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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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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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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6.03.23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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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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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글자
24쪽

(20막) 증명 (5)

DUMMY

어제, 그리고 오늘에 걸쳐 지겹게 들어왔던 폭음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일반병사들조차도 곧바로 그 위화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충격을 받은 것은 중앙 성문 위의 망루, 댄 스파인을 포함한 제국군의 지휘부였다. 갑작스러운 충격파와 거대한 진동에 전술판과 탁자는 물론 참모들까지도 바닥을 나뒹굴어야 했다. 그러나 성벽이 무너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거센 혼란 속에서도, 우직한 댄의 붉은 시선만큼은 성벽 위로 피어오르는 마력의 잔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부관!”


“예, 예엣!”


아직도 먹먹한 귀를 회복시키지 못했는지, 부관의 대답은 평소보다 과하게 크고 또렷하다.


“예비대의 투입을 중지하고 모든 수비군을 성내로 퇴각시켜라.”


“예? 하지만-”


“다르펜타가 모두 무력화되었다. 적 전투마법사의 마력이 아직 건재하니 이 이상 성벽을 고집할 이유가 없어. 병력을 물리고, 유리한 지형에서 적을 맞이한다. 각 지휘관에게 하달해.”


“.......옛, 알겠습니다!”


간신히 균형을 회복하고 일어선 부관은 아무런 흔적조차 남지 않은, 다르펜타 삼포반이 있던 자리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몰라도 삼포반은 다른 다르펜타에게 직격당한 것보다도 더욱 처참하게 박살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힘입어 더욱 빠르게 접근해오기 시작하는 카나반의 공성탑들. 부관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퍼뜩 정신을 차린다.


“아, 그리고.”

곧바로 통신병에게 돌아서려는 부관을 붙드는 댄의 목소리. 부관은 그가 자신을 향해 내민 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다음 말을 듣고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군단장님 연결해.”











“어, 알았어. 계획대로 해~.”

평온한 집무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아실레마제국 2군단장 스이바노 브란트의 목소리와 표정은, 멀지 않은 곳에서 마즈다성과 2군단의 운명이 걸린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하고 가벼웠다. 그의 목소리만 높게 울려 퍼지는 집무실은 ‘집무’를 목적으로 한다기보다는 별장에 가까운, 아늑하고 잘 꾸며진 공간이었다. 겉보기에도 푹신한 가죽소파에 육중한 몸을 박아 넣은 채 주인의 이름이 새겨진 명패를 받침 삼아 발을 올려놓는 브란트. 물론 책상 위엔 빈 와인병들과 빌 예정인 와인병들만이 군단장으로서의 집무를 대신하여 샹들리에의 불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야, 꼬마야. 너네 아빠엄마 오셨단다. 좋지? 응?”

울리는 건 그의 목소리뿐이었지만 그의 그림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섯 개의 거대한 창문으로 쏟아지는 빛으로도 밝히지 못하는 집무실의 가장 깊은 구석. 반도 각지에서 모은 값비싼 와인들을 품고 있는 장식장 바로 아래, 먹색 눈동자 하나가 생기를 품은 채 번뜩이고 있었다.

통통하던 볼살은 아무것도 먹지 않아 쪽 들어갔으며, 잠을 자지 않아 눈 밑으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로즈는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 그녀의 핏속에 흐르는 특유의 무게와 열기 덕분에, 만약 그녀의 키가 조금 더 크고 손에 작은 날붙이라도 하나 쥐고 있었다면 브란트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를 ‘적’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태까지 계속 그래왔던 것처럼, 브란트는 소녀의 침묵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와인으로 반들거리는 입술을 움직인다.

“이야, 그래도 솔직히 놀랐어. 설마 진짜로 저런 규모의 군세로 우릴 치려고 할 줄이야. 다가오지도 못하고 끝날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도 성벽까지 넘고 들어온다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대단한 거 같아.”

대답이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술주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냐? 여긴 마즈다힐의 마즈다성이야. 성벽을 넘어온다고 해도, 정말로 그것뿐이라고. 밖에서 맨날 깨지기만 하니까 우리가 좆으로 보이나 본데, 나도 그렇고 애새끼들도 그렇고 이제는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한 사투란 말이야? 가장 고귀하던 자들이 가장 처절해지는 순간, 무엇까지 할 수 있을지 너희들은 상상도 못 할걸?”


“.......”


소녀는 가만히 군단장의 기름진 미소를 올려다본다. 그녀 주변으로 움직임을 봉쇄할 족쇄나 철창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로즈는 저 뒤룩뒤룩 살찐 남자가 제아무리 취한들 자신은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저 남자의 자신감과 미소가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





“물러나라! 물러낫! 안에서 전열을 정비한다!”


예비대의 충원이 중지된 상태에서 성벽 위에 남아있던 수비병만으론 공성탑으로부터 쏟아지는 카나반군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댄의 명령대로 모든 수비병이 철군하기 시작했는데, 분노와 복수를 다짐하는 병사들 사이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가 있었다.


“이봐, 쥬넨!”


쥬넨은 병사들 사이를 비집고 자신을 찾아낸 댄의 목소리에도 곧바로 반응하지 못한다. 그가 계단을 뛰어내려와 자신의 어깨를 잡아채고 나서야 쥬넨은 당혹과 경악이 뒤섞인 얼굴로 댄을 돌아볼 수 있었다.


“.......아, 장군님.”


“왕비는, 그년은 어떻게 됐나?”


“.......”


무거운 침묵이었지만, 댄은 쥬넨의 표정과 흔들리는 시선으로부터 어렵지 않게 답을 받아낸다.


“.......자네가 직접 언급한 거야. 그녀를, 변수를 잡을 수 있다고. 그래서 특별히 편제를 고치면서까지 스무 명을 만들어주었던 거네. 그럼에도 실패했다면, 나도 더 이상 자네의 뒤를 봐줄 수는 없어.”


“.......”


“돌아가서 다시 기병대의 지휘를 맡아. 이 일에 대한 판단은 군단장님께 여쭐 것이네. 지금은 만회하는 일만 생각해.”


만회.

다시 목소리를 드높으며 병사들 사이로 파묻히는 댄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쥬넨은 걸음을 멈추고 그 단어에 대해 생각한다. 스무 명의 부하를 방패 삼아 겨우 자신만 목숨을 부지하여 도망쳤다는 굴욕보다도 더욱 무겁게 그의 이성을 짓누르고 있던 진실.

자신이 들고자 했지만 결국 들지 못했던 검. 그 검을 들고 나타난 태양 같은 그녀를,

쥬넨은 두려워하면서도 질투하고 있었다.


혈통 따윈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그는 카나반에서 근위대장이라는 직위에 오를 때까지 그 혈통이란 것에만 안주하다가 몰락했던 기사들을 수없이 봐왔다. 그랬기에 그 누구보다 노력했고, 그 누구보다 커다란 결실을 얻었다. 그가 공화국에서 존경했던 기사는 오직 한 명이었지만, 그 ‘한 명’의 후예가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면서 오히려 그 생각을 굳히게 됐다.

아뮤르 지나는 그런 존재였다.

온몸의 흉터는 아무것도 증명해주지 않는다. 그녀가 받은 이름, 그녀가 받은 핏줄이 언제나 그녀를 대변해왔다. 그녀가 이름에 걸맞은 존재였냐고 묻는다면, 쥬넨은 단호히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결국 평생에 걸쳐 쌓아왔던 노력의 결과물에 터무니없이 배신당하고, 기사로서의 존재이유가 퇴색되어버린 탓에 제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곳에선 자신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다시 만난 그녀는,

쥬넨에게 있어선 악몽에 가까운 존재가 되어있었다.


“.......”


두려움과 질투가 걷히고, 다시 떠오른 먹색 눈동자에 불꽃이 일렁인다. 이곳에 온 뒤로 기사로서 강해졌을지는 몰라도, 인간으로서는 안일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카나반에서 근위대장에 오를 수 있었던 원동력. 그것은 모든 절망과 상황을 집어삼킬 수 있는 ‘집착’이었다. 쥬넨은 실로 오랜만에 자신의 검이 살아숨쉬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성문을 열어라!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


기병대가 각각 북쪽과 남쪽으로 적을 교란시킨 덕분에 다르펜타를 잃은 마즈다성의 수비대는 사방으로 분열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결국 카나반군에게 성벽과 성문의 통제권을 주게 되었다- 는 것이 표면적인 상황이었지만, ‘베르달의 늑대’ 크라트는 조금 더 깊은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올리!”


“어!”


거대한 성문이 굉음을 내며 뒤틀리기 시작하고, 성벽 위에서 지휘를 내리던 크라트는 성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큰딸의 이름을 부른다. 낙마로 인해 의수와 연결되는 어깨의 부상은 물론이고 전신에 크고 작은 타박상을 입은 그녀였지만, 워낙 출진의지가 강했던 탓에 그녀가 본대의 선봉에 서는 것을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놈들은 안쪽에서 전열을 다듬고 우릴 공격할 생각이다. 재정비가 더 빠른 쪽이 우위에 서게 돼. 지휘관들이 이 사실을 숙지할 수 있도록 전파해라.”


“알았어.”


제국군의 예비대가 쏟아져 내려왔던 계단으로 이제는 카나반의 병사들이 내려서고 있었다. 곧이어 결코 움직일 것 같지 않았던 성문 또한 활짝 입을 벌려 숲의 군대가 입성하는 것을 환영했고, 거칠 게 없는 그들은 지휘관들의 능숙한 명령 아래 신속히 합류하여 진형을 꾸리기 시작한다.


“대장님!”


“왕.”


단번에 계단을 뛰어올라 왔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다가온 로빈을 향해 짤막한 고갯짓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크라트. 높은 성벽, 그중에서도 망루 위에 있는 그들이었기에 마즈다성의 내부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다.

아무리 군사거점이라고는 해도 마즈다성은 단단한 외견과는 달리 너무도 빈약한 내부를 지니고 있었다. 도시를 상징하는 드높은 건물은 보이지 않았고, 내성과 외성의 경계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계획된 도시처럼 구역과 구역을 나누는 도로만큼은 깔끔하게 정비된 상태였지만, 그 내부를 바라보는 순간 묘한 위화감이 크라트와 로빈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너무 조용한데요?”


“음.”


그 무엇보다 군사 활동을 우선시하는 제국군이 민간인과 군수업체에게 피난령을 내렸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민간인을 방패로 시가전을 펼치는 게 제국군 입장에서도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터. 그러나 도시의 도로가엔 사람의 그림자는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질 않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카나반 기병대의 교란으로 인해 병력을 나누었다고는 해도 2군단이 성벽에서 희생한 군세는 치명적인 수준이 아니다. 분명 제대로 된 전투력을 보존하고 반격을 위한 재정비를 하고 있어야 할 텐데, 도시 안은 적막만이 가득했다.


“뭔가 노리고 있는 모양인데요.”


“신중하게 접근해야겠지. 부관! 대열을 유지한 채 천천히 시가지를 포위하라고 올리에게 전달해라.”


“알았어, 대장!”


피로 적신 가죽옷을 걸친 베르달의 병사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간다.

아직 무거운 전장의 공기. 크라트는 그 맞바람을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 도시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에게 혼잣말을 내뱉는다.


“언제까지 숨어있을 참이냐, 스이바노 브란트.”




===============




“왜 그래?”


도시에 들어온 후 줄곧 표정을 일그러트리고 있는 왕녀를 향해 결국 참다못한 유진이 걱정스럽게 묻는다. 수백 명의 베르달 용사들이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냄새가 구려.”


“냄새? 무슨 냄새?”


“피 냄새.”


본래 리즈는 저격특무대와 함께 상가와 건물들의 옥상을 누비며 사주경계를 취해야 했지만, 어째선지 유진과 셰르의 곁에서 흐느적거리며 불평을 내뱉는 중이었다.


“당연히 피 냄새가 나지, 전장인데. 한두 번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왜 그래?”


핀잔 섞인 질책과 함께 셰르가 옆구리를 찔러보지만, 왕녀는 구역질하는 시늉까지 해보이며 고개를 젓는다.


“아냐, 그런 게 아니라....... 아으,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도시 전체가 피를 뒤집어쓴 거 같아.”


“뭐어?”


터무니없다는 듯 얇은 눈매로 노려보는 셰르. 그러나 진짜로 왕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거야? 후방으로 빠질래?”


“야, 엄살이야 엄살. 걔가 언제 아픈 거 봤냐?”


“셰르! 말을 왜 그렇게 해?! 리즈 얼굴 안 보여?”


“어, 얘 왜 이래.......? 진짜로 아프면 빠져. 왜 여기서-”


셰르와 유진이 동시에 검을 뽑아든다. 무너질 듯 흐느적거리고 있던 리즈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검붉은 눈동자를 불태우기 시작한 덕분이었다. 이 땅에서 그녀의 후각, 그녀의 직감보다 더 정확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둘이었기에, 리즈의 행동이 명확하게 다가올 수 있었다.


“.......온다.”


“뭐? 뭐가? 적이야?”


셰르가 영력의 날을 세우고 주변 건물을 둘러보지만, 그의 눈으로는 그 어떠한 움직임도 잡아내질 못한다.


“아니.”

천천히 활을 치켜드는 리즈. 그에 맞춰 주변 공기가 빠르게 얼어붙기 시작한다. 먼 곳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오고, 긴장한 병사들이 숨결이 거칠어지는 순간,

“더 기분 나쁜 거.”



사방에서 ‘그들’이 튀어나온다.

기사들조차 감지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황한 카나반군은 처음엔 그들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다. 마치 야수와 같은 움직임과 무법성, 그리고 엄청난 숫자에 카나반군의 대열은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고, 선두에서 군을 이끌던 유진과 셰르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유진!”

등이 노출된 유진을 끌어당기며 대신 검을 맞받아치는 셰르. 그는 자신의 검에 의해 멈춰 세우고 나서야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건......”


붉게 충혈된 두 눈.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날카로운 송곳니. 본래의 얼굴색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얼굴을 휘감고 있는 붉은 문신은 누군가의 피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셰르는 곧바로 그 ‘괴물’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너무도 익숙한,

먹색의 제복이었으니까.


“제국군?”


셰르의 질문에 답이라도 해주려는 듯, 제국군은 비명에 가까운 기이한 고함을 내지르며 셰르의 품으로 달려든다. 셰르는 곧바로 검을 세워 달려드는 그림자의 중앙으로 날을 박아 넣었지만, 완전히 숨이 끊기기 전까지 집요하게 어깨를 파고들어오는 손톱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괜찮아?!”


“괜찮아. 대체 이것들은 뭐야? 제국군복인데?”


고통을 삼키는 셰르의 입술과 팔뚝을 따라 흘러내리는 그의 피를 눈치챈 유진이 다급하게 다가오지만, 셰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크게 팔을 돌리며 오히려 주변을 크게 살펴본다. 이미 척후병과 저격특무대는 모조리 당한 모양이었다. 대열은커녕 예상할 수 없는 규모와 방향에서 몰려드는 ‘제국군’탓에 이미 카나반군은 붉은 혼란으로 물들어있었다.


“제국군 맞아.”

목에 박아 넣은 단검을 도로 빼내며 리즈가 담담하게 답을 내어놓는다. 물론, 이어진 그녀의 첨언은 가장 확실하게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위험해.”








“저, 저게 뭐죠?”


로빈이 마저 경악을 삼키기도 전에 크라트가 곧바로 성벽에서 뛰어내린다. 아찔할 정도의 높이였지만, 영력이 그의 다리와 관절을 지탱해주었기 때문에 별다른 충격 없이 바닥에 착지할 수 있었다. 그 뒤 늑대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성문 우측의 하수로였다.

크라트는 망설이지 않고 덮개를 벗겨내어 그 안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묻어나온 ‘하수’의 냄새를 맡고 그의 얼굴엔 확신이 번져나간다. 그러나 그 확신은 불길한 확신이었다.


“대장님?”

따라 내려온 로빈을 향해 하수가 묻은 손을 내미는 크라트. 어둠에선 벗어난 그 색을, 로빈이 알아보지 못 할리 없었다.

“.......이건.......”


“이 도시에 존재하고 있던 모든 민간인과 시민들. 그들은 피난 가거나 사라진 게 아니다. ‘다른 형태’로 이 도시와 2군단을 위해 희생당한 것이지.”


“네? 그게 무슨-”


[‘피의 축복’이란 거다.]


마지막 대답은 크라트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다. 하수로의 그림자에서 스멀스멀 어둠이 삐져나오더니, 이내 소년의 형상을 이루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그의 하얀 손은 ‘하수’의 내용물로 인해 붉게 물들어있었다.


“.......데로.”


“니 새끼들이 숲에서 세뮈엘년한테 받은 것과 비슷한 거야. 그년이 ‘숲의 자손’들에게 ‘숲의 축복’을 내렸다면, 지금 저 새끼들은 ‘피의 자손’들로서 ‘피의 축복’을 받은 거야. 그것도 도시 전체에 말이지. 정말 그 새끼다운 방식이긴 해.”


진실을 알게 된 순간,

로빈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도시 전체에 내려진 피의 축복.

그리고 그것을 위해 희생된 ‘피’의 실체는.......


“.......이건....... 이건 도저히-”


“정신 차려라, 왕.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참혹한 영광이더라도, 그 영광은 승리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거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지 않아도 지금 카나반군이 급격하게 밀리고 있다는 사실은 함성으로도 알 수 있었다. 도시를 아우르고 있는 피의 축복과 그 축복을 받은 제국군은 분명 예상치 못한 변수. 그러나 이 혼란을 빠르게 수습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대장님! 기병대에게 곧바로 합류하라고 통신을 보내겠습니다! 지금으로선 우리 쪽이 병력을 집중시키는 게 더 필요할 겁니다!”


“알겠다. 난 현장지휘를 맡지. 후방지휘를 부탁하마.”


총지휘관이 스스로 전력이 되기 위해 자리를 이탈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로빈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통신병을 불러 빠르게 다시 성벽에 올라섰고, ‘참상’이라 부를만한 전장을 한눈에 담는다.


“통신병, 기병대로부터의 연락은?”


“동쪽에서 적 기병대가 출현하여 교전 중! 양측 모두 발이 묶여있다고 합니다!”


“.......하아, 쥬넨 이 망할.......”


실로 뼈아픈 순간에 움직였다.

지휘관의 역량이나 빛나는 전술은 이미 아무런 소용이 없다. 지금 도시 안의 상황은 그야말로 야만적인 힘 싸움 그뿐. 밀리느냐 밀리지 않느냐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힘이다. 작은 머릿수라도 아쉬운 이런 때 기병대를 불러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도 아까운 손실이었다.


피의 축복을 받은 제국병사와 기사들이 매섭게 카나반군을 몰아치고 있었다. 붉은 강이 발아래에서 흐르고 있는 한, 그리고 그들의 뺨과 입술에 붉은 흔적을 묻히고 있는 한, 그들은 어떤 야수보다도 치명적일 터. 무법성과 잔인함 그 자체야말로 이 도시에서 가장 훌륭한 전략. 시가지를 포위하고 있던 숲의 물결은 점점 성벽을 향해 물러나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병력이 있었더라면.......’


총지휘의 책임을 지고 있으면서도 그 어떤 한마디 내뱉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로빈은 무력함을 씹는다. 애초에 ‘성벽을 넘은 다음’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이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싸울 만하다’라는 생각만을 가지고 숲을 벗어난 게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제국 2군단, 이들의 발악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로즈는 그저 단순한 미끼였는지도 모른다.


이 성문을 물러나게 된다면, 잃는 것은 실패하는 오명과 병사들, 기사들의 목숨뿐만이 아니다.

베르달, 그리고 베르달을 넘어 하나의 시대와 도전이 끝나버린다.


물러설 수 없지만, 나아갈 수도 없다.


멈춰버린 머리를 붙잡고 신음하는 로빈은, 저 먼 곳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마찰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음? 폐, 폐하!”


“.......뭔가.”


“북문이....... 북쪽의 성문이 열립니다!”


“뭐?”


황급하게 고개를 들어 부관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목을 빼는 로빈. 그의 말대로, 절대 열릴 일이 없는 마즈다성 북문이 서서히 균열을 내며 시끄럽게 울부짖고 있었다.


“어, 혹시 아군 기병대인가? 아아, 아냐, 그들이 견제를 뚫고 성문을 돌파할 리가....... 아.......”

허황되고 짧은 희망 끝으로 찾아오는 긴 탄식.

로빈은 저 균열의 정체를 곧바로 깨닫는다.

“.......아군 기병대가 당했구나. 북문을 열고 적 기병대가 이쪽으로 합류하려는 거야. 이 상태에서 측면이 찔리면....... 부관! 크라트 대장에게 퇴각 준비하라고 전해!”


“옛!”


전열이 무너지고 적과 아군이 뒤엉킨 상태에서 퇴각, 거기에 적 기병대의 침투까지 이어진다면 살아서 이 성문을 빠져나갈 수 있는 인원은 오분의 일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로빈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여기서 잃을 수는 없었으니까.


“.......폐하!”


“왜?”


로빈의 목소리엔 약간 짜증이 묻어있었다. 지금 무슨 보고가 들어오든 좋은 소식일 수가 없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관은 대답하지 않는다.

멍하니,

북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로빈은 부관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북쪽으로 검붉은 눈동자를 움직인다.


북문 망루로 이어지는 성벽 위로,


익숙한 그림자 하나가 크게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어어어어어이! 얌마, 로비인!”


붉은 절망의 함성을 무너트리며 확실하게 귀를 파고드는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




로빈의 입가로 미소가 번지기도 전에,





벤은 다시 한 번 크게 팔을 흔들며 친구의 이름을 불러온다.





“로비이이이인! 마법사 좀 빌리러 왔어!!”





동시에 북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군세는,


남색의 물결이었다.








=====================================







“그래서, 결국 그들이 뭘 할 수 있는 겁니까?”

사방이 훤히 트인 대통령집무실. 반쯤 누운 채로 자신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는 재규를 그륜은 뭔 개소리냐는 듯한 얼굴로 올려다본다.

“침묵의 기사단 말입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카나반이 마즈다힐을 점령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잖습니까. 근데 그들이 무슨 수로, 그리고 각하가 무슨 수로 그걸 막으라는 겁니까?”


“당연히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 최소한의 움직임, 최소한의 노출이야말로 그들이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니까.”


“그런 것치고는 카나반의 여왕에게 심한 짓을 했던 거 같은데요.”


“아아, 그건 심각한 변수였으니까. 걔네는 뭔가 틀어질 만한 낌새를 더럽게 싫어하거든.”


“카나반의 마즈다힐 침공이 그 정도 낌새는 아니라는 겁니까?”


“아니긴, 씨발 더하면 더했지.”


“그런데 왜-”


자세를 고쳐 앉기 위한 수단으로 재규의 저고리를 잡아당기는 그륜. 덕분에 재규는 반강제적으로 대통령의 맞은편에 앉아야 했다.


“놈들은 일단 날 떠보는 거야. 내가 제대로 움직이는지 아닌지 확인해보려는 거겠지.”


“근데 아무것도 안 하셨잖아요.”


“당연하지! 나한테 득 될 게 없는데!”


“.......그쯤 되면 이제 신념이라고 불러도 되겠군요.”


“비꼬는 거냐?”


“설마.”


작은 탁상 아래에서 그륜이 새로운 찻잔을 꺼내든다. 재규는 한껏 예를 취하며 그로부터 차를 받아들었다.


“직접 움직이지 않는다면, 3자를 통해 간섭을 한다는 이야기인데. 국가와 국가 간, 그러니까 국가규모의 분쟁에 한낮 비밀단체 따위가 어떻게 간섭할 수 있겠습니까?”


뜨거운 열기를 식히기 위해 후후 바람을 내불던 그륜이 재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음흉한 웃음소리를 내뱉는다. 그 뒤틀린 표정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재규는 불편할 수밖에.


“그건 네가 아직 놈들을 몰라서 그래. 한낮 비밀단체 따위라고? 너 내가 그들의 후원자라는 사실을 잊은 거냐?”


“네, 하지만-”


“그들의 후원자가, 나 혼자뿐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재규의 손이 찻잔을 움켜쥔 채로 굳어버린다. 그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그륜은 낮게 웃으며 입술을 축였지만.





“국가규모의 분쟁? 그러면,



국가규모로 개입하면 되는 거야.”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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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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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막간) 하나의 밤하늘, 세 개의 달빛 +11 16.08.29 623 14 15쪽
242 (22막) 세 개의 오만 (14) +10 16.08.24 576 13 16쪽
241 (22막) 세 개의 오만 (13) +9 16.08.19 450 13 26쪽
240 (22막) 세 개의 오만 (12) +6 16.08.14 494 9 18쪽
239 (22막) 세 개의 오만 (11) +10 16.08.09 598 11 17쪽
238 (22막) 세 개의 오만 (10) +6 16.08.05 608 13 14쪽
237 (22막) 세 개의 오만 (9) +6 16.07.30 578 14 15쪽
236 (22막) 세 개의 오만 (8) +8 16.07.26 534 11 24쪽
235 (22막) 세 개의 오만 (7) +8 16.07.20 639 13 19쪽
234 (22막) 세 개의 오만 (6) +7 16.07.15 678 12 21쪽
233 (22막) 세 개의 오만 (5) +8 16.07.10 685 13 22쪽
232 (22막) 세 개의 오만 (4) +6 16.07.05 634 14 18쪽
231 (22막) 세 개의 오만 (3) +9 16.06.30 575 12 18쪽
230 (22막) 세 개의 오만 (2) +6 16.06.25 651 13 18쪽
229 (22막) 세 개의 오만 (1) +6 16.06.20 729 15 16쪽
228 (막간) 현실을 마주하며 +4 16.06.15 750 16 16쪽
227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0) +10 16.06.10 729 14 21쪽
226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9) +8 16.06.05 730 12 16쪽
225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8) +4 16.05.30 698 15 19쪽
224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7) +6 16.05.25 724 11 19쪽
223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6) +4 16.05.20 955 10 22쪽
222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5) +5 16.05.14 776 12 18쪽
221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4) +2 16.05.09 703 13 15쪽
220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3) +6 16.05.04 1,027 12 18쪽
219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2) +4 16.04.28 741 16 17쪽
218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 +8 16.04.23 849 15 19쪽
217 (막간) 필요없는 증명. 필요한 증명. +10 16.04.18 739 18 13쪽
216 (20막) 증명 (9) +4 16.04.13 698 18 16쪽
215 (20막) 증명 (8) +8 16.04.08 670 20 16쪽
214 (20막) 증명 (7) +11 16.04.02 734 14 16쪽
213 (20막) 증명 (6) +10 16.03.28 782 13 15쪽
» (20막) 증명 (5) +8 16.03.23 813 17 24쪽
211 (20막) 증명 (4) +8 16.03.18 947 16 23쪽
210 (20막) 증명 (3) +10 16.03.12 813 17 20쪽
209 (20막) 증명 (2) +10 16.03.07 887 20 19쪽
208 (20막) 증명 (1) +10 16.03.02 763 18 18쪽
207 (막간) 지평선으로 향하는 한걸음을 지켜보는 사람들 +8 16.02.26 810 19 17쪽
206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0) +8 16.02.21 910 24 21쪽
205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9) +10 16.02.16 1,033 20 22쪽
204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8) +6 16.02.11 809 17 28쪽
203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7) +6 16.02.06 764 19 21쪽
202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6) +6 16.02.01 827 17 22쪽
201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5) +10 16.01.27 820 17 17쪽
200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4) +10 16.01.22 965 16 18쪽
199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3) +8 16.01.17 706 20 18쪽
198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2) +10 16.01.12 773 20 19쪽
197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 +8 16.01.07 792 21 13쪽
196 (막간) 언젠가 +4 16.01.02 946 22 16쪽
19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2) +8 15.12.28 799 25 23쪽
19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1) +6 15.12.23 933 2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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