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결 후기
첫 번째 소설인 루시엘을 썼을 때는 완결을 낸 후에도 그 이야기에서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거의 한 달 동안에나 이미 끝나버린 글 안에 갇혀 있었죠. 이는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다 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었습니다. 중반쯤 진행한 이후 분량이 너무 길어진다는 판단에 메인 스토리 전개에 집중하고 사이드 스토리들을 최대한 쳐냈거든요. 아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야기의 뼈대만 세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책감에 시달리면서도 훗날 추가적으로 살을 붙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루시엘은 아직도 완결 표시가 없죠.) 하지만 이내 형식상으로나마 완결이 난 소설에는 다시 손이 잘 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죠.
그 경험을 거울삼아 왕녀의 외출을 쓸 때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토해내기 전까지는 다음단계까지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루시엘 때처럼 완결낸 후에도 미련이 남지는 않았지만.... 또 다른 종류의 아쉬움을 겪고 있네요.
저는 결말을 어떻게 지을지 확실히 정해놓고 집필을 시작합니다. 루시엘의 경우에는 글을 쓰기 전에 구상해두었던 결말이 거의 구현되었습니다. 다소 성급한 전개이긴 했지만 버릴 거 안 버릴 거 다 제쳐두고 전력질주를 한 덕분에 처음에 짜두었던 틀이 끝까지 남아있었던 거죠.
하지만 왕녀의 외출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부 하다 보니.... 방향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결말에 이르러서는 이야기가 제가 생각한 그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최초의 의도를 살리는 것과 매끄러운 전개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고, 어느새 제 글은 처음에 쓰고 싶었던 이야기와는 동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즉 루시엘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지 못해서 아쉬웠고, 왕녀의 외출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대로 살려내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두 가지 경우 중 어느 것이 더 나은지....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집필 과정은 왕녀의 외출 때가 더 고통스러웠지만 루시엘 때와 같은 후유증은 거의 없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루시엘과 왕녀의 외출 모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는, ‘어려운 이야기’이기에 이런 종류의 아쉬움이 생기는 걸지도 모릅니다. 다음 소설은 순수하게 제 상상력을 펼쳐내는 게 주가 되는, 조금 덜 철학적인 이야기입니다. 이제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완결을 낸 경험이 있으니 그 때 그 때 상황에 맞추어 나갈 생각입니다.
-등장인물소개-
휘렌델 바르테인 : 왕녀의 외출을 집필하게 된 의도는 아주 단순합니다. ‘정치’라는 말은 굉장히 올바르고 이상적인 의미가 담긴 단어입니다. 그런데 비정하고 실리주의적인, 때로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말입니다. 저는 그 말의 원래 뜻을 한 번 상기시켜보는 계기를 마련해보고 싶었습니다. 판타지 소설인만큼 지극히 이상적인 형태로 구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더욱 드라마틱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제 야망은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ㅠㅠ
주인공이 여성인 이유는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였습니다. 가장 왕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인물이 왕이 되어가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고, 따라서 그 인물이 여자라는 점은 그 중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 중 하나였습니다. 원래 휘렌델을 유약하고 의존적인 성격으로 설정하려 했다는 말을 여러 차례 언급했는데, 이 역시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방만한 경영으로 자신의 영지였던 페나를 말아먹은 것도 말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화자 역할을 맡은 캐릭터가 너무 비호감이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에 대대적인 성격개조가 이루어졌죠.
왕녀의 외출은 좋은 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녀의 고민과 함께 시작했다가, 그 고민이 끝나면서 끝을 맺습니다. 그녀가 찾아낸 답은 결국 그 고민은 할 필요도 없었다는 것이었죠. ‘정치란 지도자가 구성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라는 것이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모두를 살리는, 영웅의 길을 택하려 했던 휘렌델이 그림자 매의 죽음 이후 왕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죠.
저는 극 중 가장 절대적인 위치에 있는 파크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절대로 평등할 수가 없는 존재들’이라고. 이는 소위 ‘민주주의 평등사회’를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기에 더욱 부정할 수 없는 명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방향과 정반대이지만 말입니다.
비록 경험을 통해 사람들 간의 완벽한 평등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에 수긍하고 굴복할 수는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평등을 지향해야 합니다. 어차피 사람들 간에 계층이 생길 수밖에 없다면, 이에 따라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지도자’가 사회 구성원의 바람을 최대한 실현시키는 것이 그나마 가장 평등에 가까운 형태가 되지 않을까? 이것이 제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상적인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민주사회가 아닌 왕정시대를 다룬 것입니다.
왕녀의 외출은 반드시 이상적인 지도자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제목이 지닌 여러 의미 중 가장 직접적이라 할 수 있는 ‘어베레드 원정’과 ‘대악마 전쟁’의 주역은 휘렌델 같은 군주의 가치를 깨닫고 지키려 한 연합군, 즉 대중의 바람입니다. 휘렌델이 그 거대한 의지를 깨닫고 따르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 되죠.
바이우스 뤼프 : 원래 왕녀의 외출은 단편으로 생각해두었던 이야기였습니다. -_-;; 네, 압니다. 그러니 제발 돌은 내려놓으시고 진정 하시죠;; 사실 원래 구상했던 이야기는 2부의 내용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루시엘을 쓰면서 반전 스토리를 짜는데 흥미를 느꼈고, 이를 왕녀의 외출에도 적용시켜 보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탄생한 캐릭터가 바이우스입니다.
바르테인 왕가에 반감을 품은 역적이고, 실제로 반란계획을 행동에 옮기고 있지만 휘렌델에게는 애틋한 부정을 품고 있는 캐릭터.... 사실상 1부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바로 바이우스입니다. 휘렌델이 민중의 군주가 되기로 결심하는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죠. 이를 토대로 휘렌델은 2부에서 평화의 군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림자 매 : 사실 이 소설의 원래 주인공은 그림자 매였습니다. 정치에 관한 이야기로 주제가 정해지기 전까지 말입니다. 집필을 시작하지 않고 단순히 구상만 하던 시절, 루시엘은 1인칭 주인공 시점, 왕녀의 외출은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써보기로 막연히 정해두었었죠.
휘렌델의 캐릭터가 달라짐에 따라 그림자 매의 성격도 최초의 구상과 달라졌습니다. 원래는 유약한 휘렌델의 대척점에 있는, 과격하고 난폭한 부족장이라는 설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니고 있으며, 악인은 아닌 캐릭터였죠. 대충 범죄도시의 마동석 같은 캐릭터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나 휘렌델의 성격이 세진만큼 그림자 매가 기를 죽이게 되었네요.
사실 원래의 계획대로, 그림자 매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진행했으면 읽는 재미는 틀림없이 더 있었을 겁니다. 거의 먼치킨 급의 캐릭터였거든요. 싸웠다 하면 무조건 이기고, 이 때문에 바르테인군을 상당히 괴롭힙니다. (원래는 하워드라는 캐릭터도 없고 휘렌델의 원정군이 1차입니다. 당연히 이길 줄 알았던 전쟁에서 고전하는 바람에 휘렌델은 점점 더 소심해질 예정이었습니다.) 휘렌델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의 초반에는 거의 완벽한 악역으로, 그녀는 그를 몹시 두려워한다는 설정이었습니다. 그가 나오는 끔찍한 악몽까지 꿀 정도로 말입니다.
급기야는 휘렌델을 납치까지 하는데, 그 때부터 휘렌델은 그림자 매에게 의외로 인간적인 면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녀의 선량함을 꿰뚫어 본 그림자 매는 전략상 아무 이점이 없는데도 순수한 선의로 그녀를 풀어준다는 설정이었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처음에도 저도 어떤 캐릭터가 가장 강한지 서열을 매기는 걸 좋아했는데, 제가 구상한 이야기들의 모든 주인공 중에서도 부동의 무력 1위가 바로 그림자 매였습니다. (사실 다른 캐릭터와 더불어 공동 1위지만) 병력을 충원하러 돌아가는 길에 휘렌델이 악마들과 조우하고 고전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나타나 시원하게 악마들을 때려잡는 장면에서 그 강력한 포스를 유감없이 발휘할 예정이었습니다. 심지어 아르만시아도 그가 해치울 예정이었습니다. 물론 그 결과 자신도 목숨을 잃게 되지만 말입니다.
메담 스피어 : 원래 메담은 지금의 수호기사 정도의 역할로 기획된 캐릭터였습니다. 2부의 내용만으로 단편을 쓸 계획이었을 무렵에는 말입니다. 포악한 그림자 매와 그나마 맞상대가 가능하며, 여왕의 신변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충성스러운 기사가 될 예정이었죠. 휘렌델의 사촌오빠이며, 훗날 그의 아들이 휘렌델의 후계자가 된다는 설정은 변함이 없지만 말입니다.
1부의 내용이 추가되면서 원래 계획에 비해 비중이 무거워졌지만 사실 그 결과 가장 많은 피해를 본 캐릭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휘렌델의 상대역이자 제 2의 주인공쯤으로 예상하셨을 텐데 그 기대와 어긋났으니 말입니다. 나름 복선이라고 2부초에 휘렌델이 멋없는 청혼을 하고, 메담이 이를 거절하는 장면을 넣기는 했지만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드는 캐릭터입니다. 차기 왕이 되어달라는 바이우스의 제안을 수락한 죄책감 때문에 휘렌델을 여왕으로 대하지 못하고 자신의 친구였던 메리에 집착한다는 설정이 제법 입체적으로 느껴졌거든요. 그러던 그가 휘렌델을 여왕으로 대하게 된다는 건 제가 구상했던 극적인 장면 중의 하나였습니다. (사실 그 장면을 글로 옮길 때 생각해두었던 만큼의 임팩트가 나오지 않았고, 그 때 가장 큰 슬럼프를 느꼈습니다 ㅠㅠ)
이제와 이야기하는데, 하워드의 죽음에 집착하며 그림자 매를 끝까지 배척하는 역할은 원래는 그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너무 비호감 캐릭터가 될까봐 미안해서 기수들에게 그 역할을 돌린 후 그 세력을 대표하는 옌닐이라는 캐릭터도 새로 등장시켰습니다.
원래는 그림자 매와 진심으로 결투를 벌이는 장면도 예정되어 있었고, 그 싸움의 승리는 메담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이미지가 더 안 좋아질까 봐 편집되고 말았네요. 그림자 매를 구박하지 않게 된 건 다행인데 그 부작용으로 비중이 급격히 줄었습니다.ㅠㅠ 아무튼 개인적으로 가장 미안한 캐릭터가 메담입니다.
벨포트와 옐러 부자. 정말 마음에 든 이름을 두 개나 붙여 준 꼬마 기사 발리언트 람켄. 그들의 종자들. 케이온지드와 샤나프린. 휘렌델의 대척점으로 설정한 실비아(그녀가 티프를 자신의 손으로 죽인 건 그림자 매의 죽음을 암시하는 일종의 복선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여러 캐릭터들이 있지만, 처음의 의욕에 비해 그 비중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말았네요. 이는 1인칭 소설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제 부족함 때문일 겁니다. 부족한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__)
당신의 댓글 하나가 당신이 읽고 있는 글을 바꿀 수 있습니다.
Comment '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