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청객들
“들었죠? 악마들이 오고 있어요. 지금이라도 빨리 병력을 철수시키세요. 여기에 있다가는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생길 거예요.”
알케니아의 선고에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다시 한 번 기수들에게 간곡히 애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저희가 여기 있는 이유가 바로 악마들과 싸우기 위해서입니다. 어찌 여왕님 혼자 이 위험천만한 곳에 두고 떠날 수 있겠습니까?”
“경들은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어요. 이것이 기사가 왕에게 충성하는 방법인가요?”
“여왕님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군주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라면 저희는 무엇이든 감수할 것입니다. 설령 그것이 왕의 명령을 거스르는 불충이라 해도 말입니다.”
기수들을 도저히 설득할 수 없다고 판단한 나는 결국 페가수스를 부르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떠나지 않는다면, 내가 자리를 옮기는 수밖에 없다. 근처에 머물고 있던 순백의 영물은 나의 부름에 응해 곧 모습을 드러냈고, 나의 바로 앞에 우아한 날개를 접으며 착지했다. 그러나 나는 그 등에 오를 수가 없었다.
“지금은 안 됩니다.”
벨포트가 내 앞을 굳게 가로막아선 것이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벨포트는 나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내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여왕님을 지켜드리기로 아버님과 어제 약조했습니다. 그 맹세를 지키려는 것입니다.”
“여왕님의 신변에 위협이 닥친다면 그 때는 오히려 저희가 손수 여왕님을 태워드리겠습니다.”
벨포트에 이어 발리언트마저 나를 저지한다. 내가 페가수스에 타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으려는 두 사람의 눈빛을 본 나는 깨달았다.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을 이들은 눈치 챈 것이다. 만일의 경우 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아르만시아를 결계에 가두겠다는 결심을 말이다.
나는 기수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그들 역시 수호기사들과 같은 표정이었다. 언제 얘기가 오간 것일까? 이들 역시 나의 각오를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 그래서 왕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왕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수호기사들의 감시 속에 갇혀버린 나는 기수들과 병사들이 악마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슬픔과 좌절감만을 맛보면서 말이다.
바르테인 군은 원 모양의 결계 동쪽 테두리를 따라 곡선 형태의 진열을 만들었다. 서쪽으로부터 접근할 악마들의 돌파를 저지하는 데에도 용이하고, 샤나프린이 결계를 발동시킨 후에는 즉시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배치였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저 멀리서 희뿌연 먼지 안개가 일어나는가 싶더니 검은 거인들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악마들을 육안으로 확인한 바르테인 군의 어깨에 바짝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온다....!”
지금 바르테인 군은 인간이 역사상 단 한 번도 상대해보지 못했던, 악마라는 강대한 적과 승부를 내려 하고 있었다. 요란한 북소리와 나팔 소리가 비장함을 자아낸다. 이내 내 위치를 확인한 악마들이 더욱 속력을 내면서 심장박동은 점점 더 고조되기 시작했다.
악마들의 수는 지난 번 게차무스를 쓰러뜨린 전투보다 더 적었다. 그러나 그 위세는 오히려 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전투에서 생존한 악마들은 인간들을 죽이면서 더욱 강한 힘을 손에 넣었고, 나중에 충원된 것으로 보이는 신규 악마들은 가려 뽑은 듯 기본적으로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반면 그들에 맞서는 바르테인 군은 그 때에 비해 오히려 수가 줄어 있었다.
병사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함성을 지르며 악마들에게 달려갔지만 그들의 빛나는 용기도 무의미했다. 첫 번째 격돌에서부터 싸움의 결과를 알 수 있었다.
“막아라! 놈들이 여왕님께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
메담이 큰 소리로 병사들을 독려하며 선전을 펼친 덕분에 악마들의 돌격을 가까스로 저지하기는 했다. 하지만 판도를 뒤집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가장 원하지 않았던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 처절하게 죽어가고 있는데,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병사들의 팔과 다리가 잘려나가고 있는데, 내 팔은 멀쩡하다는 사실이 문득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 내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죽음의 향연을 멈추어야 해. 나는 다시 한 번 페가수스를 불렀다. 그러자 이번에도 수호기사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며 무거운 목소리로 명했다.
“비켜!”
“그럴 수 없습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완강하게 나를 막고 있는 그들에게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여? 다 당신들 때문이야! 왜 내 말대로 하지 않은 거야?”
“저희는 수호 기사입니다. 그 무엇보다 여왕님의 안전을 우선으로 생각합니다.”
“아무리 왕이라 해도 저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희생시킬 권리는 없어! 나는 나 혼자 살겠다고 내 병사를 죽게 만드는 왕은 되지 않을 거야!”
버럭 호통을 내지르자 두 사람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단지 나의 분노를 피하려는 의도일 뿐, 내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여전히 페가수스에 오르는 길을 내어주지 않을 기세였다.
“누구도 여왕님을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 대신 나에게 답을 한 사람은 샤나프린이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완전히 종적을 감춘 까닭에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는데,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던 모양이다.
“여왕님이 자신을 위해 바르테인 군을 희생시키려 했다면 그들이 지금 여기서 무시무시한 악마들과 싸우고 있지도 않았겠죠. 아무리 엄명을 내렸다 해도 달아났을 겁니다.”
바로 이 때 전장에 이변이 벌어졌다. 하늘 위에서 거대한 붉은 그림자가 떨어져 내린 것이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바르테인 군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고 있던 악마들은 그를 발견하자 긴장한 듯 뒤로 물러났다.
“케이온지드!”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가 이 전투에 나타날 수도 있다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허나 만일 그가 등장해도 그것은 아르만시아가 등장한 이후일 것이라 추측했다. 붉은 바위동굴에서의 전례도 있었으니 말이다.
“어떻게 된 거야?”
지금 벌어지는 싸움은 그의 입장에서는 관심 밖의 일일 것이다. 그의 목적은 오직 아르만시아를 결계를 가두는 것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전장에 합류하자마자 곧바로 악마들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곤경에 처한 바르테인 병사를 도와주기까지 한다.
“인간을 싫어하는 것 아니었나?”
-물론이다. 나는 인간이 싫다.-
전장을 가득 메운 소음 속에서도 케이온지드는 나의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놓치지 않은 모양이다. 즉시 나에게 대답을 해왔다.
-하지만 너와 그림자 매는 예외야, 휘렌델 바르테인.-
인간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드래곤이 나를 특별 대우해주고 있다는 건 너무나도 감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그가 가세한 덕분에 숨통이 트이긴 했지만 전황은 여전히 절망적이었기 때문이다.
케이온지드가 아르만시아에게 맞설 수 있었던 건 드래곤 특유의 생존력과 내구성 덕분이었다. 단 한 명의 초강적을 상대로 버티는 능력은 탁월했지만, 다수의 상급 악마들을 압도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때문에 오히려 그 역시 하이아온의 전철을 밟아 나 때문에 희생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먼저였다.
악마들이 기세를 회복할 즈음 갑자기 어딘가에서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입 안에서 한 차례 울린 후 내지르는 날카로운 고음은 붉은 바위족이 전투에 임할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보니 과연 드래곤의 비늘과 뼈로 무장한 붉은 바위족 전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붉은 바위족의 예고 없는 난입에 놀란 기수들은 악마들과 싸우다 말고 급히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이곳에 무슨 일로 온 것인가?”
불청객을 향한 기수들의 눈빛은 경계와 의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란드가 대표로 붉은 바위족에게 물었다.
“동맹은 이미 깨어졌다. 설마 이번 기회를 빌어 그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선두에 선 반가운 얼굴.... 그림자 매가 란드의 말에 고개를 흔들어 부정했다.
“그대의 말대로 우리는 바르테인과의 동맹을 끝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렇지만 악마들과의 함께 싸우지 않는다는 말은 한 적이 없지.”
그리고 붉은 바위족 전사들은 그림자 매의 말을 증명했다. 고전하고 있는 바르테인 군이 아닌, 악마들을 향해 돌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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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추석 연휴 잘 보내셨나요?
유례 없이 긴 연휴였던 만큼 저는 유례없이 빡셌네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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