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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마지로의 만려일작(萬慮一作)

낙조십일영

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일반소설

완결

견마지로
작품등록일 :
2022.05.11 10:12
최근연재일 :
2022.08.29 10:35
연재수 :
1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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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749,279

작성
22.08.22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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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6쪽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흘

DUMMY

백일(白日) 아래 펼쳐진 하얀 모랫벌위에서 아이들의 달음박질이 이어졌다. 열명 남짓한 아이들은 끝없이 펼쳐진 동강(東江) 모래벌판을 놀이터삼아 더위도 잊은 채 서로의 뒤꽁무니를 잡으려고 줄기차게 뛰어다녔다.

조용하기만 하던 강변은 어느 새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물소리를 대신하였다.

아이들의 발은 강과 기슭을 오르내리며 물과 모래를 사방으로 튀기고 입과 눈은 술래를 부르고 찾기에 여념이 없는데, 그들을 웃는 낯으로 바라보던 털투성이 사내 하나가 두 손을 입에 대더니 강건너까지 들릴 기세로 우렁찬 목소리를 내었다.

“어서 올라와서 고기 먹어라! 다 구워졌다!”

텁석부리 사내의의 목소리에 아이들은 일제히 달음박질을 멈추더니 언덕을 향해 일제히 달려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모습을 보던 왕지균은 껄껄 웃으며 모닥불이 붙어있는 곳으로 어기적대며 걸어왔다. 사내는 이태 동안 꽤 많이 살이 불어 있었다.

“그 놈들 참 활기차구먼. 세상 부러울게 없는 나이렷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왕가 네놈은 소싯적 타령말고 뱃살이나 어찌 간수하거라. 아주 천하가 다 네것이냐?”

“얼씨구. 경순이 너는 이제 나한테까지 투덜대는거야? 도부외(都府外) 들어가더니만 말은 청산유수로 늘었는데 입에서 나오는 게 허구한 날 불평일세?”

“동무 건사하느라 늘어난 불평인 줄은 모르는 모양일세.”

어경순은 왕지균의 웃는 낯을 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고 굽고 있던 고기들을 가지런히 접시에 담았다.

두 사람은 척오조가 해체된 후 칠품 도부외(都府外) 별장이 되어 개경 성내를 순찰하고 다니며 하루 종일 같이 붙어다녔다.

어떤 때는 같이 야밤에 부하들과 궁성을 돌고, 어느 때는 국왕의 행차 시위까지 맡기도 하였으니 나름대로 큰소리 칠 법한 직책에다 순군부 천호로 있는 견태고와는 종종 얼굴을 볼 수 있는 처지이기도 하였다.

같이 천렵을 가자고 가장 먼저 통보를 받은 것도 왕지균과 어경순이었다.

사내들의 하는 일을 보던 율목어미가 된장과 찬을 골고루 준비하고 슬쩍 솥 근처로 다가오자 솥에 불을 때던 홍일국이 되었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형수님은 앉아계십시오. 아직 뜸 덜 들었습니다.”

“아니에요. 밥은 아낙이 해야지 어찌 홍직장께서 뜸을 들이시나요?”

“아닙니다! 홀몸도 아니신데 괜히 고생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여기 올 때부터 밥은 제가 한다고 했잖습니까!”

율목어미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결국 멋쩍게 미소짓고 다시 아이들이 달려오는 쪽으로 가서 찬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강변에서 건져올린 물고기 말고도 사내들의 뒤쪽에는 썰어놓은 돼지고기와 술이 한 아름 놓여 있었으니 개경 동남쪽 사천(沙川) 동강(東江)의 강변은 어느새 조촐한 잔치가 벌어지는 형국이었다.

율목이와 이상겸의 아이들이 올라와 먹을 것을 찾던 모습을 보고있던 견태고는 뒤에서 조용히 술잔을 홀짝이고 있는 달걀머리의 사내를 보며 말을 걸었다.

“천렵으로 대충 배나 채울까 했는데 이거 배보다 배꼽이 크구먼. 형무 자네에게 이거 너무 신세만 지는 거 아닌가.”

이상겸과 함께 술을 마시던 한형무가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그냥 옆 가게에서 조금씩 얻어온 겁니다. 이걸 무슨 신세라고 하십니까. 지유.”

“그래도 그냥 얻어먹기는 너무 많은 거 아닌가.”

“그냥이라니요. 이게 어찌 그냥입니까.”

견태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형무는 고개를 젓더니 슬쩍 저고리를 올리고 배를 까 보였다. 사내의 오른 옆구리에 손바닥 만한 하얀 빛의 흉터가 번득이는데 형무는 그 모습을 보이더니 진지한 표정이 되어 견태고를 바라보았다.

“이건 제 일생의 자랑입니다. 사람들이 근본 없는 장사치라 욕할 때마다 이것을 보이지요. 이래봬도 내가 창령방의 별초 출신이요 호걸들과 함께 군령을 지켰고 목숨걸고 싸운 적이 있다고 말입죠. 비록 한 일은 없었지만 저는 척오조로 살면서 지유를 모셨던 때를 절대 못 잊습니다.”

장사꾼의 유장한 말 속에는 진심이 가득 들어있었다. 견태고가 한형무의 말에 뭐라고 쉽사리 대꾸할 말을 못 찾는데, 한형무의 흉터를 보던 이상겸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장사꾼의 무릎을 손으로 두들겼다.

“한 일이 왜 없나? 자네 아니었으면 저 아이들은 그 날 다 죽었네!”

이상겸의 말에 한형무의 눈살이 찌푸려지더니 이를 악물었다. 사내는 찌푸린 눈 사이로 옛 기억이 스며나오는 듯 고통스럽게 입술을 깨물더니 듯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가끔 그 날 꿈을 꿉니다. 제가 조금만 더 날쌨거나 무예가 깊었으면······.”

“되었어. 잘 했어. 자넨 정말 용맹하게 할 일을 했네그려.”

한형무가 이상겸의 말에 북받치는 감정을 못 이기고 눈을 질끈 감자 이상겸 역시 말을 잊고 슬쩍 하늘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흥겹던 분위기가 엄숙해지자 왕지균이 눈을 껌벅이더니만 손뼉을 찰싹 치더니 화제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우리가 이렇게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진짜 중요한 일이 있는데!”

“무슨 소리인가?”

“저 놈 말이오. 일국이. 저 놈 장가 간답니다!”

“뭐야?”

“어머, 무슨 말이에요?”

“야 이놈아, 어떻게 된 거야? 어째 말도 한 마디 없이 뭔 일을 벌인거냐?”

이상겸과 견태고가 마치 나이차 별로 안 지는 숙부 같은 표정으로 홍일국을 내려다보고 율목어미마저 반색하자 홍일국은 얼굴이 시뻘게지더니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니, 아직 말씀드릴 데가 아니라서···중신을 본 것 뿐이고 아직 납채(納采)만 했지 택일도 안 했습니다.”

“잘 됐네. 각시는 누구예요?”

“수철동에 사는 녹사(錄事)댁의 차녀인데···.그거···저···집안이 화려한 것도 아니고···그러니까···그냥···인물도···뭐···아니, 제가 보기에는 그러니까···.”

“이거 그냥 사주단자 밀어넣은 것이 아니구먼. 오며 가며 보니 처녀 인물이 절색(絶色)이라 매파 꼬셔다가 중신자리 넣은 것이렷다. 척오조 시절 눈매를 그런 데다 썼구만 그래.”

이상겸이 히죽대며 말을 붙이자 홍일국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는데 모여 있던 사람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왕지균이 그런 홍일국을 보며 껄껄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그래도 녹사 장인이 군기감 직장 사위 얻으면 좋은 일 아닌가? 일국이야 나중에 첨정(僉正)까지는 올라갈 것인데!”

“아, 제발 조용히 해다오···..”

홍일국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자신의 특기인 궁시장(弓矢匠)의 재주를 살려 군기감으로 들어갔다. 이년 전 강예구가 죽은 뒤로 일국은 활을 잡고 사람을 쏘는 일은 이제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였고, 이방과는 홍일국을 활을 쏘는 곳이 아니라 활을 만드는 곳으로 보내주었다.

견태고는 그의 앞에 모여있는 척오조원들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뿌듯하게 들이차는 기쁨을 느꼈다. 실로 천하 사방에서 몰려온 이름도 모르는 장정들이 어느 새 식구나 다름없어진 터였다. 견태고는 왕지균을 돌아보았다.

“장부장과 기아훈에게는 연락해 봤는가?”

이젠 웃는 상이 아예 얼굴에 붙어버린 왕지균의 표정에서 모처럼 미소가 사라졌다. 왕지균은 머리를 벅벅 긁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기아훈은 의흥친군위 들어간 다음에 보기 힘듭니다. 가별초가 원래 자기들끼리 몰려다니고 왕자들 따라다니기 바쁘니······”

“그렇긴 하지.”

의흥친군위는 왕의 직속 시위부대로, 예전 왕자들과 이성계의 가별초를 주로 모아서 편성한 부대였다. 기아훈이야 원래 동북 가별초의 출신이니 그리 들어가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리고 장부장은 잘 안 보입니다. 추동 깊숙한 곳에 들어가 있는 모양새입니다.”

“그렇겠지.”

장천보는 익히 견태고가 예상한대로 추동의 가신이 되었다.

장천보는 이년 전 척오조가 해체된 다음 날 쓰다달다 말도 없이 추동으로 들어가버렸다. 그 이후로는 거의 연락도 되지 않았고 다른 조원들과도 연락이 닿지 않는 듯싶었다.

이상겸은 사람이 야박하다고 내내 투덜거렸지만 견태고는 오히려 그런 것이 장천보답다 여기고 있었다.

장천보는 자신을 추동에서 받은 임무를 완수하고 다시 돌아가는 군관이라 생각했을 것이고, 오히려 그것이 절도있는 장천보의 성정과 맞는 일이었다. 하지만 못내 그렇게 헤어지는 것이 아쉽기는 견태고도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백해종이는 시간을 못 뺀답니다.”

“해종이한테도 연락했나?”

왕지균의 말에 이상겸이 의외라는 듯 눈을 껌벅였다. 왕지균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경순을 바라보았다. 어경순의 입이 왕지균의 말을 대신하였다.

“충용위가 대궐 밖으로 나오는 게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저희는 가끔 주상전하 호위를 맡으니 볼 일이 있는데, 그 때마다 바쁘다고 진저리를 치더군요.”

고려시절 성중관(成衆官)이었던 백해종은 이방과의 압력으로 다시 충용위에 들어가 대궐의 호위를 맡게 되었다. 척오조에 들어와 영락한 가문의 위신을 다시 살리겠다던 백해종의 소원은 성취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들어올 때부터 출신이 달랐으니 노는 물이 다른 것도 당연한 것 아닙니까.”

홍일국이 말하자 어경순과 왕지균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겸이나 견태고도 홍일국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다.

오직 한형무만이 입맛을 쩝쩝대며 궁궐쪽을 바라보며 한마디를 던졌을 뿐이었다.

“백해종이 사람이 모난 것 같아도 은근히 맘이 약해서 몇 번 더 졸랐으면 왔을 것인데 아깝구먼.”

“그런가? 나는 그냥 한번 넌지시 지나가는 말로 청해 본 것인데···..”

“그럼 지균이 자네가 잘못한 거지.”

“어경순, 진짜 넌 왜 그러냐?”

다시 사내들이 껄껄대며 웃기 시작했다. 율목어미가 술잔을 하나씩 돌리기 시작하고, 아이들은 구운 물고기와 돼지고기를 먹으면서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자기들끼리 깔깔대며 웃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이게 사람 사는 길이로구나. 견태고의 마음속엔 한량없는 아늑함과 평온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율목어미가 견태고의 미소짓는 표정을 보더니 자기도 따라서 미소를 머금었다.

실로 더할나위 없는 시간이었다.


*----------*


“대관(臺官)과 간관(諫官)과 형조(刑曹)에서 다시 왕씨들을 적몰하라는 상소를 올렸다지요?”

“허···.지금도 대궐 문 앞에서 간관들이 엎드려 간하고 있습니다만···..”

이방원의 말에 늙은 신하는 겸연쩍게 웃으며 말을 아꼈다. 흰 수염이 멋들어지게 늘어진 비둔한 몸집의 노신은 슬쩍 자신의 옆을 걷고 있는 왕자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안군께서는 이래저래 대전의 소식이 궁금하신가 봅니다. 추동의 사내들이 궐 근처에 모여 퇴청하는 신료들을 붙잡고 이것저것 묻는다는 말이 파다한데 굳이 정안군께서도 이러실 이유가 있습니까?”

노인의 매서운 눈초리를 대하는 이방원의 답은 겸연쩍은 표정과 함께 어우러지는 미소였다.

“삼봉께선 제 저의를 곡해하지 마십시오. 그저 왕실의 친족이자 전하의 자식된 도리로 시국이 어찌 돌아가는가를 묻는 것인데 무슨 별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저 그 뿐이십니까?”

늙은 노신의 지나가는 듯한 물음은 평범하였고 어조도 범상하기 그지없었으나 가늘게 뜬 눈초리 속에 언뜻 지나가는 차가운 한기(寒氣)는 앞에 서 있는 왕자의 신색을 순식간에 갈무리 하는 중이었다.

“그렇지요. 제가 무슨 다른 생각이 있다고요.”

정안군의 푸근한 눈동자가 미소와 함께 어우려졌다.

“전하의 옥체는 여전히 강건하시어 외적이 감히 침노하지 못하고, 비록 이복동생이지만 저보다 훨씬 영특하고 비범한 세자께서 국본(國本)이 되어 계시는데, 제가 언감생심 무엇을 바란다는 말입니까?”

노인의 눈초리를 무덤덤하게 받는 정안군의 거동에는 일체의 경직됨도 없었고 어색함조차 없었다. 심지어는 슬쩍 말투 사이에 묻어나와야 할 질시와 증오조차 찾아낼 수 없었다.

이방원의 친근하고 티없어 보이는 미소를 보던 삼봉 정도전의 눈초리에 그제야 힘이 풀렸다. 늙은 신하는 어깨를 들썩이며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하긴 정안군께서 이상하게 생각하시는 것도 당연하지요. 금상께서 반대하는 데 어찌 신하들이 계속 들어 일어나는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금 전하를 제외한 모든 신료들의 의견이 합치된 상황입니다.”

“아무리 모두가 원한다 하더라도 전하께서 반대하시면 못하는 일 아니오.”

“못하지요.”

삼봉은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두 사내가 걷고 있는 관도의 작은 골목은 고즈넉하기 그지없었다. 햇살마저 벽에 막히고 바람조차 들어가지 못하는 좁은 길에 두 사내의 안광과 숨결이 작은 풍파를 만들었다.

“하지만 조만간 주상께서도 맘을 바꾸실 겁니다.”

이방원이 눈을 슬쩍 뜨자 정도전은 풍성한 수염 사이로 얇게 입술을 늘였다.

“이미 주상께서는 백일 넘게 왕씨에 대한 처결을 미루셨습니다. 대의와 관후함은 그 정도로 족하지요. 이미 전하의 명분이 차고도 넘치는 상황에 더 미룰 도리가 있습니까?”

“명분이라니. 주상께서는 원래 인재욕심이 큰 분입니다. 이지란 숙부부터 시작해서 포은까지 당신의 휘하에 두고 싶어한 분입니다. 그런 분이 왕씨 집안의 걸물들을 치고 싶겠소?”

정도전은 이방원을 딱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표정을 바꾸었다.

실로 놀랄만한 변화가 정도전의 얼굴에 드러났다. 천하를 다스릴 경륜을 지닌 명상(名相)의 얼굴에 어느 새 깊게 주름진 그늘이 드리워지더니 관후하던 인상이 순식간에 스산한 표정으로 바뀌며 명부차사와 같은 음산한 말이 입에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불로불사의 감로(甘露)가 앞에 있다 한들 그 안에 짐독(鴆毒)이 한 방울 섞였다면 그것을 누가 마실 수 있겠습니까?”

정도전이 슬쩍 한 발 앞으로 다가보며 이방원을 올려보았다.

노인의 치뜬 눈매는 주저함없이 일국의 왕자를 향하는데, 노인의 입이 열릴수록 골목에 드리어진 그늘은 더욱 어두워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정안군께서는 그 위험성을 알고 계시지 않소. 선지교의 거사는 두 번 일어나야 할 일이 아니지요. 그리고 이번에는 그 피가 정안군이 아니라 주상전하께 튈 것이고.”

이방원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정도전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정도전은 이방원의 표정을 잠시 살피더니 어깨를 들썩하고는 천천히 이방원을 놔 두고 앞으로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천하의 평안을 위해 제사를 지낼 때, 누군가는 제문을 읽고 하늘에 화평을 고하고, 누군가는 병풍 뒤에서 제물의 각(脚)을 떠야 하는거요. 그게 왕이 할 일인가···.내가 할 일이지.”

“누군가를, 얼마나 하늘에 바치실 예정이오?”

정안군 이방원은 자기도 모르게 목이 메고 입술이 바싹 마른 것을 느꼈다. 정도전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혼잣말을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왕의 직계, 대성할 재목, 그리고 후사가 걱정으로 남을 자들···백여명은 넘지 않겠습니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말입니까?”

“어릴수록 위험하지요.”

마지막으로 남긴 정도전의 말에는 오싹한 한기가 서려 있었다.

“정안군이라면 이럴 때 어찌 하실거요?”

늙은 삼봉의 뒷모습이 햇살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이방원은 입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삼봉의 몸이 골목 바깥으로 사라지자 이방원의 당혹스럽던 표정이 서서히 틀이 바뀌며 차갑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방원의 얼굴은 어느새 삼년 전, 정달가를 해치웠을 때의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할 일이라고는 하나뿐 아니겠는가?”

사내의 독백이 아무도 없는 골목 안에 나직하게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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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결미(結尾): 조선 태종 십삼년 음력 십일월 스무 엿새 +20 22.08.29 451 31 21쪽
120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닷새(6) +2 22.08.29 248 17 19쪽
119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닷새(5) +4 22.08.26 250 14 15쪽
118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닷새(4) +2 22.08.26 222 11 15쪽
117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닷새(3) +5 22.08.25 237 13 16쪽
116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닷새(2) +4 22.08.25 228 12 15쪽
115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닷새(1) +3 22.08.24 239 17 13쪽
114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나흘(4) +2 22.08.24 221 13 14쪽
113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나흘(3) +5 22.08.23 240 14 12쪽
112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나흘(2) +3 22.08.23 215 12 13쪽
111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나흘(1) +4 22.08.22 260 15 15쪽
»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흘 +1 22.08.22 250 14 16쪽
109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초사흘 +5 22.08.19 288 16 12쪽
108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초하루 +2 22.08.19 278 12 15쪽
107 음력 칠월 열 엿새(3) +7 22.08.18 279 17 16쪽
106 음력 칠월 열 엿새(2) +2 22.08.18 257 13 14쪽
105 음력 칠월 열 엿새(1) +3 22.08.18 256 11 13쪽
104 음력 칠월 열 이틀 +3 22.08.17 277 14 14쪽
103 음력 칠월 여드레 +4 22.08.17 263 13 14쪽
102 음력 칠월 닷새 +4 22.08.16 263 15 12쪽
101 음력 칠월 나흘 +1 22.08.16 248 13 13쪽
100 음력 유월 스무 나흘(5) +5 22.08.15 279 18 17쪽
99 음력 유월 스무 나흘(4) +3 22.08.15 257 12 13쪽
98 음력 유월 스무 나흘(3) +4 22.08.12 284 18 13쪽
97 음력 유월 스무 나흘(2) +2 22.08.12 255 9 14쪽
96 음력 유월 스무 나흘(1) +1 22.08.11 275 13 13쪽
95 음력 유월 스무 이틀 +3 22.08.11 264 12 18쪽
94 음력 유월 스무 하루 +3 22.08.10 288 1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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