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오는 바람
악마들과의 전쟁이 맺어주었던 인연은 그 싸움이 끝나면서 자연스럽게 매듭이 지어졌다. 알케니아는 미리 밝혔던 바와 같이 세속을 떠나 인간을 악마로 만든 죄를 속죄하며 살아가기로 했다. 이성을 잃었을 때 저지른 잘못에 연연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었지만 그 자신은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켈리트와 함께 가장 먼저 길을 떠났다. 그녀에게 파크를 찾아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켈리트에게 파크와의 재회는 더 이상 최우선순위가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이 갈 수 없었던 결계 안으로 제멋대로 알케니아에게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는 걸 보면 말이다.
다음으로 케이온지드가 무뚝뚝한 작별인사를 건넸다.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도 아르만시아가 아직 살아있으며, 결계 안에 갇혀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자신도 언젠가 신의 경지에 도달할 것이며, 그 때는 반드시 그림자 매의 복수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배려 때문에 그에게 거짓말을 하는 내 마음이 더욱 편치 않았다.
그 날이 오면 붉은 드래곤에게 진실을 이야기해주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가 정말로 그 경지에 도달한다면 더 이상 아르만시아를 죽인 인간을 경계하지도 않으리라는 것이 나의 계산이었다. 하지만 이후로 그와 재회하는 일은 없었다. 가끔 샤나프린을 통해 안부는 전해 왔지만 말이다.
인간에게 호의적인, 호기심 많은 엘프와는 이후로도 교류를 지속했다. 그 역시 인간이 바글바글한 성 안은 영 부담스러운지 사람이 없을 시간을 골라서 방문해왔지만 말이다. 샤니는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인간보다도 순수했고, 때문에 그와의 만남은 나에게 가장 커다란 기쁨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림자 매가 말한 대로였다. 전쟁은 끝이 났지만 내가 할 일은 그 때부터 시작이었다. 우선 나는 악마들과의 싸움에서 변함없는 의리로 아군의 힘이 되어주고 피를 흘려준 붉은 바위족과 굳건한 동맹을 맺었다. 마지막에 그들과 멋진 연합전술을 펼친 기수들도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 결국 그림자 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어베레드 땅을 그들에게 돌려준다는 조항에는 다소 반발이 있었다. 옐러도 왕성의회가 반대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성에 돌아가 대회의를 거치지 않고 결정을 내리는 건 절차상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나는 그들에게 왕성의회조차도 납득할 수밖에 없는 구실을 설명해 주었다. 바로 아르만시아의 존재였다. 혹시 결계에 무슨 문제가 생겨 악마들의 군주가 풀려난다면 붉은 바위족이 방파제 역할을 해주리라는 논리였다. 그러자 아무도 그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게 되었다.
윈더민 성을 떠날 당시 원정군은 바르테인의 깃발아래 모이기는 했지만 서로 다른 색깔을 지니고 있었다. 병사들마다 각자 따르고 있는 영주가 달랐고, 그에 대한 소속감이 더 컸다. 그러나 절망적인 싸움을 계속한 끝에 승리를 쟁취해낸 지금은 완전한 하나였다. 그들은 의심할 나위 없는 여왕 휘렌델의 군대였다. 따라서 어베레드 탈환이라는 당초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나의 권위가 실추되기는커녕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막강해진 상황이었다.
다른 국가들이 바르테인을 얕잡아 볼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심어둔 첩자들은 본국으로 돌아가 우리가 어떠한 존재와 싸워 승리를 거두었는지 말해줄 테니까. 음유시인들은 이 극적인 전쟁을 재료로 수백 개의 노래를 지어 우리의 승리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귀족들은 대악마 전쟁 이후 드높아진 바르테인의 위상을 이용해 타국을 공격할 것을 제의해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 개입하고 무언의 압력을 행사해 분쟁을 종식시켰다. 소샤이트, 람비드, 알타메트와 에네버에도 있을 그림자 매 때문이었다. 붉은 바위족이 겪은 비극을 두 번 다시 재현하고 싶지 않았다.
여자의 몸으로 태어난 나는 전란의 시대에 어울리는 왕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강철거인의 정원 위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던 전쟁을 모조리 없애 버리고 평화의 시대를 만들어 버렸다. 곧 내 이름 앞에 성군이라는 칭호가 붙기 시작했다. 타국의 백성들조차 나에게 고마워한다는 말이 들려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귀족들에게도 평화가 그들에게 주는 이점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 전쟁으로 가장 많은 것을 잃는 자들은 바로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이니까. 바르테인 내의 귀족은 물론 타국의 귀족들조차 빼앗아 얻을 기회를 빼앗길 위험과 갈음하는 것에 동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화 위에 번영을 쌓아올리는 데 눈을 돌렸다.
좋은 왕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이는 내가 왕이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던 고민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러한 고민조차 교만의 산물이었던 것 같다. 아빠는 왕과 귀족, 평민의 구분 없이 사람에게는 누구나 동등한 가치가 있다고 믿으셨다. 그런데 나는 그 분의 신념을 이뤄드리려 했으면서도 정작 대중의 염원을 외면해왔다. 어줍지 않은 영웅주의에 사로잡혀서 말이다.
나는 나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 왕으로서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그 많은 인물들이 어떠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나를 살리려 했는데도 말이다. 서로 반목하고 있던 그림자 매와 기수들도, 인간과 무관한 다른 종족들조차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오만하게도 나의 답을 관철시키려 했다.
그림자 매의 말처럼 나는 답을 찾으려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왕이 할 일은 단지 사람들의 바람에 귀를 기울이는 것뿐이었다. 그러면 내가 나가야 할 길이 보였고,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이것을 깨닫고 나니 정치가 더 이상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뜻을 정함에 있어 그 어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그에 따르는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한다. 이는 영웅의 길이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깨끗한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다. 그 숭고한 신념을 실천함에 있어서는 그 속물들의 입장도 헤아릴 필요가 있다. 나와 다른 답을 찾은 그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말이다.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마침내 나는 나를 괴롭히던 속박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나를 위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 나는 그들의 희생에 슬퍼하고 괴로워하기만 했다. 그런데 문득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내가 행복해져야 하지 않을까?
윈더민 성에 돌아온 후부터 다시 아빠의 잔영이 이곳저곳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얼마나 보고 싶고 그리운 아빠의 모습인데.... 오히려 찾아다니게 되었다.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그림자 매가 담겨 있는 바람. 나는 꿈꾸는 발걸음으로 그 바람을 따라 따스한 햇볕이 내리고 있는 정원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림자 매가 상냥히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는 마지막에 나에게 보였던 그 모습 그대로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빠가 최후의 순간에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다. 이에 나 역시 활짝 웃어 주었다.
“춤을 춰, 휘렌델.”
이미 몇 번이나 부탁했었지. 이제야 그 부탁을 들어주게 되었네. 귓가에 바이올린과 류트의 음이 들려온다. 그와 내가 함께 만들었던 노래가. 나는 그 노래에 맞추어 사뿐사뿐 춤을 추었다. 다음에 또 들러줘, 그림자 매. 해줄 이야기가 아주 많으니까.
당신의 댓글 하나가 당신이 읽고 있는 글을 바꿀 수 있습니다.
- 작가의말
휘렌델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났습니다.
다음 편에서 토마스의 짤막한 에필로그로 완결이 되겠네요.
Commen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