들어오자 조정은 마치 벌집을 얹어놓은 듯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그 여죄를 몰아 왕거을오미는 물론이요 그를 발고한 자의 과거까지 모두 조사하며 관련자들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임금, 이방원은 조정 대신들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방원은 상소를 새삼스레 다시 펼쳐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스무해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이 일은 지박령처럼 왕실에 늘어붙어 있는 것 같았다. 이방원은 그제야 부왕 이성계가 이 일을 왜 꺼리고 또 꺼렸는지를 알 법하였다.

참으로 질기구나. 이방원의 속내는 채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왕은 상소를 보고 아무것도 모른 채 옥에 갇혀 있는 젊은 왕씨의 후손을 생각할 때, 임진강변에서 첩리를 휘날리며 오만한 모습으로 안장 위에 앉아있던 자신의 과거가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방원은 고개를 내젓고는 아래에서 하교를 기다리는 신하들을 보며 옥음(玉音)을 높였다.

"옛부터 제왕(帝王)은 하나의 성(姓)이 아니었고 천지(天地)와 더불어 시종(始終)이 상응하였으니, 모두 조부(祖父)가 덕(德)을 쌓았기 때문에 흥하는 것이고 그 자손(子孫)에 이르러 덕이 없어지면 망하는 것이다. 만약 이씨(李氏)가 도(道)가 있으면 비록 백 사람의 왕씨(王氏)가 있다고 하더라도 무어 걱정할 것이 있겠느냐? 그렇지 않다면 비록 왕씨가 아니라 하더라도 천명(天命)을 받아 흥기(興起)하는 자가 없겠느냐? 더군다나 국초(國初)에 왕씨를 제거한 것은 실제 태조(太祖)의 본의가 아니었으니, 마땅히 다시 말하지 말라."

이방원은 말을 하면서도 심기가 편하지 않았다. 속이 더부룩할 지경이었다.

왕은 잊고 있었던 과거사가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렇게 속이 체한 듯 불편한 것은 젊은 날의 단견(斷見)에 대한 반성이요, 그 시절을 같이 했던 사람에 대한 회한이며 자신의 모순된 행동에 대한 뉘우침일터였다.

그 날 이후, 정안군 이방원은 결국 칼을 들고 궁궐에 칼날을 향하여 이복동생 세자를 폐하여 참하고, 스스로 머리에 왕관을 썼다. 이방원은 이복동생을 죽이고 아비 이성계를 배신한 것으로 정몽주부터 시작된 야차의 피투성이 길을 마무리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한번 칼날에 묻은 피는 또 다른 피로 씻어내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 이후였다.

왕은 그 이후로 아비와 전쟁을 벌이고, 장인을 내치고, 자신을 보필한 공신을 참하고 자신의 처남들을 도륙하여 끝없이 피로 피를 씻어내었다.

그리고 그 일은 결국, 자신의 삶의 유일한 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되돌리고 싶지만 되돌아갈 수 없는 길, 유자의 길을 버린 패자(覇者)의 길은 결국 주위 사람들의 죽음으로 모든 것을 청산해버렸던 공양왕의 충신 대중대부 오현도의 길에 고스란히 이어져 있었다.

늙은 왕은 나이가 찬 지금에 와서야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고 있었다.

이방원은 잠시 입을 닫고 대전의 바닥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고 신료들에게 말하였다.

"금후로는 왕씨의 후손이 혹은 스스로 나타나거나, 혹은 남에게 고발 당하는 자는 아울러 자원(自願)하여 거처(居處)하는 것을 들어주어서 그 삶을 평안하게 하라."

말을 맺은 이방원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실로 이십여년 간 자신도 모르게 왕실 위에 얹혀있던 큰 돌덩이를 치우는 날이었다. 찌푸려 들었던 왕의 눈매는 천천히 평온함을 되찾았지만, 이미 왕의 치세는 한참이 지난 뒤였다.


*----------*


“형님, 제가 왔습니다.”

왕이 발길을 옮긴 건은 상왕전의 후원이었다. 서늘한 바람이 구중궁궐의 사방을 훑으며 사람들의 옷깃을 절로 여미게 만드는데 후원의 가운데에는 여전히 다른 이들보다 어깨 하나는 더 있어보이는 거창한 체구의 사내가 곤룡포를 입은 채 다가오는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상, 오셨습니까.”

상왕 이방과의 후덕하니 인자한 미소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었지만 풍성하게 물결치던 수염은 어느새 은색으로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해가 가고 달이 갈수록 이방원은 상왕을 대할 때마다 가슴이 아리고 눈물이 먼저 나왔는데, 나이 많은 형의 얼굴은 어느새 아버지의 용모에 가까워지고 있는 탓이었다.

“시위들은 열발짝 뒤로 물럿거라.”

두형제는 곤룡포를 두른 채 후원의 길을 조용히 걸었다. 근시들의 뒤를 따랐지만 두 노왕의 말을 알아듣는 것은 불가능했다. 두 사람은 유유자적 숲 사이를 거닐며 담소를 나누는데 그 모습은 실로 여염의 늙은 형제들이 농담을 주고받는 광경과 다를 것이 없었다.

“오늘 큰 결정을 내리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주상.”

“늘 맘에 걸리던 일이었지요. 형님도 아는 일이시고요.”

상왕 이방과는 이방원의 말에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방과를 보던 임금, 이방원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나무 사이로 이어진 잿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형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언젠가 나와 늙어 그 일을 논하지 않을 날이 있겠느냐고.”

“제가 그랬습니까?”

“그러셨습니다.”

이방과 역시 고개를 들고 동생이 하는 양을 따라하듯 하늘을 바라보았다. 두 왕이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하자 뒤를 따르던 신하들 역시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덩달아 쳐다보았다.

“갑술년의 일은 후회하오?”

“군왕은 무치(無恥)라 하니 후회할 것은 없습니다. 단지······”

“단지?”

“지난 날을 돌아보면 눈물을 흘리고픈 사람 몇이 남아 있긴 합니다.”

“전하의 백성들이오.”

상왕 이방과의 말에 이방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제 백성만 되겠습니까. 선왕께서도 같은 생각을 하셨겠지요.”

이방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덧 작은 정자에 다다른 이방과는 마치 젊은 시절이 생각나는 듯 무인답게 아무렇게나 정자의 계단참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를 보던 왕 역시 하늘을 보고 형과 함께 나란히 앉아 있었다.

“가끔 그 친구가 보고 싶긴 하구먼.”

이방과의 말에 이방원이 무심결에 피식 웃음을 지어보였다.

“견지유 말입니까. 척오조 지유 견태고?”

“주상께서 그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다니 놀랍소이다.”

“어찌 잊겠습니까. 그 부사리같은 사람을. 제게 대놓고 호통을 친 몇 안 되는 위인인데.”

누가 뭐라고 할 것 없이 두 형제는 하늘을 보며 껄껄 웃어넘겼다. 잿빛 하늘에서 하나 둘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시원하게 웃고 있던 이방과의 눈앞으로 흩날리던 하얀 꽃잎이 하늘대며 떨어질 때, 군왕이자 무장이었던 사내는 일찍이 자신의 옆에서 난제를 풀어내던 거칠기 짝이 없던 사내의 용모를 기억해내려 애썼다.

세월이 지나 사람의 인상은 모두 사라졌지만 오직 사내의 눈빛 하나만큼은 어제처럼 선연히 이방과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고마운 것만큼이나 미안한 것도 많고, 아쉬운 것만큼이나 별 걱정이 되지 않는 기이한 사내였다. 오직 하나, 너무나도 처절하게 헤어진 마지막 만남이 늙은 이방과의 심사를 괴롭히고 있을 뿐이었으니, 이방과는 종종 그 일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하곤 하였다.

하늘을 보던 이방과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어디서 뭘 하고 계시는가.”

이방과의 마지막 독백에 임금 역시 눈을 들어 잿빛 하늘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


어느덧 삭풍이 이는 계절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흙바람과 꽃샘바람이 이는 봄이 살포시 찾아오더니 시나브로 바람에 무더운 열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년년세세는 사람을 기다려주지 아니하고 세월은 사람들의 얼굴에 풍상의 주름을 그리고 떠나니 날이 갈수록 자라는 것은 수숫대와 아이들이요 해가 갈수록 사그라드는 것은 뜬 달과 어른들의 기력이었다.

하지만 어김없이 올 해도 봄은 오고 여름이 다가오니, 사람들의 발걸음은 이모저모로 빨라지고 절기에 맞춰 해야할 일은 어김없이 다가왔다.

“영금(瑛今)아! 영금아! 대체 얘는 어디 간 거야?”

카랑카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부엌 너머로 들리더니만 이내 치마에 둘둘 여민 중년의 여인이 손을 치맛자락에 대충 비비며 나와 사방을 돌아보았다.

여인은 쪽진 머리를 수건으로 동여매고 마당의 닭들 사이를 헤쳐가며 사람을 찾는데 이미 머리에는 하얗게 서리가 내려 있었지만 오뚝한 콧날과 붉은 입술은 젊은 시절 꽤 고왔을 법한 미태를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여인의 목소리는 미태와는 달리 걸걸하기 그지없었다.

“영금아!”

“아, 엄마, 다 들려요! 애 깬다고!”

그제야 활짝 문을 열어젖히고 젊은 여인이 아이의 젖을 물린 채 수건두른 여인을 바라보는데, 여인은 적잖이 당황스럽다는 듯 엄마를 보며 빠르게 종알거렸다.

“갑자기 젖 달라고 보채잖아. 애부터 먹이고 나갈 테니까 잠깐만 부엌 좀 봐 줘요.”

젊은 아낙은 뾰족한 콧날과 시원한 이마가 어미를 닮아서 그 미모가 돋보이는데, 눈빛만큼은 아비를 닮아 깊으면서도 날카로운 것이 호락호락한 상은 또 아니었다.

“이 년아, 말을 좀 하고 부엌에서 나가던가···.”

딸의 가슴팍에 매달려 있는 손주의 모습을 보고 있던 여인은 그제야 인상을 누그러뜨리고는 마당을 둘러보았다.

외양간에는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고 마당에 풀어놓은 닭들은 외양간과 집 처마에 올라가 사방으로 뛰어노는데, 그를 바라보는 누렁이는 한가롭게 마당 섬돌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농가의 풍경에 다를 것이 없었다.

“오서방은 아직 안 돌아왔니?”

“아저씨들 모시고 온다고 하고 나갔지요.”

“네 오라비, 율목이는 어디가고?”

“아버지랑 다른 오라비들 오는 거 보러 동구밖에 나갔어요. 이제 올 때 되었어요.”

“범도 제 소리 하면 온다더니.”

마당에 있던 여인이 피식 웃음을 머금으며 울타리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던 언덕길에 삐죽삐죽 비온 뒤 죽순처럼 머리들이 하나 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건장하니 헌헌장부의 생김을 한 장정들이 옷을 멀끔하니 차려입고 작은 농가로 모여 드는데, 맨 앞에 앞장선 반백의 사내가 청년들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사내는 여인을 보더니 싱긋 웃고는 손으로 마당 건너편을 가리켰다.

여인은 말없이 사내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 평상 위에 부엌에서 준비한 물건들을 하나 둘 꺼내놓기 시작했다. 옷매무시를 바로 한 영금이도 방에서 아이를 업고 나와 중년사내의 뒤를 따르는 장정들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오라버니들. 별 일 없었소?”

“어이구, 우리 영금이가 이제 진짜 애 엄마가 되었구나!”

“어디보자! 이거 이거···.아이가 그 신랑놈하고 판박이 아니여?”

“무슨 말이오? 나 닮았지. 이 눈 봐라. 누구 눈인가. 오서방 눈이냐? 내 눈이지.”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영금이와 영금이의 갓난아이를 바라보는데, 그 모습을 보던 중년의 사내는 웃음을 짓더니 자신의 옆에 있던 사내를 돌아보았다.

“율목이 너도 종삼이 데리고 오지 않고.”

“고뿔이 들어서 애 엄마하고 집에 두고 왔지요.”

“잘 했다. 괜스레 아기 옮기면 곤란하지.”

사내의 말에 시원스레 대답한 율목이는 이제 사내보다 머리 하나가 더 위에 붙어있는데 훤칠하고 당당한 것이 서주에서도 인물 좋기로 유명하였다.

머릿수건을 싸맨 중년여인은 부자(父子)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는데, 여인은 두 사람을 보고 있을 때면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떨어지지 않았다. 사내를 만난 뒤로 반평생 여인을 따라다닌 버릇이었다.

“아버지, 저기 아저씨들 오십니다.”

북쪽의 내리막길을 타고 세 명의 사내가 불쑥 머리를 들이미는 게 율목이의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영금이의 신랑인 오서방이고, 그 뒤로 깡마른 무복차림의 중년인과 옥색 도포를 걸친 중후한 외모의 늙은 선비가 오서방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흰머리의 중년 사내는 말없이 성큼성큼 마당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향하였다.

오서방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걸음이 빨라지다 급기야는 비탈길을 달려가 덥석 두 사람의 손을 잡는 중년사내의 입은 저절로 벌어져 이가 드러났다.

“여전히 강녕하시오. 지유.”

“경순이. 자네 더 말랐구먼.”

“견지유, 일가 모두 건강하십니까?”

“모두 건강하네. 일국이 이 사람. 볼수록 신수가 훤해지는구먼.”

“날이 날이니 좀 차려 입고 온 것이지요.”

세 사람은 서로의 손을 덥석 잡고는 말없이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고향인 교주 원주목에 돌아간 어경순은 그곳에서 자리를 잡은 지 오래였고, 홍일국은 예전 혼담이 오가던 집과 파혼한 뒤 한양으로 터전을 옮겨 그곳에서 궁시장을 열었다.

세 사람은 굳게 잡은 손을 영원히 놓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율목어미가 천천히 울타리밖으로 나와 세 명을 보며 웃음지으며 말하였다.

“언제까지 그리 서 계실 건가요? 모두 모였으니 이제 제를 지내셔야지요.”

이미 장승 같은 장정들이 모여 평상 위에 제수를 꾸려놓고 그들이 짊어지고 온 쌀과 음식들을 격에 맞춰 담아놓았다.

율목이가 방 안에서 하나하나 이름을 적은 신주를 꺼내 제삿상 위에 정성스레 내려놓았다. 여진사람 기아훈. 임진사람 왕지균. 개경사람 백해종, 한형무. 회령사람 장천보. 그리고 삭주의 첨병출신이자 아이들의 아버지였던 척오조 행수 이상겸의 신주가 나란히 위에 올려졌다.

“학문이 적어 양반의 격식을 모두 따르지는 못하니, 나름의 예로 매년 이리 제사를 지냄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견태고는 갓 대신 사방평정건을 머리에 두르고 공손히 신주 앞에 서서 신주의 이름 앞에서 나직이 축문을 고하였다.

“사월 열 닷새. 척오조 조장 지유 견태고가 의롭고 용맹한 척오조의 여섯 협객들에게 고하옵니다. 지유 견태고와 아이들이 여섯 협사의 도움으로 검란을 피해 양광 서주에 정착한 지가 올 해로 이십년이 되었으니 이는 모두 그대들의 공이 아닐 수가 없소이다.”

견태고의 뒤에 있던 어경순과 홍일국, 한형무 그리고 다른 장정들은 말없이 견태고의 축문을 듣고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성을 바꾸었고, 모두가 일가를 이루었으며 손이 빠르고 부지런해 자신들의 소산을 내어 먹고 살 수 있는 장정이 되었소니다. 그리고 이 모자란 견모는 딸이 외손주를 지난 해 낳았으니 실로 그 복이 크오이다. 이 모든 게 그대들의 공이니 어찌 금수가 아닌 한 그 공을 잊으리오. 그리고 지난 겨울, 임금께서 드디어 왕씨에 대한 추포령을 거두셨으니 어찌 이 모든 것이 그대들의 가호가 아니고 무엇이랴···..”

견태고는 축문을 읽다가 눈을 감았다. 종이를 잡은 사내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한참동안 말을 못 잇던 견태고는 다시 이를 악물고는 축문을 마저 읽었다.

“용기와 결기가 하늘을 덮었던 척오조의 위명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오. 그리고 그대들과 우리를 한 자리로 엮었던 수많은 하늘의 인연에 감사하니 오직 이 곳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의 생이 다 하는 그날까지 이를 잊지 않을 것이외다.”

견태고는 축문을 마치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이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사내들 역시 눈을 감았다. 견태고는 한참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비틀대며 슬쩍 옆으로 몸이 기우는데, 율목이가 그런 견태고를 잡아서 바로 일으켰다.

늙은 사내는 기력이 사라지고 정(情)만이 남았다. 견태고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를 보던 어경순과 홍일국이 옆으로 다가가 손을 붙잡고 어깨를 어루만지며 씩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유. 오늘은 좋은 날 아니오. 그만 우십시오.”

“그러게 말이오. 음복하러 천리길을 왔는데 이렇게 슬퍼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행수가 지유 이 모습을 보고 있으면 깔깔대며 웃고 있을 거요.”

견태고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보더니 눈물을 흘리면서도 입에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세 사람은 빤히 서로를 쳐다보더니 결국 서로의 목을 끌어안고 등을 두드리는데,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율목어미, 곱단이는 슬쩍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서러움이 아니라 안타까움과 그리움과 안도감이 모두 섞인 생의 날숨이었다. 여인은 세 사람의 뒤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자신의 아이들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내었다.

“되었다. 모두 이제 절하거라. 얘들아. 아버지와 숙부들께 인사를 올려야지.”

여인의 말은 이 자리에 자신을 있게 해준 은인들에 대한 헌사요, 자신이 여지껏 키워 준 성 다른 자식들에 대한 훈계였다.

율목어미의 말이 나오자 율목이를 위시한 열명의 장정이 일제히 일어서 있다가 동시에 무릎을 꿇으며 평상 위의 신위에 절을 올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율목어미의 눈이 빠르게 깜박였다. 여인의 남편은 양광 서주에서 젊은 시절 모든 것을 잃고 칼 한자루를 차고 삼남을 종횡하다 개경으로 올라왔고, 수많은 일을 겪은 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그동안 그는 옛 왕조와 새 왕조 모두를 섬겼고, 충성과 의리로 삶을 이어가다 마지막엔 도리를 택했으며, 옛 상관과 옛 전우를 잃고 끌고 내려온 아이들과 함께 새 삶을 이루었으니, 실로 그 삶의 끝은 오직 소소하지만 범인이 범접하지 못할 일로 가득 차 있었다.

누군가는 망해가는 사직을 위해 신명을 바쳤고, 누군가는 새로 생긴 사직을 위해 일생을 걸었건만, 지금 그녀의 앞에 서 있는 지아비는 그 가운데에서 오직 아홉 어린 아이만을 구해 나오는 데 자신과 벗들의 생을 바친 사람이었다. 여인은 그것이 못내 자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런 여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늙은 무인은 여전히 말없이 벗들을 붙잡고 울음을 삼켰다. 율목을 비롯한 열명의 장성한 아이들은 죽은 은인들에게 안녕함을 고하며 마지막 절을 올리는 중이었다.

“아무쪼록 잘 돌아가시게! 조만간 다시 볼 것이니!”

늙은 견태고의 외침과 함께 여인은 사람들에게서 눈을 돌려 말없이 푸른 하늘 위로 흘러가는 일엽편주같은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사방을 감싸고 있었다.

실로 푸르른 날이었다. 장장(長長)한 하일(夏日)이었다.



낙조십일영(落照十一英)

-(完)-


작가의말

짧다면 짧고 장구하다면 장구할 글의 여정에 끝까지 같이 해 주신 독자제현께 실로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여러분 덕에 끝까지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견마지로 배상(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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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닷새(6) +2 22.08.29 248 17 19쪽
119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닷새(5) +4 22.08.26 250 14 15쪽
118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닷새(4) +2 22.08.26 222 11 15쪽
117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닷새(3) +5 22.08.25 237 13 16쪽
116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닷새(2) +4 22.08.25 228 12 15쪽
115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닷새(1) +3 22.08.24 238 17 13쪽
114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나흘(4) +2 22.08.24 221 13 14쪽
113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나흘(3) +5 22.08.23 240 14 12쪽
112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나흘(2) +3 22.08.23 215 12 13쪽
111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나흘(1) +4 22.08.22 260 15 15쪽
110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흘 +1 22.08.22 249 14 16쪽
109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초사흘 +5 22.08.19 288 16 12쪽
108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초하루 +2 22.08.19 277 12 15쪽
107 음력 칠월 열 엿새(3) +7 22.08.18 279 17 16쪽
106 음력 칠월 열 엿새(2) +2 22.08.18 257 13 14쪽
105 음력 칠월 열 엿새(1) +3 22.08.18 256 11 13쪽
104 음력 칠월 열 이틀 +3 22.08.17 277 14 14쪽
103 음력 칠월 여드레 +4 22.08.17 263 13 14쪽
102 음력 칠월 닷새 +4 22.08.16 263 15 12쪽
101 음력 칠월 나흘 +1 22.08.16 248 13 13쪽
100 음력 유월 스무 나흘(5) +5 22.08.15 279 18 17쪽
99 음력 유월 스무 나흘(4) +3 22.08.15 257 12 13쪽
98 음력 유월 스무 나흘(3) +4 22.08.12 284 18 13쪽
97 음력 유월 스무 나흘(2) +2 22.08.12 255 9 14쪽
96 음력 유월 스무 나흘(1) +1 22.08.11 275 13 13쪽
95 음력 유월 스무 이틀 +3 22.08.11 263 12 18쪽
94 음력 유월 스무 하루 +3 22.08.10 288 1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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