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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연재수 :
4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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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880,019

작성
17.08.31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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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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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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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왕의 의무

DUMMY

“그런데, 여왕님.”

일단 나의 요구를 모두 수락한 다음 메담이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바르테인 군과 붉은 바위족이 반목하는 것이 그렇게 걱정되신다면 그림자 매에게 진실을 밝히지 말라고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물론 나도 그런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도하지 않았어도 알고 있다.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수십 번의 저울질을 한 끝에 차라리 메담을 설득하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페가수스를 타고 악마들을 유인한다는 계획을 그가 말리지 않은 것처럼 나 또한 그 말을 꺼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붉은 바위족이고 나는 그의 왕이 아니야. 그에게는 내 말을 들어야 할 의무가 없어.”

“말씀하신 것처럼 여왕님은 그의 왕이 아닙니다.”

메담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말을 이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는 여왕님의 말씀을 들을 겁니다.”

그가 재차 요청해오자 나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메담은 동생의 원수인 그림자 매를 증오하면서도 기꺼이 그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아주기로 했다. 그에게 미안한 마음에 최소한 말이라도 꺼내 봐야할 것 같았다.

이렇게 메담과의 대화를 매듭지은 나는 다음으로 그림자 매를 불러냈다. 그리고 그에게 메담과 나눈 대화를 들려주었다. 메담이 맡기로 한 역할을 설명하면서, 그가 기수들에게 자신이 하워드를 죽였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하고 있음을 언급했다. 그림자 매는 이 대목에서도 별 감흥을 보이지 않고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마치 그것을 당연한 전개로 여기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태도가 마음에 걸려 다시금 망설임이 커져 간다.

마침내 이야기가 모두 끝났다. 이제 그에게 바르테인 군에게 계속 거짓말을 해달라고 부탁할 차례였다. 그러나 차마 그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그림자 매는 내가 이야기하는 내내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듣고만 있었고, 그것은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리 사이에는 긴 침묵만이 있을 뿐이었다.

“너 나한테 왜 이래?”

그 무거운 침묵을 견딜 수 없게 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림자 매에게 따졌다.

“미안하니까. 널 볼 면목이 없으니까.”

드디어 그의 입이 열리고, 거기서 그리웠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렇다면 여기서 공식적으로 이야기할게. 나는 네가 하워드를 죽인 것도, 그걸 나에게 숨겨온 것도 모두 용서해. 이제 나에게 미안해 할 필요 없어.”

그래. 순서가 잘못 되었구나. 틀어져 버린 그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 때 이후로 나는 항상 그와 화해하는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네가 나를 용서해도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후련해지던 가슴이 다시 답답해진다. 그림자 매는 여전히 내 얼굴을 제대로 마주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와의 어색한 관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 게 어딨어? 내가 널 용서한다는데?”

“그건 거짓의 기반위에 쌓아온 친분 때문이다. 내가 처음부터 하워드를 죽였다는 걸 밝혔어도 넌 나를 용서했을까?”

차마 그렇다고 말할 수 없어 나는 잠시 주저했다. 그러나 이내 다시 소리쳤다.

“거짓말 때문이면 뭐 어때? 덕분에 난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어. 오히려 그 거짓말에 감사할 판이라고.”

“네가 이렇게 나올수록 나는 더욱 부끄러워질 뿐이다. 죄로 얻은 보상이 클수록 죄책감도 커지는 법이니까.”

이런 완고한 자식을 봤나. 도저히 말이 안 통하네. 내가 괜찮다는데 왜 이래? 그가 더욱 악랄한 것은, 그 논리대로라면 내가 용서한다는 말을 하면 할수록 그와의 거리는 오히려 멀어진다는 점이었다.

“사실 너를 여기로 부른 건 부탁할 게 있어서였어.”

그와 화해하는 것이 요원해 보이자 화제를 돌리기 위해 비로소 나는 용건을 꺼냈다.

“기수들이 아무리 시비를 걸어도 하워드를 죽인 건 말하지 말아달라고 할 생각이었지. 그런데 그 태도를 보니 이미 답은 나온 것 같네.”

그림자 매는 얄밉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실수를 또 다시 반복할 수는 없어. 그들에게는 나에게 분노할 권리가 있고, 나는 거짓말로 그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

“너의 그 선택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어? 연합군이 와해될 수도 있어.”

“우리는 지금 상상도 할 수 없는 강대한 적과 맞서고 있다. 이기기 위해서는 똘똘 뭉쳐야 하는데 네 지휘관들에게 나에 대한 의심이 남아 있다면 언제든 와해될 위험을 떠안고 가는 셈이다. 진정한 결속을 이루려면 오히려 진실을 밝혀야 한다.”

“진정한 결속이라고? 그게 될 것 같아? 내가 왜 메담에게 너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겼는데? 네가 하워드를 죽였다는 걸 알게 되면 기수들은 악마들보다 너희 부족을 먼저 공격할 거란 말야.”

“아니, 그렇지 않아.”

그림자 매는 굳게 고개를 저었다.

“붉은 바위족이 자체적으로 불화의 원인을 해결한다면 두 세력은 충돌하지 않을 것이다. 기수들도 그것을 계기로 오히려 우리 부족을 신뢰하게 되겠지. 난 이제 가시손톱도 넘겨주었고 더 이상 메담과 케이온지드를 도와 아르만시아를 상대할 수도 없다. 이것이 이 전쟁에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마지막이자 유일한 방법이다.”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가 세워왔던 계획이다. 자신의 죽음으로 바르테인의 분노를 잠재워서 남은 부족원들을 살리는 것 말이다. 상황은 달라졌지만 여전히 진행 중이었구나. 이 나쁜 자식. 지금까지 죽을 생각만 하고 있었어?

“뭐 이딴 자식이 다 있어....”

마침내 그림자 매가 내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보게 되었다. 그의 눈은 당황의 빛으로 가득했다. 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죽으면 나는 어떻게 해?”

“....”

“미안하다고 하면서 왜 나를 계속 괴롭히는 거야? 네가 날 피하는 게 얼마나 아픈지 알아?”

나는 한참을 오열했다. 나의 어깨 근처로 머뭇거리는 손의 기척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림자 매는 끝내 나를 다독여 주지 않았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그의 말에 나는 눈물을 닦으며 그림자 매를 바라보았다. 그가 예전처럼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나를 응시해주는 것이 이렇게 기쁠 줄 몰랐다.

“너는 왜 악마들을 유인하겠다고 자처한 거지?”

왠지 그도 그것을 굉장히 묻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나도 뭔가 하고 싶어서.”

“....”

“다들 날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고 있어. 하지만 나는 뒤에서 그 사람들이 죽어가는 걸 지켜보기만 할 뿐이야.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말야. 더 이상 그러기 싫었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 보호받는 쪽이 아니라 보호하는 쪽이 되고 싶었어.”

“....그걸 위해 네 목숨도 기꺼이 내놓을 생각이지?”

송곳처럼 날카로운 그림자 매의 질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걸 본 그림자 매가 긴 한숨을 쉬며 말한다.

“역시 그랬구나. 네가 할 일은 따로 있는데....”

“내가 할 일? 그게 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

가슴이 두근거린다. 악마들과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후로 줄곧 내가 해왔던 고민이었다. 대체 내가 처한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뭐가 정답일까? 신과 드래곤, 친구....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건 그 물음의 답을 찾기 위한 과정이었다. 난 어렴풋이 그림자 매가 그 답을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번에 대화할 때는 결론이 나오기 전에 그가 폭탄발언을 해버렸다.

“너는 고민할 필요가 없어. 왜냐하면 답은 이미 나와 있으니까.”

그리고 그는 지난번과 똑같은 말을 했다.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답은 이미 나와 있다고? 나는 여전히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네 병사들이, 심지어 우리 부족까지 널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있어. 왜냐하면 네가 먼저 그들을 위해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었다는 걸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네가 할 일은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거야. 그들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지키고자 하는 왕을 죽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너에게 맡겨진 중대한 임무야.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가슴 속 어딘가가 꿈틀거린다. 그 동안 내가 죽음을 망설였던 이유를 비로소 깨달은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내가 그토록 기대했던 답이 고작 이런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

“결국은 나보고 계속 가만히 있으라는 얘기잖아?”

“가만히 있는 게 아니야. 그들의 희망이 되라는 거지.”

“됐어. 난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어. 누군가 나 때문에 죽는 걸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을 거야.”

나의 강경한 태도에 그림자 매는 더 이상 나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잠시 고민하다가 거래를 제안했다.

“그래. 네 뜻이 정 그렇다면 네가 할 수 있는 건 해. 대신 악마들을 유인하기만 하는 거야. 네가 다른 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나도 바르테인 군에게 진실을 밝히지 않겠다.”

“정말?”

나는 반가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되물었다.

“물론이다. 약속하지, 휘렌델. 대신 너도 방금 전에 내가 말한 너의 의무를 잊지 말아줘.”

그림자 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할 이유가 없다. 그는 자신의 한 말을 지키지 않을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나도 약속할게. 악마들을 유인하기만 할 뿐, 죽으려 하지 않을 거야.”

나 역시 진지한 얼굴로 그림자 매 앞에서 맹세했다. 이 말을 할 때의 작은 표정 변화 하나까지 면밀히 지켜본 후 그림자 매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앞으로도 나를 경원시하겠다는 태도 같았다. 그 점은 많이 서운했지만 일단은 그가 죽지 않기로 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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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그림자 매와의 대화가 생각보다 길어졌네요.

오늘 모든 인물과의 대화를 마무리 짓고 다음 편에서는 떠날 줄 알았는데....

이번 에피에는 이 소설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었던 주제, 이상적인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결론 말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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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18 메틸아민
    작성일
    17.08.31 08:34
    No. 1

    휘렌델은 자기가 얼마나 훌륭한 왕인지 모르는 거 같아요.
    사람들이 목숨을 거는 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건데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7.09.01 22:57
    No. 2

    그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휘렌델이 특별한 왕인 거죠 ㅎㅎ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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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 정답 +4 17.09.15 507 9 10쪽
397 허심탄회 +6 17.09.13 392 10 11쪽
396 발뺌 +4 17.09.11 419 8 10쪽
395 격발 장치 +4 17.09.08 393 7 9쪽
394 갈수록 태만 +4 17.09.04 496 1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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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 권능 +6 17.08.22 470 1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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