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XXX - 89화 민준, 함께하다 (1)
- 89화 민준, 함께하다.
모든 것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걱정을 했던 소들도 무사히 겨울을 났고 돼지들도 별일 없었다. 어느정도 큰 두 마리 새끼만 빼고 말이다. 민준은 겨울동안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해 어쩔수 없이 돼지를 잡아야 했다. 물론 거기에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먹어대는 것도 이유였다. 그때 민준은 알았다. 소를 키우고 돼지를 키우던 사람들이 왜 인터뷰에서 그들을 자식처럼, 가족처럼 여긴다고 했는지. 민준 역시도 함께 산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돼지를 잡을땐 미안한 마음에 울컥 하기까지 했다.
부족한 영양은 콩나물을 키워서 해결했다. 잔디가 물만으로 자라는 콩나물에 놀라워하며 민준을 보았지만 그도 왜 콩이 콩나물이 되는가에 대해선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어깨를 으쓱 하고 말았다. 그 뒤로 잔디가 민준을 보는 눈이 더 초롱초롱 해졌음은 물론이다.
봄이 되자 새끼 돼지들은 전에도 그랬듯이 어느샌가 성돈이 되었다. 성돈이 되었다는게 무슨 뜻인진 모두 알것이라 믿는다. 물론 그 모습을 보던 민준이 한동안 집안에서 두문불출했음은 비밀이 아니었다. 덕분에 잔디만 문밖에서 서성여야 했다.
어김없이 원시인들은 민준을 찾았다. 이번에도 각종 제물이 함께 했음은 물론이었다. 이번에는 좀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던 민준은 그들이 가져온 제물에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이번 제물중 가장 큰것은 다름 아닌 어린 남자 아이였다.
민준은 당혹스러웠지만 차마 아이를 돌려보내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잔디와 그 아이는 산제물인듯 싶었는데 이대로 돌려보내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끔찍한 일이 일어날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결국 남자 아이는 민준에게 ‘별이’ 라는 이름을 받고 민준과 잔디와 함께 그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하지만 별이는 잔디보다 조금 머리가 떨어지는듯 말을 금방 배우지 못했다. 다만 어리긴 해도 남자는 남자였는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민준의 나이프를 탐내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감히 직접 손을 대거나 하는 짓을 하진 않았다. 그나마 주제는 알고 있는듯 했다.
그해에는 작년보다 조금 일찍 콩과 죠리퐁을 심었다. 아무래도 작년에 그 검은 덩어리들은 병충해인듯 싶었는데 농약같은것은 없으니 일찍 심고 일찍 거둘 생각이었다. 다행히 작년 연구결과에 따르면 심는 날짜에 그리 영향을 받지 않는듯하니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리고 올해도 어김없이 소떼는 동쪽에서 밀려와 서쪽으로 사라져갔다. 이미 민준에게는 세 마리의 소가 있기 때문에 더 사로잡을 필요는 없었지만 소고기를 먹을 생각으로 작년처럼 함정을 팠다. 작년에 만들었던 함정들은 어느새 얕은 웅덩이로 변해 있었기 때문에 다시 사용할순 없었다.
별이는 마치 자신이 민준을 지키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대나무창을 들고 민준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하지만 좀처럼 위험한 짓은 하지 않는 민준 때문에 활약할 시간이 없었는데 민준이 무기를 들고 소를 잡으러 가자 질세라 뒤를 따랐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별이는 민준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다가 소고기를 나르는 일만 하게 되었다.
민준은 소를 그 자리에서 해체해 고기의 일부와 뼈, 가죽만 집으로 옮겨갔다. 어차피 고기를 모두 가져간다 하더라도 보관이 어려워 결국 쓰레기만 만들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만약 토굴이 좀더 차가웠다면 어땠을런지 모르지만 말이다.
나머지 뼈는 고기를 모두 발라내고 일부는 사골을 끓이고 일부는 토굴에 보관했다. 살을 발라냈으니 썩지는 않겠지 라는게 민준의 생각이었는데 결국 민준은 그걸 먹지 못했다.
가죽은 잔디에게 맏겼다. 잔디는 소가죽을 무두질해 말렸고 민준은 후에 그것으로 북을 만들 생각을 했다. 북이 있다면 혼자 노래를 부를 때에도 좀더 흥이 날 것 같았다.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처음엔 분명 집만 만들고 나면 쉬엄쉬엄 놀면서 살아도 될것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일을 하면 할수록 일이 늘었다.
집과 마당을 두르는 튼튼한 목책을 세우는 일도 여전히 지지부진, 끝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달구지도 만들어야 했다.
작년엔 소를 잡아 놓고 마땅히 쓸데가 없어 놀렸지만 언제까지 그럴수는 없었다. 밥값을 시켜야 했다. 하다못해 쟁기라도 만들어 끌리면 수확량이 늘것이라 생각했다.
소달구지를 만드는 일은 보통 어려운게 아니었다. 자전거나 수레랑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민준은 어째서 자동차 산업을 최첨단기술의 집약체라고 하는지 이해할것 같았다. 고작해야 나무로 만드는 소달구지 하나를 만드는데도 연습장 몇장을 박박 구겨가며 설계도를 그려야 했고 그것을 직접 실행에 옮겨 통나무들을 부품별로 만드는데에는 때려치우고 싶은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럴때면 아예 손을 놓고 꿀단지를 꺼냈다. 여름이 되면서 작년에 여왕벌을 놓아 두었던 나무로 가서 다시금 벌집을 꺼낸 민준은 이번에도 여왕벌이 있는 부분만 떼어 나무위에 올려두고 나머지 벌집은 집으로 가져와 단지에 담아 꼭꼭 봉인하고 물동이 안에 띄워 두었다. 혹시 개미라도 달려들면 먹지 못할까 싶어 개미가 물을 건너지 못한다는 데에서 생각해낸 꼼수였다.
밤에는 불가에 앉아 이런저런 것들을 만들었다. 예전 믹서기가 보급되기 전에 마늘을 찧을때 주로 사용하던 작은 절구와 절구공이를 만들어 잔디에게 주었다. 이제는 어렵게 돌판 위로 죠리퐁을 비비지 않고서도 쉽게 절구질로 겨를 벗겨낼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별이는 민준보다 잔디를 따랐다. 아무래도 어린 나이에, 물론 민준이 보기에 그랬지만 어쨌든 어린 나이에 살던 곳에서 떨어져 민준과 잔디 이렇게 셋이서만 살다보니 가족들이 그리운듯 싶었다. 그럴때면 잔디가 별이를 안아주곤 했는데 그럴때마다 별이는 잔디의 가슴을 만지작 거리며 잠이 들었다.
망할! 어딜 감히! 라는게 민준의 심정. 창들고 민준을 따라다닐 정도면 다 큰놈인데 그런 녀석이 그도 한번도 만져보지 못한 여자 가슴을 주무르다니. 순간 민준의 머릿속에 좋지 않은 그림이 그려졌다.
원시인들은 민준을 신으로 생각한다. 잔디도 역시 원시인이다. 그렇다면 잔디 역시 민준을 신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평소에 잔디가 민준에게 하는 행동으로 봐선 확실했다. 그렇다면 민준은 이들에게 어려운 존재. 당연히 이성으로서 호감을 가질 리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민준을 제외하곤 잔디와 별이뿐. 자칫하면 둘이 엮이게 되는 일이 일어날수도 있는 일이었다. 남자와 여자라곤 둘 뿐이니 그렇지 않을래야 않을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민준은 별이가 못마땅 했지만 그렇다고 쫒아낼수도 없는 노릇. 점점 상황은 민준으로 하여금 결정을 내리도록 만들고 있었다.
애들은 금방 자란다.
곧 가을이 다가오려 할 때였다. 잔디가 하혈을 하였다.
민준은 순간 그것이 뭔지 알것 같았다. 아니 같은게 아니라 여자아이가 커가면서 하혈을 하는 이유라곤 한가지 뿐이었다. 바로 생리. 이제부터 잔디는 여자아이가 아니라 한명의 여자가 되었다. 그리고 민준은 잔디에게 축하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잔디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해 가을을 지나며 어김없이 원시인들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아이가 없는걸 보니 인신공양은 봄에만 하는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잔디였다. 갑자기 떠나는 원시인들과 함께 돌아가려는게 아닌가.
원시인들도 놀라 그들끼리 뭐라고 떠들어 댔고 민준도 잔디의 팔을 붙잡았다. 그때 잔디는 그동안 배운 말로 민준과 더 이상 함께 살수 없는 이유를 털어 놓았고 민준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을수밖에 없었다.
생리를 하면 더러운 몸이라니. 아, 물론 민준은 잔디가 무슨 의미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진 이해했다. 옛날에도 여자는 생리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핍박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본듯한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원시시대부터 있었다니, 놀랍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민준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잔디를 떠나 보낼수는 없었다. 그녀와 함께한 1년 반 동안의 시간들. 그동안 민준은 잔디와 정이 많이 들어 있었다. 그게 여동생이나 가족으로서의 감정인지 아니면 한명의 여자로서의 감정인지 민준도 확실하게 구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게 잔디를 붙잡는데 문제가 되진 않는다.
결국 민준은 잔디를 집에 머물게 하는데 성공은 하였으나 마음은 그리 편치 않았다.
앞으로도 그들은 매년 봄이면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아이를 부모의 곁에서 떼어 그에게 바칠것인데 민준이 생각하기론 그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을 원시인들에게 이해시키기에는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원시인들끼리도 현대인들처럼 원활한 의사소통을 하는건 아닌듯 잔디와 별이 사이에도 막히는 부분이 많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민준은 굳게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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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게 결심 했다...를 다시 읽어보니 국민의례가 생각났습니다. 그런데 뭐때문에 국민의례 일부분 내용이 바뀐거죠? 별로 문제될것같은 부분은 없던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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