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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마지로의 만려일작(萬慮一作)

낙조십일영

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일반소설

완결

견마지로
작품등록일 :
2022.05.11 10:12
최근연재일 :
2022.08.29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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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9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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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닷새(6)

DUMMY

“오랜만이구나. 견태고. 내 그대를 형님의 처소에서 본 것이 마지막이었지 않느냐. 그 때는 조선의 충실한 신하더니 어찌하여 지금은 역도의 괴수가 되어 군리(軍吏)들을 상해하고 백주에 도주를 하느냐?”

정안군 이방원의 말투는 여전히 부드럽고 매끄러웠지만 눈매는 예전 견태고를 맨 처음 독대했을 때와 다를 바 없이 사납고 차갑기 그지없었다. 이방원은 견태고를 보던 눈을 돌려 장천보를 보더니 싸늘한 표정이 되어 장천보를 노려보았다.

“장별장, 내 그대에게 몇 번이나 다짐받았고 분명 이런 일이 있을 것으로 예견하였는데, 결국 그대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구나.”

“못하겠습니다. 나리.”

“장별장.”

“평생 나리를 섬겨왔지만 이것은 못하겠습니다.”

“왜 그런가?”

“저는 나리의 부하지만 동시에 척오조의 부장이었습니다. 상관의 명을 수행하지 못함은 제 능력의 부족함이나 부하와 아이들의 목숨을 지키는 것은 제가 잊고 있던 의무입니다.”

“허무맹랑한 말을 꽤 달변처럼 말하는도다. 아무려면 어떠냐. 너희들은 이곳에서 죽을 것인데.”

이방원의 옆으로 한 명의 덩치 좋은 첩리사내가 슬쩍 손을 들자 이방원의 앞에 도열해 있던 궁수들이 일제히 활시위에 살을 얹었다. 다름아닌 백응 이숙번이었다.

궁수들의 손에 들린 화살은 번쩍이고 있었고, 활 역시 당당하게 위아래가 맞아 떨어지니 강궁의 기세가 완연하였다. 경번갑 하나로 받을 수 있는 화살들이 아니었다. 시위 한 번에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견태고는 고개를 들어 이방원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눈길을 받은 이방원 역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방원을 노려보던 견태고의 입이 열렸다.

“정안군 나리. 정녕 이 방법 외엔 없사옵니까?”

“작금 천하의 기운이 왕씨의 멸족을 원한다. 나라고 살업을 원하여 이 길을 가겠느냐. 바른 길을 가기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을 감내하는 것이 아니랴.”

“그 말이 전에 죽은 오대제와 오현도의 그릇된 충심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씀이오!”

“무엇이?”

이방원의 눈썹이 자기도 모르게 솟구치는데, 견태고는 그를 노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부자가 행한 일을 되짚어 보시오. 이유 없이 관원들을 주살한 것도 모자라 부모 없는 아이들에게 고려의 뒤를 잇겠다 하여 왕씨를 억지로 준 것 또한 그들입니다. 이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칼날 앞에 목을 대고 살아왔고, 급기야는 아이들을 지키던 왕씨 규수마저 흉수에 당하고 말았습니다!”

견태고는 크게 호흡하고는 다시 이방원을 보며 말하였다.

“한데 지금 나리께서는 그 때 오씨들이 한 죄과를 다시 반복하고 계시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죄를 물어 그 생명을 없앤다고 하면 그들이 했던 일과 지금 나리의 일이 무엇이 다릅니까! 그들의 암우(暗愚)를 지금 나리가 똑같이 하는 것이 아닙니까!”

“닥쳐라, 견태고! 나는 이 나라의 왕자다! 나라의 위협이 되는 것은 모두 구축해야 하는 것이 왕자의 의무 아니더냐!”

“왕자 이전에 공맹의 덕목은 잊으셨습니까!”

순간 이방원의 눈이 커지며 이가 부드득 갈리는 소리가 이숙번의 귀까지 들려왔다. 하지만 그 순간, 열리려던 이방원의 입에 다시 굳게 닫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덤벼들듯이 대들던 견태고가 어느새 환도를 칼집에 밀어넣고는 두 손을 땅에 대고 그대로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아이들을 살려주십시오. 나리!”

어느새 이상겸과 장천보 역시 칼을 칼집에 밀어 넣고 같이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보던 율목어미와 아이들도 모두 무릎을 꿇는데 견태고의 입에서는 계속 절절한 간청에 새어나왔다.

“삼남으로 내려가 살 것입니다. 개경과 한양 길은 일평생 쳐다보지도 않겠습니다! 아이들에게 책을 주지 않을 것이고, 활과 칼도 주지 않겠습니다! 나도 이 칼을 버리겠습니다!”

사내는 사람의 말로 울부짖으며 짐승처럼 두 발과 두 다리를 땅에 대었다. 이방과는 물끄러미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견태고를 바라보며 말로 표현 못 할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들의 이름도 바꿀 것이오! 아무도 모르게 할 것입니다! 성을 물어본다 해도 왕씨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방원은 말 위에 앉아 무심한 표정으로 바람에 날리는 깃발과 물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청수한 사내의 무덤덤한 표정과는 달리, 견태고는 말 그대로 몸으로 울고 있었다. 사내의 눈에서는 어느 덧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부터 이 아이들은 전(全)가요! 옥(玉)씨요! 신(申)씨라 부를테요! 평생 받은 성으로 세세손손 살 것이요! 믿어주시오! 이씨의 하늘과 이씨의 땅에 맹세합니다!”

“왕씨의 성을 버리고 이씨의 하늘에 맹세하겠다고?”

이방원의 입에서 멍하니 견태고의 말을 읊조리자 견태고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합니다! 원하신다면 제 목숨으로 그 약조를 지키겠나이다!”

이방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견태고를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이방원의 옆에 서 있던 백응 이숙번이 콧방귀를 뀌더니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주 밑바닥 무관 놈이 하늘 두려운 줄 모르는구나. 조선의 왕실과 거간놀음이라도 하겠다는 수작이냐!”

이숙번은 손을 들어올리더니 천둥치는 듯한 소리로 급작스럽게 호령을 내렸다.

“궁수, 탑전(搭箭)!”

순간 견태고와 이상겸의 고개가 저절로 올라갔다. 장천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방원이 고개를 돌리며 이숙번을 바라보는 순간, 궁수들의 활시위가 만작을 그리며 휘어졌다. 이상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숙번의 입에서 날카로운 명이 튀어나왔다.

“이전(離箭)하라!”

견태고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뒤로 몸을 돌렸다. 사내의 눈 앞에 무릎 꿇은 채 퉁방울만큼 눈이 커진 율목어미와 율목이가 들어왔다.

사내는 두 팔을 날개처럼 벌리며 두 사람을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여인과 아이의 눈이 동시에 감기며 사내의 품 안으로 작은 새처럼 안겨 들어왔다. 사내 역시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위로 귀 옆으로 호금(胡琴)이 끊어지고 바람이 우는 듯한 화살소리가 사방에서 맴돌며 공기를 찢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아이와 여인의 머리과 몸의 체온이 사내의 가슴으로 전해졌다.

불타오르던 서주의 초가집과 새까만 연기가 피어오르던 서주의 푸른 하늘이 사내의 머릿속에서 심상이 되어 떠올랐다.

그 때의 푸른 하늘은 오늘 하늘과 무척이나 닮아있구나 싶은 생각이 견태고에게 떠올랐다.

그리고 침묵이 사방을 감싸고 돌았다.



“형무야.”

어경순의 울음섞인 목소리가 견태고의 정지된 상념을 깨웠다.

사내는 아직도 자신이 이생에 머물러 있음을 알았다.

견태고는 천천히 율목이와 여인을 감쌌던 팔을 풀고 몸을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그는 입을 벌리고 멍하니 앞에 벌어진 광경을 볼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앞에 장천보와 한형무가 두 발을 활짝 벌린 채로 화살을 온 몸에 받은 채 땅에 깊은 뿌리가 박힌 나무처럼 서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의 옆에는 이상겸이 등을 보인 채 어경순의 방패와 견태고 사이에서 웅크린 아이들을 감싸고 몸을 구부리고 있는데, 사내의 등에는 화살이 예닐곱발 그대로 박혀 있었다.

아직 이상겸의 눈은 형형하니 빛나고 있었는데, 그는 옆에서 작은 몸집을 한없이 불리고 아이들 앞에 거목처럼 버티고 서 있는 한형무를 보더니 신음을 흘렸다.

“형무···..이 멍청아···.뭐 하는 거냐···.”

한형무는 입에서 선혈을 주르륵 흘리더니 이상겸을 보며 붉은 잇새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상인은 이문을 남기고 제가 살아야 한다는데···.어째···..저는···.글러먹은 상인입니다요.”

“이보게···”

한형무는 천천히 눈을 감더니 그대로 고개를 떨구고 모래벌판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를 보던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상겸은 아이들을 보더니 이를 악문 채 미소를 지어보였다.

“괜찮다. 우린 다 괜찮아. 너희들은 모두······괜찮으냐?”

“아버지!”

아이들이 와락 일어서며 이상겸을 껴안았다. 이상겸은 미소를 띤 채 천천히 눈을 감는데, 어경순이 쓰러지는 이상겸을 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홍일국은 멍하니 비틀비틀 일어나 장천보의 앞으로 다가가 털썩 무릎을 꿇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태산같이 표정없던 장천보의 마지막 표정은 눈을 부릅뜬 채 앞을 노려보며 두 손을 활짝 벌려 아이들에게 가는 모든 화살을 자신이 맞겠다는 듯 기운차게 가슴을 벌리고 있었다. 홍일국은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시작했다.

이방원의 시선은 조용히 이숙번을 향하였다. 이숙번은 그런 이방원을 보더니 조용히 말을 내었다.

“나리께서 명을 내리실 일이 아니라 생각하였습니다. 더러운 일을 하는 사람은 따로 필요한 법입니다.”

이방원이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자 이숙번은 입맛을 다시더니 다시 궁수들을 바라보며 명을 내었다.

“궁수, 탑전!”

그때였다.

“멈춰라!”

천하가 진동하는 듯한 호령이 언덕 위에서 울려왔다. 이방원과 이숙번의 고개가 동시에 언덕위로 돌아갔다.

언덕 위에는 시커먼 철갑을 입은 곰 같은 용장이 장검을 찬 채로 말 위에서 거대한 체구를 뽐내고 있었는데, 그의 뒤로 일단의 철기들이 열을 맞춰 언덕 아래로 내려오며 이방원을 향하는 중이었다.

이숙번의 눈살이 슬쩍 찌푸려졌다.

그의 앞에 다가오는 철갑의 사내는 다름아닌 영안군 이방과였다. 이방과가 이방원과 이숙번을 바라보더니 범 같은 목소리로 좌중을 제압하였다.

“모두 물렀거라! 내 명이다!”

이방과의 목소리가 거칠게 울려퍼지며 다가오는 철기들의 앞으로 나와 견태고와 이방원 사이를 가로막았다. 이방원이 그런 형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형님.”

“너야말로 뭐하는 것이냐! 이들이 공양군과 관계없음은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저도 알고 형님도 아시지요. 하지만 왕명을 거역할 셈이십니까?”

“이 아이들에 대한 처우는 전하께서 직접 하달하신 바가 없다! 너도 알지 않는가!”

이방원은 자신의 형을 바라보며 기가 차다는 듯 말하였다.

“형님도 암묵적으로 동의하신 일을 어찌하여 손바닥 뒤집듯 하십니까? 이 일이 그리 될 일입니까?”

“내가 잘못 생각하였다! 일이 이리 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저 아이들은 끝까지 보호했어야 할 일이었는데 헛된 근심이 결국 피를 부른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충신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 죄를 짓게하는 것이 아니냐!”

이방과의 말을 듣던 이방원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어느새 여유작작하던 정안군의 얼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예전 고려의 밀직제학이었던 이리 같은 이방원의 얼굴이 다시 사내의 표정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무리 형님이시라 한들 이 일은 끝을 봐야 하옵니다! 그것이 저와 형님이 살고, 결국에는 아버지가 근심없이 나라를 통치하실 길입니다! 그 길을 막으신다면 저는 다시 예전의 사람 잡는 이방원으로 돌아갈 것이옵니다!”

이방과는 동생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분노가 가득하던 이방과의 표정은 어느덧 화가 사라지고 그 가운데 처연함이 가득해지는데 문득 땅을 바라보던 이방과의 눈이 동생을 바라보며 여느 때와 다른 조용한 어조로 동생을 불렀다.

“방원아.”

이방원이 형을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데 이방과는 동생의 표정에 아랑곳없이 자기 말을 하였다.

“일전에 네가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네 부탁으로 고응의 화살 앞에 서던 날. 우행(愚行)을 나중에 꼭 책(責)해달라 하지 않았더냐. 신심(身心)을 다하여 내 말을 따르겠다 하지 않았더냐?”

“형님, 그 이야기가 왜 여기서······”

지난 이야기가 형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이방원의 서늘하던 눈이 빛을 잃고 서서히 커졌다. 이방과는 동생의 표정을 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오늘 네게 부탁하겠다. 내 말을 따라주어라. 저들에게서 활을 거두자.”

“형님.”

“언제고 우리는 이 일을 다시 말할 날이 올 것인데 그 날 서로가 잘 하였다 말할 때가 올 것이다.”

“형님.”

“이것이 사람의 일이고 왕자의 일이냐? 왕의 의지가 아니라 고굉지신(股肱之臣)들의 바램 아니냐? 힘없는 자를 도말하고 그 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왕자의 길이라면 난.······”

이방과가 말을 채 잇지 못하자 이방원 역시 물끄러미 형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고굉지신 말입니까.”

이방원은 잠시 눈을 감고 형의 말을 뒤풀이하더니 이윽고 눈을 다시 뜨고 여전히 무릎 꿇고 있는 견태고를 바라보았다. 이방원의 비정한 눈동자가 슬쩍 찌푸려졌다.

“지유 견태고. 네가 예전 동이 떠 오를 적, 율목이와 함께 있는 내게 공맹의 도를 물었더랬다.”

“그러하옵니다. 정안군 나리.”

찌푸려진 이방원의 눈이 견태고를 노려보며 이가 드러났다.

“내 오늘 그 공맹의 도를 끊겠다.”

견태고 역시 이방원을 노려보는데, 이방원은 그런 견태고를 빤히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인의(仁義)를 버리고 패도(覇道)를 취하며 조선을 위해 모든 칠정육욕을 멸할 것인데 애오라지 내 남은 정(情)은 네가 다 가져가거라.”

이방원은 견태고가 아니라 견태고의 뒤에서 무릎 꿇고 앉아있는 사내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율목이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땅을 바라보다 문득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방원의 얼굴과 눈이 한 번 마주쳤는데, 아이는 이방원을 보며 다시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이방원은 그 모습을 보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어느 순간 가슴 속을 뒤흔들며 끓어오르던 살심(殺心)이 홀연 꺼지며 연기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방원은 잠시 하늘을 바라보더니 누구에게 던지는 지 알 수 없는 말을 강변에 내던지고 고삐를 잡았다.

“율목이 잘 키우시게.”

이방원이 말머리를 돌렸다. 정안군 이방원의 몸이 천천히 말과 함께 멀어지자 왕자를 둘러싼 궁수들과 이숙번 역시 자취를 감추었다.

정안군이 사라진 부둣가에는 오직 영안군의 군사와 살아남은 척오조원들만이 남아있었다. 이방과는 죽은 장천보와 한형무. 그리고 이상겸을 보며 눈을 지그시 감고는 명을 내렸다.

“이것으로 족하다! 지유 견태고! 너는 어서 아이들을 인솔하여 배에 오르거라!”

“나리.”

“오늘 척오조 지유 견태고를 비롯한 척오조와 그 식솔은 모두 임진나루에서 죽었다! 실제로도 그리 되었으니 더 이상 세간에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나리!”

이방과는 이를 깨물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내는 울부짖듯 부르짖었다.

“내가 끝까지 모자라 아랫사람들을 모질게 다루는구나! 이것이 능신(能臣)과 내 마지막 만남이로다! 다시는 못 볼 것이니 그것이 안타깝구나!”

견태고가 말 위의 이방과를 보며 천천히 두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고는 엄숙하게 절을 하였다. 사내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구명의 감사함인지 동료들을 잃은 서러움인지 앞날에 대한 불안함인지 알 수 없는 울음이었다. 장성한 사내는 아이처럼 울며 말 위의 사내에게 절을 올렸다. 견태고의 절절한 목소리가 하늘을 향해 울려퍼졌다.

“만수무강 하옵소서!”

사내의 말을 들은 이방과의 표정은 비통하기 그지없었다. 곰 같은 덩치를 자랑하는 장년의 왕자는 부하에게서 결국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평안히 가시게! 같은 하늘 아래 있으니 인연이 되면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을까?”

“영안군 나리!”

“모두 돌아간다! 전력으로 돌아간다!”

이방과의 말머리가 돌리며 철기가 같이 대오를 맞춰 다시 언덕 위쪽으로 향하였다. 왕자와 병사들이 사라지고 난 부둣가에는 산 자와 죽은 자들만이 남아 있었다.

홍일국과 어경순이 비틀대며 죽은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며 울기 시작했다. 율목어미와 율목이도 울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견태고는 여전히 아이들이 끌어안고 있는 이상겸을 향해 비척대며 걸어갔다. 삭주출신의 사내는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봐. 상겸이. 왜 말없이 웃기만 하나?”

“······모두···.끝난···.거요?”

이상겸의 입에서 나온 가느다란 음성에 견태고의 가슴이 들썩이며 얼굴이 일그러졌다. 견태고의 입에서 숨이 북받쳐 올라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끝났네! 모두 살았어! 이제···..가세···..”

“잘···되었구먼···.”

“가세!”

“고맙소···지유···..”

“상겸이!”

견태고의 말을 듣던 이상겸의 눈이 가늘게 떠지며 자신을 보고 있던 견태고를 물끄러미 올려보았다. 사내의 입이 다시 옆으로 활짝 벌어지며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실로 교활한 삭주 첨병에게 어울리지 않는 선하디 선한 미소였다.

“내 아이들······부탁합니다. 지유를 만난 게 내 천복(天福)이야···..”

“이상겸!”

이상겸이 눈이 다시 천천히 닫혔다. 그를 보고 있던 견태고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 턱을 타고 떨어졌다. 견태고는 입을 닫고 고개를 들었지만 일그러지는 표정을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사내는 입을 벌리고 꺽꺽 울기 시작했다.

뒤에 있던 율목어미와 아이들과 홍일국과 어경순도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다. 견태고는 수많은 화살을 등에 지고 아이들을 감싼 채 웃으며 죽은 이상겸을 다시 보고는 무릎을 털썩 꿇었다.

“이 실없는 사람······”

하늘은 참으로 무심하게 푸르기만 한데 부둣가에는 산 자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하여 강변을 가득 메웠다.


조선 태조 삼년 음력 사월 열 닷새.

강화로 유배간 왕씨의 직계가 강화 나루에서 죽임을 당하고 그 이틀 뒤 열 이레날, 삼척에서 공양군이 그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사월이 가기 전에 왕씨의 왕계(王系)와 왕씨 중 이름난 이들이 모두 백 수십여명이 죽은 바, 그들의 이름은 가까스로 살아남은 후손과 지사들에 의해 기억되고 기록되어 누대에 전해졌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개경 내창의 포구에서 사라진 아홉 왕씨 아이들에 대한 소문은 그 이후 들려오지 않았으니, 그 이야기를 아는 이들은 적었고, 안다 한들 시중에 떠도는 항설(巷說)이 되어 곧 사람들의 흥미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 뿐이었다.

유유히 내창 포구 아래로 흐르는 임진강은 수많은 배를 띄워 서로 동으로, 멀리 바다를 건너 남으로 내려 보냈지만 강 역시 입을 꾹 닫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곳에서 사람의 자취는 지워지니

오롯이 보이지 않는 한(恨)과 은(恩)만 남아 있었다.

그렇게 하늘은 사람에게 후하고 박한 것 없이 오로지 흘러가고 돌아오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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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결미(結尾): 조선 태종 십삼년 음력 십일월 스무 엿새 +20 22.08.29 451 31 21쪽
»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닷새(6) +2 22.08.29 249 17 19쪽
119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닷새(5) +4 22.08.26 250 14 15쪽
118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닷새(4) +2 22.08.26 223 11 15쪽
117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닷새(3) +5 22.08.25 237 13 16쪽
116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닷새(2) +4 22.08.25 229 12 15쪽
115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닷새(1) +3 22.08.24 239 17 13쪽
114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나흘(4) +2 22.08.24 221 13 14쪽
113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나흘(3) +5 22.08.23 240 14 12쪽
112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나흘(2) +3 22.08.23 215 12 13쪽
111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 나흘(1) +4 22.08.22 260 15 15쪽
110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열흘 +1 22.08.22 250 14 16쪽
109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초사흘 +5 22.08.19 288 16 12쪽
108 조선 태조 삼년 사월 초하루 +2 22.08.19 278 12 15쪽
107 음력 칠월 열 엿새(3) +7 22.08.18 279 17 16쪽
106 음력 칠월 열 엿새(2) +2 22.08.18 257 13 14쪽
105 음력 칠월 열 엿새(1) +3 22.08.18 256 11 13쪽
104 음력 칠월 열 이틀 +3 22.08.17 277 14 14쪽
103 음력 칠월 여드레 +4 22.08.17 263 13 14쪽
102 음력 칠월 닷새 +4 22.08.16 263 15 12쪽
101 음력 칠월 나흘 +1 22.08.16 248 13 13쪽
100 음력 유월 스무 나흘(5) +5 22.08.15 279 18 17쪽
99 음력 유월 스무 나흘(4) +3 22.08.15 257 12 13쪽
98 음력 유월 스무 나흘(3) +4 22.08.12 284 18 13쪽
97 음력 유월 스무 나흘(2) +2 22.08.12 256 9 14쪽
96 음력 유월 스무 나흘(1) +1 22.08.11 276 13 13쪽
95 음력 유월 스무 이틀 +3 22.08.11 264 12 18쪽
94 음력 유월 스무 하루 +3 22.08.10 288 1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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