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XXX - 73화 땅울림 (3)
- 73화 땅울림 -
완연한 봄이 되었다.
하늘엔 온갖 모양을 한 더없이 하얀 구름들이 떠다니고 새들은 온종일 지저귀며 이나무 저나무를 날아다녔다.
사방팔방으로 거미줄처럼 얽힌 아스팔트도로도, 높은 콘크리트 건물도 없는 초록으로 물들은 원시시대의 봄. 더없이 평화로웠다.
민준도 답답한 후드티와 청바지를 벗어 버리고 팬티바람으로 집을 나와 새로 만든 자전거를 손봤다. 민준이 원래 바바리맨이라거나 노출증이 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불을 피워 나무바퀴를 만들다보니 따뜻해진 봄 날씨 때문에 땀이 났을 뿐이다.
물론 처음엔 민준도 부끄럽게 생각했다. 현대인으로 살아온 민준에게 옷은 비단 주변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체온을 유지하기위한 수단 외에도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예의범절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현대가 아니라 원시시대이고, 팬티와 신발만으로 돌아다닌다 한들 그에게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함께 살게된 잔디 또한 오히려 팬티만 입은 민준을 더 편하게 받아들였다.
그런 민준 옆에선 잔디가 돼랑이에게 먹이를 줬다. 또 그 옆에선 언젠가부터 붙어 있던 회색 돼지가 돼랑이의 먹이를 나눠먹었다. 처음엔 민준이나 잔디가 접근할때마다 어디론가 도망가거나 멀찍이서 딴짓을 하며 둘이 사라지길 기다리더니 언제부턴가 둘이 지나다닐때에도 도망치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먹이를 내올때면 돼랑이보다 먼저 벌떡 일어나곤 했다.
민준은 먹이를 주는 잔디와 돼랑이들을 보며 흐믓하게 웃었다. 비록 지난번에 원시인들에게 돼지 4마리를 빼앗겼지만 하루가 다르게 돼랑이의 배가 불룩해지는 것이 아무래도 다시 새끼를 밴것 같았다. 물론 앞으로 나올 돼랑이 새끼들의 애비는 그 옆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 회색 돼지가 분명했다.
민준은 요즘 그 어떤때보다 더 풍요롭고 만족스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컴퓨터 게임도, 만화책도 인터넷과 텔레비전도 없고, 뭐든지 구할수 있는 대형 할인마트나 패스트푸드점도 없지만 자신의 손으로 만든 튼튼한 통나무집과 먹거리도 충분했다. 게다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돼랑이가 새끼를 나고 또 그 새끼들이 자라서 또다른 새끼를 낳을테니 얼마 있으면 힘들여 사냥을 나갈필요도 없을 터였다. 다만 가끔씩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때면 사라진 자신을 찾고 있을 가족들과 친구들이 그립기도 했지만 요즘은 잔디라는 훌륭한 말벗이 생긴 뒤로는 외로움도 덜해졌다.
“잔디! 물, 물.”
민준은 잔디를 불러 컵을 들어 물을 마시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잔디가 놀랍게도
“예.”
라고 대답하며 물을 떠오는게 아닌가.
민준은 그 모습을 보면서 흐믓하게 웃었다.
그동안 민준은 틈틈이 잔디에게 말을 가르쳤다. 물론 아주 간단한 단어들이 대부분이었다. 예, 아니오 또는 주변에서 쉽게 찾을수 있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그정도로도 민준은 충분히 만족했다. 요즘 민준에겐 잔디에게 말을 가르치는것이 즐거움 이었다.
잔디도 하루가 다르게 민준과의 생활에 익숙해져갔다. 더 이상 손목까지 내려오는 소매를 갑갑해하지 않았고 대나무로만든 젓가락과 숟가락도 사용했다. 무엇보다 얼룩덜룩하던 얼굴과 먼지와 기름기가 떡이된 머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요즘엔 민준이 잘라준 가죽끈으로 머리를 묶기까지 했다.
민준은 냇가에서 시원한 물을 떠오는 잔디를 흐믓하게 바라봤다.
그때였다.
그긍, 그그긍.
땅이 울렸다. 하지만 그 진동은 너무나 미약해 사람이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민준과 잔디도 미처 진동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동물들의 감은 속이지 못했는지 민준의 통나무집 뒷산에서 이름도 알지 못하는 다양한 새들이 일제히 날아 올랐다.
푸드드드득.
민준의 머리위로 검은 그늘이 졌다. 민준도 무슨 일인가 하늘을 올려다 봤지만 영문은 알수 없었다.
며칠이 지났다.
땅을 울리는 진원을 알수 없는 진동은 점점 강해져 민준도 느낄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 진동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계속 되었다. 하지만 어디서 시작된것인지 왜 이런 일이 생겨났는지 알수는 없었다.
그동안 민준은 집 주변에 콩을 심고 대나무를 잘라 새들이 쪼아먹지 못하게 방비를 하였다. 다행히 부리가 길다란 새는 주변에 없었는지 콩들은 문제없이 싹을 틔워 민준을 기쁘게 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여느때와 같이 잔디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있을 때였다.
아침을 먹고 나서는 콩 싹을 보호하던 대나무통을 치우고 둘레에 간단한 목책을 설치할 생각이었다. 이미 싹이 났으니 새들로부터 콩을 보호하던 대나무통은 필요없지만 대신 새싹을 먹어치우려 돼랑이들이나 작은 짐승들이 겁 없이 민준의 집 근처로 내려올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민준의 이 계획은 시작도 하기전에 다음으로 미뤄지게 되었다. 또다시 진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엔 벽틈을 메우고 있던 흙부스러기가 떨어지기까지 했다. 진동이 강해진 것이다.
민준은 수저를 놓고 가만히 진동을 느꼈다. 처음 진동을 느꼈을때 민준은 지진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현대로부터 약 1만년은 전이니 지각이 불안정해서 일어난 일이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이 진실인지 알아보기 위해 오랜만에 국사 교재를 펼쳤지만 오래전에 불쏘시게가 되어 있었다. 어쩔수 없이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아무래도 거기에 관한 내용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그에 관한 내용은 없었던듯 싶었다.
하지만 완전히 안심하지 못하고 있던 민준에게 확신을 준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시간이 갈수록 진동은 점점 강해졌고 며칠이 지나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분명 지진이라면 이런식으로 정기적으로 신호를 보내올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던것이 오늘에 이르른 것이다.
가만히 진동을 느끼던 민준은 얼른 벗어 두었던 청바지와 웃옷을 챙겨입고 창을 들었다. 그리곤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 뒤를 잔디가 따랐다. 하지만 민준은 잔디를 막아섰다.
“안돼. 기다려. 집에서 기다려, 알았지?”
민준이 손가락으로 집을 가리키자 잔디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더니 집으로 뛰어 들어가 문뒤에서 민준을 바라봤다.
그제서야 민준은 잔디에게 씨익 웃어 보이고는 벽에 세워두었던 자전거를 집어들었다.
처음 만들었던 자전거와 수레를 원시인들에게 도둑맞은후 새로 만들은 자전거는 무려 핸들이 돌아가는 최신식이었다. 전에 만들었던 자전거가 방향을 바꿀때마다 몸체를 통으로 돌려야 했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페달만큼은 어떻게 하지 못하였다. 통나무를 잘라 만든 바퀴를 대나무 페달로는 돌리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탁탁탁탁!
민준은 자전거에 올라 앉아 발을 굴렀다.
자전거는 민준이 발을 구를 때마다 점점 속도를 내더니 바람처럼 들판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민준이 달려가는 방향은 바로 동쪽이었다. 그곳에선 거뭇하고 거대한 무언가의 무리가 떼를 지어 민준의 집이 있는 서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민준의 목적은 바로 그 무리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위험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방향이 민준의 집쪽이 맞는지 아닌지 등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가만히 집안에 박혀 코앞에 올때까지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민준과 자전거가 풀밭을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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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나오는 소는 아프리카 물소의 생김새에 버팔로처럼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걸로 보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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