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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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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15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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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글자
25쪽

04화 - 2

DUMMY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 리유와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고 있었는데 미처 사건에 진입하기도 전에 수업이 시작돼 버렸다. 적어도 수업시간만큼은 평소랑 똑같다. 허나 지금의 나에게, 수업 같은 게 머릿속으로 들어올 리 만무하다. 힐끔 반 전체의 여자애들을 쳐다봤다. 평소랑 전혀 다를 게 없는 여자애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무서울 따름이다.

힌트는 하나. 리유가 주고 간 힌트. 「변태」라는 키워드. 나보다 확실히 일찍 학교에 와 있던 리유는, 애들이 내 책상과 책에 그런 짓을 할 때 격하게 ‘변태’라고 하는 걸 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무언가 나를 변태로 오해를 할 만한 게 있어서 일이 이렇게 됐다는 건데. 암만 생각해봐도 그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알 수가 없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변태’라는 말을 장난스럽게 할 만한 여자애도 리유나 성빈이, 넓게 잡으면 사감 선생님 정도밖에 없다. 내가 이 여고에서 친해진 사람은 그 세 명 뿐인걸. 아예 모르는 애에게 함부로 험담을 하거나 놀리기는 힘들다. 뭔가 계기가 있으니까 시작된 거겠지. 그리고 그 계기를 못 찾겠다는 말이고. 마음이 답답하다. 머리도 복잡하다.


다른 건 그래도 괜찮은데, 성빈이까지 날 멀리하는 건 좀 충격이다. 붙어 있던 책상을 떼서 창문까지 붙일 만큼 꽤나 거리를 띄웠는데 그것에 아무 말도 안하는 건, 암묵적으로 승인한 것이지 않나. 꽤나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만큼이나 멀구나, 성빈이하고의 거리가. 힐끔 성빈이를 보다가 얼른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행여 쳐다볼까봐.

아니야, 성빈이가 그럴 리 없어. 분명 여기에는 뭔가 사정이 있을 거야. 그 증거로, 다른 여자애들은 하나같이 나를 경계를 넘어선 적개심 가득한 눈과 혹은 경멸감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지만 성빈이는 그런 눈은 아니었잖아. 뭔가 꺼리는 듯, 망설이는 듯한 눈이지만 적어도 적개심과 경멸의 눈은 아니었다. 그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원인이나 이유 따윈 모르겠지만 펼쳐진 결과를 보자면 여자애들은 떼로 몰려 나를 싫어하고 적대하게 된 것 같고, 나로서는 어떻게 대처할 방법이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성빈이는, 나와 마찬가지로 본인의 힘만으론 어떻게 나를 도와줄 수 없을 만큼의 사태가 된 것이다.

나와 성미, 지선이를 이어주는 건 성빈이의 힘만으로 가능하다. 어차피 자기 친구들이고, 두 사람 뿐이니까. 그 정도는 한 사람의 힘으로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그게 자신을 제외한 반 모든 여자애들이라면. 아침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면 지금 반에서 성빈이, 리유를 제외한다면 나머지 모든 여자애들은 나를 적대시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성빈이가 나를 옹호하거나 우호적인 반응을 보인다면?

과연, 아무리 같은 여자애라도 무사할 수 있을까. 사람은 사회성 동물. 모두가 빨갱이를 욕하고 공산주의를 배척하는 사회라면 그렇게 따라야만 한다. 사람은 그러한 동물이다. 설령 ‘공산주의에도 이러이러한 장점은 있다.’ 라고 잘 타일러 설명한다 하더라도, 그는 곧 온갖 욕설과 핍박을 당하며 사회에서 매장당할 것이다. 그랬던 사회다.

그리고 이곳은 작은 사회, 학교. 앞으로 사회를 만들어갈 아이들이 만드는, 작은 사회. 하루에 14시간, 가족보다도 훨씬 더 많이 마주하고 같이 살아가는 공동체. 여기서 빨갱이는 나. 철저하게 빨갱이를 배척하는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빨갱이의 옹호를 한다면. 그 사람 역시 도매금으로 같이 배척당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성빈이는, 망설이는 눈빛으로 나에게 어색하게 대하는 것이다.


그 정도로 가설을 세워봤는데, 정말 그럴싸하다. 그래, 그래서 그렇게 난감한 표정을 지었던 거구나. 그런 사정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이거, 나 혼자 뻘짓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내 예상이 맞는 거겠지? 헛다리 짚는 건 아니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문득 다른 것까지 떠오른다. 바로 리유. 리유는 성빈이와는 달리 완전하게 동일하게 나를 따른다. 그래서 퍼뜩 생각이 난 거다. 리유 녀석, 가뜩이나 다른 애들이랑 친하게 지내지 못하는데. 잘못하다간 나랑 어울리는 걸 고깝게 여긴 여자애들의 뭇매를 나와 함께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안 되지. 연좌제도 아니고, 리유가 무슨 잘못이야. 리유는 그저 날 잘 따르고, 그런 리유가 귀여워서 내 귀여움을 받을 뿐인데. 도매금으로 같이 따돌림 당할 수는 없다. 성빈이는 스스로 거리를 두지만, 리유는 그러지 않으니까. 이거 문젠데. 리유한테 어떻게 설명하지. 아,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겨우 생긴 친구한테 친한 척을 못 하게 되다니. 근본적인 원인을 모르니까 이러고 있는 거겠지. 한숨을 푹푹 쉬며 수업은 전혀 집중이 되질 않는다.




‘삐─ 삐─ 삐─’

‘덜컹.’

“앗 뜨거.”

편의점. 전자레인지에 도시락을 너무 돌렸다. 플라스틱인 뚜껑이 녹을 기세로 휘어져 있다. 들기도 힘드네. 저번에 혼자 밥 먹을 때 같다. 그 때는 왜 도시락을 사서 편의점에서 먹지 않았나 후회를 했지만. 그래서 오늘은 편의점에서 먹는다.

리유는, 그냥 두고 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망치듯 교실에서 뛰쳐나왔다. 자세한 사정을 말하지 않고 나온 게 좀 걸리지만, 수업 중에 혼자 유추한 걸 생각하고 나니 도저히 애들 앞에서 리유에게 말을 걸 수가 없다. 내가 가만히 있고 리유가 친하게 말을 걸어도 애들이 의심의 눈으로 볼 텐데, 내가 먼저 살갑게 리유에게 말 걸고 리유도 방긋 웃으며 대답한다면…… 누가 봐도 한통속(?)인 걸 알게 될 테니까. 휴대폰 번호라도 알고 있었다면 문자로 조심스럽게 사실을 전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리유 휴대폰 번호는 모른다. 도시락을 편의점 안 식탁 위에 놓고 앉았다. 좀 뜨거워서 식힐 시간이 필요하다.

리유는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 혼자 있다면, 또 빵 같은 걸로 때우려나. 처음 만났던 그 동산에서, 혼자 내가 오길 기다리면서 빵을 먹고 있으려나. 살짝 가볼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아니다, 아니야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젓가락으로 밥을 떠서 먹는다. ……역시 맛없다. 편의점 도시락.

이제, 이제 만사가 다 해결됐다고 생각했는데. 토요일에 네 명이서 화기애애하게 짐을 옮기고, 저녁도 같이 먹고, 일요일 오전에는 마찬가지로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바닥도 새로 깔고, 벽지도 새로 도배하고 해서 완벽하게 꾸몄다. 임시로 선생님이 쓰지 않는 이불 한 채도 줘서, 당장이라도 잠은 잘 수 있게 됐다. 숙소도 구했고, 무엇보다 리유와 성빈이라는 친구가 생겼으니까, 그 둘을 거점으로 이제 안정적인 학교 생활을 영위하려 했는데. 충분히 그 가능성을 엿본 게, 성빈이의 소개로 성미와 지선이와도 어느 정도 안면을 틔우게 됐으니까. 조금 지내다보면 다른 여자애들도 나에 대한 어색함을 털어내고 얘기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했었다.

그게 너무 낙관적이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큰 함정에 빠진 것일까. 남자가 변태인 게 뭐가 나빠! 라고 속으로 아무리 외쳐본들 그 소리는 닿지 않는다. 여자의 오해라는 건 무섭다. 거기에, 한참 예민할 여고생들에겐 더더욱. 혼자 밥 먹는 신세가 더욱 처량하다. 게다가 미래를 생각하면 더욱 암울하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실마리도 잡히질 않는다.

“…….”

“……!”

“…….”

점심을 혼자 먹고 학교로 돌아왔다. 여전히 여자애들은 적대적인 시선이지만 어째 계속 지내다보니 괜찮아진 것 같기도 하─

……그럴 리 없잖아. 우울했던 마음은 더욱 우울해지는데, 내 자리에 앉기 전에 앞자리에 있는 리유와 눈이 마주쳤다. 리유는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다행이 무슨 말을 하거나 하진 않고, 그런 눈빛만 내게 보여주고 있다. ‘어디 갔어 바보야!’ 하는 것 같은 눈빛. 하지만 다른 애들에게 나와 리유의 연관성을 보이면 안 되기에, 난 그 눈빛을 무시하고 자리에 앉았다. 놀란 표정으로 나를 멍하니 보는 리유가 뻔히 보이지만 필사적으로 리유 쪽을 보지 않았다.

아아, 미안해 죽겠는데. 그래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건 리유를 위함이니까. 그러고 보니까 어째 성빈이도 약간 미안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허나 내가 힐끔 성빈이와 눈이 마주치니 성빈이는 바로 시선을 고쳐 내 눈을 피한다. 기분 탓이겠지.


지루하다. 재미없다. 내가 기대한 고등학교 생활은 이런 게 아닌데. 이렇게까지 수업이 재미가 없다니. 원래도 재미는 없었지만. 사람 일은 다 마음먹기 나름이라던데, 그것 때문일까. 수업시간도 지루해 죽을 맛이지만 쉬는 시간 역시 죽을 맛이다. 쉬는 시간인데도 정말 아무것도 못 하니까.

남자애들 사이에서 왕따라면 그건 폭행과 무시의 반복이라 괴롭지만 여자애들 사이에서 나 혼자 남자인 상태로 왕따니 이건 철저한 존재의 소멸이다. 그러니까, 그런 걸까. 조선시대 때 팽형을 당하면 진짜로 삶아 죽이는 게 아니라, 가마솥에 들어갔다 금세 나오고 대신 죽은 것처럼 장례도 치루고, 삼년상까지 치루고 정식으로 죽은 사람 취급을 한다고. 정작 본인은 펄펄하게 살아 있는데.

그래, 근데 나는 무슨 죄를 지어서 그런 팽형을 당하게 됐을까. 적어도 명확한 사유는 알려주고 왕따를 해 달라고. 이 여자애들아. 하긴, 왕따하는데 그렇게 젠틀하게 해줄 리 없잖아. 지금도 쉬는 시간이지만 이렇게 뻘생각이나 하고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멍하니 앉아 있다. 중학교 때 친구들과 활기차게 뛰놀던 나로서는 정말 답답하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툭.’

“아.”

“꺄악!”

그렇게 멍하니 있는데, 어떤 여자애가 나를 툭 친다. 지나가면서 치는 거라면 이해할 수 있겠는데, 내 자리는 창문 쪽, 안쪽 자리다. 거기다 성빈이와 자리까지 살짝 떨어뜨려서 그야말로 창문 안쪽, 지나가다 부딪히기 정말 힘든 곳이다. 하지만 이런 곳까지 기어이 와서 부딪히고 가는 여자애. 고압적인 눈매에, 탐스런 연한 갈색 웨이브 머리가 매력적인, 전교 1등인 그 여자애. 희세다.

“더러워, 어딜 만지는 거야?!”

“……어?? 나, 난 그냥 가만히 있었……”

“에에? 뭐야 뭐?”

마치 일부러 부딪히기라도 한 듯 내 쪽에 와서 그 큰 엉덩이로 내 팔을 치고 잔뜩 새침한 태도로 소리 높여 말하는 희세. 영문도 모르고 어이도 없어 가만히 대답하려 하지만 이어지는 여자애들의 목소리에 내 대답은 묻혀버렸다. 희세 친구들인가보다.

“……내 엉덩이 건드렸어.”

“와, 대박 대박”

“이제 본색을 드러내는 거야.”

“히익!”

잠자코 나를 노려보며 한 마디 하는 희세. 몰려온 여자애 세 명은 각기 다른 표정들로 나를 잔뜩 농락한다. 질색인 표정, 흠칫 놀라며 내 눈을 피하는 녀석. 입을 가리며 놀라는 녀석. 나는 가만히 희세와 그 애들 하나하나 살펴본다.

와, 이, 이것들. 아주 말하는 게 가관이네?! 누가 보면 내가 희세 엉덩이를 대놓고 만진 줄 알겠어!! ‘이 사람들이 지금 경우가 있지 어디서 억울한 사람 누명을 씌워!’ 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건 마음 속 메아리일 뿐이다. 당장 이렇게 여자애들이 와서 한 마디씩 말하면 그 말들은 비수가 돼 내 가슴에 하나씩 상처를 낸다. 계속해서 작아져 사나이에서 나약한 소년이 된다. 그리고 지금 멘탈은 충분히 여린 소년이 됐다.

“……미안. 모르고 건드린 것 같네.”

“……저질.”

“……변태.”

나는 이를 악물고 억지로 사과했다. 여자애들은 하나 같이 경멸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나지막이 한 마디씩 한다. 우와, 이거 이거 진짜…… 진짜 자살하고 싶다…… 여자애들한테 이런 소리를 직접, 그것도 저렇게 냉소적인 말투로 듣는 게 이 정도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말이라니. 그것도 쟤네, 그렇게 예쁘지도 않은데. 아니 지금 이 상황에서 예쁜 게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희세는 예쁘잖아.

“앞으론 좀 조심해 줬으면 좋겠어. 원래 그런 변태라고는 하지만.”

“…….”

희세는 아주 고압적인 태도로, 차가운 기운이 풀풀 날릴 것 같은 분위기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말하는 것에도 뼈가 있는 것 같다.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입을 다문다. 고개까지 숙이진 않고, 덤덤한 표정으로 그런 희세를 쳐다본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희세. 무언의 압박감을 느끼게 하는 표정에, 나는 더 이상 사단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희세와 여자애들 무리는 다시금 자기 자리로 돌아가 원래 하던 수다를 떤다. 아, 정말─ 죽고 싶다.



희세는 왜 그런 걸까. 일부러? 확실한 건, 확실하게 알게 된 건 여자애들이 정말 나를 변태로 인식한다는 거다. 그것도, 엄청난 변태로. 분명 희세가 부딪히긴 했지만, 엉덩이가 내 신체에 닿은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 여자애들은 엄청난 기세로 나를 깎아 내린다. 성폭행범 정도가 아니면 이 정도로 까이기도 힘들 것 같다.

솔직히 신체가 달려 있으면 간혹 실수로 닿을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가뜩이나 희세는 몸매가 글래머형이니까, 엉덩이도 크겠지. 그러니까 지나가다 부딪힐 수도 있잖아. 거기다, 애초에 거긴 지나갈만한 데가 아니라니까! 왜 멀쩡한 분단과 분단 사이를 두고 나와 성빈이 자리 사이를 지나가는 건데! 틀림없이 의도한 게 아니고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추측해 봐도 별다른 결론은 나오질 않는다. 그저 한숨만 가득 쌓일 뿐.

희세, 그래도 예쁘고 괜찮은 애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여자애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더욱 죽고 싶다. 처음엔 보통 혼자 다니던 희세지만 어느새 금세 애들의 중심에 서게 됐다. 하긴, 화려할 정도로 예쁜 외모에, 도도하고 고압적인 분위기, 공부도 운동도 다 잘하는 만능 엔터테이너이니 애들의 중심에 서지 못하면 그게 더 이상할 정도다. 지금은 다들 희세를 중심으로 아이들이 뭉치고 있다. 그런 여자애한테 호감을 쌓기는커녕 완벽하게 저질 이미지로 낙인찍히다니. 애초에 본인이 나한테 와서 대놓고 저런 말까지 할 정도면…… 하아. 아아. 아아아! 몰라, 뭐야 이거 억울해!

……아.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닌데. 뭔가 하나 기억의 한 자락, 잡히는 것도 같은데. 예전에, 교실에서 나가다가 희세랑 부딪히면서 살짝, 0.3초 정도 가슴에 닿았던 것 같은데. 그 때에 ‘변태’이미지가 희세에게 생겨서, 지금 이러는 거라면. 그야말로 나비효과구나. ……정말 우연이었잖아, 그 때 그건! 억울해, 억울하다고!


저녁시간까지, 긴긴 시간 잘도 참았다. 이제 저녁 먹으러 갈 시간. 하지만 그것 또한 우울함의 연속일 뿐이다. 혼자 먹어야 하잖아. 불과 저번 주까지만 해도 리유랑 같이 먹어서 엄청 즐거웠었는데.

리유랑 있으면 그냥 재밌다. 꼭 애완용 강아지나 고양이가 한 마리 있는 것 같달까. 가만히 둬도 귀엽고, 장난치면 더 귀엽고, 가끔 정말 천진난만한 애처럼 굴어서 더 귀엽다. 더 좋은 건, 본인이 귀여운 걸 잘 알고 있는데다 그걸 이용해먹거나 그러지 않고 도리어 순수하게 귀여움 받는 걸 좋아한다는 점.

내 개념 하에서 여자애들은 좋게 말하면 영리하고, 나쁘게 말하면 영악하니까. 충분히 자기가 귀여운 걸 이용한다. 그리고 그것에 껌뻑 죽는 게 뭇 남자들 아닌가.

나만 해도 만약에, 아니 어디까지나 만약이란 가정이지만 희세나 성빈이 같은 묘령의 여자애들이 애교 부리면서 무슨 부탁을 한다면 거절할 자신이 없다. 자신의 귀여움을 자각한 여자의 무서움이다. 그건 남자에겐 치명적인 무기다. 하지만 리유는 다르다. 그저 귀여울 뿐. 본인이 본인 귀여운 걸 알고 있지만 결코 그걸 무기화 하거나 이용하려 하지 않는다. 정말 순수하고 착한 아이다. 그래서 더 좋다. 그래서 더 즐겁고,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정말 리유한테라면 마음을 열 수 있을 정도로 친해졌다. 어쩌면 서로 친구가 없는 상태니까 서로에게 더 의지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건 그냥 나 혼자만의 생각일수도 있겠지만.

“……?”

“……에헷.”

교문을 지나 아까 갔던 편의점이나 가려고 막 방향을 돌리는데, 이상한 낌새에 몸을 돌려 뒤를 쳐다봤다. 교묘하게 내 뒤를 밟고 있던 리유. 나와 눈이 마주치고, 한쪽 눈을 찡긋 하며 귀엽게 웃는다. 대충 얼버무리려는 뛰어난 애교. 묘한 대치상황이 됐다. 길게 생각하지 않고, 뒤돌아 바로 뛰었다.

“으에에! 도망가지 마!”

“…….”

리유 이 자식, 하필이면 지금 나타나서! 나약해진 마음이 감상적인 생각에 빠져 더욱 약해졌는데 리유의 모습이 눈앞에 바로 나타나니까 기분이 더욱 이상해졌다. 울컥 슬픈 게 올라온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그냥 뛴다. 숨이 차오를 때까지 뛴다. 리유는 소리 지르며 쫓아오지만 애초에 리유가 나를 따라잡을 확률은 제로다. 작은 체구 뿐만 아니라 체력도 확실하게 저질인 리유니까. 있는 힘껏 달리고 또 달린다. 괜히 울컥 눈물도 날 것 같다. 그런 이상한 감정들도 잊고자 계속 달린다.

리유에게서 도망치는 건 핑계일 뿐이고, 사실은 그냥 이 현실에서 달아나고 싶어 달리는 것이다. 숨이 꽤나 차오를 무렵, 천천히 속도를 줄여 걷기 시작했다. 한없이 무기력한 기분이 든다. 속도를 줄여 거의 평소 걷는 속도보다 더욱 천천히 걷게 되었을 때엔 마음도 한참 무겁게 됐다. 뭔가 리유를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괜히 마음이 무겁다. 무심결에 힐끔 뒤를 쳐다봤다.

“……! 리, 리유야!”

뒤를 돌아보니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리유가 있다. 나보다 월등히 느린 달리기 속도로, 무엇보다 월등히 떨어지는 체력인데 어떻게 쫒아왔지. 그런 의문보다는, 리유의 상태 때문에 나는 곧장 리유에게 달려갔다. 비틀비틀 천천히 걷더니 그 자리에서 그대로 쓰러졌기 때문이다.

“리유야. 리유야!”

“하악, 하아, 하앗, 후우. 잡았다, 히힛. 하악.”

“바, 바보야, 이렇게까지 쫓아올 건 아니잖아.”

“그치만, 하악, 웅이, 하악, 하앗, 너무, 너무 힘들어 보이니까, 하악, 그 느낌, 하앗, 잘 아니까……!”

리유는 격하게 숨을 헐떡인다. 얼마나 숨이 격한지 가슴팍이 팔딱팔딱 뛰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다. 한계까지 뛰어온 걸까. 괜히 가슴이 뭉클 해져서 눈물까지 고여서 쉰 목소리로 말했다.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가 쉰 목소리로 나온다. 리유는 여전히 숨을 헐떡이며 더듬거리며 말한다. 이 바보가, 쓰러질 정도로 쫓아오다니. 이건 진짜…… 너무 미안하잖아.

“미안, 미안해, 나…… 아, 너무 그래서……”

“어, 하아, 울어? 헤에, 하악, 남자애가, 하아, 울면 안, 하악, 되는데.”

“아, 아니! 울긴 누가! 그냥……!”

나는 그대로 감정이 격하게 치솟아 올랐다. 한 번 들끓기 시작한 감정은 잘 가라앉질 않는다. 조기진화가 중요한데, 초기에 불길을 잡지 못했다면 이미 늦은 거다. 리유가 숨을 헐떡이며 하는 말에 나는 더욱 서글픈 감정이 치밀어 올라 결국엔 눈물이 고인다.

아아, 안 되지, 안 돼! 마지막 철저한 남자의 자존심이 눈물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멈춘다. 리유를 일으키려다 그대로 리유을 폭 껴안아버렸다. 허용된다면 이 품에서 울어 버리고 싶은데. 남자가 그럴 순 없다. 오늘 하루 종일 아무 말도 못하고 여자애들의 질시와 멸시를 받았던 설움이 폭발해서, 나도 모르게 리유 품에 안겨 버렸다. 리유가 나보다 한참 키도 작고 덩치도 작아 모양새가 굉장히 이상하지만, 사실 나는 거의 무릎을 꿇을 정도로 엉거주춤한 자세여서 더욱 괴상하지만. 뭐, 상관없으려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대로변이 아니라 골목길이라 사람이 없다.

말하고 싶었다. 난 진짜 억울한데. 왜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영문도 모르는데. 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아무도 날 봐주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유일하게 리유만 나를 붙들어 주었다. 필사적으로 울음이 나오려는 걸 멈췄다. 난 남자니까, 이 정도는, 이 정도는 괜찮으니까……!



“히히, 울었지?”

“……안 울었어.”

“에에에~ 울었으면서~~ 히히힛.”

한참 뒤에야, 난 겨우 진정됐다. 그리고 지금은 잔뜩 리유에게 놀림 받고 있다. ……놀림 받아도 싸다. 여자애 앞에서 울면서 찌질하게! 거기다 껴안아버리기까지 했잖아! 친해졌다고는 하지만 겨우 일주일 밖에 만나지 않은 여자애를 꼬옥 안아 버리다니. 여자친구도 아닌 그냥 친구인 여자애에게! 그것도 가슴 쪽으로 얼굴을 파묻고! 아아, 정말.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다 화끈할 정도로 창피하다.

괜히 리유에 대해 생각해서 그래. 아까 그 감상적인 생각만 없었어도. 스스로 ‘리유에겐 마음을 열어도 될 것 같다’ 라고 생각하니까 정말 그렇게 돼 버렸잖아. 리유는 당당하게 가슴을 쭉 펴며 말한다.

“막 가슴 쪽에 얼굴 파묻길래. 웅이는 진짜 변태구나─ 했지, 아하핫!”

“……미안합니다.”

“그래도 좀 안타까운 건, 선생님처럼 가슴이 컸다면 좀 더 안았을 때 좋았을 텐데. 봐봐, 운 거 맞잖아. 눈물자국 난 거.”

“푸흡, 넌 무슨 말을……! 아니라구, 아니라니까!”

“헤에─ 그치만 여기 눈물자국.”

“보여주지 마! 알아, 안다고! 내가 했어요 내가! 으으…… 그러니까 그만!”

“아하하핫. 웅이 변태!”

리유는 이 와중에 농담을 한다. 그러고보니 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빈 게 되는 건가. 그건 정말 변태인데. 누군가 이걸 봤다면 정말 오해해서 소문이 더 악화돼서 퍼지겠지.

리유는 싱긋 웃으며 자기 가슴팍을 당당하게 내민다. ……이 와중에 상당히 처량한 리유의 가슴. 그 와중에 자신의 처량한 가슴을 가지고 드립을 치는 리유에게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힐끔 리유의 가슴팍을 보니 확실히 리유 교복의 가슴 쪽에 조금 눈물 얼룩 자국이 있다. 아마 고여 있던 눈물이겠지. 으아, 진짜 창피해. 얼굴이 화악 달아오른다.

“그냥 좀…… 잊어 줘. ……너니까, 의지할 수 있다고 생각돼서, 그런 거니까.”

“웅! 나도 웅이 진짜진짜 좋으니까! 그런 거야 얼마든지. 내가 가슴은 작지만 얼마든지 받아줄게!”

“……그런 위험한 말은 하지 말구!!”

“에에? 왜? 뭐가 위험해?”

“아니, 하아…… 아니다.”

떨떠름하게 속마음을 고백하니 리유는 방긋 웃으며 말한다. 손을 뻗어 나를 껴안으려는 리유를 겨우 피하고 대답했다. 이 녀석, 너무 위험해. 리유는 의아한 표정으로 뭐가 위험한지 물어보지만 구렁이 담 넘어가듯 대충 넘어갔다. 불평하는 리유지만 이 이상 내 마음을 보이는 건 너무 창피하기에, 어떻게든 넘겼다.

“애들, 확실히 너무해. 그리고 너도 너무해. 아무리 애들 때문에 그렇다 해도 그건 주객이 전도된 거잖아. 나 상처 받았어. 점심도 안 먹었다구.”

“……내가 왕따 당하고 있는데 너한테 얘기하면. 너까지 같이 따돌림 당할까봐. 그래서, 그랬어.”

“흥흥! 아무 상관없잖아! 난 어차피 애들하고 안 친한데! 상관 없잖아!”

“아무렇지도 않게 슬픈 얘기 하네. 스스로 인정 하는구나. 애들하고 안 친한 거.”

“에, 에엣, 아니야! 친한데! 그, 그─ 그런 거니까…”

“헤에. 그렇구나.”

리유는 잔뜩 심통이 난 표정으로 말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내 생각을 말하는 나. 확실히, 말도 없이 내 판단으로 그런 건 잘못인가. 하지만 이어지는 내 말에 리유는 움찔 하며 대답하지 못한다. 아마 리유도 리유대로 사정이 있겠지. 대충 그렇구나 하고 넘겼다. 누구든 자기 과거 사정 같은 거 말하는 건 조금 창피하고 겸연쩍은 일이니까. 내가 마음을 열었다고 리유까지 마음을 연 건 아닐 테니까.

“어쨌든, 실망이야!”

“저녁이나 같이 먹자. 한바탕 울었더니 배 엄청 고프네.”

“흥, 나만큼 배고파! 난 점심도 굶었다구!”

“그래그래. 밥 먹고 후식으로 단 거 먹자. 초코 와플 먹을래? 아니면 딸기 와플?”

“우우웅! 둘 다 먹을래!”

“너 그러다 살찐다.”

“에헤헷~ 난 살 안 쪄!”

리유는 잔뜩 삐쳐서 한동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기세로 말한다. 밥 먹자는 얘기에 금세 풀려서 방긋 웃는다. 뒤이은 단 것 공약에 금세 눈 녹듯 풀어져 버리는 리유. 늘 이런 식이라 이젠 도리어 기대한 대로 반응이 나오는 걸 보는 게 귀엽다. 키도 덩치도 나보다 작은 리유지만, 마냥 귀엽기만 한 리유지만 아까 전 정신이 약해져 쓰러지는 나를 힘차게 붙들어준 걸 보면 마냥 작은 소녀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강아지처럼 또 그걸 느끼고 있는 리유. 아, 진짜 얘 귀여워서 어떡하지! 어떡하긴, 같이 저녁 먹어야지. 적당한 분식집으로 들어간다.


작가의말

에에... 뭔가 좀 너무 격정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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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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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10화. 나는 정말 나는 정말 나는 정말 그럴 의도가 - 1 +16 14.01.28 2,572 72 18쪽
38 09.5화 - 2 +13 14.01.27 4,211 129 20쪽
37 09.5화. 잉여잉여 - 1 +13 14.01.27 3,202 56 19쪽
36 09화 - 4 +10 14.01.26 2,898 66 20쪽
35 09화 - 3 +7 14.01.26 2,986 67 17쪽
34 09화 - 2 +12 14.01.25 3,155 60 18쪽
33 09화. 친구가 돼 주세요!! - 1 +21 14.01.25 3,652 69 19쪽
32 08화 - 4 +12 14.01.24 3,409 110 18쪽
31 08화 - 3 +20 14.01.24 3,070 71 18쪽
30 08화 - 2 +16 14.01.23 4,799 165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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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07화 - 4 +14 14.01.22 3,473 58 19쪽
27 07화 - 3 +11 14.01.22 3,083 63 21쪽
26 07화 - 2 +4 14.01.21 3,103 62 21쪽
25 07화. 다시 시작된 그것 - 1 +9 14.01.21 3,517 61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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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06화 - 2 +11 14.01.19 4,079 65 20쪽
21 06화. 자연스럽게! - 1 +7 14.01.19 4,313 72 18쪽
20 05화 - 4 +17 14.01.18 4,516 139 19쪽
19 05화 - 3 +24 14.01.18 3,922 72 19쪽
18 05화 - 2 +24 14.01.17 3,473 100 17쪽
17 05화. 크아아아 흑화한다 +12 14.01.17 4,654 124 21쪽
16 04화 - 4 +10 14.01.16 3,771 80 19쪽
15 04화 - 3 +18 14.01.16 3,286 79 18쪽
» 04화 - 2 +16 14.01.15 3,312 73 25쪽
13 04화. 몰라 뭐야 이거 무서워!! +11 14.01.15 3,736 92 20쪽
12 03화 - 4 +9 14.01.14 3,537 85 20쪽
11 03화 - 3 +7 14.01.14 4,215 127 18쪽
10 03화 - 2 +7 14.01.13 3,881 93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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