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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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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5.14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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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5)

DUMMY

시야를 숲 전체로 옮기면 지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 숲이 품고 있는 그림자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면 이곳 역시 피와 생명, 그리고 비명이 난무하는 전쟁터였다. 이제는 어디가 국경선이고 누가 침입자이며 누가 승리에 가까운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난잡함. 의도된 정체 속에서 병사들의 불만과 불안은 날이 갈수록 짙어지고 그런 부하들에게 자신도 납득하지 못한 설득을 심어주느라 지휘관들은 피가 말라간다.


“좋은 아침.”


크리스는 이런 상황에도 저렇게 웃으며 인사를 건넬 수 있는 디미르가 부러울 지경이었다.


“좋은 아침은 개뿔. 어젯밤 전투보고서 봤어? 사상자만 칠백 명이야, 칠백 명. 임시초소는 모조리 털리고 후트 중령까지 전사했다고. 이런데도 놈들은 치고 들어오질 않아. 심지어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담긴 굴욕이 크리스의 희미하게 푸른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온다. 그녀는 알이 커다란 안경을 내팽개치듯 보고서 위로 던져놓고, 어느덧 귀밑까지 내려온 얇은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쓸어 올려 고쳐 묶는다. 마른 입술 사이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온 것은 물론이었다.


“말했잖아. 결국 이런 싸움은 먼저 진심을 보이는 쪽이 손해라니까. 우리가 계기를 깔아주면, 그에 편승해서 짓뭉갠 다음 여유롭게 협상을 제안. 놈들이 노리는 건 그거라고. 그게 싫으면 우리가 우위에 서있어야겠지.”


디미르는 사뿐사뿐 크리스의 뒤로 다가가 잔뜩 굳어있는 여왕의 어깨를 부드럽게 풀어주기 시작한다. 크리스는 그 짧은 안식을 만끽하며 만족의 신음을 내뱉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날카롭게 곤두서있었다.


“그래서, 그 댄 스파인이란 남자. 어떻게 생각해?”


“정말로 그의 정보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카나반에 그의 존재를 비밀로 할 수 있어?”


곧바로 반문해온 디미르의 미소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크리스. 그러나 그 느슨한 미소의 끝에서 그가 어떤 답을 원하는지, 곧바로 꿰뚫어 볼 수가 없었다.


“.......모르겠어. 정보는 정보대로 빨아먹고, 그는 그대로 카나반에 넘길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장군씩이나 했던 자가 그것도 생각하지 않고 투항해온 건 아니겠지.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갑자기 돌아온 화살에 디미르는 어깨를 주무르던 손을 멈춘다. 물론 이 여왕이 순수하게 자신의 의견을 묻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단순한 조언자가 아닌 ‘검성’이라는 위치에서 해야 할 대답의 무게는 그 어떤 말보다도 무거워야 할 테니까.


“난 이 모든 게 일종의 계략이라고 생각해.”


“계략?”

이 남자에게서 이런 단어가 나오다니. 크리스는 그가 자신의 어깨를 풀어주고 있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의자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계략이라니? 누구의?”


“음, 정확히는 말할 수 없지만, 제국의 중앙군부에 있는 누군가겠지.”


“중앙군부.......?”


현재 아실레마 제국의 중앙군부를 ‘장악’하고 있는 자는 오직 하나.


“그래. ‘붉은 장미’가 죽은 후 어수선했던 군단장들끼리의 눈치싸움을 틈타서 경쟁자를 완벽히 제거하려는 거야. 3군단장인 카이우스는 차기 좌검성으로 가장 유력하면서도 ‘그’하고는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니까. 투항이라는 형태로 우리가 그를 무너트릴 구실을 주고, 동시에 댄 스파인이라는 인물이 가진 배경을 통해 동맹 사이의 신뢰를 흔들려는 속셈이겠지.”


“신뢰가 흔들리다니......., 우리가 댄 스파인의 존재를 숨기면 안 될 거란 소리야? 고작 그거 하나 때문에 신뢰가 흔들려?”


“과연 ‘고작 그거 하나’일까?”

싸늘한 웃음. 디미르는 천천히 무릎을 굽혀 여왕과 눈높이를 같게 한다.

“거꾸로 생각해봐. 만약 내 아버지가 카나반으로 가서 몰래 망명을 요청했다면, 그리고 카나반이 그 사실을 숨기려다 발각됐다면, 너는 그들에게 뭐라고 했을 거 같아? 그 영감이 전력에 도움이 될 테니 그냥 쓰시라고? 아니지. 당장 목을 쳐서 이쪽으로 보내든가 아니면 이쪽이 직접 목을 칠 수 있게 결박해서 보내든가하라고 했겠지. 그런데도 카나반이 자기들한테 도움이 될 테니 그냥 죽이지 않고 우리가 쓰겠다고, 우리한테 알리지 않는 게 조건이니 모른 척해달라고 하면, 넌 그럴 수 있어?”


“.......”


“이건 단순한 분노나 심판의 문제가 아니야. 그리고 대의를 위한 희생 따위는 더더욱 아니지. 만약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양보를 한다면, 국내 귀족들과 지휘관들은 너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게다가 로빈슨은 아직 너처럼 확고하게 중심을 잡지 못한 상태야.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그가 물어뜯길 먹잇감을 줘서는 안 돼.”


“그래서, 결국 댄 스파인을 죽여야 한다는 소리네?”


“아니.”

여왕의 얼굴이 구겨지기 전에 디미르가 의자를 돌려 다시 그녀의 어깨로 손을 올려놓는다.

“나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댄 스파인을 써먹어야 한다고 생각해.”


“.......뭐?”


무엇을 위한 상황설명이었나. 크리스가 눈을 마주하기 위해 자기 어깨 위에 있던 디미르의 손을 잡아 그를 옆으로 끌어내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웃으며 입술을 연다.


“댄 스파인을 카나반에 넘긴다고 해서 이 숲이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3군단은 여전히 막강하고, 또한 결과를 원해. 설사 이 모든 게 중앙군부의 계략이라는 사실을 알더라도 카이우스는 여길 떠날 수 없어. 어차피 이건 자신이 초래한 결과이고, 여기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차기 검성을 위한 명성에 흠집이 생기는 거니까. 그래서 그는 우리가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너는 우리가 먼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구나.”


“맞아.”

미소에게서 미소가 사라진다. 디미르는 크리스의 안경을 조심스럽게 주인의 콧대 위에 되돌려놓고, 그 무게가 짓누르고 있던 보고서를 들어 내용을 천천히 살펴본다.

“이대로 가면 결국 승자는 3군단이 될 거야. 우리에겐 이 분위기를 뒤집을 수 있는 커다란 한방이 필요해. 그리고 댄 스파인이 우리에게 그걸 가져다주겠지.”


“만약 카나반에서 눈치챈다면?”


“눈치채지 못할 거야. 3군단만 물리치면, 댄 스파인이란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


그를 이용하면서도 그의 존재를 묻어둔다.

자신이 가장 처음에 언급했던 가장 이상적인 흐름이었지만, 크리스는 디미르가 생각하고 있는 방향이 다소 엇갈려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으하암....... 뭐어, 결국 우리 영감탱이가 길게 보지 못하고 일을 벌려놓은 걸 다 우리가 떠맡게 된 셈이지.”


디미르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천막의 입구를 향해 휘적휘적 걸어간다. 진지함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그의 몸짓에 감춰진 무거운 기운.


“잠깐, 어디 가는 거야?”


그 불안을 삼키며 크리스가 그를 붙들어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듯이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어디긴, 우리 ‘정보원’한테 가지.”





======================





“다들 알았지? 정리하자면, 템피드들은 열에 약하다는 거야. 그러니까 마법사들이 먼저 화염마법을 통해 놈들의 체액을 유발해서 껍질을 물렁하게 만들면, 나머지는 기사와 병사들이 마무리하는 식이다. 화염내성에 취약한 마법사들은 기초마법이라도 괜찮으니까 열로 놈들의 접근을 막아주도록 해.”


“옛!”


“처음엔 징그럽고 더럽게 커다란 놈들이 달려들어서 당황스러울 거야. 하지만 오늘 배운 내용만 잘 숙지하고 내가 알려준 대형만 유지할 수 있으면 어려울 거 없어. 알았지?”


“예엣!”


“좋아, 해산.”


우렁찬 경례소리와 함께 수백 명의 전투마법사들이 흩어지더니 저마다 자신의 막사로 빨려 들어간다. 야영을 위한 군영이 새워진 곳은 계곡과 숲의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는 평원의 끝자락으로, 벤이 군대를 이끌고 남하했던 바로 그 경로이기도 했다.


“후우.”


답지 않게 많은 이들의 앞에서 장시간 입을 떠벌리고 있었던 탓일까. 벤은 갈라진 목과 마른 혀를 의식하며 수통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지만, 기울어가는 태양이 흩뿌리는 기다란 그림자 속에서 그의 갈증을 풀어줄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수,수,수고하셔....셨습니다. 거,검성님........”


육중한 몸집의 왕족이 자신의 곁으로 다가와 컵을 내밀기 전까지는.


“아, 고마워요, 토우칸.”


벤은 친구의 형에게서 받은 컵을 말끔하게 비워내고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친구와 마찬가지로 검붉은 머리칼에 검붉은 눈동자를 지니고 있지만, 훤칠하고 날렵한 동생과는 다르게 푸근하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같은 피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어찌나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 벤은 새삼 신기한 듯 토우칸의 얼굴을 멍하니 들여다본다.


“애,왜 그러시....죠?”


“아, 아니에요. 그건 그렇고 그냥 마즈다성에 계시지 그러셨어요. 굳이 안 따라오셔도 되는데. 어차피 더러운 꼴만 보러 가는 거고.”


“아,아,아닙니다....... 저도 지,지,지휘관으로....서, 채,책임을 다해.......”


“카니아 경이 걱정돼서 그러신 거죠?”


“아,아닙니다!”


새빨갛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대군을 보며 벤은 큭큭 웃을 수밖에 없었다. 토우칸과 카니아. 이렇게나 성격이 다른 둘이 부부라는 사실이 벤은 아직까지도 신기한 모양이었다.


“뭐어, 저야 당신과 키나아가 있으면 든든하니까 좋긴 한데, 로빈이 뭐라고 안 하던가요?”


“폐하, 아, 아니, 로....빈은 제, 제가 좋을...대로 하라고........”


“흐음.”


좋을 대로 하라.

왕의 형제를 멋대로 전장에서 굴리는 것이 국민들에겐 호의적으로 느껴질지는 몰라도, 의회는 분명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좋을 대로 하라’며 암묵적인 허가를 내주었다는 것은, 결국엔 토우칸과 카니아, 이들이 자신의 군에 강력한 전력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친구의 뜻이겠지.


“.......저어, 거, 검성님.......”


“예?”


“그, 로, 로빈과 의견....이 갈려,렸다고 들었는....데, 괘,괜찮으신가요?”


“아아, 뭐어....... 걔는 걔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고, 저는 저 나름대로 다른 생각이 있는 거니까요. 우리라고 맨날 같은 곳을 바라볼 수는 없잖아요.”


“하,하,하지만......., 여태....까진 거,검성님께서 보,보통 맞춰주셨.......는데, 이,이번엔 왜.......”


흔들리는 시선과 어눌한 말투 속에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역시 이 남자는 날카롭다. 벤은 잠시 토우칸의 진심을 헤아리려는 듯 그를 바라보더니, 마침내 한숨과 함께 입을 연다.


“전 단순히 동맹의 자격으로 브린타이나를 도와서 3군단을 물리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오열의 검성’이 맺었던 밀약과 내전, 그리고 이번 쥬넨 니바르토의 투항까지, 저에겐 이 모든 게 하나의 불길한 그림이 되어서 다가오고 있어요. 하지만 그 불길함이 뭔지 명확하게 보이지 않아요. 로빈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불확실함만으로 그의 생각을 흔들 수는 없었어요.”


“그 부,불길함이라는 게 뭐,뭡니까?”


“말씀드렸듯이 정확히 알진 못하겠어요. 그러니까 가는 겁니다. 직접 보기 위해서요. 일단 괴물들이 판치는 오스타이나성을 수복하고, 그곳을 거점 삼아 제가 봐두었던 동부경로를 따라 북진할 겁니다. 그리고 제 움직임이 계기가 되어 눈치만 보고 있는 두 세력 사이에 불이 붙겠죠.”


벤의 말을 한번 곱씹어보는 토우칸. 그리고 마침내 그 뜻을 이해한 그의 검붉은 눈동자는 경악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그,그럼......., 브린...타이나에도 아,알리지 않고 3군단....의 후방을 고, 공격하시겠다는.......?”


“예. 도와주러가는 게 아니라 불을 붙이고 감시하러 가는 셈이죠. 깜짝 선물이 될지, 아니면 예상치 못한 변수가 될지는 가봐야 알겠죠? 뭐어, 중간에 이상한 방해가 없으면 좋겠지만.”


역시 이 검성은 터무니없다. 기대했던 그 이상으로 터무니없다. 토우칸은 식은땀을 곁들인 웃음을 흘리다가, 문득 새롭게 피어나는 의문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그,그렇다면, 이 생....각을 로비,빈에게 말했...으면 되지 않았을...까요?”


“지금은 그 녀석에게도 저와의 관계가 마찰이라는 형태로 남아있는 게 좋습니다. 북쪽 말고도 지금 로빈이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니까요.”


“그렇......군요. 쥬,쥬넨 경에 대한 이,일과 의회에 전쟁에 대,대한 규명도 해야....하니.”


“아아, 그것도 있구요.”

‘그것도’?

지금 현재 로빈슨 폰 미트라블루스에게 이들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있단 말인가? 토우칸은 잘 움직이지 않는 혀에 집중하여 이를 물어보려고 하였으나,

“토우칸, 아직 밥 안 먹었죠? 고도랑 이리스가 연회에 쓰일 예정이었던 음식 몇 개를 훔쳐왔던데, 그거나 뺏어 먹죠.”


검성은 어느새 자리에서 벗어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막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




밤보다도 먼저 어둠이 찾아온 으슥한 지하. 하지만 유독 밝은 조명이 자리 잡은 구석에서, 두 여인이 깨끗한 침대 위에 누워 잘 정돈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녀들이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이라곤 얇고 하얀 천 하나뿐. 그러나 살짝 떨려오는 손끝과 목소리는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엘라. 정말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괜찮으시겠어요?”


풀어헤친 금발로 침대의 머리맡을 물들이고 있던 지나가 엘라가 누워있는 침대를 향해 돌아누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곧바로 마주보는 엘라의 새빨간 미소는 여유롭기만 했다.


“괜찮다니까.”


“하지만 성공할 거라는 완벽한 보장도 없고, 그 결과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엘라는-”


“그러니까 괜찮다고.”

완전히 돌아누워 팔로 머리를 받치는 엘라. 단순히 자세를 바꾼 것뿐인데도 흘러넘치는 요염함은,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지나의 가슴을 살짝 설레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 원래 의도야 어떻든, 너희는 목숨을 다해 로즈를 지켜주었어.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아. 아무리 광기의 꽃잎이라 불리는 나일지라도 은혜가 무슨 단어인지는 알고 있어. 이제는 내가 약속을 지킬 차례야.”


“.......크라트 대장은 뭐라고 안 하셨어요?”


“가장 먼저 지지해준 게 그 인간인데 뭐. 만약 반대했다면, 오히려 그에게 실망했을 거야. 나를 수단이자 소유물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니까. 지금 이렇게 말하기도 뭐하지만, 난 나름 축복받은 걸지도 모르겠어.”

잠시 떨어져 있을 뿐인데 벌써 엘라의 검은빛 시선엔 아련함이 묻어나온다. 그리고 그 빛은 그대로 지나에게 전염되었고, 엘라는 낮게 웃으며 지나를 향해 손가락을 내민다.

“올리에게 귀여운 남동생을 선물해주지 못하는 건 좀 아쉽지만.”


“로즈같은 남자애가 하나 더 생기면 올리는 기사를 은퇴해야 할지도 몰라요.”


“그건 그래.”


다소 짓궂게 들릴 수 있는 농담에도 엘라는 거리낌 없이 크게 웃는다. 그리고 그 웃음이야말로 마지막 순간까지 지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죄악감을 씻겨주는 존재였다.


“하아, 남자들은 지금쯤 신나게 싸우고 있겠죠?”


“왜, 내려와서 손이라도 잡아줬으면 좋겠어?”


“아, 아뇨, 그런 말이 아니라!”


당황하며 몸을 일으키는 지나. 덕분에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천이 힘없이 미끄러져 내려왔기에 그녀는 황급히 다시 몸을 뉘여야 했다. 그러나 엘라가 지나의 몸에서 본 것은 봉긋한 가슴도, 부드러운 피부도 아니었다.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태어나서 ‘기사로서’ 완벽해지기 위해 훈련이나 수련을 해본 적이 없어. 오직 내가 가지고 있는 드리브달이라는 이름의 핏줄 하나만으로 광기라는 이름을 얻었지.”


“.......”


“하지만 그건 내가 게으르거나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야. 나는 알고 있었던 거지.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해봤자, ‘장미’의 그림자조차 따라갈 수 없을 거란 사실을. 하지만 너는 달라. 네 몸의 수많은 상처들, 그것들이야말로 아뮤르라는 이름의 핏줄을 대신하여 지금의 네가 있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겠지. 나에겐 그런 각오가 없었어.”


“.......엘라.......”


엘라는 웃으며 자신의 몸을 덮고 있던 천을 거두어들인다.

상처는커녕 잡티 하나 보이지 않는 깨끗한 몸과 매혹적인 굴곡들. 그리고 엘라는, 천천히 자신의 손을 복부를 향해 가져간다.


“내 혈관을 기어다니는 피는 나에게 있어선 떨쳐낼 수 없는 저주야. 그에 비해 너는 네가 고조부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축복으로 여기지. 바로 그 차이야. 나는 이 저주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 로즈는 내 딸이 아닌 올리의 동생으로서 성장하도록 만들 거야. 하지만 너는 그 축복을 물려줘야 해.”


“.......”


“그러니까 나나 크라트에게 미안해하지 마. 이건 나의 선택이고, 나와 너 모두의 기회야. 비공식이니 뭐니, 비록 남편들이 지금 우리의 손을 잡지 못하더라도 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네.”


지나는 대답과 함께 손을 내밀어 엘라의 손을 맞잡는다. 그 손끝을 따라 흘러들어오는 영력과도 같은 온기는, 마침내 지나의 떨림을 완벽히 증발시켜주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어둠 속에서 새롭게 나타난 목소리.

하얀 장갑과, 푸른 수술복으로 무장한 세 명의 의사들이 의료장비가 실린 수레를 끌고 모습을 드러낸다.


“여왕님, 그리고 엘라론 경. 수술을 집도하게 된 왕실소속 데이고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두 명은 엄선된 군의관들이자 마법사로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여러분들을 안전하게 살펴주실 겁니다. 준비되셨다면,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두 여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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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막간) 하나의 밤하늘, 세 개의 달빛 +11 16.08.29 623 14 15쪽
242 (22막) 세 개의 오만 (14) +10 16.08.24 576 13 16쪽
241 (22막) 세 개의 오만 (13) +9 16.08.19 450 13 26쪽
240 (22막) 세 개의 오만 (12) +6 16.08.14 494 9 18쪽
239 (22막) 세 개의 오만 (11) +10 16.08.09 598 11 17쪽
238 (22막) 세 개의 오만 (10) +6 16.08.05 608 13 14쪽
237 (22막) 세 개의 오만 (9) +6 16.07.30 578 14 15쪽
236 (22막) 세 개의 오만 (8) +8 16.07.26 534 11 24쪽
235 (22막) 세 개의 오만 (7) +8 16.07.20 639 13 19쪽
234 (22막) 세 개의 오만 (6) +7 16.07.15 678 12 21쪽
233 (22막) 세 개의 오만 (5) +8 16.07.10 685 13 22쪽
232 (22막) 세 개의 오만 (4) +6 16.07.05 634 14 18쪽
231 (22막) 세 개의 오만 (3) +9 16.06.30 575 12 18쪽
230 (22막) 세 개의 오만 (2) +6 16.06.25 651 13 18쪽
229 (22막) 세 개의 오만 (1) +6 16.06.20 729 15 16쪽
228 (막간) 현실을 마주하며 +4 16.06.15 750 16 16쪽
227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0) +10 16.06.10 729 14 21쪽
226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9) +8 16.06.05 730 12 16쪽
225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8) +4 16.05.30 698 15 19쪽
224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7) +6 16.05.25 724 11 19쪽
223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6) +4 16.05.20 955 10 22쪽
»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5) +5 16.05.14 777 12 18쪽
221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4) +2 16.05.09 703 13 15쪽
220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3) +6 16.05.04 1,027 12 18쪽
219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2) +4 16.04.28 741 16 17쪽
218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 +8 16.04.23 849 15 19쪽
217 (막간) 필요없는 증명. 필요한 증명. +10 16.04.18 739 18 13쪽
216 (20막) 증명 (9) +4 16.04.13 698 18 16쪽
215 (20막) 증명 (8) +8 16.04.08 670 20 16쪽
214 (20막) 증명 (7) +11 16.04.02 734 14 16쪽
213 (20막) 증명 (6) +10 16.03.28 782 13 15쪽
212 (20막) 증명 (5) +8 16.03.23 813 17 24쪽
211 (20막) 증명 (4) +8 16.03.18 947 16 23쪽
210 (20막) 증명 (3) +10 16.03.12 813 17 20쪽
209 (20막) 증명 (2) +10 16.03.07 887 20 19쪽
208 (20막) 증명 (1) +10 16.03.02 763 18 18쪽
207 (막간) 지평선으로 향하는 한걸음을 지켜보는 사람들 +8 16.02.26 810 19 17쪽
206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0) +8 16.02.21 910 24 21쪽
205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9) +10 16.02.16 1,033 20 22쪽
204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8) +6 16.02.11 809 17 28쪽
203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7) +6 16.02.06 764 19 21쪽
202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6) +6 16.02.01 827 17 22쪽
201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5) +10 16.01.27 820 17 17쪽
200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4) +10 16.01.22 965 16 18쪽
199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3) +8 16.01.17 706 20 18쪽
198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2) +10 16.01.12 773 20 19쪽
197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 +8 16.01.07 792 21 13쪽
196 (막간) 언젠가 +4 16.01.02 946 22 16쪽
19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2) +8 15.12.28 799 25 23쪽
19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1) +6 15.12.23 933 2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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