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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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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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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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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88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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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23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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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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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깨어진 신뢰

DUMMY

나는 알케니아와 계획에 따른 내일의 이동경로를 면밀히 검토하고 있었다. 이 때 붉은 바위족의 인물 하나가 나를 찾아왔다. 그를 발견한 순간 그렇게 귀 기울여 듣던 알케니아의 설명이 하나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인물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림자 매였기 때문이다.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사실 나는 내일 내가 죽을 가능성이 절반 이상이라 예상했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에게 꼭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를 피하고 있는 그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외려 그 쪽에서 나를 찾아온 것이다.

“....”

무슨 일로 온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와의 나의 관계에는 이미 치명적인 균열이 나 있고, 그것이 언제 깨질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나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긴장한 나머지 눈만 깜빡거리는 나대신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왕님의 제안에 대해 붉은 바위족 모두의 의견을 나누어 보았습니다. 이제 그 결론을 여왕님께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그랬구나. 나는 붉은 바위족에게 동맹 파기를 제안했고, 쌓이는 먼지는 부족 전체와 의논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굳이 그림자 매가 온 걸까? 그렇게 중대한 사안을 바르테인의 왕에게 전해줄 사람은 응당 잠정적으로 외교를 담당하고 있는 쌓이는 먼지여야 하지 않나?

“저희는 여왕님의 의견을 수락하기로 했습니다. 현 시간부로 붉은 바위족과 바르테인의 동맹은 파기이며, 오늘밤 저희는 연합군의 진채를 떠나려 합니다.”

붉은 바위족과의 동맹 파기는 나도 바라는 바였고 그래서 제의도 내가 먼저 했다. 그러나 뜻하던 결과가 나왔는데도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동맹 파기를 이야기하는 그림자 매의 무뚝뚝한 얼굴이 마치 나에게 영원한 결별을 선고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용건을 말하자마자 서둘러 돌아가려는 그림자 매의 모습에 가슴이 또 한 번 무너진다.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없이 저렇게 떠나 버리는 거야? 그들이 떠난 후 우리가 어떻게 할지 물어보지도 않는 거야? 배신감에 슬픔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할 말은 그게 다야?”

나는 서운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날카롭게 외쳤다. 잔뜩 흥분한 나와 달리 그림자 매는 고요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치열한 토론이 오고갔습니다. 찬성 쪽과 반대쪽이 팽팽하게 나뉘었죠. 그런데 여왕님께서 오늘 진채를 떠나는 자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선언해 주신 덕분에 한쪽으로 의견이 기울었지요.”

그래. 내가 오늘밤 탈영을 장려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붉은 바위족을 위해서였다. 동맹 파기를 구실로 기수들이 붉은 바위족의 꼬투리를 잡을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나 덕분에 붉은 바위족이 의견 합일에 이르렀다는 말보다 더 듣고 싶은 게 있었다. 내 말은 어떻게 그런 결론에 이르렀는지 자세히 설명해 달라는 뜻이 아니었다.

“아니, 너 개인적으로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없냐고?”

그림자 매는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그의 두 눈을 마주보니 분노는 서서히 두려움으로 바뀌어 갔다. 그가 냉정한 반응을 보이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긴장감에 사로잡힌다. 이윽고 그는 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회한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산더미 같이 쌓여 있지요.”

그 한 마디를 남긴 후 그림자 매는 등을 돌려 버렸다. 그가 걸음을 떼는 걸 보면서도 나는 그림자 매를 불러 세우지 못했다. 그랬다간 내가 정말로 두려워하던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에 보였던 그림자 매의 슬픈 눈. 그것이 어쩌면 내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성취라는 생각에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벨포트 경.”

“네, 여왕님.”

“그를 따라 가주세요. 붉은 바위족이 떠나려 할 때 바르테인 군이 막거든, 기수들에게 동맹이 파기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세요.”

원래는 내가 가서 하기로 했던 일이었다. 현재 기수들과 불편한 분위기이고, 그 자리에서 또 한 번 갈등을 겪게 될 터였지만 모든 걸 감수하려 했다. 그러나 붉은 바위족과 그림자 매가 떠나는 광경을 지켜볼 자신이 없어져서 누군가에게 떠넘길 수밖에 없었다.

‘나 내일 죽을 지도 모른단 말야. 이게 너와 나의 마지막이야. 그런데 넌 나에게 해줄 말이 그것 밖에 없어?’

별별 말들이 입 안을 맴돌았지만 결국 나는 그 중 어느 것도 꺼내지 못했다. 그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림자 매의 뒷모습만 바라보고만 있었을 뿐이다. 그와의 마지막이 이렇게 후회로만 남을 뿐이라는 건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렇게까지 괴로울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이윽고 진채 안이 소란스러워지다가 잠잠해 진다. 그리고 붉은 바위족이 떠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여러 가지 감정으로 복잡해진 나는 알케니아와의 상의가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잠이 들었다.


***


....꿈을 꾸었다. 그곳에는 악마가 없었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바르테인인지 붉은 바위족인지 구분하지도 않았고, 그림자 매와 나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다. 이것이 꿈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닫고 슬퍼지려 할 때까지 말이다.

아빠가 호박 머핀이 가득 담긴 쟁반을 들고 왔다. 그는 햇살처럼 따뜻한 미소를 지었고 반가워 달려간 나를 꼭 안아 주셨다. 이 광경을 저 멀리서 하이아온이 평화롭게 바라보고 있다.

-도망쳐, 휘렌델!-

뇌리속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반가운 목소리! 어리둥절해진 나는 손을 살펴보았다. 언제부터인지 칸딘이 내 손에 들려 있었다. 다음 순간 나는 공명을 통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검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그림자 매가 내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한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는 처음에는 그와 함께 앞으로 무작정 뛰었다. 그러다 불현 듯 떠오른 생각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그 검은 그림자를 안고 버티는 하이아온의 모습을 발견했다.

“안 돼!”

이윽고 검은 그림자는 하이아온을 삼켜 버렸다. 그리고 그 거대한 드래곤으로도 부족했는지 계속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발을 멈추려 했다.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검은 그림자가 아빠마저 삼키고 있던 중이었다.

“달려, 휘렌델! 멈추면 안 돼!”

그림자 매가 내 손을 억지로 끌면서 외친다. 하지만 나는 완강히 버텼다. 그 검은 그림자는 나를 쫓아오는 중에 지나치는 사람들 전부를 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탐욕스러운 검은 그림자와 마주하자 두 다리가 후들거린다. 하지만 나는 거꾸로 그것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것의 질주를 막기 위한 방법은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쨍강! 손에 들려 있던 칸딘이 갑자기 산산이 부서진다. 그의 희생 덕분에 검은 그림자가 또 한 번 주춤거린다. 대체 왜? 이런 결과를 막으려고 되돌아가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된 거지? 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 검은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도망치자!”

그림자 매가 다시 한 번 나에게 애원한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도망칠수록 소중한 사람들이 희생되어 버려. 저것을 멈추기 위해서는 내가 가야만 해. 그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그림자 매의 손을 완전히 뿌리쳐 버렸다.

이런 나를 보는 그림자 매가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그 표정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뇌리에 각인이 되어 버렸다. 어쩐지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계속 볼 자신이 없어진 나는 다시 쫓아오기 시작한 검은 그림자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끝났다. 그림자 매의 어깨 너머로 보이던 윈더민 성도, 그 안에서 밝은 표정으로 돌아다니던 사람들도, 우리가 대화를 나누던 붉은 바위 동굴도.... 내가 그 검은 그림자 안에 삼켜진 순간 전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리고 나는 죽음보다 더 깊은 절망 속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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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사족이지만 휘렌델의 꿈에서 ‘악마가 없었다’는 

아르만시아와 같은 악마들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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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18 메틸아민
    작성일
    17.09.23 10:03
    No. 1

    그림자매가 이렇게 퇴장할 리는 없겠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7.09.24 23:29
    No. 2

    으음 아마도요....? (쿨럭)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7 Brav
    작성일
    17.09.23 13:21
    No. 3

    첫사랑이 역시 무섭네요. 그토록 미련을 남기고야 마니... 저 꿈은 자신의 희생의 결과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보여주는 휘렌델의 이성적 결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7.09.24 23:31
    No. 4

    휘렌델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습니다.
    저 꿈은 그 동안 그녀를 주저하게 만들었던 망설임이 구체화 된 것이며,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이 희생되었을 때의 결과에 대한 예측도 담겨 있을 겁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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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 불청객들 +4 17.10.13 416 7 9쪽
403 어그러진 계획 +4 17.09.25 395 8 10쪽
» 깨어진 신뢰 +4 17.09.23 370 11 9쪽
401 공감자 +4 17.09.21 393 9 10쪽
400 최소한의 전투, 최소한의 희생 +8 17.09.19 493 10 9쪽
399 왕의 허가 +4 17.09.17 459 9 9쪽
398 정답 +4 17.09.15 508 9 10쪽
397 허심탄회 +6 17.09.13 392 10 11쪽
396 발뺌 +4 17.09.11 420 8 10쪽
395 격발 장치 +4 17.09.08 394 7 9쪽
394 갈수록 태만 +4 17.09.04 496 11 10쪽
393 형제 간의 사투 +2 17.09.02 371 10 10쪽
392 왕의 의무 +2 17.08.31 424 11 10쪽
391 충신 +4 17.08.29 400 8 10쪽
390 정령왕의 행방 +4 17.08.27 423 9 9쪽
389 복수의 화신 +4 17.08.24 469 12 9쪽
388 권능 +6 17.08.22 471 1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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