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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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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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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18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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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글자
23쪽

(20막) 증명 (4)

DUMMY

공성탑이나 사다리의 도움 없이 일반병사가 마즈다성의 성벽을 오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파도처럼 움푹 파인 곡선은 갈고리로 등반하려는 적군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성벽 중간중간 뚫려있는 구멍들은 그 틈을 발판삼아 올라가려는 병사들을 좋은 표적지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운 좋게 그 중간을 넘어섰다고 해도 성벽 곳곳에 돌출되어있는 망루와 성벽 위에서 쏟아지는 공격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제국군의 지휘관들은 그 누구보다도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고 있기에 모든 초점을 공성병기들에게 맞추고 있었다. 카나반군이 나름 효과적인 교란책을 들고나오기는 했지만, 이번만큼은 이쪽의 방비가 더욱 치밀했다는 자신감을 제국의 모든 장교들과 병사들이 공유하고 있었다.

저들의 의도는 양 측면으로 수비군의 전력과 시선을 분산시킨 뒤, 가벼워진 중앙 성문을 재차 공략하겠다는 것이었을 터. 그러나 현장지휘관인 댄 스파인은 이 움직임에 현혹되지 않고 빠르게 그 의도를 간파하여 ‘다르펜타’ 포반의 이동을 최소화했다. 90초라는 긴 재장전시간이 약점인 다르펜타를 공략하기 위해선 90초로는 감당할 수 없는 압도적인 물량이나 빠른 움직임이 필요하지만, 카나반군은 이미 첫날 전투에서 대부분의 공성병기를 잃은 데다가 숲의 축복에서 벗어나 특유의 신속함마저 없는 상태다. 즉, 교란의 끝에서 주력으로 내세운 저 카나반의 본대는 남은 60초 안에 공성병기를 접근시키지도 못할 것이고, 뒤늦게 기진맥진하여 당도한 뒤에는 다르펜타의 손쉬운 먹잇감이 될 뿐. 댄의 입가로 떠오른 확신의 미소는 결코 자만에서 피어난 꽃이 아니었다.

이제 그와 그의 부하들이 신경 써야 할 유일한 문제는 성벽 아래에서 작전의 성공만을 애타게 기도하고 있는 카나반 선발대의 정리다. 댄은 이쪽 다르펜타의 움직임을 확인했으면서도 우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들을 보며 안쓰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본대라는 하찮은 희망은 당도하자마자 절망의 색으로 박살 날 것이 분명하며, 보호막의 힘이 다하는 순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일방적인 학살의 풍경이다. 수적으로도, 지형적으로도 카나반군에겐 화력전의 의미가 없는 상태. 어지러운 폭염과 마력의 잔해가 곧 다가올 승리의 순간을 자축하듯 사방에 피어나고 있을 뿐이었다.


때문에,

제국군의 그 누구도 비어있는 성벽으로 올라선 작은 그림자를 곧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앞서 말했듯이 이 날카롭고 드높은 성벽을 맨몸으로 등반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다. 그러나 기사, 그것도 아주 날렵하고 영력을 감추는 데 능한 기사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진득한 폭염을 방패 삼아 도약한 뒤, 뚫려있는 구멍과 성벽 곳곳의 틈을 발판으로 빠르게 올라선다. 구멍 안의 경비병들은 그들이 잡아낼 수 없는 신속함에 투사체가 지나간 것으로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망루 안의 병사들 또한 어지러운 전황 탓에 해변의 모래알 같은 그 밋밋한 존재감을 잡아내지 못한다.

처음으로 그 ‘존재’를 깨달은 것은, 댄의 명령으로 남쪽성벽을 향해 이동 중이었던 다르펜타 넷포반장이었다.


“뭣-”


머리로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몸이 따라줄 리 만무하다. 넷포반장은 자신의 머리 위에 내리꽂히고 있는 태양빛보다 날카로운 두 눈동자와 마주하는 순간 그대로 굳어버린다. 그리고 눈동자와는 정반대, 자정이 넘어서야 찾아볼 수 있는 어둠이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광경을 멍하니 내려다봐야 했다. 밤처럼 타오르는 불꽃이 자신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그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검은 불꽃은 그대로 그의 폐를 찢으며 턱 아래까지 불태웠고, 포반장은 비명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 바닥으로 무너진다.

앞에서 다르펜타를 이끌던 사수와 부사수가 다른 병사들이 성벽 위를 완전히 비워줬음에도 속도가 줄어든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았을 땐, 이미 두 개의 태양과 하나의 검은 불꽃이 그들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저기, 이 줄을 당기면 발사되는 거 맞지?”

고함과 비명이 난무하는 전장의 한복판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느긋한 목소리, 그리고 해맑은 미소. 하지만 흑도의 끝에 맺혀있는 악의만큼은 분명했기에 사수는 경직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고마워~.”

지나는 미소를 거두지 않고 그대로 흑도를 크게 가로젓는다. 그 한 번의 검짓으로 사수와 부사수는 물론 뒤에서 다가오던 포수들까지 두 동강이 나며 바닥으로 흩뿌려졌지만, 비어있는 성벽 위에서 그녀를 제지할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엇차.”


포반 전체가 달라붙어 움직여야 했던 육중한 다르펜타를 지나는 한손으로만 끌어당겨 방향을 바꾸어 놓는다. 거대한 병기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은 성벽 위로 이어지는 뒤쪽의 계단, 그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 모두가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진동을 퍼트렸다. 도금한 성벽표면에 균열이 일 정도의 충격이었기에 지휘관 한 명이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계단으로 올라서 성벽 위를 살펴보았고,

그의 얼굴 위로 걷잡을 수 없는 경악이 번져나간다.








“장군님! 다르펜타 하나포부터 삼포까지 재장전 완료했습니다.”


“음.”

부관의 보고대로, 댄의 시야에 붉은 깃발을 흔들고 있는 포반들의 모습이 들어온다.

“사격지휘통제실의 보고는?”


“예. 20초 뒤에 적의 본대가 유효사거리 내로 들어선다고 합니다.”


“그럼 지금으로부터 30초 뒤, 각 포대는 적 본대를 향해 일제사격을 실시한다. 하나포는 중앙, 둘포는 좌측, 삼포는 우측의 공성탑을 공격한다.”


“알겠습니다, 30초 뒤!”


부관이 통신병을 붙들고 명령을 전파하는 사이 댄은 망원경을 들고 다가오는 카나반 본대의 정면을 바라본다. 이제는 그들의 다급한 표정까지 읽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로 좁혀진 상태였다. 그 변치 않는 속도와 움직임, 대열을 천천히 살펴보며 댄이 속으로 승리의 초를 세기 시작하는 순간-


-콰앙


익숙한 폭음이 전장을 뒤흔든다. 댄의 미간이 짜증으로 구겨진 것은 물론이었다.


“뭐야?! 어느 포반이냐?! 왜 벌써-”


그러나 댄은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들려온 굉음의 정체는 익숙하다. 굳이 살펴볼 필요도 없이 다르펜타의 포격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폭음과 진동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은 댄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가 망루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왼쪽을 바라보자, 그 위화감은 가장 경악스러운 현실이 되어 허공에 일렁이고 있었다.

그의 느낌대로 포격의 불꽃은 다르펜타의 포신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다. 문제는, 그 포격에 산산 조각난 것이 카나반군의 본대가 아닌, 좌측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르펜타 포반이었다는 점이었다.


“뭐, 뭐냐?! 불량탄? 사고인가?!”


사고라고 생각한 부관의 판단은 자연스러웠다. 그의 판단력과 시야로 잡아낼 수 있는 최선의 그림이었으니까. 하지만 댄의 붉은 눈동자는 아직도 휘날리는 성벽의 파편과 마력으로 인해 뒤틀린 공간 너머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다르펜타 이동 중지! 부관! 예비대와 특무기사단을 성벽 위로 투입시켜라!”


“예? 하지만 그들은 측면에-”


“빨리! 놈들이 다르펜타를 탈취했단 말이다!”


“.......옛?”


“이예나 대위로부터 보고! 다르펜타 넷포가 침투한 적 기사에게 장악당했으며 현재 발라크 3소대가 교전 중! 북쪽을 향해 이동 중이던 여섯포도 적 기사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부관이 댄의 명령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통신병이 먼저 현실을 일깨워준다.

다르펜타가 다르펜타를 포격했다는 상황.

댄을 수행하는 모든 부관들이 마침내 그 심각성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하나포의 피해상황은?”


쥬넨이 도약하다시피 계단을 오르며 뒤를 따르는 기사를 향해 물었다.


“직격은 피했습니다만 가신을 받치던 성벽이 무너지고 포반 인원들이 전원 사망하여 작전수행이 불가하다고 합니다.”


“.......그래.”

쥬넨의 발걸음이 멈춘다. 이제 두 걸음만 뛰어 올라가면 성벽 위에 올라설 수 있다. 그리고 그 너머엔 전투의 함성으로 치장된, 일방적인 살육의 참상이 고스란히 들려오고 있었다.

“보고에 따르면 넷포에 침투해온 적 기사는 단 하나, 카나반의 왕비이다.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어젯밤 그녀를 잡기 위해 너희 부대원 일곱을 데리고 덤볐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고조부이자 카나반의 선대 검성인 ‘흐름’과 비슷한 길에 들어섰으며, 여태까지 우리가 상대해왔던 그 어떤 존재보다도 위협적이다.”

쥬넨이 오직 하나의 목적으로 모아둔 제국2군단 직속특무기사단. 그 소속을 상징하는 먹색 제복의 기사 스무 명이 그의 그림자를 따라 계단에서 눈을 빛낸다. 거기에 성안에서 대기하던 예비대 병력 또한 당장이라도 투입될 기세로 모든 계단을 가득 메우고 있다.

“하지만 검성의 경지에 들어선 자, 아니, 검성 그 자체일지라도 심장에 검을 박아 넣으면 모든 생명은 끝난다. 너희 모두가 알고 있겠지만 나는 과거 카나반에 있을 당시 근위대장이자 저 기사의 선배였다.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 ‘아뮤르 지나’라는 이름의 기사가 어떤 기질을 갖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녀가 흐름의 이름을 얻었음에도 단신으로, 적지의 한복판에서 날뛰고 있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

오만.

우리는 그 오만의 대가로, 그녀에게 죽음을 선사해줄 것이다.”


흔들림 없는 쥬넨의 먹색 눈동자 위로 난자당한 제국군의 시체 하나가 성벽 안으로 굴러떨어진다. 그 고깃덩어리에 묻어있는 영력의 잔향을, 쥬넨을 포함한 모든 특무기사단 전원이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쥬넨은 망설이지 않고 수십 개의 계단을 단번에 뛰어오른다. 영력을 감출 필요도, 감추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는 곧바로 성벽 위의 태양과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아, 선배~. 약속 지키러 오신 거예요?”



포신으로 연결되는 폐쇄기. 다르펜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그곳으로 찔러 넣었던 흑도를 뽑아내며 지나가 환하게 웃는다. 그러나 전장과는 동떨어진 그 미소보다도 먼저 쥬넨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따로 있었다.

이 구역을 담당했던 발라크 3소대는 통상적인 경비중대로, 50여 명의 전투원과 다섯 명의 기사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그런 그들이 다르펜타를 강탈한 ‘적’과 교전을 시작했으니 지원하라는 댄의 명령을 받은 게 불과 수십 초 전.

하지만 성벽 위에,

발라크 3소대의 목소리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찢겨져 나간 핏덩이와 조각난 무기들만이 이곳에서 ‘흐름’을 맞이하여 싸웠던 이들이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다.


쥬넨을 따라 성벽 위로 올라선 기사들도 같은 참상을 바라보며 침을 삼킨다. 다르펜타가 길목을 막고 있는 탓에 그들은 반원으로 지나를 포위할 수밖에 없었다. 쉴 새 없이 터지는 포격마법들과 비명들을 배경으로, 지나는 특유의 새빨간 혀끝을 깨물며 천천히 자신을 둘러싼 무리의 얼굴을 살펴본다.


“일곱 명으론 안 되니 스무 명. 참 쉬운 계산법이네요.”


“목적을 이뤘음에도 물러나지 않고 남아있는 그 만용이야말로 죽음으로 향하는 쉬운 길이지.”


“목적을 이뤘다뇨? 이제부터 시작인데?”


제국군의 피로 축축한 머리카락을 묶어 올리는 지나. 핏줄기 하나가 훤히 드러난 차가운 이마를 가로지르며 그녀의 눈썹을 적신다. 농후한 비린내를 품은 그 핏방울은 기다란 속눈썹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지나의 눈동자로 스며들었지만, 지나는 눈을 깜빡이지 않는다.


스무 명의 기사는 조심스럽게 간격을 좁힌다. 그들은 지나가 이런 포위대형에 반응할 모든 수단에 대해 대비하고 있었다. 하늘로 높이 도약하거나, 영력으로 바닥을 가격하여 포위대형을 무너트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절대로 물러나진 않을 것이다. 그녀는 오만하니까, 그리고 그런 오만을 품을 자격이 있으니까.


‘자, 어느 쪽이냐.’


가장 확실한 일격을 날릴 수 있는 쥬넨은 포위진의 최후방에서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있었음에도 저 흐름의 후예는 이쪽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소름이 끼칠 정도의 집중력이었지만, 쥬넨은 오히려 나머지 기사들은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듯한 그 오만함에 감사하고 싶었다.

미세한 표정까지 읽을 수 있는 거리. 검이 닿는 데 도약조차 필요 없을 정도의 거리까지 검은 제복들이 좁혀왔지만 지나는 여전히 반응하지 않는다. 물론, 대상이 먼저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도 이들은 준비가 되어있었기에, 쥬넨이 선제공격을 의미하는 수신호를 위해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


도시 전체를 뒤흔드는 강력한 진동과 폭음이 하늘 높이 솟구친다. 다르펜타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희생양이 된 것은 카나반군이 아닌 성벽 위 또 다른 다르펜타포반이었다.

제아무리 예리하게 훈련받은 기사들이라 할지라도 지축을 뒤흔드는 충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시야와 자세. 카나반의 태양은 그 틈을 놓치지 않는다.


“!”


묵직한 영력을 느끼고 황급히 도끼를 들어 올리지만, 검은 불꽃은 도끼날을 그대로 통과하여 기사의 목까지 꿰뚫는다. 반쯤 증발한 핏줄기가 높이 솟구치자, 지나는 한 번 눈을 깜빡이고 곧바로 좌측에서 내리꽂히는 검을 손등으로 쳐낸다. 무기를 놓칠 수는 없다는 기사로서의 자긍심 때문에 제국기사는 그대로 튕겨져 나갔으나 간신히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었다.

특무기사들은 당황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나가 파고들어온 지점을 기점으로 다시 원형대형을 만들어 그녀의 사각을 만들어낸다. 그녀가 크게 검을 휘둘렀을 때 생기는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틈을 주지 않고 매섭게 그녀를 몰아붙일 작정이었다. 사방에서 교대로, 치명적인 적의를 품고 날아드는 온갖 무기들을 지나는 훌륭하게 막아내고 있었지만, 자신의 흑도에 새로운 피를 묻히지는 못하고 있었다. 영력이 담긴 공격은 영력이 담긴 방어로 막아낼 수밖에 없다. 모으질 못하는 힘을 분출할 수는 없는 법. 그녀의 ‘흐름’을 봉쇄하는 순간 기세는 기운다. 이것이 쥬넨의 생각이었고 그 생각은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


몰아붙이는 기세에 쥬넨은 동참하지 않는다. 그는 외곽에서 천천히 움직이며 지나의 신경을 괴롭히고 있었다. 단순히 사각을 찌르는 공격으로는 그녀를 잡을 수 없다. 힘의 소모와 무뎌지는 날카로움이 만들어낼 한순간의 틈. 쥬넨이 노리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작은 틈의 순간이었다.


“크악!”


그 ‘틈’은, 쥬넨의 예상대로 제국기사의 피와 함께 찾아온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 여기사는 자신들의 연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내는 지나를 향해 경외심과 짜증이 동시에 올라온 상태였다. 사방에서 진동하는 피비린내를 비롯한 복합적인 감각들이 뒤섞여 여기사는 자신의 차례가 아니었음에도 한걸음 다가서 지나의 후방을 향해 창을 찔러 넣었고, 지나는 자신의 옆구리를 스친 창목을 잡아 전방의 기사를 향해 내던진다. 창끝이 미간에 작렬한 기사는 그대로 절명, 졸지에 자신의 무기로 동료를 찌르게 된 여기사는 분노를 터트렸지만, 자신의 목을 붙잡은 지나의 손가락이 그대로 기도와 목뼈를 한꺼번에 뜯어내었기에 그 이상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리고 쥬넨은 망설이지 않고 기사들 사이로 도약한다. 하지만 그것이 사각은 아니었다. 방금 여기사의 피로 더럽힌 왼손, 그 왼손이 가로막고 있는 그녀의 왼측면. 평상시였다면 오른손의 흑도로 쥬넨의 검을 막아내었을 테지만, 특무기사들의 쉴 새 없는 공격과 견제에 그녀는 손과 발 모두가 묶인 상태였다.

물론 이것으로 그녀의 목숨을 끊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의 왼손, 왼팔만큼은 취할 수 있으리라 쥬넨은 확신하고 있었다. 오만에 젖어있는 태양의 얼굴에 마침내 고통과 상실의 굴욕을 새길 수 있다. 그는 노골적으로 회색빛 연철검의 끝으로 영력을 끌어모았고, 마주치는 시선의 품으로 몸을 던졌다.


태양빛보다 눈부신

그녀의 눈동자.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그녀의 샛노란 눈동자가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쥬넨은 그 빛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의 검을 그 태양의 한복판으로 찔러 넣는다. 그의 예상대로 여기사의 피로 물든 그녀의 손가락이 그사이를 막아섰지만, 하얗고 가느다란 지나의 손가락은 적의가 가득한 옛 선배의 검날을 막아내기엔 너무도 연약해 보였다.


너무도

연약해 보였다.




“.......”




놀람도, 경악도,

또는 두려움도,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다.


쥬넨은 공중을 도약하던 발을 살며시 바닥으로 내려놓았고, 그 사실에 흠칫 놀란다. 그리고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검끝을 보며 침을 삼킨다. 피를 보리라 다짐했던 의지와 영력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아니, 빨려 들어가 버렸다.

그의 모든 것을 삼켜버린 눈동자는, 고통은커녕 여전히 빛이 바래지 않은 채 타오르고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보게 되고, 느끼지 않아도 느껴져요. 음......., 뭐라고 설명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언젠가 선배도 이 광경을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굳은살과 상처투성이의 하얀 손바닥.

그 바로 앞에서 멈춰선 쥬넨의 검끝을 어루만지며 지나는 새빨간 혀끝을 내밀어 얇게 웃는다.

“ ‘힘은 갈구하는 자에게 스며든다. 적의와 살의, 또는 선의와 희생을 오가는 그 힘의 흐름을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생명이라는 진정한 힘을 다룰 자격이다.’ 우리 할아버지가 하셨던 말씀, 기억하시죠?”


창.

갈고리창.

도끼.

검.

단검.

화살.

권총.


그 모든 의지가 가냘프게 떨린다.


기사라는 이름과 피를 지니고 태어난 생명으로서,

그들이 수천 번,

수만 번,

수십만 번 반복해왔던 영력의 흐름.

바로 그 흐름이 질식하고 있었다.

혀와 숨이 뒤틀릴 정도로 어색한 감각에 모든 이들의 호흡이 멈추고,

의지를 들이마시지 못한 폐는 그 어떤 목소리도 밖으로 내뱉지 못한다.





“뭐, 아무튼, 고마워요.”






====================






“보고 드립니다! 넷포를 습격한 적 기사를 쥬넨 대령이 직접 요격, 전투 중! 적이 장악한 여섯포 사격에 의한 삼포의 피해는 경미, 작전수행 가능합니다!”


부관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이며, 댄은 이제 망원경조차 필요 없는 카나반 본대를 바라본다.


“사격제원 다시 수정하고, 둘포는 중앙의 적 공성탑. 삼포는 우측의 적 공성탑. 준비된 포반으로부터 발사준비.”


“발사준비!”


펄럭이는 붉은 깃발.

댄은 커다랗게 외친다.


“쐇!”










“야! 너는 그거 하나를 제대로 못 맞히냐!?”


끈질기게 달라붙는 제국기사의 창을 피하며 셰르가 질책의 고함을 내지른다. 질책의 대상이 된 유진은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지으면서도, 아쉬움이 남는지 다르펜타의 줄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야포는 기초교육 받은 게 전부인데 어떡해, 그럼?!”


북쪽으로 이동 중인 다르펜타포반을 탈취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자신의 말처럼 야포라고는 훈련소시절 기초교육으로 받은 게 전부였던 유진의 포격은 지나의 그것과는 달리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가까운 다르펜타포반의 근처를 맞히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들을 완벽하게 무력화시키진 못한 것이다.


“이제 어쩌지? 계획한 건 운용 가능한 다르펜타를 1개로 줄이는 거였잖아! 2개가 남으면 무너지는 공성탑도 2개....... 성벽을 장악하기엔 부족할 거야.”


셰르의 말대로, 본대를 겨누는 다르펜타의 숫자를 1개로 줄이는 것이 지나가 제의한 계획의 중점이었다. 그 뒤 침투한 기사들은 다르펜타 그 자체를 엄폐물 삼아 좁은 계단과 길목을 이용하여 본대가 공격할 때까지 버틴다. 즉, 처지하지 못한 다르펜타를 직접 무력화시키기 위해 접근한다는 건 처음부터 계획되지도 않았고 가능하지도 않았다는 뜻이었다.


“일단 버텨보자. 놈들이 공성탑을 빗맞히기를 기도해야지.”

차마 손을 놓지 못하는 유진을 대신하여 다르펜타의 포신 속으로 수류탄을 굴려 넣는 셰르. 그는 유진을 잡아끌어 그녀의 뒤로 달려들던 병사의 목을 둔탁한 폭발음이 들려오기 직전에 베어낸다.

1차 목적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상황은 좋지 않았다. 길목을 막고 있는 다르펜타 반대편으로 몰려드는 제국군과, 계단을 통해 성벽으로 복귀하려는 경비병들의 물결은 ‘버틴다’라는 명령의 개념 자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셰르는 멍하니 성벽 난간에 걸터앉아있는 리즈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거기 왕녀님! 좀 도와주지?”


“.......”


“리즈! 야! 엘리자베스!”


멍한 왕녀에게 달려드는 병사의 다리를 간신히 베어내며 숨을 몰아쉬는 셰르. 욕을 품은 그의 입술이 열리기 직전, 리즈는 그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자그맣게 속삭인다.


“.......바람. 이쪽으로 불고 있어.”


“뭐어?”


“아, 깃발 올라왔다.”


그녀의 감탄에 셰르는 유진이 처리하지 못한 다르펜타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리즈의 말대로, 그곳엔 사격준비완료를 알리는 붉은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깃발이 휘날리는 방향은,

성벽의 안쪽.


리즈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다. 그녀는 느긋하게 등 뒤의 화살통에서 날렵한 화살 하나를 꺼내 들었고, 익숙한 동작으로 활시위를 당긴다.

셰르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수의 머리를 맞히기에는 터무니없이 멀고 장애물이 많다. 그리고 운 좋게 그 사수를 처리한다 해도 다르펜타 자체를 무력화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그녀의 검붉은 시선, 화살촉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다르펜타가 아니었다.

성벽의 바깥쪽, 아군의 공성탑이 접근하고 있는 방향이었다.


뭐하고 있냐는 셰르의 목소리는 그녀의 귓가에 스치지 않는다.

리즈는 짧게 숨을 멈추고, 손끝을 간질이는 화살깃을 통해 영력을 흘려 넣는다.


감았던 한쪽 눈을 뜬다.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좋은 냄새야.”



날숨처럼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끝을 떠나는 화살.

그 화살은 저 멀리 성벽 밖으로 크게 유영한다.

부드러운 곡선은 맞바람을 맞아 급격하게 반대방향으로 휘감기기 시작했고,

검붉은 영력은 자연 그 자체를 동력삼아 날카로운 몸짓으로 공간을 가른다.






무전병의 엄지손가락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다르펜타 삼포반장은 팽팽하게 줄을 잡는다.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는 포격의 후폭풍으로부터 눈과 얼굴을 지키기 위해 뒤돌아섰고,



줄을 당기는 순간 포구로 빨려 들어오는 화살 하나를 보지 못한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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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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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막간) 하나의 밤하늘, 세 개의 달빛 +11 16.08.29 623 14 15쪽
242 (22막) 세 개의 오만 (14) +10 16.08.24 576 13 16쪽
241 (22막) 세 개의 오만 (13) +9 16.08.19 450 13 26쪽
240 (22막) 세 개의 오만 (12) +6 16.08.14 494 9 18쪽
239 (22막) 세 개의 오만 (11) +10 16.08.09 599 11 17쪽
238 (22막) 세 개의 오만 (10) +6 16.08.05 608 13 14쪽
237 (22막) 세 개의 오만 (9) +6 16.07.30 578 14 15쪽
236 (22막) 세 개의 오만 (8) +8 16.07.26 534 11 24쪽
235 (22막) 세 개의 오만 (7) +8 16.07.20 639 13 19쪽
234 (22막) 세 개의 오만 (6) +7 16.07.15 679 12 21쪽
233 (22막) 세 개의 오만 (5) +8 16.07.10 685 13 22쪽
232 (22막) 세 개의 오만 (4) +6 16.07.05 634 14 18쪽
231 (22막) 세 개의 오만 (3) +9 16.06.30 576 12 18쪽
230 (22막) 세 개의 오만 (2) +6 16.06.25 651 13 18쪽
229 (22막) 세 개의 오만 (1) +6 16.06.20 730 15 16쪽
228 (막간) 현실을 마주하며 +4 16.06.15 750 16 16쪽
227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0) +10 16.06.10 729 14 21쪽
226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9) +8 16.06.05 730 12 16쪽
225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8) +4 16.05.30 698 15 19쪽
224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7) +6 16.05.25 724 11 19쪽
223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6) +4 16.05.20 955 10 22쪽
222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5) +5 16.05.14 777 12 18쪽
221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4) +2 16.05.09 703 13 15쪽
220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3) +6 16.05.04 1,028 12 18쪽
219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2) +4 16.04.28 741 16 17쪽
218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 +8 16.04.23 849 15 19쪽
217 (막간) 필요없는 증명. 필요한 증명. +10 16.04.18 739 18 13쪽
216 (20막) 증명 (9) +4 16.04.13 698 18 16쪽
215 (20막) 증명 (8) +8 16.04.08 670 20 16쪽
214 (20막) 증명 (7) +11 16.04.02 735 14 16쪽
213 (20막) 증명 (6) +10 16.03.28 783 13 15쪽
212 (20막) 증명 (5) +8 16.03.23 813 17 24쪽
» (20막) 증명 (4) +8 16.03.18 948 16 23쪽
210 (20막) 증명 (3) +10 16.03.12 813 17 20쪽
209 (20막) 증명 (2) +10 16.03.07 887 20 19쪽
208 (20막) 증명 (1) +10 16.03.02 763 18 18쪽
207 (막간) 지평선으로 향하는 한걸음을 지켜보는 사람들 +8 16.02.26 810 19 17쪽
206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0) +8 16.02.21 911 24 21쪽
205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9) +10 16.02.16 1,033 20 22쪽
204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8) +6 16.02.11 809 17 28쪽
203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7) +6 16.02.06 765 19 21쪽
202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6) +6 16.02.01 828 17 22쪽
201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5) +10 16.01.27 820 17 17쪽
200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4) +10 16.01.22 965 16 18쪽
199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3) +8 16.01.17 707 20 18쪽
198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2) +10 16.01.12 773 20 19쪽
197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 +8 16.01.07 792 21 13쪽
196 (막간) 언젠가 +4 16.01.02 947 22 16쪽
19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2) +8 15.12.28 799 25 23쪽
19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1) +6 15.12.23 933 2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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