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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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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6.03.12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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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글자
20쪽

(20막) 증명 (3)

DUMMY

금빛의 머리칼 몇 가닥을 스치며 검 하나가 날카롭게 어둠을 꿰뚫는다. 그러나 정작 검의 주인은 눈동자가 흔들리고, 머리칼의 주인은 미소를 거두지 않는다. 검의 주인은, 머리카락의 주인이 앞의 동료에게 신경이 집중되어있는 걸 보고 그녀의 배후로 도약하여 사각을 찔렀다. 제아무리 야생적인 감각을 지녔다 하더라도 이 순간에, 그리고 이 위치에서 날아드는 기사의 공격을 피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할 터.

그런데 이 금빛 머리칼의 기사는 마치 춤의 연속동작처럼 자연스럽게 목을 틀어 검을 빗겨내었다. 그 후 곧바로 어깨를 들어 목과 어깨 사이로 검을 붙드는 그녀의 행동을 검의 주인은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지만, 검신을 따라 역류해 들어오는 묘한 기운을 느끼고 황급히 검을 빼내려 했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밤하늘을 쪼개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부러져버리는 검. 어떤 상황에도 평정심을 유지하도록 훈련받아온 제국기사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다. 이스누시아 연철이 첨가된 명검은 아니었지만, 살의가 충만한, 목숨 하나를 찢기엔 충분한 영력이 담긴 검이었다. 정예기사로서의 모든 것이 담긴 그 검을, 악의로 받아낼 가치조차 없다는 듯 어깨와 목으로만 부러트렸단 말인가?

그러나 그에게 모욕감으로 몸부림칠 여유 따윈 없었다. 지금 이 땅을 비추고 있는 그 어떤 조명보다도 빛나는 샛노란 두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친 것이다. 이곳이 아늑한 침대 위였다면 다가오는 그 눈동자로부터 키스의 설렘을 느꼈을 테지만, 그녀의 입술은 달콤한 키스 대신 부러트린 검날을 물고 제국기사의 입술을 덮쳐온다.

왼손으론 왼측면에서 다가오던 여기사의 손가락과 검손잡이를 한꺼번에 반죽으로 만들어놓았고, 오른손의 흑도로는 정면에서 다가오던 기사의 창목과 미간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그리고 입으로 부러트린 검날을 배후에서 접근하던 기사의 목에 꽂아 넣는다.

단 한 합으로 세 명의 부하를 무력화시키는 후배를 바라보며 쥬넨은 그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30초라니 제 생각이 짧았네요, 선배님. 이렇게 도와주신다면야 15초면 되겠는데?”


뭉개진 손을 붙들고 비명을 지르는 여기사의 얼굴에 흑도를 꽂아 넣으며, 지나가 새빨간 혀끝으로 웃었다.


“오만이야말로 기사의 생명을 깎아먹는 일등공신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쓰러진 세 명을 대신하여 곧바로 지나를 둘러싸는 네 명의 기사들. 쥬넨 또한 정면에서 그녀를 향해 검을 겨눈 채 접근한다.


“선배야말로 자만하셨네요.”

주변에 내리깔린 모든 어둠을 빨아들일 기세로 불타는 흑도, 오미누스움브라.

순간, 기사로서의 본능이 쥬넨의 발걸음을 붙든다.

“고작 일곱 명으로 날 잡겠다니.”


지나의 미소가 쥬넨의 목소리보다 빨랐다.


한껏 몸을 낮추고 크게 원을 그리는 그녀의 흑도에 접근하던 기사들이 움찔했지만, 그 먹색의 불길은 자신들에게 닿기엔 터무니없이 짧았기에 기사들은 곧바로 그녀를 덮칠 준비를 한다. 이미 늦었음을 느꼈지만 쥬넨은 그들에게 움직이지 말라 소리를 내지른다. 그와 아직도 미소를 거두지 않고 있는 지나만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


지나를 감싸고 있던 네 명의 기사 모두가 동시에 무기를 쥔 자신들의 손을 바라본다. 어째서 영력이 실리지 않는지, 어째서 힘이 실리지 않고 있는 것인지 의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번의 호흡 뒤에, 그들 모두가 동시에 조명 아래로 내장을 내리쏟는다. 무기는 물론, 검은 제복과 피부를 감싸고 있던 강화복마저도 흘러내리는 주인의 핏덩이를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기사들의 얼굴에 마지막으로 떠오른 표정은 ‘고통’이 아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데에서 비롯된 ‘의문’이었다.


분명 먹색 불꽃은 닿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사들은 간격의 밖에서 무너져 내린다.

쥬넨은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과거 자신이, 카나반의 모든 기사가 동경했던 그 풍경이 펼쳐져 있었으니까.


“.......역시 피는 속일 수 없다- 그건가.”


“칭찬 감사합니다~♥”


지나의 황금빛 미소 뒤로 성문이 완전히 입을 벌리는 굉음이 울려 퍼진다. 함성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병사들과 기사들. 카나반의 기사는 그 광경을 살짝 돌아보더니, 새빨간 혀로 입맛을 다시며 한걸음, 쥬넨을 향해 다가선다. 이제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그림자는 쥬넨의 것, 하나뿐.


“그러나.”

그럼에도, 쥬넨은 물러서지 않는다. 눈빛을 죽이지도 않는다. 회색으로 빛나는 그의 검은, 주인의 적의만큼이나 흔들림 없이 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오만이다.”

쥬넨의 도약과 동시에 지나의 흑도가 허공을 가른다. 물론 그녀가 ‘진짜로’ 가르고자 했던 것은 밤을 물들인 어둠이 아닌 쥬넨의 얼굴. 하지만 쥬넨은 불꽃을 넘어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흐름’을 공중에서 몸을 틀어 피해낸다. 마치 그 실체가 눈으로 보이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의외라는 듯, 쥬넨의 검을 받아내는 지나의 입가에 새로운 미소가 피어난 것은 물론이었다.

“너만이 성장할 동기가 있고 너만이 스스로에게 가혹한 게 아니다. 반쯤 피어난 네 흐름의 꽃을 여기서 잘라주마.”


주변의 시체들과 흙이 튀어오를 정도의 영력이 쥬넨을 중심으로 폭발한다. 지나는 그런 그의 검을 받아내겠다는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의 발동작만으로 그의 연격을 피해낸 지나는, 그녀와 쥬넨의 사이 흙바닥으로 흑도를 내리꽂는다.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간파한 쥬넨이었기에 솟구치는 흙과 먼지 사이로 몸을 날렸지만, 동시에 날아든 영력의 폭풍에 그대로 튕겨 나가야 했다. 만약 그 순간 검을 들어 막아내지 않았다면, 자신도 부하들과 마찬가지로 두 동강이 났으리란 사실을 그는 검끝에 남아있는 감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선배, 제가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요?”

먼지 사이를 뚫고 나타난 두 개의 태양. 탐조등의 불빛들을 등지고 있는 그녀였지만, 쥬넨은 불타는 그 두 눈동자를 똑똑히 올려다볼 수 있었다.

“너~~~무 너무 즐거워요. 그도 그럴 게, 제 의지와 계기를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으니까요. 엘라는 이미 로즈의 엄마가 되어버렸고, ‘붉은 장미’는 죽어버렸죠. 그리고 저에게 ‘흐름’을 남겨준 ‘흐름’은, 더 이상 곁에 없으니까........, 제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는 시험장을 찾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여기가 그 시험장이 될 수 있으리라 저는 믿고 있어요.”


저 새빨간 미소가,

원래 이리도 소름끼치는 색이었나.


“그러니까, 선배. 부디 제 훌륭한 밑거름이 되어주세요. 이 더럽게 크고 둔탁한 성과 함께, 저와 제 나무를 위한 비료가 되어주세요. 그럼 당신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국가를 배신한 걸 봐 드릴게요, 알았죠?”


“........”


“약속한 겁니다? 이 약속은 내일, 아니, 오늘이구나. 좀 있다가 받으러 올게요.”


새벽의 하늘로도 감출 수 없는 군세가 땅을 뒤흔들며 접근하기 시작한다. 지나는 슬쩍 뒤돌아 그들의 존재를 확인하더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쥬넨의 곁을 스쳐 지나간다. 만약 그녀가 검을 휘둘렀다면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합을 겨룰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이쪽이 먼저 달려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쥬넨은 자신에게 어떠한 반응도 보이질 않는, 간격에서 멀어지는 카나반의 왕비를, 그 어떤 감정도 품지 않은 시선으로 가만히 노려보고만 있었다.


“그럼, 좀 있다 봐용~”


흐려지는 탐조등 불빛의 끝으로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붉은 미소. 쥬넨은 그녀의 그림자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어둠으로 파묻힐 때까지 가만히 그곳에 서있었다.


“쥬넨, 괜찮나?”


그랬던 그가 마침내 시선을 거둔 것은 댄 스파인이 그의 어깨를 붙잡은 뒤였다.


“.......예, 괜찮습니다. 추격대는 보내지 마십쇼, 잡지 못할 겁니다.”


“자네 얼굴 좀 봐, 완전히 파랗게 질렸어. 도대체 누굴 만난 건가?”


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고 나서야 쥬넨은 검을 집어넣고 자신의 턱을 쓰다듬는다. 어느새 그곳엔 차가운 땀이 송글송글 수염을 적시고 있었다. 물론, 자신이 그렇게 땀을 흘릴 정도로 열심히 검을 휘두르진 않았다는 사실을 쥬넨은 알고 있었다.


“장군......., 아니, 군단장님을 봬야겠습니다. 회의를 소집해 주십시오.”


“회의? 이 시간에?”


“예.”

검을 집어넣었음에도 손끝에는 아직도 감각이 남아있다. 그 떨리는 손에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놀라움, 그리고-

“변수를 충분히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확신이었다.









“뭐, 그렇게 된 거야.”


피칠갑을 한 채 침실로 돌아온 부인의 가벼운 웃음. 로빈은 어이가 사라진 표정으로 그녀의 검집을 받아든다.


“........무슨 산책이라도 나갔다 온 것처럼 말하니 오히려 내가 할 말이 없네.”


“화났엉?”


“당연히 화났지! 발각됐으면 바로 튀었어야지 왜 거기서 힘싸움을 하는데?!”


“아잉, 미안해애애.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쥬넨 선배의 목도 들고 왔을 텐데.”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버럭 화를 내는 로빈의 앞으로 지나는 자신의 등을 내밀고 샛노란 머리를 위로 들어 올린다. 하얗게 드러난 그녀의 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로빈은 깊은 한숨과 함께 피로 물든 강화복의 지퍼를 내리기 시작한다.

“.......네가 각성한 네 피를 시험해보고 싶어서 안달난 거는 이해해. 하지만 아직 나에겐 너는 아직 ‘왕의 기사’가 아닌 ‘왕비’야. 네가 피를 흐르게 해도 불안하고, 네가 피를 흘리면 가슴이 찢어진다고. 내가 왜 아직도 여기에 남아있는지 모르겠어?”


땀의 흡수가 뛰어나도록 제작된 강화복이었기에 피의 흡수도 빨랐던 모양. 강화복 안쪽 하얀 피부가 이미 적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로빈은 따듯하게 적셔진 수건으로 천천히 그녀의 몸을 닦아주기 시작한다.


“로빈, 너에게는 아직 귀여운 애인일지 몰라도, 이미 나는 너를 대표하는 기사이자 너의 검, ‘나이트 마제스티’의 이름을 받았어. 너의 곁에서 검을 들기 위해 할아버지의 이름을 버렸다고. 네 걱정은 이해하지만, 너 또한 나의 희생을 이해해 줘야 해. 난 단순히 너와 키스하고 너의 미소를 삼키기 위해서 너의 곁에 있기로 맹세한 게 아냐. 너를 사랑하면서도 내 피에 흐르고 있는 이름을 증명하기 위해 너의 이름을 받은 거야.”


“.......알고 있어. 하지만-”


갑자기 뒤돌아서서 로빈의 목에 팔을 거는 지나. 근육으로 단단한 그녀의 허리까지 강화복이 흘러내리고, 아직 닦아내지 못한 피비린내가 로빈의 턱 아래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나를 믿어. 믿음의 크기를 키워서, 불안을 짓눌러버려. 나는 네 명령이 없이는 절대로 죽지 않을 거야, 알고 있잖아?”


“.......죽으라고 명령해도 안 죽을 거면서.”


“그건 그래.”


지나가 히힛- 웃으며 새빨간 혀끝을 깨문다. 로빈은 그 혀끝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입술 속으로 당겨온다. 적의 피로 반들거리는 그녀의 등을 감싸 안으며, 로빈은 길게,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숨결을 탐독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건 알아냈어?”


그대로 그녀를 안아 들고 침대로 다가서는 도중, 문득 생각났다는 듯 로빈이 물었다.


“뭘?”


“........애초에 왜 거길 가셨는지 잊어버린 건 아니시겠죠, 왕비님?”


“아아, 맞다.”

로빈의 품에서 벗어나 대충 피를 닦아내는 지나. 그녀는 곧바로 제복을 집어 들고 몸에 걸치며, 허탈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있는 로빈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인다.

“전달사항 있으니까 지휘관들 모아봐.”






=================





“학습능력이 없군.”

가장 높이 떠오른 태양. 그 아래로 펼쳐진 광경을 내려다보던 댄의 한마디였다. 물론 쥬넨을 포함하여 같은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부관들 모두가 그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진형.

어제와 다르지 않은 공성병기.

어제와 다르지 않은 속도.

그 탓에 겪었던 참상의 흔적이 아직도 성벽 아래 고스란히 남아있음에도 똑같이 다가오는 카나반의 군세. 별다른 명령을 내릴 가치도 없어 보였지만, 댄은 쥬넨을 향해 돌아보는 것만큼은 잊지 않는다.

“정말로 그녀를 잡아낼 수 있겠나?”


“목을 취하는 것까지는 확신 드릴 수 없습니다만, 붙들어 놓을 수는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그녀의 영향력이 없다면, 저들은 그저 숲을 벗어난 오합지졸일 뿐.”


“........직접 검을 맞대봤으니, 자네가 가장 잘 알겠지. 군단장께서도 믿고 계시네.”



“옵니다!!”



누군가의 외침과 동시에 성벽 위의 모든 병사들은 무기를 뽑아들고 마법사들은 보호막을 전개한다. 수많은 소총과 장궁, 석궁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다른 무엇들보다도 더욱 끔찍하게 빛을 빨아들이는 존재는 따로 있었다.


“ ‘다르펜타’ 포반 사격준비! 하나포는 양측의 공성탑, 둘포는 중앙의 파성추, 삼포는 후방의 적 전투마법사 대열, 넷포와 오, 여섯포는 적의 움직임에 대비하여 가변방열을 준비하라! 사격지휘통제소는 지금부터 제원측정 시작해!”


포대장의 명령에 위장막을 걷어내고 시커먼 모습을 드러내는 ‘다르펜타’들. 성벽 위의 움직임이 분주해지는 가운데, 곳곳에서 사격준비완료를 알리는 포반장들의 깃발이 펄럭이기 시작한다.


“동원된 병사나 병기들의 숫자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무슨 생각일까요? 이쪽과 소모전을 하자는 생각은 아닐 테고.......”


부관 중 하나가 성벽에 기대어 크게 전장을 둘러본다. 물론 그의 어투에 깃들어 있는 것은 우려가 아닌 비웃음이었다.


“어젠 공성병기만 노렸으니, 이번에도 그럴지 확인을 해볼 생각이겠지. 물론 어설프게 나무로 급조한 저깟 병기들보다 이쪽의 농축탄 하나가 아까운 건 사실이지만,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천천히 접근하던 카나반군의 움직임에 점점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성문을 중심으로 좌, 우측의 망루를 동시에 공략하려는 움직임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물론, 그 결과 또한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쐇!”


성벽을 뒤흔드는 맹렬한 발포음. 병사들이 그 후폭풍으로부터 몸의 자세를 고치기도 전에, 직격당한 공성탑이 무너져 내리는 풍경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성벽 위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온 건 물론이었다. 뒤이어 두 번의 포음이 연달아 평원에 울려 퍼졌고, 공성탑은 물론이고 강철로 번쩍이던 파성추 또한 직격으로 찢겨나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연이어 무력화된 공성병기들. 이제 성벽 아래 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맨손으로 벽을 두드리는 것밖에 없다. 포대원들은 능숙한 움직임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포신을 식히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들 모두가 오늘은 포신이 이 이상으로 과열될 일이 없을 거란 확신을 품고 있었다.


“댄 장군님, 공격명령을!”


신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댄을 돌아보는 부관. 그러나 댄의 표정은, 그런 그의 미소를 한순간에 앗아갈 정도로 굳어있었다.


“이상하군.”


“옛?”


“폭발이 두 번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


“보호막을 뚫는 순간, 병기에 직격하는 순간, 관통하여 지면에 내리꽂히는 순간, 세 번 마력폭발이 일어나야 정상이다. 하지만 오늘을 직격했을 때와 뒤로 관통했을 때, 두 번밖에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즉, 적 마법사들이 보호막을 치지 않았다는 소리지.”


말을 마치며 관측병의 망원경을 뺏어드는 댄.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무너진 공성탑의 잔해였다. 그리고 그의 불안대로, 잔해 속엔 그 어떤 시체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적의 선발대는 기만이다! 모든 다르펜타 포반은 재장전을 준비해라! 사격지휘통제소는 사격제원 다시 산출해! 목표는-”


“적 본대가 움직입니다!”


댄의 명령이 끝나기도 전에 부관의 외침이 성벽 위를 뒤흔든다. 댄은 황급히 망원경을 숲의 그림자에 가려진 지평선으로 옮겼고, 먼지와 함께 양쪽으로 크게 갈라지는 군세를 확인할 수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기병대와 공성병기들. 댄은 빠르게 그 움직임의 의미를 읽어낸다.


“다르펜타 예비포반은 빠르게 양측면으로 움직인다! 병사들을 성벽 위에서 내려보내! 포반에게 길을 터줘라! 성벽 안의 예비대는 빠르게 투입될 준비!”

마즈다성의 유일한 약점.

바로 모든 지점을 수비하기엔 지나치게 규모가 크다는 것.

물론 댄을 포함한 2군단의 지휘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적의 공격 방향에 곧바로 대처할 수 있는 예비대를 내부에 준비시켜 놓았고, 다르펜타 또한 성벽 위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개조되어 있었다. 물론 성벽의 폭이 포반 전체가 움직이기 수월할 정도의 넓이이긴 했지만, 빠른 이동을 위해 병사들이 성벽에서 내려가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남문과 북문을 노리고 우회해올 것이다! 저항이 거세다면 동쪽까지 갈 수도 있음을 잊지 마라! 각 포반장들은 적의 상황을 주시하며 다르펜타를 배치시켜야 한다! 탄을 낭비하지 마! 적의 공성병기만 파괴하면 된다!”


“댄 장군님! 이곳에 배치된 세 문의 다르펜타도 이동시킵니까?”


부관의 말에 댄은 곧바로 다시 망원경을 들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남쪽과 북쪽을 향해 진출한 적의 기병대는 물론이고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새로운 군세 또한 놓치지 않는다.


“아니 대기한다. 혼란을 틈타 이쪽으로도 공성병기가 충원될 거다. 포대장! 다르펜타 재장전까지 얼마나 남았나?!”


“60초입니다!”


“좋아.”


제아무리 재빠른 기동력이라도 저 끝에서 이곳까지 60초 만에 공성병기를 이끌고 당도할 수는 없다. 산개한 카나반군의 움직임은 물론 효과적이긴 했지만, 이미 댄의 머릿속에서 예상되었던 범위를 넘어서진 못하고 있었다. 이쪽은 그들의 생각보다 더욱 견고하게 훈련되어있다. 다르펜타 또한 그들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기동력을 지니고 있다.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그들의 기세를 확실하게 끊을 수 있는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이다. 한적해진 성벽 위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다르펜타를 바라보는 댄의 입가로 확신의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한 가지 아주 간단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바로,

공격수단을 잃은 성벽 아래의 카나반군 1진이, 아직도 끈질기게 저항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기만책으로써 버리는 패였기에 선발대의 공성병기에 보호막을 칠 이유가 없었음은 분명하다. 보호막으로 마력을 낭비하지 않았기에, 방치된 병력을 성벽 위에서 쏟아지는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면서 공격마법으로 반격해오는 그들의 반응이 어색하지는 않다. 생존을 위한 발버둥, 그리고 후속대와 합류하여 성문을 공략하려는 헛된 몸부림에 지나지 않겠지- 라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국 2군단의 지휘관들은, 그런 카나반군의 ‘발버둥’과 ‘몸부림’이 실패한 공격작전의 말로가 아닌, 의도된 것이었음을 간파하지 못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을 빼앗으며 어지럽게 공중에서 맞부딪치는 마력의 향연.

다르펜타의 이동을 위해 비어버린 성벽, 그 위로,



아주 작은 그림자 몇 개가 올라섰다는 사실을,


제국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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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막간) 하나의 밤하늘, 세 개의 달빛 +11 16.08.29 623 14 15쪽
242 (22막) 세 개의 오만 (14) +10 16.08.24 576 13 16쪽
241 (22막) 세 개의 오만 (13) +9 16.08.19 450 13 26쪽
240 (22막) 세 개의 오만 (12) +6 16.08.14 494 9 18쪽
239 (22막) 세 개의 오만 (11) +10 16.08.09 598 11 17쪽
238 (22막) 세 개의 오만 (10) +6 16.08.05 608 13 14쪽
237 (22막) 세 개의 오만 (9) +6 16.07.30 578 14 15쪽
236 (22막) 세 개의 오만 (8) +8 16.07.26 534 11 24쪽
235 (22막) 세 개의 오만 (7) +8 16.07.20 639 13 19쪽
234 (22막) 세 개의 오만 (6) +7 16.07.15 678 12 21쪽
233 (22막) 세 개의 오만 (5) +8 16.07.10 685 13 22쪽
232 (22막) 세 개의 오만 (4) +6 16.07.05 634 14 18쪽
231 (22막) 세 개의 오만 (3) +9 16.06.30 575 12 18쪽
230 (22막) 세 개의 오만 (2) +6 16.06.25 651 13 18쪽
229 (22막) 세 개의 오만 (1) +6 16.06.20 729 15 16쪽
228 (막간) 현실을 마주하며 +4 16.06.15 750 16 16쪽
227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0) +10 16.06.10 729 14 21쪽
226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9) +8 16.06.05 730 12 16쪽
225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8) +4 16.05.30 698 15 19쪽
224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7) +6 16.05.25 724 11 19쪽
223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6) +4 16.05.20 955 10 22쪽
222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5) +5 16.05.14 776 12 18쪽
221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4) +2 16.05.09 703 13 15쪽
220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3) +6 16.05.04 1,027 12 18쪽
219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2) +4 16.04.28 741 16 17쪽
218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 +8 16.04.23 849 15 19쪽
217 (막간) 필요없는 증명. 필요한 증명. +10 16.04.18 739 18 13쪽
216 (20막) 증명 (9) +4 16.04.13 698 18 16쪽
215 (20막) 증명 (8) +8 16.04.08 670 20 16쪽
214 (20막) 증명 (7) +11 16.04.02 734 14 16쪽
213 (20막) 증명 (6) +10 16.03.28 782 13 15쪽
212 (20막) 증명 (5) +8 16.03.23 812 17 24쪽
211 (20막) 증명 (4) +8 16.03.18 947 16 23쪽
» (20막) 증명 (3) +10 16.03.12 813 17 20쪽
209 (20막) 증명 (2) +10 16.03.07 887 20 19쪽
208 (20막) 증명 (1) +10 16.03.02 763 18 18쪽
207 (막간) 지평선으로 향하는 한걸음을 지켜보는 사람들 +8 16.02.26 810 19 17쪽
206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0) +8 16.02.21 910 24 21쪽
205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9) +10 16.02.16 1,033 20 22쪽
204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8) +6 16.02.11 809 17 28쪽
203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7) +6 16.02.06 764 19 21쪽
202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6) +6 16.02.01 827 17 22쪽
201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5) +10 16.01.27 820 17 17쪽
200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4) +10 16.01.22 964 16 18쪽
199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3) +8 16.01.17 706 20 18쪽
198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2) +10 16.01.12 773 20 19쪽
197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 +8 16.01.07 792 21 13쪽
196 (막간) 언젠가 +4 16.01.02 946 22 16쪽
19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2) +8 15.12.28 799 25 23쪽
19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1) +6 15.12.23 933 2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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