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그러진 계획
눈을 뜬 후 나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꿈의 내용을 곱씹어 보았다. 왜인지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윽고 나는 머리를 흔들어 꿈이 남긴 후유증을 떨쳐버렸다. 고작 악몽 따위에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다. 어쩌면 내가 햇빛을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다.
아마도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그런 악몽을 꾸었을 것이다. 기분이 착잡해진 건 그 꿈에서 아빠와 하이아온, 칸딘이 또 다시 날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린 나는 잡념을 떨쳐버리고 몸을 일으켰다.
왜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상체를 일으키자마자 무심코 남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곧 나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남쪽은 붉은 바위족이 떠나간 방향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꿈에 그림자 매도 나왔었지. 꿈속의 검은 그림자에게 뛰어들 때 그가 지었던 표정이 아직도 생생히 눈앞에 아른거린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의 얼굴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설령 일이 잘 풀려 오늘 내가 죽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해는 이미 높이 떠 있었다. 악마들을 유인하는 동안 선잠을 자며 누적된 피로 때문에, 그리고 그 요상한 꿈 때문에 늦잠을 잔 모양이다. 수호기사들과 샤나프린, 그리고 나보다 먼저 일어나 있던 알케니아가 문안인사를 건넨다. 그들 역시 악마들과의 최종 결전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표정이 자못 비장했다.
“결계는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샤나프린이 반가운 소식을 들려주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으니 이제 내가 내 역할을 수행할 차례다.
“연합.... 바르테인의 진채로 가보죠.”
무심코 실수를 할 뻔 했던 나는 재빨리 말을 정정했다. 붉은 바위족이 떠났으니 이제 더 이상 연합군이 아니다. 지금쯤이면 군대라고 부를 수 없는 규모가 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나는 과연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남아 있는지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 남아 있는 바르테인 군의 규모에 따라 내가 취할 행동이, 나의 생사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
잠시 후 나는 당혹감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진채 안에서 풍겨오는 군기의 규모는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멈추었던 발을 재촉해 달려가 본다. 이윽고 내 눈 앞에 바르테인의 대군이 도열해 있는 광경이 펼쳐졌다. 마치 단 한 사람의 탈영자도 없는 것처럼 건재한 모습이었다.
“여왕님이다!!”
나를 발견한 병사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른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들의 환대 속에서 진채 안으로 입장했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아무리 많이 남아 봐야 1~2만 명 사이일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승리를 기약할 수 없는 싸움인데 살 길을 찾아 떠난 사람이 이렇게 없단 말인가?
진채 안에 들어오자 난처한 얼굴의 메담과 기수들이 시립해 있는 것이 보인다. 기수들 역시 단 한 명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을 보니 병사들 중 단 한 명의 탈영자도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경들이 병사들에게 명령했어요? 떠나지 말라고?”
나는 잔뜩 화난 목소리로 그들에게 따졌다. 감히 왕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한다는 기사들이 내가 직접 내린 명령을....
“아닙니다!”
뜻밖에도 나의 물음에 대답한 건 기수가 아닌 병사들이었다.
“저는 제 자신의 의지로 남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제 와서 달라질 게 뭐 있겠습니까? 목숨이 아까웠다면 애초에 윈더민에 갔을 겁니다.”
“여왕님을 위해 싸우게 해주십시오! 바라는 건 그것뿐입니다!”
병사들이 앞 다투어 자신이 남기로 한 이유를 설명했다. 참으로 한심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늘어놓는 바보 같은 이야기를 하나하나 듣고 있자니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한다. 그들의 목소리가 잦아들 때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나는 외쳤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여러분이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아닙니다, 여왕님!”
병사들은 일단 일제히 내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말주변이 없어 보장된 생존을 마다하면서까지 남아 있는 이유까지는 설명하지 못하고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가운데 누군가 소리 높여 외쳤다.
“여왕님이 어제 그러셨죠? 여왕님은 걸핏하면 저희 곁을 떠난다고. 그러니 목숨 걸고 싸워줄 의리는 없다고. 물론 그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여왕님은 떠나셨을 때마다 언제나 돌아오신 걸 잊지 않습니다. 싸워야 할 의리가 없는 게 아닙니다.”
“맞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병사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에 기를 얻은 그 병사가 다시금 말을 이어 나간다.
“저희의 운명은 그 때 결정되었습니다. 여왕님이 처음 저희를 위해 죽을라 했을 때 말입니다. 어떻게 왕께서? 저희 같이 보잘 것 없는 목숨을 살리겠다고....”
그도 나만큼이나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가슴이 찡해져서 더 이상 병사들을 마주할 수 없게 된 나는 등을 돌렸다. 맞이하러 나온 옐러가 어느 새 내 앞에 서 있었다.
“이번에는 여왕님의 뜻대로 풀리지 않았군요.”
“....”
“여왕님은 저 같은 정치꾼들의 상식 밖에 계신 분입니다. 바로 그 행동 때문에 병사들도 상식을 벗어나게 된 거죠.”
옐러의 분석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내 생각이 짧았다. 이 자리에 있는 병사들은 애초에 악마와 싸우는 것도 각오하면서 나를 구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이제와 그들에게 생존을 보장해보았자 그들의 선택이 달라진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나는 병사들을 뒤로 하고 진채의 중앙까지 이동했다. 그리고 모여 있는 기수들에게 말했다.
“다들 어제 기사단장에게 내 계획에 대해 들었죠?”
“들었습니다.”
“모두 병사들을 이끌어 이곳을 떠나 주세요. 그리고 내가 신호를 보낼 때까지 악마들에게 발각당하지 않을 곳에서 대기해 주세요.”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병사들이 남았지만 달라질 건 없다. 그들을 희생시키지 않을 방법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여왕님.”
옌닐이 결연한 얼굴로 나를 향해 말했다. 기수들 역시 그와 뜻을 같이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왕의 명령에 거역할 생각인가요?”
남아 있는 기수들은 왕이라는 자리에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왕의 권위를 정면으로 부정할 줄은 몰랐다.
“기사된 자에게 왕의 명령에 따르는 건 절대적인 의무입니다. 그래서 어제 선왕 살해 혐의가 있는 붉은 바위족을 순순히 보내준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의무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상황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전시일 때, 다른 하나는 왕의 생명과 직결되었을 때입니다. 지금은 그 두 가지 모두 해당됩니다.”
“여왕님 혼자 아르만시아를 맞이하게 둘 수는 없습니다! 병사들과 함께 곁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여왕님을 지켜내겠습니다!”
옌닐의 말을 받아 다른 기수도 분연히 외친다.
“혼자 있으나, 병력과 함께 있으나 별 차이 없어요. 여러분도 보았듯이 아르만시아는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잖아요.”
“그 작은 차이 때문에 남아 있으려는 겁니다.”
“....!! 고작 그것 때문에 남겠다고요? 수많은 목숨이 희생될 거예요!!”
“그 대가로 여왕님은 조금이라도 더 안전해지시겠죠.”
나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아주 조금 더 높이기 위해 수만의 병사들을, 나를 위해 끝까지 죽으려 하는 고마운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겠다고?
“경들은 이렇게 나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는 건가요?”
나는 틀림없이 기수들이 그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붉은 바위족을 순순히 보내준 나에게 앙갚음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옌닐이 고개를 흔든다.
“여왕님께서 홀로 아르만시아에게 쫓기는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최근 여왕님과 저희의 사이는 조금씩 틀어지고 있었습니다. 인정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것으로 변함없는 충성심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지만 그들이 나에게 반역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선택으로 그들에게 득 될 것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이제 그들의 입장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한다. 기수들은 그들 기준의 상식을 철저히 따르고 있었다. 왕에게 목을 매달고 있는 그들에게는 내 명령을 거스르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지켜야 했고, 그 과정에서 희생당하는 병사들의 목숨은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기수들의 태도는 완고했다. 그들을 설득할 수 없다는 건 이미 어제 깨달은 바이다. 그래서 왕의 권위로 굴복시키려 했는데, 그것도 먹히지 않게 되었다. 나는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메담에게 보내 보았다. 그래도 기수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불세출의 검술로 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라면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그러나 메담은 슬며시 내 시선을 피해 버렸다. 이제 와서 기수들의 의견에 동조해버린 것이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알려드려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두어 시간 이내에 악마들이 도착할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상황을 타개할 뾰족한 해결책을 찾지 못해 답답해하고 있는 와중이라 알케니아의 선고가 더욱 절망적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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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메담 : 이러면 내가 배신자처럼 보이는 거 아냐? 나는 처음부터 기수들 의견에 더 가까운 입장이었는데.... 원래 성격도 그렇고.
휘렌델 : 아냐, 그렇지 않아. 네가 동조하는 건 기수들의 논리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없다는 걸 드러내는 장치일 거야.
메담 : 그렇지?
휘렌델 : 그래. 이 배신자 놈아^^
메담 : 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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