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연재수 :
417 회
조회수 :
632,086
추천수 :
14,829
글자수 :
1,880,019

작성
17.09.15 02:16
조회
507
추천
9
글자
10쪽

정답

DUMMY

천막을 나오자마자 약간의 후회가 밀려온다. 나와는 생각이 다르다 하나 옌닐을 비롯한 기수들의 충성심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비록 그 충성심 때문에 나를 가르치려 들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 그들에게 내가 너무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회의장을 나가자마자 곧바로 뒤따라 나오는 옐러를 보자 마음이 더욱 뒤숭숭해졌다. 그가 나를 쫓아온 이유는 내가 저지른 일을 수습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악마들과의 결전을 앞둔 날 이러면 안 되었는데....”

차마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난 먼 하늘을 올려보며 중얼거리듯 넌지시 사과했다.

“알고 계시니 다행입니다.”

그 말이 뭐가 우스웠는지 옐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그에게 꾸중 비슷한 걸 들을 줄 알았는데.... 그 표정을 보자 몸에 잔뜩 들어갔던 힘이 스르륵 빠져나간다.

“옌닐 경의 말이 맞는 걸까요? 기수들 전부가 반대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걸까요?”

어쩌면 그들이 옳고 내가 잘못된 게 아닐까? 어리고 세상물정도 모르면서 너무 독선적으로 나간 게 아닐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옐러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하지만, 난 그의 대답을 듣기 전에 이미 스스로 답을 찾았다. 그들의 의견을 따르자면 난 붉은 바위족을 몰살시켜야 한다. 그런 게 정답일 리 없어. 만약 그게 정답이라 해도 인정할 수 없어.

“기수들의 의견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들은 여왕님보다 더 오랫동안 살았고, 승리자가 되기 위한 지혜를 익혀 왔습니다. 그들이 여왕님께 간언하는 건 그 숱한 경험 속에서 거르고 걸러낸 정수뿐입니다.”

옐러 역시 별 수 없구나. 실망하려는 찰나 옐러가 한 마디 덧붙인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여왕님의 의견이 틀렸다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솔직히 전 모르겠습니다. 어느 쪽 의견이 맞게 될지.”

“그러면 경은 중립인 건가요?”

나의 물음에 옐러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의 경솔함을 질책하고 기수들과 화해시키러 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처음에 저는 란드와 같았습니다. 여왕님에게 이 나라를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노드 체스터의 반란에 가담했었죠. 저 녀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왕님에게 투항했지만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말을 하면서 옐러는 나를 수행하고 있는 벨포트에게 시선을 돌린다. 말없이 우리 대화를 듣고만 있던 그의 아들은 아버지 스스로 치부를 드러내자 당황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 생각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옌닐 경과 같아졌죠. 여왕님은 아직 뭘 모르니 이 몸이 가르쳐서 제대로 된 왕으로 만들어야겠다. 그런 생각이었죠. 그림자매를 제거할 함정을 팠을 당시에는 말입니다.”

이번에는 가벼운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 해나가던 옐러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그 때 저는 그림자 매를 공격하지 말라는 여왕님의 명령을 무시했습니다. 어리숙한 여왕님보다 제 판단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등에 식은땀이 흐릅니다. 저는 역사 상 가장 흉악한 죄인이 될 뻔 했습니다. 여왕님은 끝까지 그림자매를 지키려 하셨습니다. 미친 정령검의 조종을 받는 와중에도 말입니다. 만약에 그 때 여왕님이 고집을 부리지 않으셨다면, 제 가르침을 따르셨다면 여왕님은 지금쯤 최악의 살인마가 되어 있었을 겁니다.”

“그 때는 경도 나도 그림자 매의 검에 얽힌 내력에 대해 알지 못했잖아요.”

내 판단력을 높이 사주는 건 고맙지만 그 사건은 적절한 예시라 보기 어려웠다. 우연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옐러는 고개를 흔들며 말을 잇는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여왕님은 여왕님께 반기를 들었던 아덴트 주민들을 구하려 하셨습니다. 심지어 적의 성 안에 무방비로 들어가셔서 말입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여왕님이 그렇게 구해낸 사람들은 란드의 반란을 피해 없이 진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두 번이나 반복되면 그건 더 이상 우연이 아닌 겁니다. 한 번 돌아보십시오. 드래곤에 엘프, 살라고 보내줬더니 죽는 길을 택하고 돌아온 병사들.... 원정을 떠날 때만 해도 적이라고만 생각했던 붉은 바위족도 여왕님을 위해 기꺼이 싸우려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순진하다고만 생각했던 여왕님의 결정들이 이뤄낸 결과들입니다.”

옐러의 목소리에는 나라는 사람에 대해 느낀 경이가 그대로 묻어 있었다. 과분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내가 항상 옳은 판단만 내린 건 아닌데....

“지금의 행동도 제 상식에서는 많이 벗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감히 경솔하게 판단을 내리지는 않으려 합니다. 여왕님의 결정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처음에 밝혔듯 옐러는 중립적인 입장이었다. 섣불리 판단을 내리지 않고 사태를 신중히 관망하기로 한 것이다.

“경이 내가 이렇게 회의장을 나와 버린 걸 책망하고 기수들과 화해시키려고 나온 줄 알았어요.”

“제가 나온 건 아들 녀석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입니다.”

거봐. 이번에도 완전히 잘못 짚어 버렸네. 옐러는 벨포트에게 시선을 맞춘 후 그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예전에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네, 기억합니다.”

벨포트가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여왕님을 잘못 보았듯 너 역시 잘못 보았구나. 그 말을 할 때의 나는 너의 안목을 신뢰하지 못했다. 여왕님을 향한 너의 태도는 사사로운 감정에서 비롯되었을 뿐, 충성심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구나.”

옐러의 말을 들은 벨포트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것이 새삼 떠올랐던 모양이다.

“내일 전투에서 스미스 가의 명예를 걸고 수호기사로서의 의무를 다하거라. 내가 해줄 말은 그것뿐이다.”

이 말을 듣자 스미스 부자가 과거 나누었다는 대화를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었다. 일찍이 옐러는 나에게도 같은 말을 해준 적이 있었다. 나 때문에 벨포트가 죽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벨포트에게 걸었던 금제를 풀어준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들의 결심을 눈으로 확인한 옐러는 만족한 얼굴로 터덜터덜 돌아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참 동안 서 있었다. 그가 나를 이렇게까지 믿어주고 있었을 줄이야. 고맙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의 신뢰가 부담스럽기도 하다. 붉은 바위족과의 동맹을 파기한 건 그들의 생존을 확보해주기 위해서였고, 회의장을 뛰쳐나온 건 솔직히 그들에 대한 증오를 버리지 못하는 기수들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는데....

그는 믿어주고 있지만 나는 방금 전의 행동이 잘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지금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이 정답인지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때 문득 하이아온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그는 내게 정치가 무엇인지 물었고, 나는 정치란 자신이 내린 결정을 정답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답했다. 내가 저지른 짓을 정답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향이 뚜렷해지자 머릿속에서 떠다니고 있던 여러 가지 생각들이 가지런히 정리되는 느낌이다.

“혹시 샤니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나의 물음에 벨포트는 기꺼이 나를 그가 있는 곳까지 안내해 주었다. 도착하자 샤나프린이 환히 웃으며 나를 맞이해 주었다.

“결계는 완성한 거야?”

“아직 끝내지 못했습니다. 크기가 워낙 커서.... 아마도 내일 오전 중에는 마무리 될 겁니다.”

알케니아는 악마들이 내일 오후쯤에 도달할 것으로 추측했다. 계획에는 차질이 없다는 뜻이다.

“무궁화는 어디에 심을 거야?”

“저기입니다. 결계의 동쪽 끝부분이죠.”

말뿐이 아니라, 샤나프린은 직접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었다. 그 곳에는 바위도 있고 커다란 덤불도 있었다.

“몸을 숨기기에 최적의 장소 같네?”

“일부러 만든 겁니다. 빗장을 걸기 전에 아르만시아에게 발각되어 버리면 안 되니까요. 결계를 만들기 앞서 식물들부터 먼저 성장시켰습니다.”

“역시 그렇구나. 저 정도면 악마들도 눈치 못 챌까?”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는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엘프는 아주 작은 소리와 냄새도 남기지 않으니까요.”

샤나프린이 악마들로부터 완벽히 은신할 수 있다는 건 하이아온이 죽을 당시에 입증된 사실이었다. 그래서 처음 만날 때 내가 자신의 존재를 눈치 챈 것에 몹시 놀랐던 것이다. 본인의 입으로 그 사실을 확인한 후 나는 벨포트와 발리언트가 듣지 못하도록 작은 목소리로 샤나프린에게 물었다.

‘그런데 만약에.... 아르만시아에게 내가 죽으면 어떻게 돼? 이 결계도 소용없어지는 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뛰어난 적응력을 가진 엘프는 우리를 대할 때는 사람의 말로, 케이온지드를 대할 때는 머릿속의 울림으로 대화에 응했다. 이번에도 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작은 목소리로 대답해온다.

‘아무리 엄청난 마력을 가지게 되었다 해도 그의 육체는 여전히 악마입니다. 이 결계의 영향력을 벗어나지는 못하죠.’

됐어.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간신히 찾아낸 정답을 실행에 옮길 조건이 모두 충족되었다.




당신의 댓글 하나가 당신이 읽고 있는 글을 바꿀 수 있습니다.


작가의말

캐시디엘 : 결계를 저렇게 빨리 만들어도 되는 건가요? 왕녀의 외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훗날 제가 완성할 결계는 만드는데 거의 몇 달이나 걸렸었는데....

샤나프린 : 나는 파크에게 설계도를 받은 것과 다름 없는 상황이었잖아요. 게다가 기원의 종에게는 창조의 속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 걸린 거죠.

캐시디엘 : 그렇군요 ㅠㅠ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 작성자
    Lv.47 Brav
    작성일
    17.09.15 09:38
    No. 1

    어렵네요. 가장 높은 자리는 가장 외로운 자리라더니 그 자리를 갈망하는 사람은 의무를 가볍게 여기고, 휘렌델 같은 사람은 책임감에 깔리고... 옐러 경의 중립은 어떻게 보면 경험과 지식을 부정당한 사람이 혼란한 상태에서 모든 것을 일단 유보하는 걸로 보이네요. 그나마 왕에 대한 충성이라는 목적을 가진 것이 휘렌델에게는 득이겠지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7.09.16 22:23
    No. 2

    맞습니다.
    옐러가 중립을 표방하는 이유를 정확히 꿰뚫어 보셨네요.
    정치와 군사적인 면에서 휘렌델보다 몇 수 위인 옐러가 휘렌델의 가능성에 대해 열어두고 있다는 건 바꾸어 말해 그녀의 잠재력을 기대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겠죠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8 메틸아민
    작성일
    17.09.15 10:19
    No. 3

    벨포트 보다 비중이 커져버린 옐러경ㅋ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7.09.16 22:27
    No. 4

    예정보다 훨씬 많은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
    정령왕이 폭주할 때 죽일 생각까지 했던 캐릭터인데....
    휘렌델을 대하는 귀족의 유형을 오늘 분류해봤는데,
    옐러 같은 유형은 아마 그 혼자 뿐일 겁니다.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왕녀의 외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17 완결 후기 +13 17.11.24 702 17 12쪽
416 에필로그 : 진정한 지도자 +12 17.11.17 614 15 10쪽
415 불어오는 바람 +6 17.11.13 425 8 8쪽
414 남은 것은.... +4 17.11.09 395 10 10쪽
413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4 17.11.06 368 5 7쪽
412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고백 +6 17.11.03 403 10 8쪽
411 기적 +6 17.11.01 376 9 7쪽
410 뜻 밖의 공명 +6 17.10.29 364 10 8쪽
409 고집과 단념 +6 17.10.25 402 12 8쪽
408 다시 그 때로 +6 17.10.23 401 8 8쪽
407 돌이킬 수 없는 선택 +6 17.10.21 420 8 7쪽
406 유일한 선택지 +6 17.10.18 389 8 12쪽
405 하극상 +4 17.10.16 468 5 6쪽
404 불청객들 +4 17.10.13 416 7 9쪽
403 어그러진 계획 +4 17.09.25 395 8 10쪽
402 깨어진 신뢰 +4 17.09.23 369 11 9쪽
401 공감자 +4 17.09.21 393 9 10쪽
400 최소한의 전투, 최소한의 희생 +8 17.09.19 493 10 9쪽
399 왕의 허가 +4 17.09.17 459 9 9쪽
» 정답 +4 17.09.15 508 9 10쪽
397 허심탄회 +6 17.09.13 392 10 11쪽
396 발뺌 +4 17.09.11 419 8 10쪽
395 격발 장치 +4 17.09.08 394 7 9쪽
394 갈수록 태만 +4 17.09.04 496 11 10쪽
393 형제 간의 사투 +2 17.09.02 370 10 10쪽
392 왕의 의무 +2 17.08.31 424 11 10쪽
391 충신 +4 17.08.29 400 8 10쪽
390 정령왕의 행방 +4 17.08.27 423 9 9쪽
389 복수의 화신 +4 17.08.24 469 12 9쪽
388 권능 +6 17.08.22 471 11 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