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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031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6.05.20 21:46
조회
954
추천
10
글자
22쪽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6)

DUMMY

[너는 만용을 부릴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암흑의 공백, 공백의 암흑. 그런 곳에서 눈을 뜬 벤은 익숙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목소리를 향해 짧은 인사를 건넨다.


“그래, 나도 반가워. 근데 이제 슬슬 지겹지 않니?”


[너는 만용을 부릴 것이다.]


“아, 이번에는 미래형이네? 걱정해주러 온 거야?”


벤의 노골적인 빈정거림에도 공백 속의 목소리는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그의 앞으로 다가온다. 예전엔 메아리나 마찬가지였던 그 울림이, 그 ‘만남’이 있었던 후론 너무도 또렷한 형체로 악몽이 되어있었다.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지 잊어버린 자에게 미래는 허락되지 않는다. 네가 만들어낸 이름과 네가 받은 이름 모두가 거짓이다. 네겐 자격이 없다.]


벤은 만약 이 형체에게 손가락이 있었다면 자신의 미간을 쿡쿡 찌르고 있었을 것이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물론 그건 상상만으로도 불쾌해지는 광경이다.

자신과 얼굴이 똑같은 자들에게 꾸지람을 듣는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가 부정당하는 기분이니까.


“자격? 무슨 자격? 난 내가 무슨 대단한 힘을 가지거나 위대한 업적을 이룰 거라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자만했던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이런 나에게 무슨 자격이 필요하다는 거야?”


[네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앉아있다고 생각하는가?]


“뭐, 검성? 이건 어차피 교란용 명예직일 뿐이야. 왕은 내가 아니라 내 친구고, 그랜드마스터는 내가 아닌 다른 마법사가 오를 자리야. 난 어디까지나 주변인에 불과해. 그리고 난 이런 상황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고.”


[그 만족이, 바로 너와 네 눈동자가 담고 있는 모든 이들의 자만이자 죄악이 될 것이다.]


“......”


똑같은 얼굴. 그러나 새로운 목소리가 반대 방향에서 벤의 사고를 찌르며 들어온다. 꿈이라는 현상은 닫혀있는 잠재의식의 발현이라던 대학에서의 가르침이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인간을 어떻게 해야 가장 불쾌하게 만들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존재는, 바로 그 사람 자신, 본인일 테니까.


[인과는 네 선택에 따라 맞추어 흐르는 것이 아니다.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지금의 네가 만들 수 있는 건 시선조차 끌지 못하는 작은 파동일 뿐. 네 모든 걸 옥죄고 있는 굴레가 원하는 것은 이런 하찮은 변수 따위가 아니다.]


[너는 만족할 것이다. 그리고 자만할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에 눈을 돌리고 하고 있는 것에 만족하여 결국 자만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너 하나만의 죄악으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번갈아 자신을 쏘아붙이는 두 ‘같은 얼굴’을, 벤은 천천히 불완전한 손으로 밀어낸다. 무의식에 짓눌리는 의식이었기에 그 자신의 형체 또한 제대로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럼, 내가 뭘 해야 해? 솔직히 말해서, 나는 지금도 내가 가진 능력이나 운에 비해 너무 과분한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나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부분을 콕 집어서 뭐라고 하고 있거든. 나는 그에 반박할 수 없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마치 합창처럼, 동시에 짓눌러오는 두 목소리.

[[정말로 반박할 수 없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존재로부터 흘러나오는 본심을 꺼낼 수 없는 건가? 오만을 꺼내지 못하는 오만. 바로 이것이 네가 자격을 받지 못하는 이유다.]]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너는-]




팟- 하고,

암흑을 대신하여 밝아지는 시야.

눈을 두 번 깜빡이자 공백을 대신하여 익숙한 천막의 천장이 벤의 머리 위에서 쏟아지려 한다.


“어이, 검성!”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천막의 입구를 파헤치며 들어서는 익숙한 얼굴과 목소리. 벤은 부스스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켜 쏟아지는 빛을 가리기 위해 손을 든다.

“깼어? 나와 봐, 손님이 오셨어.”


일반적인 병사나 기사였다면 검성의 잠을 방해한 점에 대한 사죄부터 내뱉었겠지만, 역시 카니아는 카니아였다. 그녀는 비몽사몽한 벤의 상태가 즐거운지, 히죽 웃으며 천막의 입구를 더욱 활짝 열어젖힌 것이다. 결국 벤은 악몽의 마지막이 남긴 찝찝함을 씹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빛을 향해 걸음을 내딛어야 했다.


“.......”


카니아의 당혹감이라곤 없었던 밝은 표정과 목소리에 방심했다. 그녀가 말한 ‘손님’은, 결코 그렇게 가벼이 맞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천막을 나서는 순간 느낄 수 있었던 경직된 분위기. 숲의 한복판이었으나 그 어떤 생명의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고 아침 햇살 또한 평소보다 누렇게 침묵으로 짓눌러온다. 벤은 때아닌 전투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는 병사들의 적의 속에서 익숙한, 너무도 익숙한 얼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 형제! 다시 만나서 반가워!”


자신을 향한 카나반 장병들의 적의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반갑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렌. 벤은 그런 렌의 존재 자체에 일단 인상을 찌푸리고, 그와 그가 데려온 병사들의 상태에 구김의 깊이를 더한다.


“.......여긴 어떻게-, 아니, 왜 왔어?”


그들을 곧바로 공격하지 않은 병사들의 인내심에 속으로 박수를 보내며 벤이 물었다. 나름 평정심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그 자리에 있는 기사들은 물론이고 병사들까지 그의 혀에 적의가 담겨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형제’의 적의에도 불구하고, 렌은 방긋 웃으며 팔을 벌린다.


“왜긴, 카나반이 마즈다힐을 먹었다며? 그럼 소중한 형제는 다시 북진을 할 테고, 그 대업에 빠질 수야 없지.”


“오스타이나에서 그렇게 뒤통수를 쳐 놓고 뻔뻔하기도 하셔라.”


“뒤통수라니, 순수한 욕망 때문에 일어난 작은 사고였을 뿐이잖아. 안 그래?”


둘의 역사와 오스타이나 성에서 있었던 일을 모르는 사람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정말로 친근한 쌍둥이 형제의 해후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렌의 표정에선 진심 어린 반가움이 드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다가서는 그를 향한 벤과 카나반 병사들의 시선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작은 사고? 그날 오스타이나에서 죽은 병사와 마법사가 몇 명인지 알기나 해? 심지어 그 괴물들도 아니고, 네가 데려온 개새끼들한테 당한 자들도 있어. 그런데 작은 사고라고? 지금 이 자리에서 붉은 나무와 차가운 불꽃의 이름을 대신하여 네 목을 치지 않을 이유가 있다면 하나라도 대봐.”


한 번의 주문과 한 번의 도약으로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좁혀졌음에도 렌은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에 곁에서 악의적인 미소를 띠우고 있던 카니아가 그를 제지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벤은 손을 들어 그녀의 개입을 막는다.

마침내 다시 마주하는, 똑같은 두 얼굴.

먼저 작게 입술을 움직인 것은, 미소를 품고 있는 렌이었다.


“악몽.”


“.......뭐?”


“꿈 말이야. 너도 꿨지?”


렌의 목소리는 속삭임에 가까운 신중함을 품고 있었다. 덕분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카니아조차 그들의 대화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지만, 벤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만큼은 읽을 수 있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


“무슨 상관이냐니, 모든 게 상관있지. 너도 들었으면 알 거 아냐. 우릴 부르고 있어.”


“내 꿈에 ‘우리’는 없었어.”


“정말 그럴까?”


벤은 게걸스러운 렌의 미소를 향해 화염마법을 꽂아 넣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짓눌러야 했다. 자신의 어깨 위로 팔을 두르려는 렌의 시도를 강하게 저지하며, 그는 다시 한 번 렌이 이끌고 온 병사들의 행색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


“그래서 뭐 어쩌자고? 다시 끼워달라고?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너와 네 거지새끼들을 내가 왜 믿어야 하지?”


초췌한 얼굴과 꾀죄죄한 군복. 제대로 된 보급은커녕 여태까지 밖에서 노숙해온 것이 분명한 브린타이나 병사들의 몰골은 신뢰와는 거리가 멀었다.


“믿을 필요 없어. 처음 계획했던 대로 우릴 고기방패로 써도 상관없어. 이미 나갈 놈들은 나갔고, 남은 건 생존을 위해 투쟁할 수 있는 애들뿐이니까. 원한다면 쟤들 모두를 죽여도 상관없어. 하지만 나는, 내 발목을 자르지 않는 이상 너랑 같이 악몽을 찾아갈 거야.”


이것이 믿음을 보여주기 위한 허풍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의 본심인지 벤은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부관들과 병사들이 어떤 선택을 바라는지, 그리고 ‘그녀’가 어떤 선택을 바랄지는 분명했다.

만약,

만약 그 악몽만 아니었다면,

벤은 단호하게 모든 이들의 바람을 따라 선택했을 것이다.

배신자의 목을 치고, 모두가 납득할 만한 선택을 했을 것이다.




‘너는 만용을 부릴 것이다.’




벤은 벌써부터 후회가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것만 같았다.




==================





“그게 결론입니까? 반역자가 가지고 온, 그 진위조차도 불분명한 정보를 바탕으로 새로운 작전계획을 짠다? 폐하, 폐하께서는 저희를 속이고 이번 마즈다힐 침공에 직접 참여하신 것에 대해 아직 의회 앞에서 어떠한 해명도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잊고 계신 듯합니다.”


란다의 날카로운 말이 순식간에 아침의 산뜻함을 도려낸다. 각 대표들과 총리, 그리고 왕만이 모여 있는 자리였기에 망정이었지, 만약 모든 의원들의 앞이었다면 꽤나 따가운 눈초리를 받았을 법한 태도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반복되어온 그런 태도에 익숙해진 오로메는 찻잔 위로 살짝 입술을 움츠렸을 뿐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는다. 반박은 집무실 창가에 기대어 서있던 로빈의 몫이었다.


“그 문제와 이번 작계문제는 별개입니다, 란다 경. 공화국 역사상 최초로 제국의 영토를 얻은 과정에 절차상 문제가 있었던 점은 인정합니다. 그에 대한 질책이 필요하시다면 달게 받죠.”


“절차상 문제라뇨? 폐하께서는 국경을 순시한다는 핑계로 베르달을 방문하시고서 그대로 전쟁을 벌이셨습니다. 그 어떤 의회의 동의도, 파병절차도 거치지 않고서 말이지요! 단순히 절차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게 독재와 다를 게 뭐란 말입니까?”


“침공과 점령이라는 결과로 이어지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로즈를 납치하여 먼저 도발한 쪽은 제국의 2군단장 스이바노 브란트였습니다. 그리고 도발에 대한 현장지휘권은 줄곧 베르달의 지휘관인 크라트 경이 가지고 있었구요. 이 문제에 대해선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결국 의회도 지원군 추가파병에 동의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이미 상황이 벌어질 대로 벌어진 뒤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상황이 벌어진 터라 어쩔 수 없었을 뿐이에요. 그렇다면 란다 경은 저와 크라트 경이 영주의 딸이 납치된 상황에도 가만히 앉아 의회의 처리를 기다렸어야 했다고 봅니까? 어린애를 납치한 적들과 교섭을 해야 했을까요?”


로빈의 지적에 란다는 떫은 차향을 씹을 뿐 대답하지 않는다. 마침내 찾아온 소강상태를 틈타 중재를 나선 것은 아델이었다.


“자, 저희가 모인 건 그 문제를 논하고자 하는 게 아니었잖아요? 쥬넨 경의 정보를 바탕으로 새롭게 만들어질 작전계획말입니다만, 검성께서 군을 이끌고 떠나셨다고 들었는데, 혹시 이미 이 작계가 발동이 된 것인지요?”


“예, 뭐. 아직 세밀하게 협의된 건 아닙니다. 애초에 검성의 부대는 오스타이나의 탈환을 위해 출병한 것이었으니까요. 개인적으론 남아줬으면 했지만, 그는 본래의 목적을 위해 다시 북진했을 뿐입니다.”


차분한 아델의 목소리 덕분이었는지, 대답하는 로빈 또한 한숨을 돌린 채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보충은 란다의 찻잔을 채워주던 총리, 마누앙이 받는다.


“베르달군과 중앙군이 보충되고 재편되는 대로 마즈다힐 전역에 대한 녹화작업과 평정작업도 병행될 것입니다. 제국의 반격에 대비하여 전초기지의 정비도 필요하겠지요. 행정상의 편입과 정책에 관련된 문제들은 폐하께서 아르다르에 돌아가시는 대로 다시 논할 것입니다.”


“아, 그거 말인데요.......”

조심스럽게 시선을 집중시키는 왕. 로빈은 아침 햇살이 뚫고 들어오는 창가에서 벗어나, 찻잔이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자리에 조심스레 엉덩이를 내려놓는다. 얼마 전까지 육중한 제국의 군단장이 애용했던 자리였는지라, 의자 자체가 푹 꺼져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정비도 정비지만, 저는 제국이 제대로 준비하기 전에 추가적인 공격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추가적인 공격?”


오로메와 란다, 그리고 아델의 표정이 저마다 다른 이유로 살짝 뒤틀린다.


“예, 사실 새로운 작계도 이 부분을 중점으로 계획되고 있습니다. 검성과는 아직 합의를 보지 못했지만, 저도 크라트 경도 2군단의 붕괴로 국경이 혼란스러운 지금, 추가적인 타격으로 제국을 흔들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동시에 전력강화에 큰 이득을 볼 수도 있고요.”


“........전력강화에 큰 이득이라면......., 이스누시아로군요.”


“예,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담담하게 대답을 하고 있었지만, 로빈은 나름 놀라는 중이었다. 가장 먼저 자신의 의도를 꿰뚫어 본 사람이 다름 아닌 란다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작부터 거세게 반대만 부르짖을 것 같았던 그가, 다음 목표가 이스누시아라는 걸 확인하자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고민에 빠져들고 있지 않은가.


“제가 군인이 아니라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이스누시아라면 그 연철무기가 생산되는 곳이지요? 단순히 무기생산지인데 그렇게까지 전략적 가치가 높다는 말씀입니까?”


마찬가지로 란다의 눈치를 살피던 오로메가 로빈을 향해 물었다.


“네,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기사들의 역량이 배가되는 특수병기입니다. 물론 다른 연철무기들로도 비슷한 효과는 볼 수 있지만, 이스누시아에서 나오는 철광석이야말로 기사들을 위해 특화된 녀석이라 할 수 있죠. 대전쟁 이후로는 제국이 점령하여 독자적으로 물량을 조절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제국과 다른 국가들의 기사운용력에서 차이가 벌어진 주요요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렇게 중요하다면 제국도 방비를 철저히 해놓지 않았을까요? 너무 무리해서 빠르게 움직이려는 것은 아닐지.......”


아델이 걱정스러운 듯 말끝을 흐렸지만 로빈은 더욱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바로 그 점입니다. 물론 제국도 이스누시아의 중요성을 알기에 별도의 수비대까지 편성해서 지역을 사수하도록 명령해놨죠. 하지만 문제는, 바로 그 수비대가 역사적으로 줄곧 2군단 소속의 직할부대였다는 점입니다.”


“2군단이 붕괴된 지금, 지휘계통에 혼란이 왔겠군요.”


란다의 첨언에 힘입어 로빈이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위를 뒤덮고 있는 전술지도를 향해 손가락을 움직인다.


“성에 남아있던 2군단 문서들을 검토한 결과 해당 지역의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스누시아를 방어하고 있는 인물은 어윈 아이언하트 대령으로, 성급한 성격과 일관성 없는 병력운용 덕분에 일찍이 군단장심사에서 탈락하고 직할부대로 내려간 자입니다. 엘라론 경이 2군단을 지휘하던 시절에 배속된 인물이니, 어쩌면 그녀를 앞세워 회유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병력의 규모는 어떻습니까?”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란다의 질문. 하지만 로빈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대답한다.


“2개 연대급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배치될 당시의 규모니까, 지금은 더 축소되었으면 축소되었지, 더 늘어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저는 찬성입니다.”


모두가 의외라는 눈빛으로 란다를 바라본다. 특히, 로빈은 이번 작전계획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던 인물로부터 가장 먼저 확답을 받은 것이 더욱 놀라운 모양이었다.


“.......폐하와 크라트 경께서 그토록 확신하고 계시다니, 저 또한 찬성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란다의 시선을 이어받은 오로메의 대답. 그리고 자연스럽게 모든 이들의 시선은 시민당의 대표, 아델에게 집중된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부드러운 입술을 열었다.


“국익이 된다는 데 반대할 이유는 없겠죠.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예.”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풀렸기 때문에 로빈은 그녀의 입에서 어떤 조건이 나오든지 간에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에 비해 란다의 얼굴은 살짝 경직되었고, 그 모든 과정과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마누앙의 입가엔 살며시 미소가 피어오른다.

“이스누시아 지방을 장악한다면, 그 철광석채굴권과 연철무기제작권의 일부를 공기업과 사기업에게 균등히 배분해주셨으면 합니다.”


“.......예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조건.

로빈이 잠시 아델의 의도를 되새겨보기 위해 머뭇거리는 사이, 반박의 목소리는 의외의 입에서 터져 나온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민간업체에 채굴권과 제작권을 양도하자니? 시민당대표께선 지금 국익이라는 단어를 잘못 이해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란다 경께서야 말로 진정한 국익이 뭔지 모르고 계시는 것 같네요. 지금 공화국의 시민들은 이어지는 전쟁과 증세 때문에 허리가 휘고 있습니다. 지방경제는 침체되고 있고, 이 침체가 장기화될 조짐이 보이고 있어요. 물론 강력한 무기의 제작과 보급을 통해 국방력을 강화되는 것도 필수적이지만, 이는 동시에 막대한 이익을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동맹국과 중립국, 중립도시들을 겨냥하여 철광석과 무기를 무역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기회를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일부 업체들로 선정하여 맡긴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국익증진 아닌가요?”


“내가 맞춰보지! 지금 대표께서 말하는 선정된 일부 업체들이란 게, 결국 모두 시민당 의원들의 회사일 거 같은데, 아닌가?”


“당연하죠. 저희 의원들은 모두 해당 지역을 대표하는 분들로만 구성되어 있으니까요. 귀족들의 알량한 겉치레에 불과한 도덕적 의무와는 달리, 저희 의원님들은 진정으로 해당 지역구의 시민들을 위해 봉사할 준비가 되어있는 분들입니다. 이들이 아니면 누구에게 맡길 수 있겠어요?”


“그런 불순한 의도에 편파적인 혜택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일상적인 두 당대표의 마찰을 지켜보면서, 로빈은 무언가 곧바로 깨닫기 어려운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위화감의 대상은 다름 아닌 란다였는데, 같은 느낌을 받은 게 로빈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불순한 의도라고 하셨는데, 어째선지 저는 란다 경이야말로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계신 게 아닌지 의심되네요.”


“.......뭐요?”


분노를 넘어 뒤틀린 경악으로 아델을 바라보는 란다. 그러나 아델은 기죽지 않고 말을 잇는다.


“만약 우리 공화국이 이스누시아 지방의 전권을 갖게 된다고 가정했을 때, 가장 먼저 부름을 받게 되는 건 군수업체 ‘미란다’겠죠. 란다 경께서는 가주가 아닌 일반 가원이셨던 시절부터 미란다와 많은 거래와 계약을 하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단순히 이름이 비슷하셔서 그런 건 아닐 테고.”


“.......그게 지금 무슨 상관-”


“또한 가슈펠라르 가문의 가주는 대대로 미란다의 최대주주였죠. 제 말이 틀렸나요?”


“.......”


그랬구만.

자신을 대신하여 위화감을 풀어주는 아델을 향해 로빈은 고개를 끄덕여 남몰래 감사를 표한다. 하지만 란다가 이스누시아 정벌에 관련하여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 해도 로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 기세를 타서 정벌을 ‘정론화’ 시키는 것뿐.


“차후 의견을 나눌 기회는 충분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아요. 제국이 재정비를 하기 전에 빠르게 공격을 가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하시겠죠?”

무언의 긍정. 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을 정리하기로 한다.

“좋습니다. 총사령관은 크라트 경, 선봉은 제 대리기사가 맡겠습니다. 아,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엔 안 따라갈 테니까.”


로빈의 마지막 말은 혹시라도 마누앙과 대표들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을까 덧붙인 것이었다. 란다와 아델 사이에서 흐르는 미묘한 기류만을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표들. 그 도중에, 문득 란다가 주변을 둘러보며 흘리듯 로빈에게 묻는다.


“그러고 보니, 그저께부터 왕비님이 보이시질 않는군요.”


“아, 그, 지나는 저번 전투 때 입은 경상을 치료하느라......., 전투 전까지는 회복될 수 있을 겁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로빈은 당황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크게 웃으며 대표들을 배웅한다. 집무실에 마누왕과 둘만 남게 되자,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깊은 숨을 내쉬는 로빈. 그런 그를 향해 마누앙은 새롭게 데운 찻잔을 내밀었다.


“의회에는 밝히지 않으실 겁니까?”


“기적적으로 자연치유되었다-는 설명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엘라론 경이잖아요. 교회는 물론이고, 심지어 오로메 경께서도 탐탁치 않아하실 걸요.”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납득시켜야 할 인물은 따로 있지요.”


“예, 알고 있어요.......”


‘그녀’를 단순히 ‘인물’이라고 평할 수 있을까.

어쩌면 가장 거대한 숙제라고도 할 수 있는 붉은 나무의 향을 뒤로 하고, 로빈은 최대한 시선을 동쪽을 향해 집중시키기로 다짐한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 작성자
    Lv.86 네모구름
    작성일
    16.05.20 22:07
    No. 1

    잉? 설마 엘라론의 자궁을 이식 받았나요? 로즈 외에도 크라트의 아이를 낳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엘라가 큰 희생을 선택했군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5.24 01:32
    No. 2

    네모구름님 언제나 감사드려요!
    생각보다 큰 희생일수도...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니푸르
    작성일
    16.05.25 20:44
    No. 3

    51% 노하고자-> 논하고자
    66% 로빈을-> 로빈은
    94% 마누왕-> 마누앙
    재미있게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5.28 19:39
    No. 4

    헠 라루사님 감사합니다! 수정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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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막간) 하나의 밤하늘, 세 개의 달빛 +11 16.08.29 623 14 15쪽
242 (22막) 세 개의 오만 (14) +10 16.08.24 576 13 16쪽
241 (22막) 세 개의 오만 (13) +9 16.08.19 450 13 26쪽
240 (22막) 세 개의 오만 (12) +6 16.08.14 494 9 18쪽
239 (22막) 세 개의 오만 (11) +10 16.08.09 598 11 17쪽
238 (22막) 세 개의 오만 (10) +6 16.08.05 608 13 14쪽
237 (22막) 세 개의 오만 (9) +6 16.07.30 578 14 15쪽
236 (22막) 세 개의 오만 (8) +8 16.07.26 534 11 24쪽
235 (22막) 세 개의 오만 (7) +8 16.07.20 639 13 19쪽
234 (22막) 세 개의 오만 (6) +7 16.07.15 678 12 21쪽
233 (22막) 세 개의 오만 (5) +8 16.07.10 685 13 22쪽
232 (22막) 세 개의 오만 (4) +6 16.07.05 634 14 18쪽
231 (22막) 세 개의 오만 (3) +9 16.06.30 575 12 18쪽
230 (22막) 세 개의 오만 (2) +6 16.06.25 651 13 18쪽
229 (22막) 세 개의 오만 (1) +6 16.06.20 729 15 16쪽
228 (막간) 현실을 마주하며 +4 16.06.15 750 16 16쪽
227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0) +10 16.06.10 729 14 21쪽
226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9) +8 16.06.05 730 12 16쪽
225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8) +4 16.05.30 698 15 19쪽
224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7) +6 16.05.25 724 11 19쪽
»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6) +4 16.05.20 955 10 22쪽
222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5) +5 16.05.14 776 12 18쪽
221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4) +2 16.05.09 703 13 15쪽
220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3) +6 16.05.04 1,027 12 18쪽
219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2) +4 16.04.28 741 16 17쪽
218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 +8 16.04.23 849 15 19쪽
217 (막간) 필요없는 증명. 필요한 증명. +10 16.04.18 739 18 13쪽
216 (20막) 증명 (9) +4 16.04.13 698 18 16쪽
215 (20막) 증명 (8) +8 16.04.08 670 20 16쪽
214 (20막) 증명 (7) +11 16.04.02 734 14 16쪽
213 (20막) 증명 (6) +10 16.03.28 782 13 15쪽
212 (20막) 증명 (5) +8 16.03.23 812 17 24쪽
211 (20막) 증명 (4) +8 16.03.18 947 16 23쪽
210 (20막) 증명 (3) +10 16.03.12 812 17 20쪽
209 (20막) 증명 (2) +10 16.03.07 887 20 19쪽
208 (20막) 증명 (1) +10 16.03.02 763 18 18쪽
207 (막간) 지평선으로 향하는 한걸음을 지켜보는 사람들 +8 16.02.26 810 19 17쪽
206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0) +8 16.02.21 910 24 21쪽
205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9) +10 16.02.16 1,033 20 22쪽
204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8) +6 16.02.11 809 17 28쪽
203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7) +6 16.02.06 764 19 21쪽
202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6) +6 16.02.01 827 17 22쪽
201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5) +10 16.01.27 820 17 17쪽
200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4) +10 16.01.22 964 16 18쪽
199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3) +8 16.01.17 706 20 18쪽
198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2) +10 16.01.12 773 20 19쪽
197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 +8 16.01.07 792 21 13쪽
196 (막간) 언젠가 +4 16.01.02 946 22 16쪽
19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2) +8 15.12.28 799 25 23쪽
19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1) +6 15.12.23 933 2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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