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진정한 지도자
-윈더민을 떠날 때만 해도 그녀는 왕녀였다. 하지만 돌아왔을 때는 여왕이 되어 있었다.-
휘렌델 바르테인 여왕에 대한 세간의 평가이다. 실제로 그녀는 원정을 기획할 당시에는 무기력했고 메담이 왕좌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왕도 겪지 못했던 전대미문의 사건을 겪으면서 군주로서의 사명에 눈을 떴다.
“정치란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그녀가 대악마 전쟁을 통해 얻은 신조였다. 휘렌델 여왕은 자신을 위해 죽어가는 목숨에 슬퍼하고 괴로워했으며 절망했다. 그 희생을 막기 위해 거꾸로 자신을 희생하려 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그 희생에 보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죽어간 이들이 기꺼이 목숨과 바꾸려 했던 소원을 이루어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 그녀는 60년이 넘도록 바르테인을 다스리는 동안 이 좌우명을 지켜나갔다.
“냉정히 말해서 인간은 결코 평등할 수가 없는 존재에요. 두 사람만 있어도 더 나은 사람과 못한 사람이 구분되죠.”
그녀가 이 말을 한 건 귀족들이 누리는 특권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필연적으로 누군가는 무리를 이끄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그 사람이 자신이 속한 집단이 지향하는 바를 실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도 그녀의 주장에 납득하지 못했다. 끊이지 않고 계속 되어온 전란 속에서 강철거인의 후예들은 권위란 힘과 공포에서 온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화의 시대가 열리고 전쟁이 없어지면서 낡은 믿음은 차츰 무너지고 말았다. 휘렌델 여왕은 그녀 자신이 연 새 시대에 통용될 가치관을 미리 제시했던 것이다.
이 글을 읽게 될 너희 후손들은 이 말을 특별히 명심했으면 한다. 너희는 왕이고 권력의 정점에 서 있기에 힘으로 군림하고자 하는 유혹에 흔들리기 쉬울 것이다. 여왕의 말처럼 인간 사회에서는 크고 작은 지도자가 자연적으로 생겨나기 마련이고, 사실 그들과 너희는 크게 다르지 않다.
너희를 왕으로 만들어 주는 건 수 많은 사람들의 인지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사회적 합의인데, 이것은 일견 굳건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뒤집어 생각하면 껍데기에 불과하다. 바르테인 이전에도 강철거인의 정원을 주름잡던 패권국은 여럿 있었고, 휘렌델 여왕보다 더 강력했던 왕도 적지 않았다. 그 영원할 것 같았던, 절대적으로만 보였던 그 권력들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보거라. 그 어떤 왕도 휘렌델 여왕보다 오랫동안 전성기를 유지하지 못했다.
실체가 없는 공포라는 걸 사람들이 깨닫는 순간 왕은 더 이상 왕이 아니다. 그림자 검이란 붉은 바위족의 말처럼 말이다. 얄팍한 사회적 합의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난 적극적인 동의를 받아야 너희가 진정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너희는 휘렌델 여왕이 자신의 정책을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건 강력한 군사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고, 또한 그녀도 그 얄팍한 사회적 합의에 의해 이미 왕이란 지위를 획득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도 그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최근 라인트에서 부흥한 주신교의 사례에도 눈을 돌려 보거라. 종교 지도자라는 새로운 형태의 권위는 그녀가 주장한 지도자의 덕목에 정확히 부합한 것이었다.
비록 그녀의 직접적인 후손은 아니지만, 너희는 그녀와 한 핏줄이다. 그런 만큼 나는 너희가 그녀의 신념을 계속 지켜나갔으면 한다. 바로 너희를 위해서 말이다.
물론 그녀의 전철을 그대로 답습하여 강철거인의 정원에서 전쟁을 완전히 뿌리 뽑으라는 말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정책을 굳게 지지하고 있지만 너희에게까지 강요하지는 않는다. 이제 너희도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녀가 평화를 갈구하게 된 강력한 동기는 대악마 전쟁과 그림자 매 솔피리스의 죽음이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너희의 시대에는 지금과 다른 사회적 요구가 있을 테고, 그 요구에 따르는 것이야 말로 오히려 그녀의 뜻을 지키는 길이다.
하지만 휘렌델 여왕이 평화의 시대를 연 과정에서는 많은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 휘렌델 여왕은 모두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상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동시에 지극히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자신의 이상을 펼치는 데만 급급하지 않고 모두의 동의를 이끌어 내는 데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때로는 양보도 하고, 권위에 기대어 반대자들을 압박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휘렌델 여왕이 아르만시아를 쓰러뜨릴 수 있었던 건 서로를 지키려 하는 그림자 매와 그녀의 의지가 일으킨 기적이었다. 그러나 대악마 전쟁에서의 승리는 기적이 아닌 엄연한 현실이었고, 나는 너희가 여기에 주목하기를 바란다. 여왕은 마지막 순간에 자신과 다른 가치관을 지닌 자들에게서 동의를 얻어냈고, 그 극적인 합의 덕분에 연합군은 악마들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너희가 그녀가 반대자들을 다루는 기술을 능숙하게 익혔으면 한다. 너희 시대에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을, KJH지도는 휘렌델 여왕의 업적 중 으뜸으로 손꼽히는 것이다. 그녀가 그것을 만든 건, 전쟁이 가져다줄 일확천금을 포기하지 못하는 귀족들을 달래기 위한 목적이었다. 실제로 그 지도 덕분에 우리는 타국의 땅만이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고, 교통과 수송의 발달 덕분에 전쟁에서 얻는 것 이상의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내가 휘렌델 여왕을 지나치게 추켜세운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물론 여기에는 사적인 감정이 들어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녀는 고아인 나에게 교육의 기회를 열어주었고, 덕분에 역사학자로서의 경력을 쌓아올릴 수 있었다. 그녀에게 고마운 점은 이 뿐만이 아니다.
어차피 이 문서는 너희들만 볼 것이기에 조심스럽게 밝히는데, 너희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도 어떻게 보면 휘렌델 여왕 덕분이란다.
그녀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혹자는 남편될 이에게 왕의 권위가 옮겨갈 것을 경계한다고 이야기하고, 혹자는 약혼자인 하워드 선왕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굳이 고르자면 후자 쪽이 진실에 더 가까울 것 같다.
휘렌델 여왕은 그림자 매의 고백을 듣기만 했을 뿐, 대답하지 못했다. 따라서 행동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평생 자신의 옆자리를 비워두는 것으로 말이다.
메담은 감히 그림자 매의 빈자리를 채울 엄두는 내지 못했어. 마지막 순간에 여왕의 진심을 꿰뚫어보지 못하고, 그녀를 구하러 가지 못한 자신에게는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거든. 설마 자신과 공명하고 있던 검에게 속을 줄은 몰랐던 거지. 이 일 때문에 메담은 기사단장의 검과 완전히 절연하고 말았단다.
메담 역시 여왕과 마찬가지로 나이 50을 넘길 때까지 짝을 찾으려 하지 않았어. 가장 가까운 친구로서, 한 핏줄을 나눈 가족으로서, 왕에게 충성하는 신하로서, 그리고 그녀를 사랑했던 한 남자로서 여왕을 위해 바친 청춘을 조금도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지. 그런데 그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자신처럼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 거야.
임종하시기 직전 어머니는 나에게 남자처럼 행세하라는 말씀을 유언으로 남기셨다. 고아로 살아갈 내가 여자라는 게 알려지면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염려하셨던 것이다. 성장하면서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되었을 때 메담도, 휘렌델 여왕도 무척 놀랐었지. 그러나 그 때는 메담도 휘렌델 여왕만을 바라보느라 내 감정을 알지 못했어. 솔직히 어렸을 때는 질투심 때문에 여왕에게 심술도 많이 부렸었지. 그러나 철이 들면서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니까 질투조차 할 수 없게 되었지. 단지 메담을 향한 감정만 간직했었단다.
메담과의 사이에서 브라이언이 태어났을 때 휘렌델 여왕은 그 누구보다 기뻐하고 축하해 주었어. 후사를 남기지 못한 게 은근히 마음에 걸렸었나봐. 기다렸다는 듯이 메담의 출신을 밝히고 나의 아들을 자신의 정식 후계자로 삼아버렸지. 브라이언의 정통성에 말이 생길 걸 우려해서 메담을 선왕으로 추대한 후에 아예 그의 이름을 따서 윈더민을 메다민으로 바꾸어 버렸어.
지금 너희가 읽고 있는 대악마 전쟁의 진실은 브라이언이 바르테인의 8대왕으로 즉위하기 직전 날에 여왕이 나와 브라이언에게 들려준 것이란다. 이 이야기를 공개해도 좋을지, 그녀는 나에게 선택을 맡겼지. 이 문장을 시작할 때까지도 고민하고 있었는데.... 방금 결정을 내렸어. 이것을 후대에 왕이 될 너희 후손들에게만 전하기로 했단다. 왜냐하면 이 기록은 전혀 객관적이거나 공정할 수가 없거든. 역사적 가치를 잃었으니 그냥 손자들에게 이 왕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남기자꾸나.
그녀에게 고마워할 일이 너무 많아서 역사학자로서의 중립을 잃었다는 건 잘 알고 있단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감히 단언하고자 한다. 휘렌델 바르테인은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 아니라 최고의 왕이었다는 걸 말야. 부디 너희도 그녀에게서 많은 걸 배워 진정한 지도자로 거듭났으면 좋겠구나.
-토마스 바르테인-
당신의 댓글 하나가 당신이 읽고 있는 글을 바꿀 수 있습니다.
- 작가의말
휘렌델 : 지금까지 왕녀의 외출을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
(고) 그림자 매 : 다음 이야기는 1월 초쯤 시작될 예정입니다 ^^
메담 : 결국 날 쩌리로 날림처리한 작가놈-_-이 그 때 즈음에야 조금 한가해진다나 봐요.
Comment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