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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50,808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6.02.26 20:09
조회
852
추천
19
글자
17쪽

(막간) 지평선으로 향하는 한걸음을 지켜보는 사람들

DUMMY

“.......이상이 재보급까지의 경계 및 정찰일정이다. 질문?”


“.......”


카논은 침묵을 공유하는 장교와 부사관들의 얼굴을 찬찬히 둘러본다. 평소 임무 하달이 끝나면 긴장으로 잔뜩 굳어있었던 그들의 표정이 어딘가 묘하게 풀어져 있었다. 무언가를 잔뜩 기대하고 있는 듯한 눈빛과, 들썩이기 시작하는 엉덩이. 여기서 자신이 다음에 내뱉을 한마디가 자신을 ‘재미없고 융통성도 없는 상관’과 ‘적당히 풀어줄 줄 아는 동료’, 둘 중 하나로 각인시켜준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카논은, 자신이 저 자리에 있었던 시절을 기억해버린 탓에 흘러나오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아직 여긴 적지야. 적당히 마시고, 임무에 차질 없게 용사들 관리 잘 해.”


“예에엣!”


“해산!”


카논의 선언을 기다렸다는 듯 환호성을 지르며 천막을 빠져나가는 승리자들. 그들의 목소리와 표정에선 생사를 넘나들었던 전투의 흔적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드라흐마 대위님은 한잔 안 하십니까?”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로 들려오는 너무도 어색한 호칭과 경어. 카논은 그 얼굴을 향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챈다.


“저까지 진탕 퍼마시고 뻗으면 내일 정찰보고는 누가 듣고 위에 올리겠습니까, 레이쇼 중위님?”


“우와, 작전장교 달았다고 이제 놀아주지도 않으려 하네?”


다른 왕실참모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너저분하던 머리를 짧고 깔끔하게 정돈한 레이쇼였지만, 여전히 반쯤 풀어헤친 정복과 어색한 중위계급장에서 느껴지는 경박함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카논은 그런 그의 경박함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뭐래, 또. 똑같은 왕실참모인 누구와는 다르게 전 지금부터 전투보고서랑 전투력보고서랑 보급현황보고서까지 싹 다 정리해야 하거든요? 좀 도와주시던가?”


“그런 거쯤이야 대충 한두 시간 써갈기면 끝나는 거 아닌가?”


“그럼 그 한두 시간만 투자하시죠? 아, 글은 읽을 줄 아시나?”


“제 자존심을 건드리려는 시도, 아주 좋아요. 근데 소용없습니다. 하하하하하!”


“나가, 이 인간아!”


우스꽝스럽게 춤을 추는 레이쇼를 향해 냅다 지휘봉을 던지는 카논. 그러나 막대기는 그의 이마에 혹을 만드는 대신 애꿎은 천막만 강타하고선 바닥으로 나뒹군다. 레이쇼는 깔깔 웃으며 지휘봉을 주워 카논을 향해 살짝 던지고는 잽싸게 천막 밖으로 사라진다. 침묵이 그림자를 몰아낸 지휘천막 안에서, 카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아 자신에게 주어진 방대한 업무를 내려다본다.


승리감이라는 각성제로도 전투의 피로를 완벽하게 지워낼 수는 없었다. 펜을 잡은 손끝에 일고 있는 미세한 떨림과 위화감.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적의 피로 흥건한 기병도가 이 손을 대신 짓누르고 있었다. 그녀의 왕은 오늘 승리의 공을 자신의 생각을 세밀하게 다듬고 철저하게 병사들을 훈련시킨 참모진에게 돌렸다. 그중에서도, 베르달에서부터 줄곧 외부인과 베르달 용사들 사이의 간격을 좁히고 훈련 및 통솔방식과 지휘체계의 통일에 몰두해온 카논의 노력은 크게 빛을 발할 수 있었다. 평생을 베르달숲에서만 싸우고 생활해온 베르달 용사들이 숲을 벗어나, 그것도 평소의 기력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로 적지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음은 운이나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이 카논 혼자서 이루어낸 결과물은 아니었다.

왕실참모의 일원 중에선 레이쇼가, 그리고 파견된 근위대 중에서는 왕녀인 리즈가 특유의 친화력으로 중앙군과 베르달 용사들 사이의 벽을 허무는데 큰 역할을 해주었다. 베르달이 대대로 중앙군과는 껄끄러운 관계를 이어오고 있었으며, 심지어 ‘광기의 꽃잎’과 ‘붉은 장미의 검성’이 베르달을 침공해왔을 때도 외부 세력에 대한 보이지 않는 경계심이 그들 사이에 널리 번져있었다는 사실을 로빈은 놓치지 않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급박한 수세에 몰렸을 때도 완벽하게 화합되지 않았던 이러한 관계를, 공세라는 환경을 계기로 돌려놓자는 생각이 훌륭하게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응?”

천막 입구로 새어 들어오는 익숙한 부산스러움에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드는 카논. 설마-하는 마음이 입으로 튀어나오려는 순간, 그녀의 적갈색 시선의 끝에서 술통을 짊어진 소란의 장본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왜 돌아왔나요, 레이쇼 중위? 내 앞에서 놀리면서 마시려고?”


“에이, 무슨 섭한 말씀을. 아무리 나라도 놀리면서 술 처먹는 짓은 안 해요. 다 같이 즐기면서 도와주려고 왔죠.”


“다같이.......?”


“네, 여기 지원자들.”


크게 웃으며 전술지도 한복판에 술통을 내려놓는 레이쇼. 그리고 카논은 그의 뒤로 따라 들어오는 뜻밖의 얼굴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 중위는 그렇다 쳐도, 시즈키치 중위랑 가슈펠라르 중위는 여기서 뭐하나?”


“잠깐, 나는 왜 ‘그렇다 쳐도’인데?!”


“중위! 몇 번 말하나? 아무리 왕녀라도 내가 상관이니 경어를 쓰라고 했잖나!”


“싫어, 귀찮아.”


카논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리즈를 제지하며 동시에 그녀의 뺨을 콰직 꼬집는다.


“내가 뭣 때문에 그 고생을 하면서 베르달 기사들한테 계급을 정착시켰는데! 중위가 그러고 다니면 의미가 없잖아!”


“아야, 아야야! 난 오빠한테도 반말하는데, 카논한테는 그러면 안 돼? 그럼 카논이 우리 오빠보다 높다는 거야?”


“그, 그건........”


순간 사고가 멈춰버린 카논. 그녀를 대신하여 레이쇼가 낄낄 웃으며 짐승 같은 왕녀를 떼어놓는다.


“대위님, 왕녀님한텐 이길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핏줄을 가장 영악하게 쓸 줄 아는 분이라니까요. 아, 그리고 셰르랑 유진 중위는 신경 쓰지 마세요. 냅두면 둘이 또 어딘가 사라져서 꽁냥꽁냥할까봐 잡아온 거니까.”


“레이쇼 중위님!” “꼬,꽁냥.......?”


버럭 화를 내는 셰르와 당황하여 얼굴을 붉히는 유진을 보며, 레이쇼는 다시 한 번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품속에 가지고 온 잔을 꺼내놓는다. 카논은 자신에게 오는 잔을 한번 거부했지만, 돌아온 건 잔을 채우며 보급현황보고서를 뺏어가는 레이쇼의 손길이었다.


“자자, 숨은 승리의 주역끼리 조촐하게 축하나 합시다.”

뭐라 한마디 하려던 카논을 가로막는 레이쇼의 목소리. 그가 싱긋 웃으며 잔을 들어 올렸고, 리즈가 재빠르게 뒤이어서, 그리고 셰르와 유진이 마지못해 잔을 올린다. 모두의 시선이 카논에게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다. 결국, 카논은 체념의 한숨을 내뱉으며 잔을 잡는다.

“살아남아 승리를 즐길 수 있음에 감사하며!”


레이쇼의 기합과 함께 둔탁하게 맞부딪치는 잔들.


“오늘 라이펠의 은총을 받은 모든 목소리들을 위해.”


그리고 인도적인 카논의 마무리와 함께 밍밍하고 미지근한 와인이 다섯 기사의 목을 타고 흘러들어간다. 달콤한 만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피로 얼룩진 숨결을 중화시키는 데에는 충분했다. ‘한 잔 더’를 외치며 스스로 잔을 채우는 리즈를 제외한 나머지는 곧바로 카논으로부터 나눠 받은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물론 보고서의 최종결정권자는 카논이었기에, 레이쇼와 셰르, 유진이 할 수 있는 것은 각종 수치와 사실관계를 대조하여 맞는지 확인하는 정도였다.



“.......5142명.”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리즈가 와인을 넘기는 소리만 가득하던 천막에서 유진의 자그마한 탄식이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뭐?”


“오늘 전사로 보고된 아군의 숫자야. 5142명. 부상자까지 합치면 8천 가까이 돼.”


셰르를 향해 천천히 자신이 읽던 보고서를 내미는 유진. 셰르가 그것을 집어보기도 전에 카논의 목소리가 먼저 나온다.


“생각보다 피해가 크지. 분위기만으로는 마치 압승이라도 한 것 같지만, 이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재보급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거야.”


“국경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은 겁니까?”


“여기서 기세가 꺾인 것처럼 보일 순 없어. 일단 이쪽의 전투력이 많이 손실되었다고 하더라도, 적의 요격군은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는 게 정황상 더 중요하니까. 승리 그 자체가 지금의 우리에겐 동기이자 원동력이지.......”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는 듯, 셰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진에게 보고서를 돌려준다.


“충원될 인원들은 아마 베르달이 아닌 통합군의 일부일 텐데....... 사실 회복되었다고는 해도 베르달 전력은 아직 충분하지 않은 상태였잖습니까. 지금 데리고 나온 인원이 베르달에서 가용할 수 있는 최대 전력이라고 보는 편이-”





“정말로 우리가 마즈다힐을 점령할 수 있을까요?”


통상적인 전술논의로 이어지려던 셰르의 말을 끊어버리는 레이쇼. 그의 목소리는 무심하게, 그러나 날카롭게 술잔 위의 눈동자들을 사로잡는다.


“.......레이쇼 중위, 지금 그게 무슨-”


“아니, 말 그대로. 대위님, 중위님들. 정말로 우리가 2군단을 잡아먹고 마즈다힐을 점령할 수 있다고 봅니까?”


“질문에 다른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순수하게 답변 드리겠습니다. 네,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뭐를 근거로요?”


변함없는 레이쇼의 느슨한 태도에 카논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진다.


“지금 우리가 여기서 승리의 축배를 들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근거 아닌가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선제공격에 성공했고, 적의 요격군까지 격파해냈어요. 처음엔 의심했던 사람들도 지금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카나반의 승리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적의 요격군은 그 구성으로나 규모로나 적 지휘관의 잘못된 판단과 오만에서 기인한 겁니다. 카논, 만약 적의 2군단장이 주변의 반대와 본인의 자존심 박살을 무릅쓰고, 모든 변수를 개의치 않고서 군단의 모든 전력을 동원하여 우리를 공격했다면, 그때도 지금과 같은 결과가 나왔을 거라 확신할 수 있어요?”


“그건.......”


가슴은 망설이지 말라 외치고 있지만, 카논은 이성의 판단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망설임이 곧 대답이 된 듯, 레이쇼는 술잔을 비우며 말을 이어나간다.


“처음 침공 작전을 들었을 땐 그러려니 했어요. 빡세게 훈련을 받고 훈련을 시키면서 자신감도 생겼죠. 저는 침공이라는 현상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저를 포함한 모두가 기대한 대로 우린 첫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우릴 지켜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린 할 수 있다는 걸 각인시켜 줬어요. 그 증명을 위해 죽어간 5142명. 전혀 아깝지 않다고 봅니다. 하지만 말이죠.......”

말끝을 흐리며 잔을 채우는 공화국의 기사. 그의 경박했던 미소는, 어느새 씁쓸함을 씹고 있는 지휘관의 웃음으로 바뀌어있었다.

“여기서 한걸음 잘못 내딛었다가, 그 5142명의 희생이 물거품이 될 것 같아서 불안합니다. 예, 물론 상황은 좋아요. 상징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뛰어난 업적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우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까요? 평원에서 비슷한 규모의 적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것과, 우리의 배가 넘는 상대가 버티고 있는 성을 점령하는 건 다른 이야기입니다. 더욱 커다란 희생은 물론이고 잘못하면 지금 희생된 5천 명의 영혼까지 무의미하게 돼버릴 수 있다는 거예요.”


“음, 그러니까 레이쇼는, 이 정도에서 만족하고 돌아가자- 그거야?”


검붉은 눈동자를 품고 있는 왕녀의 얼굴이 무엇을 품고 있는지 레이쇼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임에 망설이지 않는다.


“네에, 뭐, 그런 셈이죠. 지금 다들 웃고 떠들며 승리를 만끽하고 있지만, 그 승리가 생각보다 많은 피로 물든 전초전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을 겁니다. 승리했기에 더욱 커다랗게 다가오는 불안. 어느 누가 지금 확신을 가질 수 있겠어요?”


흐응- 콧소리를 내며 탁자에 엎드리는 리즈. 동시에 셰르와 유진은 자연스럽게 카논의 눈치를 살핀다. 말단 현장지휘관이나 다름없는 중위가, 그것도 왕실참모의 일원이라는, 그 누구보다도 확신에 젖어있어야 할 장교가 술김에 내뱉은 말이라고는 용납할 수 없는 의심발언. 당장 카논의 호통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 그들이었지만,


“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술잔을 내려놓는 카논의 목소리는 차분하기만 했다.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비트는 레이쇼와, 놀란 표정의 셰르와 유진. 카논은 펜까지 놓은 채, 빈손으로 자신의 구릿빛 이마를 쓸어 넘긴다.

“처음 작계를 짤 때도 최종목표를 마즈다성으로 잡은 폐하의 의지에 선뜻 확신을 가질 수 없었어요. 정말로 폐하께선 우리의 전력으로 마즈다힐을, 2군단을 격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 라고요. 그리고 오늘 전투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승리 후에 이어질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습니다.”


“대위님-”


“하지만.”

혹여 누가 들을세라 자신의 말을 제지하려는 셰르를 가볍게 짓누르는 카논의 눈빛. 그녀의 적갈색 눈동자엔 그 어느 때보다도 굳건한 확신이 빛나고 있었다.

“저는 오늘 전투를 통해 어째서 폐하께서는 의심하지 않고 계셨는지, 어째서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을 가능하다 생각하고 계셨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분의 확신은 우리의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어요. 바로-”




“어휴, 칙칙하게 여기서 뭣들하고 있냐?”




영력이 실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를 내뿜으며 샛노란 태양이 천막입구를 비집고 등장한다. 그 태양의 새빨간 혀끝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리즈였다.


“지나 언뉘이이!”


“우리 귀여운 아가씨! 오늘 수고했엉!”


자신의 가슴계곡으로 돌진해 들어온 왕녀의 얼굴을, 마치 애완견처럼 마구 비비는 지나. 리즈는 리즈대로 그게 마음에 드는 듯, 얼굴 표정이 망가지는 것도 상관치 않고 지나의 품으로 더더욱 깊이 파고든다.


“지나 언-, 아니, 나이트 마제스티! 여긴 어쩐 일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취하는 카논. 뒤이어 셰르와 유진이 일어났지만, 레이쇼만큼은 웃으며 손을 흔들 뿐 별다른 예를 취하지 않는다.


“앉아, 앉아. 걍 언니라고 부르라니까 뭘 또 새삼스럽게 그래?”


“허나-”


“허나는 무슨. 붉은 나무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말 편하게 해.”


“왕비가 그러시는데 따라야지 뭐.”


“레이쇼 당신은 너무 편하잖아.”


“하하핫!”


애초에 전술회의를 고려하여 만들어진 원형탁자였기에 자리를 하나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나는 그런 동료들의 움직임을 손짓으로 제지하며 술통 옆에 술통을 내려놓는다.


“아냐 됐어. 걍 니들 또 맛없는 술 먹고 있을 거 같아서 몰래 꽁쳐둔 거 나눠주려고 온 거야.”


“크으, 역시 우리 생각해주는 건 왕비님밖에 없다니깐.”


“아, 태하 보급관한텐 비밀이다?”


가장 먼저 술통을 향해 잔을 들이미는 레이쇼, 그리고 질세라 그의 턱을 밀치며 들어오는 리즈.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소란에 셰르와 유진은 웃음을 터트린다. 그러나 카논만큼은, 향긋한 술통에 현혹되지 않고서 지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ㅌ......, 지나 언니. 혹시 어디 아파?”


“응? 아니, 왜?”


“안색이 안 좋은데?”


카논에 말에 그제야 자신의 뺨을 만져보는 지나. 그녀의 얼굴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들고 있었던 술통을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닐 터. 그럼에도 카논은 지나를 감싸고 있는 묘한 위화감을 잡아낸 것이다.


“아아, 여기 오기 전에 루디 경이랑 한잔 걸쳤거든. 피곤한데 마셔서 조금 취했나 봐. 가서 쉬어야겠다.”


“응, 그래. 빨리 들어가. 폐하께서 걱정하실라.”


“다들 적당히 마시고, 오늘 고생 많았어!”


지나는 해맑게 손짓하며 셰르와 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먼저 달아나듯 자리를 비운다. 그 발끝에 서려있는 비틀거림이 카논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지만, 그런 그녀의 의식을 레이쇼의 느긋한 목소리가 되돌려놓는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예?”


어느새 카논의 곁으로 다가와 새로운 향이 담겨 있는 잔을 내미는 레이쇼. 카논은 엉겁결에 잔을 받고 건배까지 해버린다.


“아니, 아냐. 아까 마지막 대답을 들은 거 같아서. 맞죠?”


“.......예.”


태양이 사라진 그림자를 응시하는 카논의 눈빛. 그곳엔

왕은 알고 있었지만, 다른 모두가 의심하고 있었던 빛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당장 다음 전투가 어찌될 지는 아무도 모르죠. 패배할 수도 있고, 여기에 있는 사람 중 누군가도 다음엔 술잔을 들지 못할 수도 있어요.”

코와 혀를 자극하는 달콤한 향을 품은 채, 카논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이는 레이쇼. 그는 자신이 머금은 그 향이 너무도 만족스러운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카논의 시선을 쫓아간다.


마즈다힐 전초전이라 불린 오늘의 전투.

그 자리에 있었던 자라면 모두가 공감하는 단 하나의 사실.




“뭐 그래도....... 저 왕비님이라면 한 발자국 정도 더 걸어볼 만하겠는데요?”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8

  • 작성자
    Lv.87 네모구름
    작성일
    16.02.26 20:16
    No. 1

    오늘도 좋은 글 보고 갑니다.
    라루사님보다 먼저 댓글을 달다니!!!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2.27 14:11
    No. 2

    엌 네모구름님 빠른 감상 감사드립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니푸르
    작성일
    16.02.26 22:50
    No. 3

    네모구름님 빠름ㄷㄷ
    사실 제가 늦었지만요ㅋㅋ
    마즈다힐 전투는 완전히 지나를 위한 무대인것 같네요. 진정한 검성으로의 각성, 그리고 공식적인 데뷔전!
    그런데 카나반에 진정한 검성이 생겼으니 기만용 검성인 벤은 짤리려나...ㅠㅠ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2.27 14:11
    No. 4

    라루사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벤이 실직하나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5 고생문
    작성일
    16.02.28 23:16
    No. 5

    작가형 어디갔어 현재 내가 돈이 너무 없어서 무료로 봐서 너무 좋긴하지만.. 이건 유료해도 볼 작품이야.. 근데 왜 댓글이 이거밖에없어?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2.29 08:01
    No. 6

    으잌 저 여기있습니다 고생문님, 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evolutio..
    작성일
    16.03.25 12:47
    No. 7

    아.. 역시...오랜만에 와도 여전한 감동...ㅠㅠ 그나저나 카논하고 레이쇼가 누군지 기억이 안난닼ㅋ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3.26 18:34
    No. 8

    에볼루션님 언제나 감사드려요!
    카논과 레이쇼 모두 벤의 첫출정 때 부관을 맡았던 사람들이죠 ㅎㅎ
    카논은 전 아르바티앙 시장이자 현 북부사령관인 자히르 드라흐마의 딸이기도 하고, 레이쇼는 벤에 의해 강제로 장교임관을 당했(?)었습니다 :)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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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22막) 세 개의 오만 (14) +10 16.08.24 585 13 16쪽
241 (22막) 세 개의 오만 (13) +9 16.08.19 455 13 26쪽
240 (22막) 세 개의 오만 (12) +6 16.08.14 501 9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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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22막) 세 개의 오만 (3) +9 16.06.30 584 12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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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0) +10 16.06.10 737 14 21쪽
226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9) +8 16.06.05 736 12 16쪽
225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8) +4 16.05.30 703 15 19쪽
224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7) +6 16.05.25 730 11 19쪽
223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6) +4 16.05.20 960 10 22쪽
222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5) +5 16.05.14 782 12 18쪽
221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4) +2 16.05.09 709 13 15쪽
220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3) +6 16.05.04 1,035 12 18쪽
219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2) +4 16.04.28 748 16 17쪽
218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 +8 16.04.23 856 15 19쪽
217 (막간) 필요없는 증명. 필요한 증명. +10 16.04.18 744 18 13쪽
216 (20막) 증명 (9) +4 16.04.13 705 18 16쪽
215 (20막) 증명 (8) +8 16.04.08 677 20 16쪽
214 (20막) 증명 (7) +11 16.04.02 741 14 16쪽
213 (20막) 증명 (6) +10 16.03.28 788 13 15쪽
212 (20막) 증명 (5) +8 16.03.23 817 17 24쪽
211 (20막) 증명 (4) +8 16.03.18 952 16 23쪽
210 (20막) 증명 (3) +10 16.03.12 816 17 20쪽
209 (20막) 증명 (2) +10 16.03.07 892 20 19쪽
208 (20막) 증명 (1) +10 16.03.02 770 18 18쪽
» (막간) 지평선으로 향하는 한걸음을 지켜보는 사람들 +8 16.02.26 853 19 17쪽
206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0) +8 16.02.21 916 24 21쪽
205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9) +10 16.02.16 1,040 20 22쪽
204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8) +6 16.02.11 815 17 28쪽
203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7) +6 16.02.06 771 19 21쪽
202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6) +6 16.02.01 832 17 22쪽
201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5) +10 16.01.27 827 17 17쪽
200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4) +10 16.01.22 970 16 18쪽
199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3) +8 16.01.17 711 20 18쪽
198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2) +10 16.01.12 778 20 19쪽
197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 +8 16.01.07 799 21 13쪽
196 (막간) 언젠가 +4 16.01.02 951 22 16쪽
19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2) +8 15.12.28 808 25 23쪽
19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1) +6 15.12.23 938 2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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