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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연재수 :
417 회
조회수 :
632,071
추천수 :
14,829
글자수 :
1,880,019

작성
17.09.04 02:34
조회
495
추천
11
글자
10쪽

갈수록 태만

DUMMY

케이온지드에게 여러 모로 신세를 진데다, 밝히기 꺼리던 이야기까지 들어버렸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나는 그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 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한 붉은 바위족 주민들에게 연합군이 기다리고 있는 동쪽으로 떠나라고 말했다.

“부디 몸조심해, 작은 새.”

예상대로 붉은 바위족 사람들은 떠나기 전 진심으로 내가 무사하기를 기원해 주었다. 그들의 간절한 눈빛과 목소리가 그림자 매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정작 그림자 매는 회한에 가득 찬 얼굴로 먼 곳만 바라볼 뿐 따로 인사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저는 여왕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하나 둘 작별인사를 전하고 있는 가운데 발리언트가 불현 듯 나에게 선언했다. 나에게는 그의 뜻을 꺾을 명분이 없었다. 너무 위험하니 넌 빠지라는 말을 왕을 지켜야 할 수호기사에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나는 그림자 매와의 약속 때문에 당장은 죽을 생각이 없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는 바르테인 군에게 자신의 죄를 고한 후 죽음을 택할 테니 말이다. 내키지는 않지만 일단 발리언트는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여왕님. 제 임무는 여왕님의 안전을 지키는 것입니다.”

내 뒤에 선 발리언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알고 있어요, 람켄 경.”

“따라서 제 검으로 여왕님의 목숨을 거두는 일도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

그의 다음 말을 들은 나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림자 매와의 약속이 없었고, 악마들을 유인하는 일이 뜻대로 안 풀리면 최후의 수단으로 그에게 나를 죽여 달라고 요청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나를 따라오겠다고 한 이유가 있었구나. 수호기사의 입장에서 계속 나를 지켜봐왔기에 나의 의중을 읽었던 모양이었다. 저 어린 녀석이 그 동안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을까? 이 말을 나에게 직접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걱정 마세요.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나는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그림자 매와의 약속이 없었다면 여기서 그의 걱정을 덜어주기는커녕 당황한 모습으로 그에게 확신을 주었을 것이다.

이윽고 사람들과의 작별 인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붉은 바위족의 노인 하나가 내 앞에 섰다. ‘진한 주름’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고집이 세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나는 한 번도 너를 작은 새라고 부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네 이름은 휘렌델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 붉은 바위족 중에는 이방인인 나를 끝까지 경계한 사람도 여럿 있었고 진한 주름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처음 그림자 매가 바르테인의 왕을 만나러 간다고 했을 때, 나는 그와 쌓이는 먼지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그들은 강철거인 족의 우두머리가 우리의 입장을 이해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결국 내가 예상한 대로 너는 우리의 입장을 이해해주지 않았다. 대신 우리가 되었지. 휘렌델, 아니 여왕님....”

말하는 도중에 진한 주름이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는다.

“우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신 것처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지키려 하신 ‘우리’에는 당신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그의 말을 듣자 왜인지 가슴 속이 뜨거워진다. 그도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다는 걸.

“그러면 저희는 먼저 본대와 합류하겠습니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여왕님. 부디 무사하셔야 합니다.”

거의 당부에 가까운 메담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인파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나 둘씩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는 가운데 마지막까지 남은 이들이 있었다. 예전부터 거리를 두고 본대를 따라오던 무리들, 알케니아와 켈리트, 그리고 샤나프린이었다.

“샤니. 넌 안 가?”

나의 물음에 샤나프린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여왕님께 말씀 안 드렸습니까? 너무 집중한 탓에 깜빡 잊은 모양이군요. 나도 여왕님과 함께 행동할 생각입니다.”

“무슨 소리야? 너는 아르만시아를 가둘 감옥을 완성해야 하잖아.”

샤나프린이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연합군에게 합류하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이해한다. 하지만 나를 따라오려 하는 이유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여왕님을 지켜드리면서도 오오라 연구는 계속 할 수 있습니다. 원리는 이미 파크에게 모두 배워두었으니까요.”

“이제 나는 페가수스를 타고 악마들과 술래잡기를 할 거야. 그런데 내 옆에 있으면 집중이 안 될 것 아냐?”

“오오라의 이치는 집중한다고 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수많은 실전이 필요합니다.”

갑자기 샤나프린의 손에서 길쭉한 것이 불쑥 튀어나왔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샤나프린의 손에는 약 40cm 길이의 하얀 빛의 막대가 들려 있었다. 처음 보는 것이지만 낯설지가 않다. 칸딘과 함께 사람들을 치료해 줄 때 사용했던 마법과 비슷한 느낌이 난다.

“그게 오오라야?”

“그것에 최대한 가깝게 만든 것입니다. 악마는 오오라의 대척점에 있는 존재들. 이것으로 그들을 베면서 거듭 수정을 하다 보면 점점 더 완성도가 높아질 겁니다.”

샤나프린이 만든 빛의 검을 본 켈리트는 곧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사도들이 쓰는 무기가 바로 그런 거야. 물리적 형체를 이룰 때까지 오오라를 거듭 겹치는 거지.”

“그 말을 듣고 만들어 본 겁니다.”

샤나프린이 집중하고 있었던 건 아마도 이 검을 만드느라 그랬던 것 같다. 그는 시험 삼아 자신이 만든 검을 허공에 몇 차례 휘둘러 본다.

“인간의 검은 나와 맞지 않았습니다. 메담의 검술을 눈여겨 봐두었기에 그것을 얼추 재현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검이 목표에 닿는 순간 미묘하게 힘을 배분하는 것이 잘 안 되더군요. 하지만 이 검은 무게가 전혀 나가지 않으니 제대로 다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샤나프린은 내가 천하장사를 빌려 주었을 때 능숙한 동작에 비해 악마를 제대로 베지 못했었다. 줄의 매듭을 묶지 못하는 것처럼, 엘프에게는 칼날의 무게 중심을 인위적으로 옮기는 요령도 어려웠나 보다.

“아, 메담의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내가 여왕님을 따라가려는 건 그 때문이기도 합니다. 자기 대신 여왕님을 지켜달라고 하더군요.”

메담 이 자식.... 웬일로 곱게 물러나나 했다. 혹시 발리언트에게도 녀석이 귀띔해준 거 아닐까?

“저도 여왕님을 따르겠습니다.”

이건 뭐야? 혼자 가려고 했는데 혹이 하나 더 붙는다. 바로 알케니아였다.

“당신의 마법은 악마들에게 통하지 않는다면서요?”

“하지만 저는 언제, 어디서든 아르만시아가 강림하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여왕님께서 악마들을 유인하시는 건 아르만시아에게 추격당할 위협에도 노출되는 겁니다. 그 위협을 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켈리트가 인상을 구기며 그에게 날카롭게 외쳤다.

“무슨 소리야? 너는 나에게 파크님을 찾아 주는 거 아니었어?”

“미안해, 켈리트. 이번에는 이쪽 일이 더 급하잖아.”

알케니아는 켈리트에게 사과한 후 등에 맨 배낭을 벗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무로 만들어진 부엉이 인형을 꺼냈다.

“파크님은 조금 전에 돌아가셨어. 지금쯤이면 부활하셨겠지.”

그가 손으로 잡자 나무 부엉이가 서서히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한다. 이윽고 움직임이 멈춘 부엉이의 눈에서 푸른빛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봐. 바로 저 쪽이야. 방향은 알았으니 좀 더 수월하게 찾을 수 있겠지?”

“방향만 알면 뭐해? 난 너처럼 파크님의 기척을 정확히 느낄 수 없어. 그 부엉이도 인간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잖아.”

켈리트가 계속해서 채근하자 알케니아는 곤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목소리만은 여전히 단호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죄를 지었어. 여왕님을 보필하는 건 그 최소한의 속죄야. 나와 만나기 전에도 너는 파크님이 환생하실 때마다 그 분을 찾아냈잖아.”

“갖은 고생을 하면서 말이지!!”

켈리트는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원망하는 눈으로 알케니아를 한껏 쏘아본 후 나무 부엉이의 눈이 바라보는 쪽으로 쏜살같이 날아가 버렸다.

“자, 이제 우리도 슬슬 움직여야겠습니다. 아르만시아는 본래의 세계로 귀환했지만, 악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곧 여왕님을 쫓아올 겁니다.”

이미 페가수스는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하는 와중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발리언트와 함께 그 위에 올라탄 후 서서히 날아올랐다. 그러자 샤나프린과 알케니아도 나의 뒤를 따른다. 악마들을 내가 유인하겠다고 말했을 때, 나는 나름 비장한 각오였었다. 그 임무가 아무리 위험해도 감수할 생각이었고, 심지어 그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미안함 때문에 차라리 위험하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있었다.

“파크님이 부활하신 곳은 저 쪽이야. 헷갈린 거야? 다시 한 번 보여줘?”

“닥쳐!!”

어느새 돌아온 켈리트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치자 알케니아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나 혼자 악마들을 유인할 생각이었는데.... 그녀까지 돌아오자 나의 바람은 무너지고 말았다. 내가 맡은 임무는 너무나도 평화롭게 진행되었고, 샤나프린은 오오라를 완성했다. 마침내 아르만시아와 결판을 낼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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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루이 : 호오? 즉 떡갈나무 부엉이는 알케니아가 켈리트에게 파크를 찾아주는 과정에서 제작된 것이군요. 그런 내력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알케니아 : 나도 이 부엉이가 그렇게 뽀개질 줄은 몰랐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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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18 메틸아민
    작성일
    17.09.04 10:10
    No. 1

    오오라 검에 떡갈나무 부엉이!
    거기다 루이까지!
    루시엘 생각이 새록새록 나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7.09.07 23:19
    No. 2

    다음 소설에서는 왕녀의 외출 생각도....^^;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7 Brav
    작성일
    17.09.05 10:17
    No. 3

    이제 단순한 희생정신을 넘어서 자신에게 희망을 거는 사람들의 마음도 헤아리기 시작한 휘렌델인가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7.09.07 23:20
    No. 4

    헤아렸는지는 아직 알 수 없죠.
    그녀가 죽지 않기로 결정한 건 그림자 매와의 약속 때문이니까요.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미안한 마음에 차마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상태입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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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 왕의 허가 +4 17.09.17 459 9 9쪽
398 정답 +4 17.09.15 507 9 10쪽
397 허심탄회 +6 17.09.13 391 10 11쪽
396 발뺌 +4 17.09.11 419 8 10쪽
395 격발 장치 +4 17.09.08 393 7 9쪽
» 갈수록 태만 +4 17.09.04 496 11 10쪽
393 형제 간의 사투 +2 17.09.02 370 10 10쪽
392 왕의 의무 +2 17.08.31 423 11 10쪽
391 충신 +4 17.08.29 400 8 10쪽
390 정령왕의 행방 +4 17.08.27 422 9 9쪽
389 복수의 화신 +4 17.08.24 468 12 9쪽
388 권능 +6 17.08.22 470 1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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