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146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6.07.15 20:21
조회
678
추천
12
글자
21쪽

(22막) 세 개의 오만 (6)

DUMMY

“엄청 단단하고 거대했어. 온 힘을 다해도 얕은 상처를 내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마치 영력은 필요 없다는 것처럼 근육만으로 나를 압도했어. 그냥 드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무식한 철퇴를 사탕처럼 휘두르더라고. 별로 똑똑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냄새도 그렇고 보기에도 그렇고 인간이라기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괴물이었지.”


지휘관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이 조우했던 적에 대한 묘사를 늘어놓는 왕녀. 이미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라 천막의 주변은 빛과 소리 모두가 어둠 속에 파묻혀있었다. 이런 시간에, 그것도 이미 보고서로 정리해서 제출까지 한 내용을 리즈가 굳이 다시 반복하고 있는 이유는, ‘적’을 파악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이 마침내 딸을 재우는 데 성공하여 복귀했기 때문이었다.


“맞아, 어윈이네.”

엘라가 턱을 받치고 있는 두 손등 위로 새빨간 미소를 품는다.

“그렇게 무식하게 싸우는 기사는 제국에서 그 인간밖에 없지.”


“강한가?”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는 크라트의 질문. 엘라는 미소의 색을 더욱 짙게 띄우며 깍지를 풀고 등받이 뒤로 힘껏 기지개를 켠다.


“강해. 단순히 물리적인 강함만으로 군단장 후보에까지 올랐던 사람이니까.”


“하지만 심사에서 떨어졌다고 하셨죠.”


좀처럼 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성이던 지나의 질문에 엘라는 고개를 끄덕인다.


“응. 강하기는 하지만, 무식할 정도로 단순했지. 머리까지 모두 근육인 인간이라 군단장직엔 부적합하다고 했다나 봐. 뭐어, 물론 나도 무식한 주제에 이름빨로 군단장을 맡았다는 소리가 많았지만, 어윈 그 사람은 나보다 더 심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드니까.”


“듣기로는 성격이 급하고 폭력적인 거 같은데, 엘라가 2군단장으로 있을 때엔 사이가 좋다고 하셨죠? 엘라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걸까요?”


“말했잖아. 단순한 인간이라고.”

전시의 군인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태도로 와인을 홀짝이는 엘라.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마침내 모두는 그 향기로운 미소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엄마랑 나한테 반했거든.”


“.......”


그 어떤 대답이나 반응도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크라트의 무표정을 향해 모여든다. 그러나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특유의 차갑고 시퍼런 안광을 빛낼 뿐.


“그 호의를 이용해서 어윈을 회유할 수는 없나?”


“시도는 해보겠지만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걸.”


“어째서?”


비어버린 와인잔이 아쉬운 듯 엘라가 입맛을 다시자, 곁에 서있던 지나가 친히 붉은 향으로 빈 잔을 채워준다.


“그가 심사에 탈락하면서 중앙군부와 사이가 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좌천이나 다름없는 이스누시아 지방에 얌전히 앉아 중앙의 말을 듣고 있었던 건, 그의 단순함에서 가장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는 부분이 바로 ‘충성심’이기 때문이야. 어윈은 평민 출신의 자신이 강력한 기사의 힘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군단장 문턱까지 갈 수 있었던 걸 제국황제의 은총이라 생각하고 있거든.”


“.......너에 대한 연심보다, 황제에 대한 충심이 더욱 클 것이다?”


“그래. 게다가 난 지금 애 딸린 유부녀잖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적장한테 몸을 팔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면, 그 인간이 곱게 봐줄 리가 없지.”


“결국 정면승부네요.”


상황을 정리하는 지나의 선언. 그에 줄곧 듣고만 있던 카논이 전술지도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적갈색 눈을 빛낸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발을 묶고 견제하는 방식을 보면, 멍청해서 군단장심사에 떨어진 사람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건 그래. 근데 말했듯이 이스누시아는 말 그대로 중심세력에서 낙오된 인간들만이 발을 담는 곳이거든. 내가 2군단장으로 있을 땐 그곳에 어윈 외에 이름 있는 장군이나 참모는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뚜껑을 열어보면 알겠지.”

‘늑대’의 거대한 그림자가 지도와 탁자 위를 전부 덮으며 번져나간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모여든 모두의 시선은 오직 크라트의 뒷모습만 찾을 수 있었고, 천막을 나서는 그의 목소리는 수많은 운명을 담고 있는 만큼 무거웠다.

“우리를 견제하기 위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뒤에 남아있는 수단이 없다는 뜻이다. 더 이상 수작에 놀아나지 않겠다. 척후는 거두고, 이대로 성까지 곧장 진격한다.”






====================






“적의 척후에게 자기소개를 하고 보내주시다니요.”

이스누시아의 영주이자, 이스누시아 방위군 최고사령관인 어윈 아이언하트는 집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술맛을 떨어트리는 부관을 향해 잔뜩 인상을 찌푸린다. 그렇지 않아도 험악하고 굵은 인상이었기에 불편한 내색을 하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흘러넘쳤지만, 부관은 그에 굴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간다.

“대령님이 척후 사냥에 직접 나서신 것은 어디까지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그들을 말살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니셨기 때문입니다.”


“그래, 나는 그런 힘을 지녔지. 그러니까 놈들이 나의 존재를 깨닫고 두려워하도록 일부러 보내준 거다.”


맥주가 입가로 넘치는 것은 상관도 하지 않고서 당당하게 웃어 보이는 어윈. 부관은 그에 짧게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내린다.


“말씀드렸듯이, 지금 적에게 심어 줘야 하는 것은 의심입니다. 누가, 어떻게, 무슨 의도에서 척후를 공격했는지,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지 의심하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토록 쉽게 대령님의 존재가 노출된다면, 적은 모든 시선을 대령님께 집중할 겁니다.”


“나에게 집중되면 좋은 거 아니냐?! 내가 모조리 때려 부숴주면 되잖아!”


“.......대령님의 힘을 의심하진 않습니다. 다만 대령님이 무적불멸의 존재는 아니시지 않습니까. 적이 대령님을 공략하는 게 곧 이스누시아를 공략하는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적을 지체시키고 빈틈을 만드는 이쪽의 계획은 물거품이 됩니다. 압도적인 힘을 지녔으면서도 마지막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 적이 걸음을 멈추고 다시 척후를 보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상황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요소였습니다.”


“내가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들이 더욱 맹렬히 달려들 거란 말이냐?”


“바로 그렇습니다.”


부관이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거대한 술잔이 그녀의 귀를 스치고 지나가 집무실의 벽에 부딪히며 사방으로 파편을 흩뿌린다.


“너는 내가 당연히 그들에게 기사전으로 패배할 거라 보고 있구나! 날 누구라고 생각하냐?! 평생 1:1로 져본 적이 없는 어윈 아이언하트다! 애초에 의심이니 빈틈이니 뭐니, 얄팍하게 눈치만 보면서 적을 맞이하는 건 나의 방식이 아니었다! 올 테면 오라고 해! 내가 모조리 죽여주지!”


부관은 그제야 어윈의 의자 아래 널브러져 있는 빈 맥주통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력의 기운이 아른거리는 화끈함. 찢어진 귀 아래로 붉은 핏물이 뚝뚝 흘러내렸지만, 부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윈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선다.


“대령님, 그들은 정예군입니다. 엘라론님을 생포하고, 검성님을 살해했던 바로 그 자들입니다. 대령님은 아직도 믿지 못하시지만, 엘라론님까지 그들과 함께하고 계십니다. 아군병사들은 실전경험도 거의 없는 방위군, 그리고 지원은 기대하기 힘든 상황. 대령님 혼자서 감당하실 수 있는 적이 아닙니다.”


“이년이 또!”


씩씩거리며 탁자를 내리치는 어윈. 그 충격으로 인해 주변의 술통은 물론이고 부관의 몸까지 바닥으로 나뒹군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 둘이 다급하게 들어와 그를 말리지 않았다면, 부관은 그대로 어윈의 주먹에 두개골이 으깨졌을 것이다.


“대령님, 고정하십쇼!”


“대령님!”


물론 두 기사의 힘으로 막아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부관이 목숨을 건진 것은, 두 기사의 목소리와 쓰러져있는 부관의 눈빛을 무시할 정도로 어윈의 취기가 올라있지는 않았던 덕분이었다.


“.......쳇! 야! 너, 저년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지하감옥에 처넣어라. 그리고 너, 너는 당장 나가서 병사들에게 출전준비 하라고 전파해.”


“대령님!”


기사의 손에 끌려나가며 절망스러운 목소리로 어윈을 부르는 부관.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전혀 귀에 닿지 않는다는 듯, 어윈은 맥주향이 남아있는 입술을 핥으며 크게 가슴을 두드린다.


“해가 뜨기 전에 모두 죽여주지!”





===================





“적이다!” “적입니다!”


아직 짙은 침묵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는 시각. 크라트는 예상치 못한 적의 등장을 맞이하고 있었다.


“적이라고? 규모는? 매복인가?”


황급히 병사들에게 전투대형을 명령하면서, 카논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크게 주변을 둘러본다. 척후도 없는 야간행군이었기에 충분히 매복의 위험성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어둠 아래 얼핏 보이는 적의 규모는 매복이라기엔 너무도 거대했던 것이다.


“이상하군, 여기서 요격이라니.”


혼잣말에 가까운 크라트의 감상이었지만, 그의 곁으로 샛노란 태양이 다가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게요. 이상하게 시간을 끈다 싶었는데 갑자기 요격이라........ 뭔가 계략이 있는 걸까요?”


“두고 보면 알겠지. 왕비, 중앙을 맡아라. 적의 지휘관이 누군지 알아낸 다음에-”




“내 이름은 어윈 아이언하트! 카나반의 나뭇가지들을 모두 때려 부수기 위해 왔다!”




적군의 선두. 일렁이는 거대한 그림자 하나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목소리가 마른 나무들의 뿌리를 들썩이며 울려 퍼진다. 크라트와 지나가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 것은 물론이었다. 지나는 곧바로 뒤에 있던 리즈를 향해 무언의 질문을 던졌고, 왕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확신을 얻는다.


“이 전쟁, 우리가 이겼네요.”


새벽의 하늘보다 더욱 짙은 흑도를 뽑아들고, 카나반의 태양은 새빨간 혀끝을 살짝 깨물며 앞으로 나아간다. 평소의 크라트였다면 그런 그녀의 미소를 향해 방심하지 말라며 질책을 내렸겠지만, 확신은 지나의 미소에만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명탄.”


“조명탄 발사!”


크라트의 명령을 그대로 전파하는 카논. 곧이어 환한 불빛이 과거 숲이었던 황무지의 하늘을 밝게 비추었고, 훤히 드러난 전장의 상황은 크라트에게 망설임을 주지 않는다.


“전진.”


“전군, 전진!”


적과 조우하자마자 대열을 정비한 카나반군과는 달리, 이스누시아의 병사들은 조명탄이 떠오를 때까지도 강행군으로 인한 거친 호흡에서부터 제대로 회복하질 못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육안으로 확인된 카나반군의 기세는 지휘관인 어윈의 말과는 달리 거대하고 드높았으며, 쏟아져오는 함성은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절망이었다.


“쳐라앗!”


그러나 어윈은 부하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그저, 없던 사기마저 끓어오를 정도로 울리는 장엄한 목소리를 병사들의 가슴 속으로 깊게 박아 넣을 뿐. 기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어윈을 따라 달려나갔고, 병사들이 그 뒤를 따른다. 자연스럽게 어윈을 꼭짓점으로 돌격대형이 형성된 것이다.

중앙과 양익으로 병사를 나눈 카나반군은 그에 맞추어 크게 간격을 벌리기 시작한다. 돌격해오는 적의 양옆에서 감싸 포위섬멸전을 펼치려는 생각이었다. 적의 발을 묶은 다음엔,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병대가 출격하여 허리를 끊으며 전투의 끝을 장식할 것이다. 크라트는 이 과정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가지지 않고 있었다.


“으랴아앗!”


적의 꼭짓점이, 아군의 중앙군과 충돌하기 전까지는.


“-!”


멀리서 전장을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면, 그 순간을 ‘폭발’이라는 단어 외에 정확히 묘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윈이 카나반 중앙군의 방패벽에 들이받기 직전, 높게 뛰어올라 적진의 한복판으로 철퇴를 내리꽂았고, 그 영력의 분출은 이내 폭발이 되어 주변의 모든 존재를 집어삼킨다. 후폭풍의 바람이 칼날처럼 카나반병사들의 방패와 갑옷을 찢어발겼으며 말들은 뒤흔들리는 지축에 다리가 부러져 그대로 주저앉는다. 카나반의 기사와 병사 몇몇은 익숙한 광경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바로 마즈다성을 공략할 당시, 수많은 병사들을 희생시켰던 농축화마력탄사출장치, ‘다르펜타’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한 인간의 손에서부터 그 참상이 재현되고 있었지만.


“허.”


그가 한 번 철퇴를 휘두를 때마다 서너 명의 카나반 병사들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허공을 날고, 한 번 철퇴가 지면에 내리꽂힐 때마다 대열이 와해되면서 길이 열린다. 크라트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감탄 섞인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어윈의 요격에 그 어떤 전술적판단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틀렸다. 저 남자는 자신이 있었던 거다. 바로 자신의 ‘무력’이 곧 ‘전술’이 된다는 자신이.

그러나 크라트는 당황하거나 조급해하지 않는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이 전투의 승패는 정해져 있었으니까.


“흠?”


태풍처럼 휘몰아치던 철퇴가 멈춰 선다. 가장 먼저 그 위화감을 느낀 것은 어윈 본인이었다. 분명 한 육체를 으깨면서 지면을 강타했어야 할 자신의 철퇴가, 깊은 어둠에 가로막혀 있었던 것이다.


“작작 날뛰시지?”


불꽃처럼 일렁이는 어둠 속에서, 샛노란 태양이 반짝이며 미소를 품는다. 어윈은 망설이지 않고 그 미소를 향해 재차 철퇴를 내리꽂았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의 파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의 입가로 미소가 전염되는 순간이었다.


“하하핫! 내 ‘아몬둔’를 막을 수 있는 자가 카나반에 있었다니! 이름이 뭐냐, 계집! 내 친히 기억해주마!”


“그거 황송하네. 근데 어차피 좀 있음 뒈질텐데 내 이름은 알아서 뭐하게?”


지나는 빙글 몸을 돌려 흑도의 옆면으로 철퇴를 쳐내고, 번개처럼 어윈의 품으로 파고들의 그의 어깻죽지에 검을 내리꽂는다. 그 모습을 지켜본 카나반의 병사들을 환호를 내질렀다. 거한의 왼팔이 잘려나가는 그림이 자연스럽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 검, 익숙한데.”


그러나 흑도는 약간의 피를 머금었을 뿐, 그 어떠한 살점도 맛보지 못한다. 어윈이 자신의 어깨에서 정지한 흑도를 맨손으로 붙잡고, 천천히 그 검은 불꽃을 감상하고 있었을 뿐이다.


“어휴, 듣던 대로 단단하네.”


지나는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팔을 당겨보지만, 붙들린 흑도는 옴짝달싹하질 않는다.


“.......그렇군. 네년이....... 네년이 델핀님과 엘라론님을.......!”


“아.”


됐다-라며 마침내 움직이는 흑도에 환호할 틈도 없이, 지나는 그대로 내리꽂히는 철퇴를 피해 몸을 날려야 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후폭풍이 치솟았고, 지나는 몸을 피했음에도 수 미터나 더 멀리 나가 떨어져야 했다.


“죽여 버리겠다!!”


“진부한 대사는 그만 좀 하시지?”


마치 벌레를 치워내듯, 앞을 막아서는 카나반 병사들을 옆으로 날려 보내며 접근하는 어윈을 향해 지나는 쓴 비웃음을 짓는다. 거리를 좁히자마자 거대한 덩치라고는 믿을 수 없는 민첩함으로 도약해오는 어윈이었지만, 지나는 도망치지도, 방어자세를 취하지도 않고 그대로 짧게 숨을 들이마신다.


“흠?”


겉보기와는 달리 어윈은 꽤나 침착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지금 눈앞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영력이 사라지고, 마치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처럼 희미해지는 여인의 샛노란 눈동자. 그 주변에만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든 흐름이 멎어버리고, 철퇴는 방향감각을 잃는다. 그는 흑도가 천천히 자신의 복부로 파고드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쳇.”


어윈의 정신을 일깨워준 것은 여인이 혀를 차는 소리. 그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거친 기합과 함께 뒤로 한걸음 물러선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검이 파고든 자리로 굵은 핏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치명상은 아니었다. 여인이 혀를 찬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으리라.


“무슨 수작을 벌인 거냐?!”


“내가 묻고 싶네! 정말이지 어떻게 되먹은 몸이야? 당신 인간 맞아?”


도리어 화를 내며 투덜거리는 지나. 그녀를 향해, 어윈은 다시 자세를 고쳐 잡고 크게 으르렁거린다.


“보통 계집은 아니구나! 자, 싸움은 지금부터다! 덤벼라!”


“미안한데, 주변을 좀 둘러보지그래?”


“.......뭣?”


급소를 찔린 것처럼 흠칫 멈춰 서는 어윈.


“이미 끝났다고요.”


눈앞에 상대에만 집중하고 있던 어윈의 오감이 천천히 되돌아오기 시작한다. 취기가 녹아내리면서 그의 이성이 마침내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고, 점점 줄어들던 함성이 이제 거의 들리지 않을 지경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용감하게 그의 뒤를 따르던 부하들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이미 그들은 포위된 아군을 버려두고 외곽까지 밀려나 퇴각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끝났어, 어윈 아이언하트. 무기를 버리고, 얌전히 투항해.”

영력이 되살아나는 여인의 눈동자. 그에 맞춰, 사방에서 무시 못 할 수준의 영력이 점점 그를 옥죄기 시작한다.

“이 소리 들리지? 우리 기병대가 움직이기 시작한 소리야. 이제 너흰 끝이라고. 지금이라도 투항하면 남은 부하들의 목숨을 살려줄게.”


흑도를 한 바퀴 빙글 돌리며 어윈에게 다가서는 지나. 그녀는 땅으로 느껴지는 진동을 통해 판단한 것이었지만, 카논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속삭인다.


“저기......., 언니.”


“응?”


“우리 기병대는 아직 움직이지 않았는데.......”


“.......뭐? 그럼 이건 무슨-”


카논과 지나의 시선이 동시에 동쪽을 향한다. 어둠밖에 없었던 숲의 흔적에서 일군의 기병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물론, 그들은 짙은 먹색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적이다! 적의 기병대다!”


“사방에서 몰려듭니다!”


기울어가던 승기의 끝에서 피어나는 혼란. 카논과 지나는 재빨리 지휘관들을 불러 방어대형을 명령하면서, 동시에 아군 기병대를 호출한다. 그 과정에서 포위 직전까지 몰고 갔던 적군에게 퇴로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고, 어윈을 필두로 한 그들은 황급히 전선을 빠져나와 퇴각을 시작했다.


“이건.......”


지금 상황이 당혹스러운 것은 어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주변의 카나반군을 물리치면서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어두운 하늘과 어지럽게 늘어선 죽은 나무들의 그림자는 카나반의 지휘관들뿐만 아니라 그의 눈도 괴롭히고 있었다.


“대령님!”


하지만 혼란의 와중, 똑똑히 그의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 하나. 어윈은 그 외침의 방향을 따라 철퇴를 휘두르며 도약했고, 말을 타고 달려온 익숙한 부하기사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여깁니다!”


세 명의 기사였다. 그리고 등이 비어있는 말 한 마리. 어윈은 망설이지 않고 뛰어들어 말의 고삐를 낚아챈다. 뒤늦게 그의 도주를 깨달은 지나가 추격을 위해 말에 올라타려 했지만, 카논의 만류에 의해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거냐? 웬 기병대야?”


포위를 벗어나 어둠 속에 몸을 맡기며, 어윈은 숨을 정돈하고 부하기사를 향해 묻는다. 그러나 부하기사는, 도리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예?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대기하라고 대령님이 명령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뭐? 나는-”

어윈은 말을 잇지 못한다. 자연스럽게 한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남아있는 애들을 불러라. 퇴각한다.”








“조명탄.”


전선에 가득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단 하나의 수단. 크라트의 명령에 다시 한 번 하늘은 대낮처럼 밝게 빛난다. 그리고 그제야, 지나를 비롯한 카나반의 지휘관들은 혼란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뭐야, 저건.......”


마른 숲을 오고가고 있는 기병의 숫자는 불과 백여 기. 그들은 각기 죽은 나무를 매달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마치 거대한 군세가 습격을 한 것 마냥 먼지와 진동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조명탄에 의해 그 정체가 발각되자 그들은 끌고 있던 나무를 버리고 다시 어둠을 향해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고, 방어태세를 갖춘 카나반군과 뒤늦게 전장에 합류한 기병대로는 그들의 뒤를 추격할 수가 없었다. 당연하게도, 지휘관인 어윈을 비롯한 이스누시아군도 이미 어둠의 품으로 파고든 뒤였다.



“한 방 먹었군.”


승리했음에도 승리의 함성이 울리지 않는 전장. 그 이유를, 크라트는 단 한마디로 정리한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7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변수의 굴레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43 (막간) 하나의 밤하늘, 세 개의 달빛 +11 16.08.29 623 14 15쪽
242 (22막) 세 개의 오만 (14) +10 16.08.24 576 13 16쪽
241 (22막) 세 개의 오만 (13) +9 16.08.19 450 13 26쪽
240 (22막) 세 개의 오만 (12) +6 16.08.14 494 9 18쪽
239 (22막) 세 개의 오만 (11) +10 16.08.09 599 11 17쪽
238 (22막) 세 개의 오만 (10) +6 16.08.05 608 13 14쪽
237 (22막) 세 개의 오만 (9) +6 16.07.30 578 14 15쪽
236 (22막) 세 개의 오만 (8) +8 16.07.26 534 11 24쪽
235 (22막) 세 개의 오만 (7) +8 16.07.20 639 13 19쪽
» (22막) 세 개의 오만 (6) +7 16.07.15 679 12 21쪽
233 (22막) 세 개의 오만 (5) +8 16.07.10 685 13 22쪽
232 (22막) 세 개의 오만 (4) +6 16.07.05 634 14 18쪽
231 (22막) 세 개의 오만 (3) +9 16.06.30 575 12 18쪽
230 (22막) 세 개의 오만 (2) +6 16.06.25 651 13 18쪽
229 (22막) 세 개의 오만 (1) +6 16.06.20 729 15 16쪽
228 (막간) 현실을 마주하며 +4 16.06.15 750 16 16쪽
227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0) +10 16.06.10 729 14 21쪽
226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9) +8 16.06.05 730 12 16쪽
225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8) +4 16.05.30 698 15 19쪽
224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7) +6 16.05.25 724 11 19쪽
223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6) +4 16.05.20 955 10 22쪽
222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5) +5 16.05.14 777 12 18쪽
221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4) +2 16.05.09 703 13 15쪽
220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3) +6 16.05.04 1,027 12 18쪽
219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2) +4 16.04.28 741 16 17쪽
218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 +8 16.04.23 849 15 19쪽
217 (막간) 필요없는 증명. 필요한 증명. +10 16.04.18 739 18 13쪽
216 (20막) 증명 (9) +4 16.04.13 698 18 16쪽
215 (20막) 증명 (8) +8 16.04.08 670 20 16쪽
214 (20막) 증명 (7) +11 16.04.02 735 14 16쪽
213 (20막) 증명 (6) +10 16.03.28 782 13 15쪽
212 (20막) 증명 (5) +8 16.03.23 813 17 24쪽
211 (20막) 증명 (4) +8 16.03.18 947 16 23쪽
210 (20막) 증명 (3) +10 16.03.12 813 17 20쪽
209 (20막) 증명 (2) +10 16.03.07 887 20 19쪽
208 (20막) 증명 (1) +10 16.03.02 763 18 18쪽
207 (막간) 지평선으로 향하는 한걸음을 지켜보는 사람들 +8 16.02.26 810 19 17쪽
206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0) +8 16.02.21 910 24 21쪽
205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9) +10 16.02.16 1,033 20 22쪽
204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8) +6 16.02.11 809 17 28쪽
203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7) +6 16.02.06 764 19 21쪽
202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6) +6 16.02.01 827 17 22쪽
201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5) +10 16.01.27 820 17 17쪽
200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4) +10 16.01.22 965 16 18쪽
199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3) +8 16.01.17 706 20 18쪽
198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2) +10 16.01.12 773 20 19쪽
197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 +8 16.01.07 792 21 13쪽
196 (막간) 언젠가 +4 16.01.02 946 22 16쪽
19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2) +8 15.12.28 799 25 23쪽
19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1) +6 15.12.23 933 24 1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