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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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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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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7.26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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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22막) 세 개의 오만 (8)

DUMMY

덜린과 마찬가지로 ‘실패한 주인’ 중의 하나인 ‘숲의 민족’ 엘론의 경우에는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주인으로서의 생명이 다했다는 걸 납득하고 스스로 나무가 되어 숲의 일부로 돌아가는 이들과, 아직은 이 땅에 자신들의 역할이 남아있다고 믿는 이들이다. 후자의 경우, 일부는 예전처럼 세뮈엘의 이름을 받들어 드루이드로 생활하기도 하고, 일부는 ‘거짓된 주인’인 인간들의 사회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기도 한다. 하지만 덜린은 다르다.

그들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인간들과 직접적으로 교류하지도, 인간을 거짓된 주인이라며 적대하지도 않았다. 덜린이라는 종족이 아직도 반도에 남아있다는 걸 인간들이 알게 된 것은 모든 국가와 사회가 고착화되고도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이마저도 우연히 그들과 조우한 상인의 증언을 토대로 고고학자들이 직접 찾아 나선 뒤에야 증명되었으니, 이들이 얼마나 의도적으로 문명과 거리를 두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존재가 드러난 이후에도 덜린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힘겹게 그들이 머물고 있는 장소를 찾아 외교관을 파견하더라도, 아무 말 없이, 가면 너머로 그저 이쪽을 지그시 응시하고만 있는 거구들과 대화를 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들에게 ‘침묵의 일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였다. 하지만 그들의 제련기술과 건축기술만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서, 가끔 덜린과의 교역에 성공한 국가나 도시들이 커다란 혜택을 본 경우는 있었다.

물론, 그마저도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그들의 선택’일 뿐이었다. 이 덜린과의 교역에 성공한 도시들의 일화를 보면 그들의 묘한 ‘계약개념’을 엿볼 수 있다.


어느 가난한 도시의 성벽이 폭풍으로 인해 무너지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외부업체에 의뢰하여 이를 보수하기엔 비용이 만만치 않았던지라 도시의 시장은 전전긍긍하며 한동안 이를 방치할 수밖에 없었는데, 마침 도시의 외곽을 지나던 덜린족 한 명이 이를 보고 갑자기 다가서기 시작했다. 위협적인 문신에 형태를 알 수 없는 가면,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초록 생물체가 접근하는 것을 본 도시의 경비병들은 잔뜩 경계의 날을 세웠지만, 놀랍게도 그 덜린족이 한 행동이라곤 묵묵히 무너진 성벽의 잔해를 외곽으로 치우는 것뿐이었다. 경비병들은 추가붕괴를 우려하여 그에게 물러서라 경고했으나 침묵의 일족은 그 어떠한 대답도 없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는 덜린족의 숫자가 하나둘 늘기 시작하더니, 어디선가 도금할 강철까지 가져와 주변의 허술한 성벽까지 말끔히 보수를 완료했다.

시장은 당황스러웠다. 그들이 멋대로 성벽을 보수한 것은 둘째 치고, 그 결과물의 완성도가 어디서도 보지 못할 정도로 완벽했기 때문이다. 불과 닷새 전엔 바람만으로도 위태롭던 성벽이, 어느새 마력폭탄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해져 있었으니까. 문제는, 도시는 여전히 가난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보수를 완료하고 그대로 성문 밖에 앉아 차분히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시장은 더욱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부 측 사람들은 물론이고 과거역사를 다루는 고고학자들마저도 이 종족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만약 이들이 호전적이고, 성벽 보수에 대한 마땅한 값을 치르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그리고 그 발생할 일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시장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일단 시간을 끌어야 했다.

시간을 끌기 위한 수단으로 시장이 택한 방법은 간단했다. 성 밖에 모여 있는 열 명의 덜린족에게 식사를 대접한 것이다. 그들의 주식이 무엇인지, 애초에 뭘 먹고 살긴 하는지도 몰랐기에 시장은 최대한 많은 종류의 음식을 만들어 그들에게 내놓았다. 시장 본인도 직접 음식을 나른 뒤에 성벽 위로 물러나 조심스럽게 그들을 관찰했는데, 그들은 갑자기 서로를 향해 무릎을 꿇고 가면을 바닥에 맞대어 기도 비슷한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서로에게 했던 행위를, 이번엔 시장이 몰래 지켜보고 있던 성벽을 향해 반복했다. 당연히, 시장의 불안은 더욱 증폭되었다. 뭔가 자신이 그들의 심기를 건드린 게 아닐까, 뭔가 그들만의 예의에 어긋난 짓을 한 건 아닐까. 그러나 그는 다음날 아침, 놀라운 보고를 듣게 된다.

성문 앞에 있던 덜린족이 사라진 것이다. 깔끔하게 씻고 정돈된, 빈 그릇들만을 남긴 채.


이처럼 기묘한 몇몇 일화들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인간들과 교류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교류라고 해봤자 위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멋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대부분. 이런 폐쇄성과 이해할 수 없는 개념들 때문에, 에일로피아의 여섯 번째 주인인 그들은 그 전 시대인 다섯 번째 주인 엘론보다도 인간들에게 알려진 바가 부족한 것이다.


“.......”


그런 덜린족이,

어째서 제국의 변방, 이스누시아의 광산에 모여 곡괭이질을 하고 있는지, 지나는 그들 중의 한 명과 그곳에 앉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감히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목소리를 지닌 덜린족, 고브나이가 인간들을 이끌고 당도한 장소는 허리가 잘린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 구덩이에서 벗어나 멀지 않은 공터었다. 흔히 알고 있는 ‘사무실’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아직 온기가 스며있는 모닥불이나 나무를 갈아 넣은 배게 등으로 보아 어떤 역할을 하는 곳인지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자리에서 무덤덤하게 엉덩이를 내려놓는 고브나이. 지나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그의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검집을 내려놓는다.


“뭐, 차 같은 거라도 대접하지?”


여전히 적의가 묻어있는 레이쇼의 투정이었지만, 고브나이는 이미 그의 존재는 무시하기로 작정한 듯 도발을 향해 어떠한 반응도 보이질 않는다. 결국, ‘대화’의 시작은 지나의 몫이었다.


“당신은 스스로를 ‘아브달라크’라고 하셨죠, 다른 덜린족과는 가면이 조금 다르신데, 무슨 연관이 있는 건가요?”


“우리는 목소리를 품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자격도 없기 때문이지. 하지만 가끔, 태어날 때부터 목소리의 저주를 갖는 자들이 있다. 바로 나처럼.”


“목소리의 저주라....... 구체적으로 그 저주라는 게 뭐죠?”


“뭐일 거 같나?”


자리에 앉은 채 기다란 두 팔을 벌려 보이는 고브나이. 지나는 고브나이를 처음 보는 순간 느꼈던, 다른 덜린과의 차이점을 곧바로 떠올린다.


“.......신체적인 결함이로군요.”


“결함?”

그렇지 않아도 굵은 어금니가 찢어진 입술 사이로 더욱 도드라진다. 인간의 눈으로는 그저 흉측한 뒤틀림이었지만, 지나는 그게 덜린의 미소임을 알 수 있었다.

“결함이 아니다. 그 반대지.”


고브나이가 크게 벌렸던 팔을 서서히 바닥으로 내리누른다. 그 손끝을 통해 바닥으로 전해지는 묘한 진동. 그 힘은, 지나에게도 나머지 기사들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영력.......? 당신 기사군요!”


“기사....... 인간들은 이 저주를 기사라고 부르나? 너희에게도 같은 목소리를 느낄 수 있다. 카나반의 인간들은 모두 기사인가?”


“그건 아니에요. 인간들 중에서도 소수만 이 힘을 가지고 태어나죠. 하지만 우린 이걸 저주라고 부르진 않아요. 하나의 기회이자, 힘이라고 생각하죠.”


“그것은 너희가 피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피의 시대에선, 이렇게 피를 부르는 목소리를 힘이라 착각하지.”


“뭐, 그건 부정하지 않겠어요.”


또다시 레이쇼의 불만이 터져 나올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지나가 먼저 고개를 끄덕여 뒤쪽의 목소리를 봉쇄한다.


“나와 잡담이나 늘어놓기 위해 찾아온 건 아닐 테고. 철심장과 적대하고 있는 너희들이 어째서 이런 곳에 찾아온 것인가?”


의외로 먼저 본론을 꺼내든 쪽은 고브나이였다. 그에 지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크라트의 눈치를 살폈고, 그의 고갯짓으로부터 확신을 얻은 뒤에야 입술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저흰 이 광산에서 나오는 철광석과, 그 철광석으로 만드는 연철무기를 위해 이스누시아 지역을 점령하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철심장, 어윈 아이언하트를 몰아내야 하고요.”

잠시 말을 끊고 고브나이의 반응을 살펴보는 지나. 그러나 그는 가만히 침묵하고만 있었다.

“그가 당신들의 존재 이유를 만들어주었다고 하셨죠. 만약 저희가 당신들에게 똑같은 걸 제공할 수 있다고 한다면, 저희와 협조해주실 수 있나요?”


“불가능하다.”


고브나이의 대답은 빠르고 단호했다. 지나는 그 단호함에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곧바로 샛노란 눈을 더욱 번뜩이며 그를 향해 몸을 기울인다.


“어째서죠?”


“우리를 향한 배려는 우리가 선택한다. 우리는 존재의 이유를 남겨놓기 위한 행동이 필요했고, 그 행동을 위해 이곳을 선택했을 뿐이다. 너희 목소리들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상관이 없으니까 그냥 우리 쪽으로 줄을 서도 괜찮은 거 아냐?”


수많은 옆구리 찌르기에도 불구하고 결국 레이쇼가 다시 한 번 끼어들고 만다.


“너희 인간들은 그렇게 쉽게 자신의 선택을 번복할 수 있는 건가? 명예라고는 모르는 족속들이군.”


“아놔, 이게 보자보자하니까.”


이번엔 그 어떤 만류가 오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레이쇼. 물론, 그에겐 검을 뽑아 덜린족의 피 색깔을 확인할 의도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 그저 고브나이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회담’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카나반의 목소리들’이 결코 만만한 자들이 아님을 저 얇은 덜린에게 각인시켜줄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크라트 또한 이런 레이쇼의 의도를 읽고 고브나이의 반응을 보고 싶었기 때문에 굳이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쇼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아무리 거짓된 적의일지라도 섣불리 뱉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인간.”


고브나이의 충고가 아니었더라도 레이쇼는 그 이상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새 바로 옆까지 다가와 있는 거대한 그림자가 존재 자체로 그의 기세를 짓눌러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력을 느끼지 못했다고는 하나, 이런 거구가 접근하는 걸 눈치챌 수 없었다는 건 기사로서 납득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게다가 새로운 그림자는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지나와 고브나이의 대화에 정신이 팔려있던 사이, 이미 주변은 우락부락한 덜린들의 가면으로 가득했다.


“.......도대체 뭐야 이 녀석들은.......? 무슨 기척도 없이-”


“앉아라, 레이쇼 중위.”


무게감만큼은 그들에게 뒤지지 않는 음색으로 크라트가 명령을 내린다. 덜린의 무지막지한 주목보다도 레이쇼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것이 바로 ‘늑대’의 목소리였기 때문에, 레이쇼는 짧은 욕설만을 남기고 순순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엉덩이를 내리눌러야 했다.


“알겠어요. 당신들이 이곳에 있음으로써 존재의 가치를 되찾게 해준 것이 어윈이기 때문에 그를 배신할 수 없다는 말씀이시죠?”


주변의 상황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는 다시금 고브나이의 사고를 끌어당긴다.


“배신이라는 단어는 적절치 못하다. 애초에 우린 철심장에게 신뢰 따윈 주지 않았다.”


“.......믿음을 주지도 않았고 스스로 선택한 배려이지만, 등을 돌릴 수는 없다.......”


깊은 한숨과 함께 지나는 앞으로 기울였던 몸을 뒤로 무른다. 비록 가면 너머였지만, 그런 그녀의 행동과 표정이 어떤 의미인지 고브나이는 제대로 알고 있었던 모양.


“이해해달라고는 요청하지 않겠다. 나 또한 너희의 목소리들을 이해할 수 없으니까.”


“.......”

이들이 평생을 지켜왔던 것보다도 짙은 침묵을 삼키는 지나. 그녀는 가면의 음영 속에서 이쪽을 향하고 있을 덜린의 눈동자를 찾는 듯, 가만히 팔짱을 낀 채로 기사가 아닌 기사를 마주한다. 영력을 전개하지 않았음에도 특유의 태양 같은 위압감을 흩뿌리는 왕비의 시선은, 세상에서 가장 그녀를 사랑하는 이조차도 솔직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침묵의 끝에서, 지나는 그런 자신의 ‘목소리’가 눈앞의 상대에게도 닿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분홍빛 입술을 열었다. 그녀의 의혹은, 이런 단순한 대답으로 흐려질 생각이 없었으니까.

“좋아요. 이 이상 여러분들을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폐하!”


“하지만 이거 하나만 대답해주세요.”

인간과 덜린, 모두의 시선과 사고를 가로채는 카나반의 태양.

“만약 어윈이 당신들에게 저희와 물리적으로 대적할 것을 요구한다면, 당신들은 그에 따를 건가요?”


“그럴 이유가 없다. 배려는 받았고, 이미 그에 대한 보상은 주고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지나는 망설임 없이 검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녀를 따라 일어나면서도 참모들의 표정은 밝을 수가 없었다. 공식적으로, 이곳에서 카나반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나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말씀 감사합니다. 이런 전통 깊고 강직한 분들과 검을 맞대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철심장을 몰아내고서 다시 찾아뵙도록 하죠.”


“.......너는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선명하지만 겸손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군. 오만과 거짓으로 물들지 않은 인간과 목소리를 나눈 것은 처음이었다. 이건 나쁘지 않아.”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고브나이. 여전히 다른 덜린들과 비교하면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그가 ‘목소리’를 갖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된 지금, 그의 존재감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그 어떤 침묵의 일족보다도 거대해 보였다.

“이 배려에 대한 보답으로, 한 가지 진실을 알려주겠다, 숲의 기사.”


“진실?”


지나에게 대답하기 앞서, 고브나이는 등 뒤의 허리 잘린 산맥과, 저 아래 어둠을 삼키는 구덩이를 크게 둘러본다.


“너희는 이곳에서 나오는 철을 위해 철심장과 싸우겠다고 왔지.”


“예.”


“이곳에서는 더 이상 철광석이 나오지 않는다.”


“.......예?”


지나와 크라트, 레이쇼는 물론이고 최대한 감정과 반응을 죽이고 있던 셰르와 유진마저도 이번만큼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어지는 고브나이의 목소리는 담담하기만 했다.


“이 광산이 우리가 주변에서 마지막으로 찾아낸 광맥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열 번째 겨울이 끝나기 전 끊기고 말았지. 우리는 좀 더 느긋하고 공을 들여서 무기를 만들고 싶었지만, 인간들의 재촉이 너무 과했다.”


“.......이스누시아에서 나오는 모든 연철무기가 당신들의 작품이었군요.......”


“우리는 본래 연철만으로 무기를 만들지 않는다. 검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선 겉은 단단하면서도 속은 부드러워야 해. 그래서 우린 복합강을 쓴다. 그런데 인간들은 어째선지 연철로만 이루어진 회색무기를 빠르게, 그리고 많이 만들어달라고 하더군.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우리가 쓸 게 아니니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하아.......”


고브나이의 장인정신에 대한 이론은 이미 지나의 귓가를 떠나있었다.




‘이스누시아의 철이 말랐다.’




지나는 이제야 어째서 이곳이 변방 취급을 받고 있는지, 대대적인 침공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제국의 중앙군부가 움직이지 않는지, 그 진실된 내막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 제국의 우검성은 이런 이스누시아의 실태를 알면서도 어윈을 영주로 임명한 것일 터. 만약 그가 철광석의 고갈을 이유로 무기생산을 중지한다면, 그걸 트집 잡아 문제아를 제거할 수 있는 명분으로 쓰면 되니까. 어윈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정도 눈치는 있었을 거다. 생산량을 조절한답시고 그 동안 쌓아놨던 마지막 비축분을 조금씩 풀면서 생명을 연장하고 있었겠지.”


지나와 마찬가지로 모든 상황을 간파한 크라트의 분석이었다.


“.......이게 정말이라면 우리가 여기 있을 근본적인 이유가 사라지는 거예요. 지금이라도 군을 물리고, 로빈과 의회에 상황을 설명해야 합니다.”


“진정해라, 여왕. 아직 물어볼 것이 하나 남아있다.”

푸른 안광을 흩뿌리며, 이번엔 지나를 대신하여 크라트가 고브나이의 앞으로 다가선다.

“이름 있는 덜린. 너에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다.”


“말하라, 늑대 같은 인간.”


“네 말대로라면, 이미 이스누시아의 모든 광맥은 이미 모두 고갈된 지 꽤 오래 지났다는 거겠지.”


“말했듯이, 이곳이 마지막이었다.”


“그렇다면 너희는 왜 아직까지 이곳에 남아 산을 후벼 파고 있는 건가?”


“.......”


철광석의 고갈이라는 충격 때문에 지나도 지나쳐버린 중요한 사실 하나. 바로 그 사실을, 크라트가 파고든 것이다. 그리고 고브나이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카나반의 기사들은 이 의문에 결코 가볍지 않은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어윈이 너희에게 배려랍시고 던져준 일거리는 철광석의 채굴과 연철무기의 제련이었다. 그런데 네 말대로 이미 철광석이 고갈되었다면, 너흰 도대체 여기서 무얼 캐고 있는 건가?”


대답을 재촉하는 크라트의 눈빛에, 고브나이는 잠시 주변의 덜린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조금 전 지나가 크라트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행동이었다.

짧은 침묵의 교환이 끝나고, 마침내 고브나이는 한걸음 크라트와 지나에게 다가선다. 그러나 이어진 그의 반응은, 목소리를 위해 입을 벌리는 것도, 순식간에 경계태세를 취하는 근위기사들을 제압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굵직한 손가락을 들어, 무언가를 가리킬 뿐이었다.


“응?”


지목의 대상이 된 지나는 당황한다. 하지만 이내 고브나이의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자신의 손, 정확히는 손이 들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도를 베는 검, 검은 영혼의 응집체. 흑도(黑刀) 오미누스움브라.”


“어어.......?”


예상치 못한 이름이 예상치 못한 입에서 튀어나오자 지나는 당황할 수밖에. 그러나 그런 그녀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브나이는 다시 한 걸음 더 지나를 향해 다가선다.


“그 검은 우리 여섯 번째 주인의 시대에 만들어진, 몇 남지 않은 귀검이다. 이 시대에 남아있는 우리들은, 우리가 이 땅에 존재했음을 증명해줄 가치를 더욱 많이 남겨놓을 의무가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과거 우리의 시대를 빛내주었던 역사를 재현시킬 필요가 있었지. 우리는 그 검이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이곳으로 찾아와, 인간들을 다스리던 황제에게 우리의 거주와 연구를 허락해달라고 했다. 그 배려에 대한 대가로, 그 황제는 두 가지를 내걸었다.”


“연철무기의 제련과 오미누스움브라의 헌납이군.”


크라트의 말에 고브나이는 긍정의 뜻으로 거친 손바닥을 내보인다.


“철의 채굴과 제련, 무기의 생산. 그리고 연구와 실험. 이 모든 것을 단기간에 모두 해내기엔 우리의 숫자와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그러나 이백 번의 겨울이 지나가는 동안 땅으로 되돌아간 육신은 있었어도, 이탈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다면, 철광석이 모두 바닥났는데도 당신들이 여기에 남아있다는 건.......”


말끝을 흐리는 지나를 향해, 고브나이는 자신의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간다. 만약 무기가 있었다면 즉각 근위기사들이 움직였겠지만, 왜소한 덜린의 허리에 달려있는 건 무기가 아닌, 그전까지는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한 작은 가죽주머니였다.

그곳에서 고브나이가 꺼내든 것은,


작은,

아주 작은,

새카만 모래알갱이였다.




“이건.......?”


“이 작은 알갱이 하나를 정제하기 위해 우린 산을 깎고 보이지 않는 구덩이를 파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선조들이 이르렀던 환희에 발을 담글 수 있었다. 이 모든 건, 네가 그 귀검을 갖고 있기에 알려주는 것이다.”

어느새 주변의 모든 덜린들이 무릎을 꿇고, 가면을 지면에 맞대고 있었다. 그 모든 경의가 향하는 곳, 그 결정체를 내려다보며, 고브나이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움브라스톤. 이것이 바로, 시대의 영혼이 담겨있는 영혼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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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문은?! 지원요청에 대한 답은 아직도 없냐?!”


“전문은 왔습니다만, 기다리라는 내용밖엔.......”


“브, 블라고슬로바는?! 도시 중에 하나쯤은 우릴 도와줄 수도 있잖아! 남아있는 모든 연철무기를 넘겨줄 테니 지원군을 보내라고 꼬셔봐!”


“대령님, 멋대로 무기에 손을 댔다가는 나중에-”


“나중이 어딨어?! 지금 당장 카나반 새끼들이 눈앞까지 쳐들어왔는데!”


전술회의라기보다는, 한 사람의 윽박지르기에 가까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지휘관들은 이 사태를 만들어낸 장본인인 어윈을 향해 쓴소리 하나 내뱉질 못하고 있었다. 만약 멋대로 요격을 나가 막대한 피해를 입은 책임을 그에게 묻는다면, 돌아오는 건 사과의 고갯짓이 아니라 육중한 철퇴일 테니까.


“그 어떤 도시도 연철무기 조금 때문에 제국 군부와의 원한관계를 만들려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조명조차 닿지 않는, 회의실의 가장 구석진 그림자에서 부관이 목소리를 내본다. 그러나 회의실 안에서, 기사도 아닌 일개 부관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 도움도 안 되는 것들! 안 된다 못 한다 반대만 하지 말고 대안을 내놓으란 말이다! 저 좆같은 나무새끼들을 싹 다 조져버릴 수 있는 그런 대안 말이다!”


“.......”


억지라는 단어가 혀 아래까지 튀어나왔지만 모두가 꾹 눌러 참는다. 누구 때문에 사태가 이 지경이 됐는지 모르는 사람은 이곳에서 오직 한 사람뿐이리라.


“씨발, 배고프다. 다들 썩 꺼져! 저녁 회의 때까지 모두 하나씩 대안을 만들어 와라! 그렇지 않으면 머리를 짓뭉개주겠다!”


지휘관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 경례를 올리고 회의실을 빠져나간다. 그들 모두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윈이 알 리가 없었다.


“대령님.”


또다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 어윈은 모두 꺼지라는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보다도, 목소리의 주인, 그 존재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크게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린다.


“또 뭐? 꺼지라는 말 못 들었냐?! 명령불복종으로 다시 감옥에 넣어줄까?!”


“명령하신 대안에 관하여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부디 저에게 발언을 허락해 주신다면.......”


“.......”


뿌드득 이를 갈며 부관을 흘겨보는 어윈. 그는 끝까지 허락의 답변은 내놓지 않고서, 홱 고개를 돌려버린다. 부관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름이 아니라, 덜린에 관한 것입니다만.”


“너 이년이 아직도!”

어윈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주먹을 치켜들며 으르렁거린다.

“내가 왜 그 짐승들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냔 말이다! 놈들은 그저 노예야! 말도 할 줄 모르는 병신들 집단이라고! 놈들에게 먹고 자고 일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준 것만으로도 은혜에 감사해야지, 왜 내가 눈치를 봐야 하냐고?!”


“다른 이야기입니다, 대령님.”


당장에라도 자신의 얼굴을 짓뭉갤 기세의 주먹 앞에서도, 부관은 어조 하나 바꾸지 않는다. 오히려 누그러진 것은 어윈 쪽이었다.


“.......다른 이야기?”


“예, 제가 잘못 생각했었습니다. 대령님이 그들에게 고개를 숙일 이유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그들은 노예고, 힘은 대령님이 쥐고 계시잖습니까.”


“.......흠, 흠. 뭐 그렇지. 드디어 멍청한 네년도 내 말을 알게 됐구나. 그래서 다른 이야기란 게 뭐냐?”


눈 녹듯 사라진 어윈의 적의를 확인하고, 부관은 품속에서 작은 종이 하나를 꺼내 어윈에게 건넨다. 그것은 일종의 통지서였다. 어윈의 이름을 빌려야 하는 물건이기에 그에게 보여준 것이었지만, 그가 글씨 따윈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부관은 곧바로 종이의 내용을 요약해준다.





“간단합니다. 덜린들을 협박하여 움직이게 만드는 겁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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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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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막간) 하나의 밤하늘, 세 개의 달빛 +11 16.08.29 627 14 15쪽
242 (22막) 세 개의 오만 (14) +10 16.08.24 585 13 16쪽
241 (22막) 세 개의 오만 (13) +9 16.08.19 455 13 26쪽
240 (22막) 세 개의 오만 (12) +6 16.08.14 501 9 18쪽
239 (22막) 세 개의 오만 (11) +10 16.08.09 602 11 17쪽
238 (22막) 세 개의 오만 (10) +6 16.08.05 614 13 14쪽
237 (22막) 세 개의 오만 (9) +6 16.07.30 582 14 15쪽
» (22막) 세 개의 오만 (8) +8 16.07.26 541 11 24쪽
235 (22막) 세 개의 오만 (7) +8 16.07.20 642 13 19쪽
234 (22막) 세 개의 오만 (6) +7 16.07.15 686 12 21쪽
233 (22막) 세 개의 오만 (5) +8 16.07.10 691 13 22쪽
232 (22막) 세 개의 오만 (4) +6 16.07.05 642 14 18쪽
231 (22막) 세 개의 오만 (3) +9 16.06.30 584 12 18쪽
230 (22막) 세 개의 오만 (2) +6 16.06.25 656 13 18쪽
229 (22막) 세 개의 오만 (1) +6 16.06.20 736 15 16쪽
228 (막간) 현실을 마주하며 +4 16.06.15 757 16 16쪽
227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0) +10 16.06.10 737 14 21쪽
226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9) +8 16.06.05 736 12 16쪽
225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8) +4 16.05.30 703 15 19쪽
224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7) +6 16.05.25 730 11 19쪽
223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6) +4 16.05.20 960 10 22쪽
222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5) +5 16.05.14 782 12 18쪽
221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4) +2 16.05.09 709 13 15쪽
220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3) +6 16.05.04 1,035 12 18쪽
219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2) +4 16.04.28 748 16 17쪽
218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 +8 16.04.23 856 15 19쪽
217 (막간) 필요없는 증명. 필요한 증명. +10 16.04.18 744 18 13쪽
216 (20막) 증명 (9) +4 16.04.13 705 18 16쪽
215 (20막) 증명 (8) +8 16.04.08 677 20 16쪽
214 (20막) 증명 (7) +11 16.04.02 741 14 16쪽
213 (20막) 증명 (6) +10 16.03.28 788 13 15쪽
212 (20막) 증명 (5) +8 16.03.23 817 17 24쪽
211 (20막) 증명 (4) +8 16.03.18 952 16 23쪽
210 (20막) 증명 (3) +10 16.03.12 816 17 20쪽
209 (20막) 증명 (2) +10 16.03.07 892 20 19쪽
208 (20막) 증명 (1) +10 16.03.02 770 18 18쪽
207 (막간) 지평선으로 향하는 한걸음을 지켜보는 사람들 +8 16.02.26 853 19 17쪽
206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0) +8 16.02.21 916 24 21쪽
205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9) +10 16.02.16 1,040 20 22쪽
204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8) +6 16.02.11 815 17 28쪽
203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7) +6 16.02.06 771 19 21쪽
202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6) +6 16.02.01 832 17 22쪽
201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5) +10 16.01.27 827 17 17쪽
200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4) +10 16.01.22 970 16 18쪽
199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3) +8 16.01.17 711 20 18쪽
198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2) +10 16.01.12 778 20 19쪽
197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 +8 16.01.07 799 21 13쪽
196 (막간) 언젠가 +4 16.01.02 951 22 16쪽
19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2) +8 15.12.28 808 25 23쪽
19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1) +6 15.12.23 938 2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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