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심탄회
쌓이는 먼지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한다.
“동맹을 파기한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내일이면 가시손톱의 우두머리와 싸우게 될 텐데 한 사람의 힘이라도 아쉽지 않은가?”
“그건 우리의....”
나는 목을 가다듬은 후 발언을 정정했다.
“내 싸움이야. 너희가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어.”
“네 싸움이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
나비의 춤이 내 말을 받아 곧바로 발언을 펼쳐나간다.
“너는 일전에 우리 전사들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전사가 아닌 자들까지 너에게 구원을 받았지. 작은 새, 우리 부족 전체가 너에게 목숨을 빚졌다. 우리가 네 싸움에 참여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 목숨을 빚졌기 때문에 함께 싸워주겠다고? 그러다 그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인데?”
나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바르테인군이 지금 너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내일 어떻게 나올지 뻔하잖아? 틀림없이 가장 위험한 전장으로 너희를 교묘히 몰아넣을 거야. 내일 얼마나 어려운 싸움을 하게 될 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어. 어쩌면 아르만시아를 가두는데 실패하고 내가 죽을 수도 있지. 그렇게 되면 기수들은 그 책임을 너희에게 돌릴 거야. 너희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나를 돕는 것 따위가 아냐. 바로 너희의 생존이지.”
나는 나비의 춤에게 왜 동맹을 파기해야 하는지, 왜 그들이 내일 전투에 참여해서 안 되는지 조목조목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뜻을 꺾지 않은 표정이었다.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이유는 나의 논리에 반박할 만한 말주변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나비의 춤은 대신 설득해 달라는 눈빛으로 쌓이는 먼지를 바라본다. 그러나 쌓이는 먼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의 기대와는 다른 것이었다.
“네 말이 옳다, 작은 새. 서로를 믿지 못하고 경계한다면 같이 싸우는 의미가 없겠지.”
쌓이는 먼지는 흥분한 나비의 춤이 따지고 들기 전에 얼른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 임의로 동맹을 파기할 수는 없어. 나는 말하기의 대표자일 뿐, 왕이 아니다. 결정은 부족 전체와 의논해서 내려야 한다. 돌아가는 대로 사람들과 이야기 해보겠다. 나비의 춤과 내가 지금 그렇듯 의견이 분분할 만한 안건이니 그 결과가 네 바람과 다를 수도 있다.”
이어지는 말을 들은 나비의 춤은 잔뜩 찌푸렸던 얼굴을 약간이나마 풀었다. 반면 이 자리에서 확답을 듣고자 했던 나로서는 조금 아쉬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붉은 바위족의 방식이니 어쩔 수 없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는 약속할 수 있어. 결과가 어떻게 나오던 네 말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겠다. 순진하게 악마들과의 싸움만 생각하다가 가장 위험한 전장으로 내몰려 허무하게 목숨을 잃지 않겠다. 이건 부족원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알았어.”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동맹을 파기함으로써 내가 이루고자 했던 목표는 달성된 셈이기에 일단은 만족하기로 한 것이다.
결론이 내려지자 나는 밖으로 내보냈던 기수들을 다시 천막 안으로 불러들였다. 미리 말을 맞추어 두었는지 그들은 자못 당당한 태도로 입장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내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조심스럽게 살피는 게 느껴진다. 어떤 놈들은 붉은 바위족 대표자들을 몰래 째려보기도 했다.
바르테인 군의 영주와 기사들이 전부 자리에 앉자 이번에는 쌓이는 먼지와 나비의 춤을 내보냈다. 그들과는 이미 이야기가 끝났기에 굳이 회의에 참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형식상으로나마 양측을 동등하게 대하는 모양새를 보이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들이 여왕님께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붉은 바위족이 나가기 무섭게 기수 하나가 묻는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해도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저희가 그들에게 식량을 제공한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이 척박한 땅에서 먹을 것을 구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는데, 저희는 동맹으로서의 예우를 다했습니다.”
켕기긴 하는지 그나마 내세울만한 부분을 끄집어낸다. 참으로 역겨워서 못 봐주겠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하나마나한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우리 허심탄회하게 얘기해보죠. 경들은 내가 마음에 안 들죠?”
여기서 그들이 붉은 바위족에게 가한 심리적 압박에 대해 추궁해 보았자 물증이 없으니 얻을 건 별로 없을 것이다. 뜬구름을 잡아 던지고 받는 것과 같은 정치적 논쟁에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일찍이 나는 그 방법으로 그들의 동의를 얻어냈고. 붉은 바위족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결국 지금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억지로 맞춰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단도직입적으로 접근해 보기로 했다. 당돌한 질문 내용에 순간적으로 놀랐던 기수들은 이내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강하게 부정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치도 않습니다! 어떻게 여왕님을....”
“당신들이 목숨 바쳐 나를 지키려는 이유는 내가 왕이기 때문이잖아요. 만약에 내가 왕이 아니었다면, 하워드가 죽지 않고 내가 페나의 영주에 머물러 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었겠어요? 이렇게 내 눈치를 보면서 굽실 거리고 있겠어요? 결국 당신들은 내가 좋아서 따르는 게 아니잖아요? 왕관만 쓰고 있다면 누구라도 상관없는 거잖아요?”
일순 회의장이 침묵에 휩싸였다. 시간이 흐르고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이려 할 즈음 한 사람이 분연히 외쳤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왕님!”
그는 바로 옌닐 경이었다. 란드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핵심 역할을 했던 충신이자 붉은 바위족에 대해 누구보다도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는 인물. 현재 남아 있는 기수들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여왕님께서는 바로 저희 앞에서 기사단장에게 왕위를 물려주셨습니다! 저희는 입회인이 되어 그 즉위식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악마들에게 날아가신 여왕님을 구하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어찌 저희가 여왕님이 아닌 왕관만을 쫓는다고 말씀하십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옌닐 만큼은 나에 대한 충성심이 진심인 것 같다. 목소리에 억울하고 비통한 심정이 절절히 묻어나온다.
“그런데 왜 경들은 내가 추구하는 이상을 지지해 주지 않는 건가요?”
나 또한 서운하고 서글픈 감정을 이 한 마디에 모조리 담아냈다. 나의 진심을 느낀 기수들은 하나 같이 숙연한 얼굴이 되었다.
“붉은 바위족은 바르테인의 땅을 빼앗았고 하워드 선왕까지 그들과 싸우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들과 동맹을 맺을 수 있겠습니까?”
진심과 진심이 맞부딪친 까닭일까? 기수들은 더 이상 비겁하게 논점을 회피하려 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붉은 바위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증오심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어베레드는 원래 그들의 것이었어요. 부족 대통합의 시대 이래로 그들의 터전이었는데 우리가 먼저 빼앗은 거라고요. 그 전쟁에서 승리한 정복왕 윌리엄 또한 그들 선조의 목숨을 셀 수도 없이 빼앗았어요.”
“그들의 세력은 작고 볼품없습니다. 게다가 철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미개한 야만족입니다. 그 하찮은 자들이 어찌 우리와 동등한 입장에 설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 우리는 그 볼품없는 세력조차 아쉬운 상황이에요. 지난 전투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역량을 입증하지 않았던가요?”
기수들은 차례로 한 마디씩 던졌고, 나는 그 때마다 조목조목 반박해 주었다. 이윽고 소나기처럼 빗발치던 기수들의 발언이 잠잠해지자 비로소 나에게도 발언할 기회가 주어졌다.
“여러분들 모두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그들과 평화적인 관계가 되기를 희망해요.”
“대체 바르테인이 뭐가 아쉬워서 그들과 화친을 맺어야 하는 겁니까?”
그들이 발언할 때마다 내가 그랬듯 누군가 반박한다. 나는 기수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아쉬워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들 또한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바르테인과 붉은 바위족. 비록 속한 세력은 다르지만 그 전에 우리 모두 똑같은 사람이에요.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게 호의를 베푸는 데에는 이유가 필요하지 않아요. 그래서 붉은 바위족은 기꺼이 이 어려운 싸움에 힘을 보태어 준 거에요. 우리에게는 그들의 용기와 배려에 보답할 의무가 있어요.”
이것은 최후의 시도였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러나 기수들은 진심이 오롯이 담긴 발언을 듣고도 별로 감화되지 않은 눈치였다. 나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논리인데, 그들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걸까?
“강철거인의 후예들이 부족 대통합의 전쟁에서 승리자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옌닐이 나를 타이르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명한 왕일수록 신하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여왕님은 아직 어립니다. 왕위에 오른 지도 얼마 되지 않으셨는데 벌써 두 차례나 반란을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전란의 시대에 거부감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옌닐 경의 말이 맞습니다. 저희는 내일 큰 싸움을 앞두고 있습니다. 여왕님께서 조금만 더 경험이 있으셨다면 이렇게 중요한 날 자칫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는 화제는 꺼내지 않으셨을 겁니다.”
이 순간 나는 그들과 나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들이 정말로 나에게 충성한다면 응당 나의 이상을 따라 주리라 기대했는데, 그들은 거꾸로 나를 계몽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충성이라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회의는 여기서 마칠 게요.”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결국 나는 아무 결론도 내지 않은 채 자리를 정리해 버렸다.
“내일 전투에 대해 의논해야 하지 않습니까?”
기수들이 놀란 얼굴로 물어온다. 나는 그들에게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차피 필요 없잖아요. 내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경들끼리 의논을 마치지 않았나요?”
기수들은 정곡을 찔린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내가 터덜터덜 걸어 나갈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던 건 자신들이 갈고 닦은 정답을 나에게 확인받는 단계를 마치지 못한 허잔함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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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옌닐 : 나는 좀 좋은 이미지의 캐릭터인 줄 알았는데.... 이러다 욕먹겠네 ㅠㅠ
휘렌델 : 나도 걱정이야. 다수결의 원칙을 무시했잖아. 독선적으로 비춰지는 거 아냐?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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