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나는 정령왕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아르만시아를 죽일 수 있다니, 만약 그럴 힘이 나에게 있었다면, 진즉에 놈을 해치워 버렸을 것이다.
-혹시 내가 가지고 있는 왕의 마력을 말하는 거야?-
-그렇다. 마법이야말로 인간의 권능. 네가 가지고 있는 권능은 이미 아르만시아를 죽이고도 남을 정도다. 놈이 널 노리는 것도 그 힘 때문이지.-
-하지만 나는 그 힘으로 아르만시아를 옭아매는 게 고작이었어.-
-악마는 마법을 분쇄할 수 있어. 따라서 순수한 마력을 퍼부어 아르만시아를 묶어두려 하는 건 굉장한 낭비라 할 수 있어. 좀 더 효율적으로 이용한다면 능히 놈에게 대적할 수 있는 수단이 될 거야.-
-하지만.... 나는 이 힘을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을 모르는 걸. 나는 마법사가 아니니까. 그나마 아르만시아를 구속할 수 있었던 것도 칸딘의 도움 덕분이었어.-
말을 하면서 나는 다시 한 번 기억에 각인된 칸딘의 흔적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칸딘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왜 갑자기 그와의 공명이 되살아났는지, 무슨 연유로 별안간 사라졌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
-잘 알고 있군. 넌 마법사가 아니야. 그런데도 마법을 쓰려고 하니까 자꾸 실패하는 거야.-
정령왕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조금 전 그는 마법이야말로 인간의 권능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마법을 쓰려 하지 말라니, 이게 무슨 모순이란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정령왕이 부연 설명을 덧붙인다.
-인간이 마법을 사용하는 건 신들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파크는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자신의 의무마저 팽개치고 이곳에 내려와 있지만 아직도 해답을 찾지 못했지.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어. 인간 중 마법에 눈을 뜬 자들.... 즉 마법사들은 공통점을 찾아낸 것이다. 모든 마나의 근원이 되는 존재와 자신의 공통점을 말이다.
너는 마법사가 아니야. 그래서 너 자신과 관련된 공통점은 찾지 못하지. 하지만 네가 가진 마력은 달라. 그 어떤 마법사보다도 마나의 근원과 닮아 있어. 너는 할크루 이후 처음으로 자신이 지닌 마력을 이해하고 있는 왕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으니 비로소 의문이 풀린다. 정령왕의 말은 모순이 아니었다.
-즉 마법을 쓰려 하지 말고 그 근간이 되는 마력의 원리에 대해 탐구하라는 말이구나?-
-그렇다. 인간의 권능인 마법은 ‘공통점’을 찾는 데서 비롯된다. 마법사들이 그의 존재와 자신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내는 것처럼, 네가 지닌 힘과 그의 공통점을 찾아봐.-
정령왕의 말을 듣고 내가 품고 있는 마나를 이해하려다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어마어마한 마나들. 그것들은 모두 바르테인 국민 개개인의 소망이 모인 것이다. 이제 생각해보니 내가 지닌 마력은 수많은 인격이 모여 집합체를 이루고 있는 정령왕과 정말로 꼭 닮아 있었다. 그래서 지금 정령왕과 공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전에는 정령왕이 그림자 매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있었기에 오히려 불가능했다.)
마나의 근원이라고 불리는 존재. 마법을 다루는 드래곤과 정령들, 엘프들과 대화하면서 나는 그 개념에 대해 어렴풋이 특정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정확히 어떤 존재이고 무슨 역할을 하는 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런데 왕의 마력과 정령왕의 공통점을 찾아내고 연역적으로 대입해보자 그 제 3의 존재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 마나의 근원은....!!-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이 바로 내 앞에 있었다.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했다. 너무나도 거대하고 엄청난 진실 앞에 휘렌델 바르테인으로서의 보잘 것 없는 자아가 희박해지다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이제 깨달았구나. 모든 불가사의한 힘이 그에게서 비롯된다. 악마의 힘도, 천사의 힘도, 엘프와 드래곤, 정령의 마법도.... 심지어 신들의 권능마저도. 네가 지닌 마력은 바로 그것의 재현인 거야.-
마나의 근원을 정의 내리는 정령왕의 말은 그대로 무한한 상상력을 제한하는 테두리가 되었다. 그 덕분에 나는 가까스로 무아지경 속에서의 탐구를 멈추고, 내가 처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힘은 네 거야. 어떤 형태로 사용할 지는 네 마음대로 정할 수 있어.-
그래. 이제는 칸딘의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지닌 힘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어. 나는 근원에 도달했고 드디어 깨달았다. 이제는 그 힘을 마법으로 바꾸는 것도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왕의 마력의 본질을 깨닫기까지 정령왕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실제로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제 나는 그림자 매와 처절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아르만시아를 지긋이 노려 보았다. 어떠한 종류의 타격에도 피해를 거의 받지 않으며, 받는다 해도 이내 회복해 버리는 궁극의 진화.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수단을 나는 찾아냈다.
나는 비로소 완벽히 이해할 수 있게 된 내 안의 마력을 인도했다. 그들을 있어야 할 자리에 배열하자 내가 원하는 형태의 결과가 도출되기 시작한다. 아까 전에 쓸데없이 마력을 낭비한 바람에 조금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가까스로 아르만시아를 해치울만한 위력에는 도달할 것 같다. 나에게 어서 떠나자고 계속해서 재촉하고 있던 알케니아가 내가 만들고 있는 것을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경악한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여왕님이 어떻게 또 다시 마법을....?!!”
“아니, 이건 마법이 아니에요.”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 마법은 아르만시아를 쓰러뜨리는데 효율적인 수단이 아니다. 신을 죽일 수 있는 건 오직 신의 힘뿐이었다. 나는 나를 향한 사람들의 바람을 신앙으로 치환시켰고, 그 결과 잠시 동안 신이 될 수 있었다.
“기적이지.”
마침내 역작용의 투명한 불꽃이 완성되었다. 그것은 궁극의 진화도 단숨에 파괴할 수 있을 정도로 거세게 이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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