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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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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6.02.21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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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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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글자
21쪽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0)

DUMMY

숲의 사도로부터 그 어떤 축복도 받지 않고 일궈낸 순수한 승리. 베르달의 용사들과 기사들은 재정비와 이른 행군을 위해 휴식을 취하라는 상부의 지침에도 불구하고 밤늦게까지 영광에 취해있었다. 그중엔 과감하게 숨겨두었던 술을 꺼내는 자도 있었지만, 그들이 오늘 어떤 각오로 전투에 임했고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는지 알고 있기에 지휘관들도 눈을 감아주는 분위기였다.


“.......”


군영 전체를 감싸고 있는 들뜬 분위기. 그러나 그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세상인 것만 같은 침묵이 한 천막을 짓누르고 있다. 그 어떤 조명도, 그 어떤 환희도 남아있지 않은 그림자 속에서 묵묵히 입구를 지키고 있던 근위대 한 명이, 다가오는 눈동자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인다.


“.......언제부터 그랬어?”


손짓으로 대신 인사를 받은 로빈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이미 그의 검붉은 시선은 새카만 천막의 입구를 향해 있었다.


“전투보고가 끝나고 한잔 걸치자마자 피곤하다며 들어가더니 곧바로 저렇습니다.”


담담함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로빈과 마찬가지로 오즈카의 표정엔 우려가 깃들어있었다.


“별다른 말은 없고?”


“네, 로빈만 계속 찾습니다.”


“군의관한텐 아직 말 안 했지?”


“네. 아무래도 ‘그쪽’의 일은 아닌 것 같아서.”


“.......고마워, 오즈카. 피곤할 텐데 이제 가서 쉬어.”


거절의 말은 듣지 않겠다는 듯, 로빈은 오즈카의 건장한 어깨를 툭툭 치며 천막 안으로 들어선다. 자신의 그림자가 삼켜지자마자 입구를 닫은 것은 물론이었다.

곳곳에서 넘쳐흐르는 환호성과 웃음소리. 그 환희를 만들어낸 어둠을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선 안 된다는 의무감이 오즈카의 피곤을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쉬라는 왕명을 거역하는 셈이지만, 그는 로빈이 다시 나올 때까지 누구의 시선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고목처럼 서서 주변의 목소리를 빨아들이기로 했다.

그것만이, 지금 이 안에 있는 두 남녀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였으니까.



“.......”


천막에 들어선 로빈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호흡을 방해할 정도의 후덥한 열기였다. 만약 안경을 끼고 있었다면 곧바로 김이 서려 앞이 보이지 않을 수준. 쨍쨍한 여름 해가 떠있는 시간도 아니고, 난방이 있을 리도 만무하다. 로빈은 곧바로 어둠 속에 매달려있는 조명으로 손을 가져가, 조심스럽게 가장 낮은 단위의 빛으로 천막 안을 비추었다.


“.......로.......빈?”


흐린 불빛 아래, 열기의 원인, 아니, 열기 그 자체가 있었다.

보기에도 거칠어 보이는 숨결. 떨리는 눈망울과 그 끝에서 일렁이는 작은 눈물들. 이쪽의 이름을 부르는 분홍빛 입술은 이미 메마르고 갈라져 얇은 핏줄기를 턱 아래로 흘려보내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빠르게 로빈의 시선을 빼앗은 것은, 탈수가 걱정될 정도로 전신에서 쏟아지는 땀과 평소의 하얀 살결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갛게 달궈진 그녀의 피부였다. 비현실적으로 뜨겁고 축축한 천막 안의 공기가, 바로 그녀의 몸과 그녀의 몸이 증발시키고 있는 땀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로빈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리고 만다. 하지만, 여기선 자신이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괜찮아, 지나. 나야, 네 남편.”


“로.......빈.......”

이미 그 시야마저 흐려졌는지, 생기를 잃은 샛노란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방황한다. 지나는 야전침대에서 반쯤 떨어져 있었던 자신의 몸을 되돌려주는 로빈이 고마운 듯 힘겹게 웃으며 그의 뺨을 어루만졌지만, 로빈에게 있어 그 손길은 화상이 걱정될 정도의 열기를 품고 있었다. 그럼에도 로빈은 그녀의 손을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소중하게 감싸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긴다.

“로빈.......”


“응.”


“나.......너무 아파.......”


커다란 눈물이 지나의 눈가에 맺히지만, 그것은 그녀의 머리카락조차 적시지 못하고 공중으로 증발하고 만다. 로빈은 망설이지 않고 제복과 군화를 벗어, 그녀에게 팔베개를 내어주며 곁에 눕는다.

기사로서의 지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 중에 가장 강인한 존재다. 어렸을 적부터 온몸을 흉터로 만들고, 전장에서 상처를 입으며 때론 패배까지 했지만, 기사로서의 그녀는 단 한 번도 약한 소리를 해본 적이 없다. 그런 그녀가 울음까지 터트리며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지금 그녀가 겪고 있는 상황이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운지를 보여주는 증거. 지나의 피부로부터 전해져오는 열기 따윈 그녀가 견뎌내고 있는 고통의 백분의 일도 되지 않음을 알고 있기에, 로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그녀와 함께하기로 다짐한다.


“걱정하지 마. 내가 옆에 있어.”


“응......., 응.......!”


밝게 웃으며 대답하려다가도, 이내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내뱉으며 로빈의 가슴에 매달리는 지나. 곁에서 보기만 해도 미간이 구겨지는 시간이었지만, 로빈이 다급하게 군의관을 찾지 않는 것엔 이유가 있었다.


“견뎌야 해. 지나, 알지? 꼭 견뎌내야 해. 이 순간만 견디면,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어.”


“알아, 알고 있어....... 너를 위해, 나는 꼭....... 아흑........”


달군 쇠와 같은 지나의 몸을 로빈은 그대로 끌어안는다. 이것만으로 그녀의 열과 고통을 나눌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가 조금 더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어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검성의 피는 갑자기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축적되는 것이다.’



한센이 그들에게 남겼던 말.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모든 국가의 역대 검성 중 그 누구보다도 갑작스럽게 등장했던 한센을 생각하며 그들은 좀처럼 그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알려진 것처럼 필요에 의해 ‘급조된 검성’ 따위가 아니었다.


“아뮤르 가문은 예전부터 기사의 피가 짙은 혈족이었지. 아무리 일반인들과 혈연을 맺고 전쟁과 동떨어진 곳에 살아도 언제나 기사를 배출해왔단다. 어쩌면 ‘검성의 피’라는 건 아득히 먼 선대 때부터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르지. 다만 200년 전까지 그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것은, 그만큼 피와 죽음에 노출될 일이 적었기 때문이야.

대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나는 햇병아리 장교였지. 오히려 형님 쪽이 전도유망했어. 물론 나도 형님을 존경했기에, 그가 전쟁을 통해 꽃을 피우리라 의심치 않았지. 그런데 그가 첫 전투에서, 그것도 하필 학살의 검성을 만나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크게 절망했어. 그리고 그 절망감을 분노로 승화시켜 전투에 임하고, 살육에 임했단다.

물론 전황은 좋지 않았지. 패배의 연속이었어. 수도가 함락당하고, 붉은 모래의 가도가 생겨나고, 모두가 죽음과 멸망을 예상했다. 하지만 나만큼은 뒤틀린 환희에 젖어있었어. 적을 베는 기쁨, 내 안의 영력이 커져가는 데서 비롯된 고양감. 내 손에서 끝나는 생명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는 더욱 더 많은 피를 갈구하게 되었단다. 그리고....... ‘그 순간’이 내게 찾아왔어.


「기사를 완성시키는 것은 훌륭한 검과 무자비한 훈련이 아니라 적과 아군의 피로 온몸을 뒤집어쓰는 것」


기사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제국의 초대 검성, 아론 드리브달의 격언. 나는 마침내 그 말의 참된 뜻을 깨닫게 되었지.

죽음에 무감각해지는 순간, 그 순간이 되면 찾아오는 격렬한 죄책감과 영혼의 고통.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은 수많은 영혼의 목소리를 자신의 영력으로 집어삼킨 자들만이 겪을 수 있는 선택받은 저주. 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존재하는 시간을 살육으로 보내던 나를 단번에 짓누르며 등장했지. 나는 그 순간을 이렇게 부른단다.

‘참회의 시간’이라고.

온몸이 불타고 뒤틀리는 참회를 포기하고, 스스로 시간을 끝내버렸다면 ‘흐름’이라는 이름도, 그리고 지금의 너희도 없었겠지. 단순한 의미로는 ‘각성’이라 이름 붙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그때 속삭이는 영혼들의 목소리가 너무도 선명해. 그 죄악의 시간은, ‘기사’라는 하나의 정형화된 존재를 뛰어넘는 목표가 있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고통이란다.

지나야, 너에게 그 참회의 시간이 찾아올지는 나도 장담할 수 없구나. 하지만 언젠가, 너도 그 죄악과 후회의 구렁텅이에서 몸부림칠 날이 온다면, 내 강아지야, 이거 하나만큼은 기억해다오.

절대로

너 혼자만을 위한 검을 들면 안 된다. 내가 공화국의 생존을 검의 생명으로 삼은 것처럼, 너도 네 검의 생명을 바칠만한 무언가를 찾아내렴. 살육을 위한 기사가 아닌, 기사를 위한 살육을 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네 안에, 네 피에 깃들어 있는 진정한-”



“검성으로서의 각성........”


로빈은 뒤늦은 대가를 치르고 있는 부인의 눈물을 닦아주며 한센의 조언을 상기한다. 그가 굳이 지나와 자신을 함께 불러놓고 그 진실을 알려준 이유가 있었다. 그가 언급한 ‘참회의 시간’은, 지나 혼자서 받아들여야 할 단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검의 생명을 바치리라 맹세했고, 자신은 그런 그녀에게 사랑과 영원의 시간을 함께하기를 맹세했다. 그녀가 견뎌야 할 시간은, 곧 자신이 함께해야 할 시간.

한센은, 지나가 아닌 그에게 조언이자 부탁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으흑.......!”


이가 흔들릴 정도로 꽉 물어 고통을 참아보려 애쓰는 지나. 로빈은 그녀를 감싸고 있는 자신의 피부가 벌겋게 익는 것은 상관하지 않고 더욱 거세게 그녀를 끌어안는다.


“지나, 잘 들어.”


“.......”


“언젠가, 우린 가볍게 웃으며 이 시간을 우리의 아이에게 들려줄 거야. 아이는 믿지 못하겠다며 웃겠지.”


“.......”


“하지만 아이는 곧 널 닮은 눈을 크게 뜨고 우릴 올려다볼 거야. 이미 그때는, 세상의 모든 지평선이 너의 색과 너의 이름으로 물들어 있을 테니까.”


“.......”


“그리고 그 시작이 바로 오늘임을, 그리고 내일임을, 나는 믿고 있어.”


듣는 이도 견디기 어려운 신음이 이어진다. 그 신음을 누르기 위한 누군가의 신음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끝이 보이질 않는 시간의 연속 속에서도,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존재를 확인한다. 나눠지지 않고 전가되는 고통.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를 놓지 않는다. 호흡이 힘들어지고 의식이 멀어져가지만, 그들은 포기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는다.

그가 곁에 있고,

그녀가 곁에 있기에,

둘의 역사상 가장 긴 밤이 끝날 때까지,

그들의 영혼은 강하게 묶여 있었다.








“-!”


시간의 경과를 깨달을 새도 없이 로빈은 손이 닿는 곳의 공백을 깨닫고 황급히 몸을 일으킨다. 잠에 빠져든 것인지 아니면 정신을 잃은 것인지는 몰라도, 작은 비닐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빛은 그의 눈동자 속으로 깊은 불안을 새겨 넣고 있었다.

땀으로 축축하던 야전침대가 싸늘하게 식어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부둥켜안고 있었던 영혼의 주인 또한 보이질 않는다. 기상으로 인해 침침한 눈을 부비며 다시 손을 뻗어보지만, 역시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손이 떨려오는 불안과, 끝까지 함께 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한꺼번에 로빈의 이성을 죄여오기 시작한다.

남편으로서, 그리고 기사로서 좀 더 강했다면,

그녀를 조금이라도 혼자 두지 않을 수 있었다면.......


이런 나약함 때문에 그녀가-




“아, 좋은 아침.”


보이지 않는 침대의 아래에서 두 개의 샛노란 태양이 밝게 빛을 비춘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이마는 땀으로 반짝이고 있었지만, 그 환한 표정 어디에도 고통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새빨갛던 피부도, 본래의 하얀 살결로 돌아와 있었다.


“.......지나?”


“안녕, 촌놈 기사.”


처음으로 로빈을 만났을 때,

그를 불렀던 호칭.

그녀 또한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지, 말을 마치자마자 새빨간 혀끝을 깨물며 귀엽게 웃는다. 팔굽혀펴기를 끝내고 기분 좋게 땀을 훔치는 그녀와 그녀의 미소를, 로빈은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나, 너.......”


“응, 괜찮아. 아직 온몸이 조금 얼얼하긴 한데, 이상하게 지치긴커녕 당장이라도 달려나가서 싸울 수 있을 거 같아.”


다소 핼쑥해지긴 했지만 그녀의 미소엔 빛이 살아있었다. 만약을 위해 가져다 두었던 커다란 분대용 물통은 이미 반쯤 비어있는 상태. 살짝 달아오른 그녀의 피부와 얼굴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요염한 생기가 넘친다.

로빈은 그녀의 손을 잡고, 침대 쪽으로 끌어당긴다. 거부할 힘이 있음에도 꺄륵 웃으며 그를 향해 무너지는 지나. 로빈은 해맑은 그녀의 얼굴을 깊이 들여다보며, 그녀의 뺨과 이마를 어루만진다.

분명히,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알고 있던 그녀가 아니었다.

위화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 입술에 키스를 함에 그 어떠한 거부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땀으로 축축한 그녀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어루만지고, 흉터마저도 부드러운 그녀의 피부를 쓰다듬는다.


“.......기분이 어때?”


스스로는 이미 대답을 내렸음에도, 로빈은 지나를 향해 이렇게 물었다.


그녀가 미소 짓는다.

다시 한 번 그의 숨결을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난 지나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배고파. 고기 훔쳐 먹으러 가자.”




였다.





==========================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안톤은 사령부 주변을 순찰하던 도중, 자신의 증조부이자 상관인 카이우스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곧바로 지휘천막으로 찾아온다. 그의 예상대로, 제국의 3군단장이자 서부원정군 사령관 ‘은빛의 사선’ 카이우스 드레브냑은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없는 지휘소에서 랜턴 하나를 켜두고 사색에 잠겨있었다. 그의 사색을 방해하는 일이 친족에게만 허락된 영광임을 알기에, 안톤은 눈짓으로 증조부의 허락을 구하고 나서야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2군단의 소식 들었나?”


새벽의 어둠으로도 감출 수 없는 날카로운 은빛 눈매. 무거운 존재감이 그대로 서려있는 군단장의 목소리에 안톤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다.


“스이바노 브란트말입니까. 마즈다힐로 침공해온 카나반군을 요격하려다 패배했다고 들었습니다.”


“정보부에서 일하는 내 동기에게 부탁해서 그 전투보고서를 입수할 수 있었어. 한 번 읽어봐.”


“옛.”


증조부에게서 넘겨받은 종이 한 장을 빠르게 탐독하는 안톤. 그가 전투보고서의 마지막 단락을 끝마치는 순간, 카이우스가 새로운 전문을 그의 앞으로 내어놓는다.


“그리고 이게, 방금 전 우검성의 이름으로 각 군단장에게 하달된 명령서다.”


“검성이 직접.......? 감히 제가 읽어도 되겠습니까?”


“읽어봐.”


“.......”

전문의 내용은 짧았다. 하지만 안톤은 자신이 가진 제국기사로서의 역량과, 부관으로서의 노련함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내용을 몇 번이나 되읽고 나서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장군님, 이건.......”


“기회라고 생각하나?”


“그, 그렇지 않습니까? 일단 그 ‘흐름의 후예’을 잡아내기만 하면 좌검성직이 보장된다니, 지금 여기서 피튀기며 브린타이나와 싸우고 있는 것보단 빠른 길이 아닙니까?”


진지를 감싸고 있는 숲은 평화롭지만, 여기서 조금 더 서쪽으로 가면 브린타이나와 3군단 사이의 치열한 소모전이 이 시간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협약을 지키지 않은 브린타이나 왕국으로부터 정당한 보상을 받아내기 위해 3군단이 시작한 전쟁이지만, 실상은 카이우스가 비어있는 제국의 좌검성직을 얻기 위해 독단적으로 꾸민 일임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총력전에 임하지 않고 국경압박만 계속하고 있는 3군단의 전략이야말로 그 사실을 증명한다는 비판이 제국 내에서도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안톤은 오히려 그 타개책으로 우검성 측이 먼저 손을 내민 것이 아니냐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굵직한 수염이 뒤덮고 있는 턱 위로, 만족과는 거리가 먼 군단장의 미소가 떠오른다.


“좌검성에 자기 뜻대로 움직일 인물을 꽂는다면 곧 자신의 세상이 시작되는데, ‘그’가 이 좋은 기회를 이딴 식으로 날려버릴 리 없다. 애초에 그가 검성선출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명령서’라니, 오만하기 짝이 없지.”


“.......그렇다면-”


“이 명령서는 그가 독단적으로,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군단장들의 의중을 찔러보기 위해 만들어낸 거야. 아직 2군단의 전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나오는 걸 보면, 처음부터 스이바노 브란트는 버리는 패였다는 거겠지. 우검성 ,‘그’는 현재 2군단의 상황을 다른 군단장들에게 의도적으로 노출시키려 한 것 같다.”


안톤은 다시 한 번 명령서를 읽어보았지만, 의문으로 얼룩진 표정을 풀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저희가 움직이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미끼를 던지겠습니까?”


“잘 읽어봐라. 그는 좌검성직이 ‘보장된다’고 했지, 자신이 ‘보장한다’라고는 하지 않았어. 즉, 그는 스스로의 한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 쪽이 직접 적을 늘리는 방향으로 가길 원하는 거다.”


“우리가 직접 적을.......?”


“생각해봐라, 안톤. 만약 여기서 누군가가 브란트를 도와 ‘제2의 흐름’이 될지도 모르는 싹을 잘라낸다면, 와해될 뻔한 2군단의 구세주로서 누가 떠오를 것 같나? 뒤에서 명령한 ‘그’일까? 아니지, 당장은 표면적으로 구원의 손길을 내민 그 누군가가 되겠지. 그러면 군단장으로서 그 누군가의 영향력은 2개 군단을 품으면서 거대해질 텐데, 그건 우검성이 그리 바라지는 않을 상황이야. 그런데, ‘그’보다도 그 상황을 바라지 않는 자들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다른 군단장들.”


“그래.”

카이우스는 두 장의 종이를 거두어들여 손가락으로 살짝 튕겨낸다. 그러자 종이들은 공중에서 서로 얽히며 구겨지더니, 이내 흔적도 남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그 행동이 마력이 아닌, 순수한 영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안톤은 경이로움에 침을 삼킨다.

“여태까지 제국에서의 군단은 독립적인 군사집단이었고, 황제폐하의 침묵이 계속되는 한 앞으로도 그럴 거다. 하지만 우검성의 이런 행동들을 통해, 검성직에서만큼은 선의의 경쟁이었던 틀이 깨지면서 언젠가는 서로 눈치를 보며 경쟁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될 거야. 지금 독단적으로 브린타이나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나만 하더라도 변명의 여지는 없지. 이런 나의 행동 때문에 불안해진 다른 누군가가 이 우검성의 미끼를 덥석 물어버린다면, 분위기가 꽤 재밌게 흘러갈 수도 있다.”


“.......”


부관인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거대하고 무거운 이야기였기에 안톤은 그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증손주의 심정은 아는지 모르는지, 카이우스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우검성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어.”


“그게 뭡니까?”


“자기 때와는 달리, 지금 군단장들 모두가 노골적으로 검성직을 탐내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이 눈치싸움 덕분에 좌검성직은 꽤나 오랫동안 공석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의회에선 우검성의 군권독재를 방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의회 중심의 선출식을 강행할 테고, 그것이야말로 우검성으로서는 최악의 흐름이지.”


“그럼.......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되는 겁니까?”


대답에 앞서, 손을 들어 지휘소의 모든 불빛을 지워버리는 카이우스.


“글쎄. 아까도 말했지만 군단장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일단 나는 이 전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얻어내고, 가만히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다. 2군단이 어떤 형태로든 빨리 끝나버리는 쪽이 나에겐 최선이지.”


“.......그 말씀은.......”


“이 전투보고서 한 장만으로는 이 사냥감이 진정한 ‘제2의 흐름’인지 알 수 없다. 오히려 섣불리 움직였다가 그딴 햇병아리를 잡고 검성직을 얻으려 했냐-며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모두 기다리는 거다.”


안톤이 눈치챌 새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카이우스는 어느새 입구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는 황급하게 따라나서는 증손주를 뒤돌아보며, 여태까지 그의 앞에서는 한 번도 지어본 적이 없었던 인자한 미소를 숲을 배경으로 지어 보인다.




“만약, 혹시라도 그 햇병아리가 2군단과 브란트를 희생양으로 삼아 진정한 ‘흐름’으로 거듭난다면, 그때는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나.”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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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8

  • 작성자
    Lv.99 니푸르
    작성일
    16.02.21 21:48
    No. 1

    이번편 소름이네요ㄷㄷ
    지나가 드디어 진정한 검성의 경지에 올랐네요ㅜㅜ 2군단은 물론 3군단까지 우걱우걱 먹어치우길!
    재미있게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2.23 19:30
    No. 2

    라루사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ㅠ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0 에크나트
    작성일
    16.02.22 03:00
    No. 3

    와 이제 좀 강한케릭터들이 나오려나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2.23 19:31
    No. 4

    에크나트님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강려크한 친구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6 네모구름
    작성일
    16.02.22 14:54
    No. 5

    지나의 흐름이 끊기지 않길 기대하고 있을게요. 지나와 로빈의 아이를 보고 싶습니다ㅎㅎ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2.23 19:31
    No. 6

    네모구름님 언제나 감사드려요!
    저도 보고 싶습니다 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evolutio..
    작성일
    16.02.23 12:33
    No. 7

    마치 하나의 페이즈가 끝나고 샤로운 페이즈가 시작될꺼라고 암시하는 화인것 같군요..ㅎㅎ 주인공 세력의 전력강화와 때맞추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더 강한 적들..

    무사히 각성을 마친 지나와 로빈의 길은 순탄치 만은 않아 보이는데.. 과연 흐름을 이어받은 지나와 그녀의 사랑하는 왕 로빈은! 정말 그들의 색으로 지평선 끝까지 물들일 수 있을 것인가! coming soon..!

    이라는 느낌인가여?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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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2.23 19:31
    No. 8

    ㅎㅎㅎ 에볼루션님 항상 감사합니다!
    훌륭하게 요약해주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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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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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막간) 하나의 밤하늘, 세 개의 달빛 +11 16.08.29 623 14 15쪽
242 (22막) 세 개의 오만 (14) +10 16.08.24 576 13 16쪽
241 (22막) 세 개의 오만 (13) +9 16.08.19 450 13 26쪽
240 (22막) 세 개의 오만 (12) +6 16.08.14 494 9 18쪽
239 (22막) 세 개의 오만 (11) +10 16.08.09 599 11 17쪽
238 (22막) 세 개의 오만 (10) +6 16.08.05 608 13 14쪽
237 (22막) 세 개의 오만 (9) +6 16.07.30 578 14 15쪽
236 (22막) 세 개의 오만 (8) +8 16.07.26 534 11 24쪽
235 (22막) 세 개의 오만 (7) +8 16.07.20 639 13 19쪽
234 (22막) 세 개의 오만 (6) +7 16.07.15 679 12 21쪽
233 (22막) 세 개의 오만 (5) +8 16.07.10 685 13 22쪽
232 (22막) 세 개의 오만 (4) +6 16.07.05 634 14 18쪽
231 (22막) 세 개의 오만 (3) +9 16.06.30 576 12 18쪽
230 (22막) 세 개의 오만 (2) +6 16.06.25 651 13 18쪽
229 (22막) 세 개의 오만 (1) +6 16.06.20 730 15 16쪽
228 (막간) 현실을 마주하며 +4 16.06.15 750 16 16쪽
227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0) +10 16.06.10 729 14 21쪽
226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9) +8 16.06.05 730 12 16쪽
225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8) +4 16.05.30 698 15 19쪽
224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7) +6 16.05.25 724 11 19쪽
223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6) +4 16.05.20 955 10 22쪽
222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5) +5 16.05.14 777 12 18쪽
221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4) +2 16.05.09 703 13 15쪽
220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3) +6 16.05.04 1,028 12 18쪽
219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2) +4 16.04.28 741 16 17쪽
218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 +8 16.04.23 849 15 19쪽
217 (막간) 필요없는 증명. 필요한 증명. +10 16.04.18 739 18 13쪽
216 (20막) 증명 (9) +4 16.04.13 698 18 16쪽
215 (20막) 증명 (8) +8 16.04.08 670 20 16쪽
214 (20막) 증명 (7) +11 16.04.02 735 14 16쪽
213 (20막) 증명 (6) +10 16.03.28 783 13 15쪽
212 (20막) 증명 (5) +8 16.03.23 813 17 24쪽
211 (20막) 증명 (4) +8 16.03.18 947 16 23쪽
210 (20막) 증명 (3) +10 16.03.12 813 17 20쪽
209 (20막) 증명 (2) +10 16.03.07 887 20 19쪽
208 (20막) 증명 (1) +10 16.03.02 763 18 18쪽
207 (막간) 지평선으로 향하는 한걸음을 지켜보는 사람들 +8 16.02.26 810 19 17쪽
»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0) +8 16.02.21 910 24 21쪽
205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9) +10 16.02.16 1,033 20 22쪽
204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8) +6 16.02.11 809 17 28쪽
203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7) +6 16.02.06 765 19 21쪽
202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6) +6 16.02.01 828 17 22쪽
201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5) +10 16.01.27 820 17 17쪽
200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4) +10 16.01.22 965 16 18쪽
199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3) +8 16.01.17 707 20 18쪽
198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2) +10 16.01.12 773 20 19쪽
197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 +8 16.01.07 792 21 13쪽
196 (막간) 언젠가 +4 16.01.02 946 22 16쪽
19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2) +8 15.12.28 799 25 23쪽
19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1) +6 15.12.23 933 2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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