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견마지로의 만려일작(萬慮一作)

낙조십일영

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일반소설

완결

견마지로
작품등록일 :
2022.05.11 10:12
최근연재일 :
2022.08.29 10:35
연재수 :
121 회
조회수 :
51,158
추천수 :
2,441
글자수 :
749,279

작성
22.08.15 10:45
조회
279
추천
18
글자
17쪽

음력 유월 스무 나흘(5)

DUMMY

견태고는 속으로 혀를 차고 있었다.

지금 남아있는 적들은 추성 김두북과 낙조 이위충, 그리고 십영이라 불리는 오대제였는데 이들이 거리를 벌리고 궁시로 저격을 할 것만을 상정한 것이 오판이었다.

특히나 낙조 같은 경우는 지금까지 접전을 벌이며 한 번도 활을 쓴 적이 없었다.

결국 이번 싸움은 늙은 이위충이 자신이 원하는 싸움을 하기 위해 판을 벌린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척오조는 속절없이 그 판에 빠져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 사내는 지금 머릿속을 스쳐가는 한탄과 상념에 빠져있을 겨를이 없었다. 낙조의 고리칼이 매섭게 자신을 향해 짓쳐 들어오고 있었다.

어경순의 방패는 가볍게 칼질 한번에 뒤집어졌고 딴죽이 걸린 어경순의 몸은 뒤로 나동그라졌다. 흰 수염 위로 번득이는 이위충의 눈은 실로 다시 기억하기 싫을 만큼 형형하고 공포스러웠다.

“추성의 말이 맞았다! 지금이라도 대마를 노리는 것이 옳은 일이었거늘!”

낙조의 칼이 번개처럼 견태고의 좌우를 때리며 날아들었다.

견태고의 칼이 바람을 가르며 들어오는 칼날을 받아 치자 낙조의 입에 히죽 소름 끼치는 미소가 올라왔다.

“꿩 대신 닭이로구나! 하지만 견태고 그대도 나쁘지는 않아!”

견태고의 칼이 고리칼에 눌리며 공간을 터 주었다.

틈을 연 낙조의 고리칼이 그대로 직선이 되어 견태고의 목을 찌르고 들어왔다. 하지만 견태고는 그대로 손목을 돌려 손잡이로 낙조의 칼날을 쳐올리고는 팔을 뻗어 낙조의 목을 노렸다.

서걱하는 소리와 함께 낙조의 수염 한 뭉텅이가 칼에 쓸려 하얀 안개가 되어 날아갔다.

“좋을 시고!”

어느새 몸을 뒤로 빼낸 낙조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칼을 내뻗었다.

이번에는 이상겸이 자신의 칼을 들고 낙조에게 맞서 들어갔다.

이상겸의 칼이 매섭게 노인의 목과 허리를 노리고 채찍처럼 휘감기니 노인은 눈살을 슬쩍 찌푸리고는 이상겸의 칼을 맞받고 몸을 돌려 이상겸의 등 뒤를 잡았다. 실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북녘의 칼이구나.”

이상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대로 앞으로 몸을 던져 구르니, 그 사이를 타고 왕지균과 백해종이 칼을 번득이며 낙조에게 덤벼들었다.

왕지균의 칼이 낙조의 칼을 강하게 후려치고 그대로 몸을 돌리며 오른발이 물레방아처럼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며 낙조의 머리를 노렸다. 단번에 낙조의 머리를 부숴버릴 심산이었다.

하지만 한 발 먼저 들어온 낙조의 어깨가 왕지균의 엉덩이를 그대로 들이받아 한 장이나 되는 거리 너머로 내동댕이쳤다. 노인은 옆에서 매섭게 들어오는 백해종의 칼날을 털끝 차이로 피하더니 그대로 칼을 세워 백해종과 칼을 겨누었다. 순간 사방으로 뻗치는 칼날과 칼날이 서로의 몸을 탐하며 빛살과 불꽃을 뿌렸다.

백해종 역시 눈을 크게 뜨고 자신 앞에서 칼을 날리는 노인을 노려보았다. 노인의 눈 역시 번쩍이며 새로운 적을 바라보았다.

“개경에 팔도의 인재가 모인다더니.”

낙조의 칼이 번득이며 백해종의 칼을 순식간에 뒤로 몰아붙였다. 백해종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허둥지둥 보법을 잡는데 실로 지금까지 견태고를 상대로 보여준 칼놀림은 그저 유희로 보일 지경이었다.

이를 보고 있던 기아훈이 만도와 단도를 든 채로 시커먼 그림자가 되어 낙조를 향해 달려들었다. 순간 낙조의 검이 허공에서 멈추는가 싶더니만 뒤로 몸이 주르륵 빠지며 들어오던 기아훈의 칼날을 받아 챘다.

“여진의 검은 이미 볼 만큼 보았다!”

순간 기아훈의 칼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번득이는 낙조의 칼이 기아훈의 목을 날아드는 순간 기아훈이 반사적으로 내민 단도에 낙조의 칼이 부딪혔다.

기아훈의 몸이 화급하게 빠져나가는 순간 이를 악문 장천보의 칼이 낙조를 향해 날아들었지만 아예 장천보의 칼은 낙조에게 닿지도 않았다.

실로 천양지차라는 것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척오조의 누구도 낙조에게 칼을 들이댈 수가 없었다. 견태고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저 늙은이를 잡아라! 모두 돌격!”

그 찰나, 하늘을 찢는 듯한 괴성과 함께 순군만호부의 천호가 칼을 들고 낙조를 겨누었다. 어느 새 순군들을 기습했던 다섯명의 사병들은 모두 피를 쏟으며 바닥에 누워 있었는데, 그들이 같이 저승으로 데려간 순군의 숫자는 다섯을 훨씬 넘어서는 숫자들이었다.

낙조의 입에 올라갔던 미소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노인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래, 잔치가 아니라 호상(好喪)이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순간 노인의 몸이 땅을 박차는가 싶더니 척오조의 사이를 뚫고 몰려드는 순군의 앞에 뛰어들었다. 실로 혀를 내두를 신법이었다.

노인의 몸이 앞으로 나갔을 때 노인의 손에 들린 고리칼은 보다 멀리 나가며 대적한 자들의 목과 손목과 허벅지를 향해 곧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사방에서 피바람이 불며 노인의 대적한 순군들이 추풍낙엽이 되어 바닥에 깔렸다.

순군을 호령하던 천호의 얼굴에 순식간에 사색이 깃들었다. 그를 보던 견태고의 몸이 낙조를 쫓았다. 이상겸의 견태고의 옆을 지켰다.

“이행수.”

“예, 지유.”

견태고가 칼을 고쳐 잡고 말을 걸자 이상겸 역시 칼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동시에 들어가서 같이 잡도록 하세. 때가 보이면 누구라도 좋으니 몸으로 틀어막고.”

이상겸이 이를 악물었다.

“지유. 내가 죽으면 꼭 우리 왕도관 죽인 가히새끼 멱을 따주시오.”

“알겠네.”

“그 새끼 배를 갈라 간을 제삿상에 놓아주시구려.”

“······내가 죽으면 율목이에게는 말하지 말아주게.”

이상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견태고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환도를 들고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사내의 보폭에 이상겸이 발걸음을 맞췄다.

두 사내는 두 손으로 환도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고 천호에게 돌진하는 낙조를 향해 동시에 땅을 박찼다.

순간 천호의 환도가 하늘로 날아가며 전포의 앞섶이 단칼에 베어졌다. 쇄자갑의 고리가 박살나며 천호의 속저고리가 훤하게 드러났다. 천호는 눈을 채 감지도 못한 채 자신의 앞으로 날아드는 죽음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낙조의 칼날이 곧게 날아오다 순식간에 수직으로 날을 세웠다.

번개처럼 양 옆에서 들어오던 두 자루 환도가 환두대도 한 자루에 막혔다. 이상겸과 견태고가 천호를 등 뒤에 세우고 같이 칼을 들어올리고는 그대로 사선으로 낙조를 베어나갔다.

낙조의 직도가 두 자루의 환도를 밀어내며 다시 간격을 벌렸다. 노인의 눈이 번득이더니 몸이 견태고를 향해 돌아섰다. 칼이 눈보다 빠르게 견태고를 향해 날아왔다. 순간 견태고의 칼날이 반사적으로 낙조의 칼을 쳐내며 다시 거리를 벌렸다.

백해종의 환도가 뒤에서 들어오며 낙조의 칼을 다시 다른 곳으로 돌렸다. 백해종의 공격을 막아내는 순간 이번에는 기아훈의 만도가 번득이며 낙조의 몸을 향해 들어왔다.

낙조는 거리낄 것 없다는 듯 기아훈의 만도를 받아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홍일국이 이를 악물고 칼을 내질렀고, 홍일국의 옆에서는 왕지균과 장천보가 칼을 잡고 다시 들이쳤다. 심지어 어경순도 방패를 뒤로 둘러메고 환도를 뽑은 뒤에 낙조를 향해 다가왔다.

팔방(八方)이 척오조에 의해 메워지고 가운데 홀로 백발의 칼잡이가 남았다.

낙조는 칼을 천천히 가슴 앞으로 당기더니 견태고를 쳐다보았다. 노인의 수염 사이로 희미한 미소가 잡히는 듯싶었다.

찰나의 정적이 모든 이들의 발을 잠시 묶어 두던 순간, 낙조의 발이 움직이며 견태고의 가슴팍을 향해 칼을 들이밀었다.

순간 이상겸이 자신의 칼을 든 채 견태고의 앞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낙조의 고리칼이 그대로 이상겸의 몸을 뚫고 견태고를 향해 들어가려는 순간 왕지균과 백해종의 칼이 낙조의 손목을 각각 치고 기아훈과 어경순의 칼이 낙조의 등을 찔렀다.

이상겸이 괴성을 지르며 환도를 도끼처럼 휘둘러 낙조의 칼을 날리며 옆으로 빠지는 순간, 견태고의 몸이 그대로 앞으로 나가며 낙조의 가슴팍을 그대로 찌르고 뒤로 빠져나갔다.

사내 일곱이 한 점을 교차하며 빠져나가는데 서로의 길에 걸리는 자가 없었다. 낙조의 몸이 그대로 풀썩 앞으로 무릎을 꿇고 쓰러지는 순간, 백설같이 하얗던 노인의 수염이 붉게 물들었다.

낙조에게 등을 보인 견태고의 심장은 마치 터질것만 같았다. 사내는 칼을 거두고 천천히 무릎 꿇은 채 앉아있는 노인의 앞으로 다가섰다.

상처입고 쓰러져 죽을 때를 기다리는 낙조 이위충의 모습은 마치 늙은 산군(山君)과 같아 죽음이 목전에 이르렀어도 위엄이 넘쳐 쉽사리 다가갈 수 없었다.

“삼척제율.”

노인의 눈이 들리며 견태고를 바라보았다. 노인은 견태고의 얼굴을 보더니 히죽 미소를 지어보였다.

“좋은 일격일세. 견태고.”

“귀공께서는 왜 이 일에 관여하신겁니까?”

견태고의 말에 이위충은 잘린 손목을 슬쩍 보더니 허탈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자네는 바다 너머로 사라지는 태양을 본 적이 있는가.”

“고향에서 자주 보았소이다.”

“붉게 넘어가는 순한 빛의 해를 보면서···.그 시간이 영원히 남아있기를 바란 적이 없었느냐.”

“뭐요?”

노인은 붉은 핏물을 꾸역꾸역 내뱉으면서도 눈빛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영원히 밤이 오지 않기만을 바랐다.”

노인의 눈이 견태고의 눈을 마주보았다. 늙고 주름진 눈매 가운데 들어있는 눈동자는 실로 강렬하면서도 속된 것이 없어 차마 제대로 살펴보지 못할 위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눈의 초점은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이위충의 힘없는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하지만 밤은 필연으로 찾아오겠지. 또 다른 아침이 오는 것은 하늘의 도리런가. 아니면 인생의 욕심이런가.”

“이위충 노사.”

“그건 남은자의 몫이지···. 자네는 아침을 위해 밤을 기다리나?”

견태고는 노인의 말에 답을 하지 못하였고 노인은 더 이상 견태고의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낙조 이위충의 목숨이 다하는 순간, 뒤에서 범종같이 굵은 목소리가 울리며 견태고의 주위를 환기시켰다.

“실로 삼척제율이었구나.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삼사우사 이방과의 목소리였다. 견태고와 척오조가 묵례를 하자 이방과는 이위충의 주검을 바라보더니 앞에 있는 저택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것으로 살수들의 터전은 모두 열린 것인가. 남은 자는 누구인가?”

“추성 황주목 김두북과 오현도 부자만이 남았습니다.”

“그자들이 저 안에 준동하고 있는 것이냐.”

“그런 듯싶습니다만 기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견태고의 말을 들은 이방과는 슬쩍 눈썹을 찌푸리더니 앞에 서 있는 낡은 저택을 노려보다 순간 입을 활짝 벌리고 대갈일성을 질러대었다.

“더 애꿎은 생명을 희생하며 헛된 저항을 이어갈 셈인가! 어서 죄인은 나오라! 나와서 명을 받아라!”

실로 이방과의 행동은 가진 자의 오만함이요 권세쥔 자의 우행(愚行)같은 행동이었다. 견태고가 보기에도 사람 목숨을 양식처럼 취하는 인사들에게 꾸짖음이라는 것이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그때, 놀랍게도 조용하던 저택의 앞문이 천천히 열렸다.

순군과 척오조의 활이 번쩍 들리며 저택의 문을 겨누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온 것은 사모에 단령포를 두른 관복의 차림으로 천천히 걸어나오는 비둔한 노인이었다.

이방과는 비틀대며 내려오는 노인을 무섭게 노려보는 중이었다.

“오랜만이오. 오대부.”

“삼사우사의 직을 맡으셨다지요. 감축드리옵니다. 이방과 대감.”

이방과는 오현도의 하례에 눈썹을 찌푸렸지만 다시 표정을 바꾸고 근엄하게 말을 시작했다.

“그대와 그대 아들의 모략으로 일어난 지난 석 달 간의 살생과 난행을 잊을 수 없으리라. 이런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고도 하늘이 두렵지 아니하냐! 그대는 물론이거니와 황주목 김두북과 사수시 주부 오대제의 죄과 역시 중죄에 해당한다! 대부는 어서 나머지 잔당을 모두 이끌고 내려와 포승을 받으라!”

“그들은 자진(自盡)하였소이다.”

“뭐야?”

이방과는 눈이 둥그레져 오현도를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담담하게 두 사람의 죽음을 고하는 오현도는 입에서 나온 참람된 말과 관계없이 너무나도 평온한 표정이었는데, 이윽고 이어지는 오현도의 말은 더운 모여있는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했다.

“국적 이성계를 끌어내리지 못한 책임과 한을 지고 두 호걸이 죽었으니, 이 노부 역시 그 뒤를 따라갈 생각이외다.”

뒷짐지고 있던 오현도의 손에서 피묻은 장도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미 붉은 관복의 아래는 피로 젖어 있었고, 노인의 발 아래에는 붉은 핏물이 고이는 중이었다.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방과를 보던 오현도는 부드러운 말투로 이방과에게 말을 걸었다.

“천하를 두고 자웅을 겨루었다 생각하오. 하지만 내가 그대들의 오성을 이기지 못하고, 천시가 그를 따르지 않았소. 인화(人和)하나로 대국을 돌이킬 수는 없더구려.”

“무슨 가증스러운 말이냐! 너는 관인들을 주살하고 허황한 말로 무인들을 불러 그들의 생을 헛되게 마감한 자로다. 그런 네게 고상한 최후를 허락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우사 대감.”

오현도의 얼굴은 이제 해쓱하니 핏기가 사라진지 오래였다.

이방과는 그제야 오현도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견태고와 이상겸이 천천히 활시위를 내리는데, 그를 보던 오현도는 이방과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내 지은 죄가 하늘에 닿으나 그간 대감을 알고 지낸 인연에 기대어 마지막 소원을 말하고 싶소이다.”

“······그게 무엇이냐.”

“마지막으로 사직(社稷)에 인사나 드리고 죽게 해 주시구려.”

이방과는 대답 대신 늙은 오현도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오현도는 이방과의 대답을 듣는 대신 하늘을 우러러보며 긴 탄식을 남겼다. 노인은 통증을 느끼는지 눈을 질끈 감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왕통(王統)을 지키지도 못하였고 사직(社稷)을 바로 세우지도 못하였구나! 그게 내 권(權)과 능(能)의 한계인 것을. 어찌하여 이렇게 긴 시간을 미련을 두며 남아있었단 말인가.”

늙은 권신은 비틀대며 발을 옮겼다. 사내의 발은 바위투성이 험난한 절벽 사이를 바라보았다. 노인은 용케 중심을 잡으며 허위허위 걸음을 옮겼지만 한 걸음을 올리면 두 걸음을 쉬어야 하였다. 노인의 호흡이 가빠지고 다리 아래로 흐르는 피의 양은 점점 많아졌다.

이미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노인이 벼랑을 향해 몸을 옮기자 견태고가 칼을 들고 노인의 앞을 막으려 하였지만 웬일인지 이방과가 손을 뻗어 견태고를 제어하였다. 이씨 가문의 사내는 절벽으로 향하는 늙은 고려의 재추를 굳이 막으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오현도가 발 아래 땅을 눕히고 머리 위에 또 다른 땅이 없는 곳까지 도달하였을 때, 늙은 눈에는 개경의 모든 경치가 아늑하게 펼쳐져 들어왔다.

이제는 폐허가 된 왕궁의 터가 잡힐 듯이 보이고 그 아래로 곧게 이어진 남대로와 십자가가 유장하게 펼쳐지는데, 오늘도 생업을 꾸미는 백성들과 욕심을 감춘 정객(政客)과 무인들이 같이 어우러져 걸어가는 곳, 왕도 개경의 전경이 늙은 사내의 눈 앞에서 뿌옇게 번져갔다.

노인의 눈에서 소리없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빛 바랜 수염 사이로 사내의 울음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용서하시옵소서. 경효대왕 마마.”

대중대부 오현도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노인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마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신의 능력이 모자라 마지막까지 왕씨의 나라를 보살피지 못하였사옵니다. 이 죄를 어찌 짊어지고 저승에 가 대왕의 면전에서 용안을 뵈리까.”

노인은 떨리는 무릎을 바로잡더니 허리를 펴고 또렷하게 보이는 궁성을 향해 두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이제 노인의 무릎은 떨리지 않았다.

노인은 천천히, 하지만 엄숙하게 궁을 보며 무릎을 꿇고 손을 땅에 대었다. 노인은 단정하게 국궁(鞠躬)의 자세로 꿇어 앉아 네 번 머리를 조아렸다. 국궁사배를 마친 노인이 평신(平身)을 하고 다시 일어섰을 때, 노인은 이제 울지 않았다. 오직 모든 것을 결정한 지사의 눈빛이 눈물을 대신할 따름이었다.

“대 고려국 천천세!”

노인의 우렁찬 소리가 산 외의 우레가 되어 땅아래로 떨어졌다.

“천천세!”

“천천세!”

장렬하게 마지막 외침을 땅과 하늘사이에 뿌린 노인의 몸이 그대로 땅에 주저앉듯 쓰러졌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이방과가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며 감탄한 듯 혼잣말을 뇌까렸다.

“장절하도다.”

권신의 탈을 썼던 충신의 혼백은 육신을 떠나 산 위를 맴돌다 성부를 떠도니, 마른 하늘에 으르렁대는 소리 한 줄기가 개경성도를 휘감았다.

때 아닌 한기가 도로를 휘감았다. 사람들은 하나 둘 고개를 들어 멀리 보이는 송악(松嶽)을 올려다보았다. 산이 울고 있었다. 마치 인간사 모든 일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산은 조용히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5

  • 작성자
    Lv.99 포대화상
    작성일
    22.08.15 13:57
    No. 1

    사랑합니다 힘내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포대화상
    작성일
    22.08.15 13:58
    No. 2

    권신의 탈을 떴던 >>> 썼던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1 견마지로
    작성일
    22.08.15 14:56
    No. 3

    감사합니다. 수정하였습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1 악지유
    작성일
    22.08.15 17:08
    No. 4

    고작 몇 명으로 이미 기울대로 기운 고려를 다시
    일으켜세우겠다고? 뜻은 가상할지 모르지만 시세를
    모르는 아둔한 짓거리...

    그리고 대업을 도모한다는게 수장들은 도외시한채
    고작 아녀자인 왕도관과 힘없는 몇몇 벼슬아치, 그리고
    방과의 부하들 목숨을 노리는 것이었다니 실로 가소로운
    대업이다. 차라리 꼭꼭 숨어 길게 보고 훗날을 도모
    하는게 훨씬 상책이지. 필부의 만용같은, 깜냥도 안되는
    대업타령은...

    찬성: 0 | 반대: 2

  • 작성자
    Lv.71 탈혼백수
    작성일
    23.01.17 13:09
    No. 5

    ㅉ..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낙조십일영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7/13일부터 2편씩 올리겠습니다. +2 22.07.11 168 0 -
공지 낙조십일영(落照十一英)은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22.05.11 1,063 0 -
121 결미(結尾): 조선 태종 십삼년 음력 십일월 스무 엿새 +20 22.08.29 452 31 21쪽
120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닷새(6) +2 22.08.29 249 17 19쪽
119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닷새(5) +4 22.08.26 251 14 15쪽
118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닷새(4) +2 22.08.26 223 11 15쪽
117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닷새(3) +5 22.08.25 238 13 16쪽
116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닷새(2) +4 22.08.25 229 12 15쪽
115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닷새(1) +3 22.08.24 239 17 13쪽
114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나흘(4) +2 22.08.24 222 13 14쪽
113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나흘(3) +5 22.08.23 241 14 12쪽
112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나흘(2) +3 22.08.23 215 12 13쪽
111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나흘(1) +4 22.08.22 260 15 15쪽
110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흘 +1 22.08.22 250 14 16쪽
109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초사흘 +5 22.08.19 288 16 12쪽
108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초하루 +2 22.08.19 278 12 15쪽
107 음력 칠월 열 엿새(3) +7 22.08.18 280 17 16쪽
106 음력 칠월 열 엿새(2) +2 22.08.18 257 13 14쪽
105 음력 칠월 열 엿새(1) +3 22.08.18 256 11 13쪽
104 음력 칠월 열 이틀 +3 22.08.17 277 14 14쪽
103 음력 칠월 여드레 +4 22.08.17 264 13 14쪽
102 음력 칠월 닷새 +4 22.08.16 264 15 12쪽
101 음력 칠월 나흘 +1 22.08.16 248 13 13쪽
» 음력 유월 스무 나흘(5) +5 22.08.15 280 18 17쪽
99 음력 유월 스무 나흘(4) +3 22.08.15 257 12 13쪽
98 음력 유월 스무 나흘(3) +4 22.08.12 285 18 13쪽
97 음력 유월 스무 나흘(2) +2 22.08.12 256 9 14쪽
96 음력 유월 스무 나흘(1) +1 22.08.11 276 13 13쪽
95 음력 유월 스무 이틀 +3 22.08.11 264 12 18쪽
94 음력 유월 스무 하루 +3 22.08.10 288 17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