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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193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6.07.10 20:25
조회
685
추천
13
글자
22쪽

(22막) 세 개의 오만 (5)

DUMMY

“없어, 없어~ 아아-무것도오 없어어~”


잡초마저 말라비틀어진 숲바닥을 발로 걷어차며, 카나반의 왕녀는 황폐함에 대한 불평을 마치 노래처럼 흥얼거린다. 과거엔 녹색으로 우거진 생명의 저장고였다지만 지금 남아있는 것은 누런 먼지와 하늘뿐. 처음에는 잔뜩 경계의 날을 세웠던 저격특무대원들도 탁 트인 시야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자 왕녀와 마찬가지로 느슨함을 발끝에 담고 있었다. 여태까지 그래왔듯, 어차피 자신들의 눈보다 왕녀의 코가 더 정확할 테니까.


“대장, 또 초소입니다.”


석궁을 짊어진 병사 하나가 나무에서 내려오며 보고를 한다. 이미 생명이 다한 지 오래된 나무였기 때문에 돼지 코고는 소리와 함께 껍질과 가지들이 우수수 떨어졌지만, 그나마 그 나무가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흔적’들 중에선 유일하게 인간의 체중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온전한 편이었다.


“어차피 또 비어있겠지이~.”


“그래도 확인은 해보시는 게.......”


“알았어, 알았어.”


자신의 활을 붙든 채로 두 팔을 뒤로 넘겨 찌뿌둥한 어깨를 푸는 리즈. 그녀는 왕녀의 신분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커다란 하품을 하며 부하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움직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숲속 작은 공터에 진입할 수 있었다.

검게 빛바랜 목책과, 주변 나무의 높이에 맞게 솟아있는 감시탑. 과거 이곳이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되어있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무너지지 않은 목책 때문에 곧바로 초소의 내부를 확인할 수가 없었고, 자연스럽게 병사들의 시선이 왕녀에게 모인다.


“대장?”


부르지 않아도 할 거였다면서 투덜거리는 왕녀. 그녀는 바람의 방향에 맞춰 걸음을 옮기고, 눈을 감은 채 살짝 코를 벌름거린다.


“.......없어. 웬 짐승 한 마리만 기어들어와 있네.”


“짐승?”


“몰라, 먹을 걸 찾아서 숨어들었나 보지. 따로 보고할 필요는 없고, 그냥 대충 뭐 남았는지 뒤져보고 합류해.”


“알겠습니다.”


리즈의 명령을 따라 대원 두 명이 훌쩍 목책을 뛰어넘는다. 슬슬 햇빛의 기울기가 눈으로도 확인되는 시간. 오늘 저녁엔 또 누구의 하누를 훔쳐 먹어야 하나- 고민하며 리즈는 뒤돌아선다. 그러나 그녀의 발걸음은,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곧바로 멈춰 서고 만다.


“.......짐승?”


대원들도, 스스로도, 코의 감각에서만큼은 그녀를 따를 자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 예리한 후각이야말로 리즈가 누구보다도 정찰임무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이유. 그 신뢰 덕분에 특무대원들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목책을 넘어 적의 초소 안으로 진입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즈가 자신의 후각에만 맹목적으로 의지하는 기사라는 뜻은 아니었다.


이 주변의 숲이 절멸한 것은 ‘붉은 장미의 검성’, 델핀 드리브달이 제국의 2군단장으로 있던 시절이다. 숲의 파괴는 먹이사슬의 붕괴, 생태계의 종말을 야기했을 것이고, 이 숲에 생명의 목소리가 사라진 지는 그만큼 꽤나 오래됐을 터.

그런데 아직,

이 주변에 배회하는 짐승이 남아있다?


그렇다면 이 짐승의 냄새는,

‘정말로’ 짐승의 것이 아니다.



“고나르, 유빌! 당장 거기서 빠져나오-”



리즈의 외침은 거대한 폭발과 함께 산산이 조각나며 흩어지는 목책 아래 간단히 묻히고 만다. 잔뜩 말라있었던 대지는 후폭풍으로 짙은 먼지구름을 만들어냈고, 때문에 재빨리 경계태세로 전환한 특무대원들도 즉시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하하핫!”


지축을 뒤흔드는 커다란 웃음소리. 마치 그 웃음 자체가 바람을 만들어 낸 듯 먼지구름을 걷어내기 시작했고, 리즈와 대원들은 마침내 폭발을 일으킨 장본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길게 찢어진 미소. 굵은 턱선을 따라 거칠게 올라온 수염들.

하지만 그 일그러진 즐거움보다도 가장 먼저 리즈의 검붉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마치 갑옷처럼 단단해 보이는 그의 근육들이었다. 저러다 터지는 게 아닌가 걱정될 정도로 부푼 근력의 상징들을 보며 리즈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녀는 곧 감상을 집어치울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들고 있는 거대한 철퇴. 그 철퇴의 뾰족한 머리 부분에 가슴에 꿰뚫린 채 매달려 움찔거리고 있는 부하의 시신. 그리고 남자의 반대편 손은, 다른 대원의 머리를 마치 풍선처럼 터트려 쥐고서 질질 끌고 다니는 중이었다.


“쏴!”


리즈는 망설이지 않고 시위를 당긴다. 부하 대원들의 참혹한 모습과, 강화복 하나 걸치지 않고 자신 앞에 나타난 남자의 오만함. 이들에 대한 분노가 뒤섞여 그의 미간으로 향하는 그녀의 은빛화살촉엔 치명적인 영력이 깃들어 있었다. 리즈의 화살을 신호로, 십여 명 대원들의 석궁, 활, 소총이 일제히 남자를 향해 적의를 뱉는다.

하지만 그 끝에서 들려온 것은 비명이 아니었다.


“오, 꽤나 좋은 영력이구나!”


남자는 미소를 거두지 않고 미간으로 흘러내리는 자신의 피로 입맛을 다신다. 그는 뇌수로 범벅이 된 손을 털어낸 후, 천천히 자신의 이마에 반쯤 촉을 박아넣고 있는 화살을 뽑아내어 휙, 뒤로 내던진다. 살짝 가죽을 파고든 리즈의 그 화살만이, 남자에게 상처를 입힌 유일한 존재였다.

더러운 위화감. 리즈는 입술과 함께 욕을 씹는다. 자신의 화살이 두개골에 상처조차 내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이 남자는, 모든 화살과 볼트, 총탄을 빗겨내지 않았으니까.

일반적으로 기사들은 본인이 다루는 무기뿐만이 아니라 전신으로 영력을 조금씩 흘려보내어 자신을 향한 원거리 공격에 대비한다. 피부를 감싸고 있는 영력으로 화살이나 총탄의 궤도를 살짝 바꾸어 빗겨내는 것이다. 이는 아무리 영력이 실리지 않은 공격일지라도 직접 피부에 닿으면 부상을 입을 수 있는 데다가, 빗겨내는 쪽이 정면으로 받아내는 것보다 영력의 소모에 있어서 압도적으로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남자는 모든 공격을 보란 듯이 정면으로 받아내었다. 그리고 그의 자신감이 증명하듯, 리즈의 화살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공격도 남자의 우람한 근육을 뚫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리즈가 불편한 이유는, 아직까지도 이 남자에게서 어떠한 영력도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오직,

지저분한 야수의 비린내.

이것만이, 리즈가 그에게서 맡을 수 있는 전부였다.


“물러나!”


단검을 빼어들고 앞으로 도약하는 리즈. 굳이 냄새를 맡지 않아도, 남자의 미소를 읽지 않아도, 그가 다음에 무슨 행동을 할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


우렁찬 발돋움 한 번으로 순식간에 대원들과 거리를 좁히는 남자. 저 루남부르트와 비슷한 덩치에서 뿜어져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민첩함에 대원들은 본능적으로 2차 발포를 시도하지만, 돌아오는 건 태풍처럼 휘날리는 철퇴뿐이었다. 뼈가 으스러지고, 내장이 비집고 튀어나오는 역겨운 소리와 함께 세 명의 대원이 나무와 흙바닥으로 살점들을 흩뿌린다. 단 한 번의 휘두름만으로 세 명이 분쇄되는 광경은 아무리 노련한 대원들일지라도 기겁하기 충분했다. 굳어버린 대원들의 눈동자 위로 철퇴의 그림자가 다시 한 번 떠오르는 순간,

리즈는 남자의 옆구리로 단검을 꽂아 넣는다.


“.......?!”


이번에도 역시, 영력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리즈의 단검은 남자의 복사근을 뚫지 못하고 피부만을 갈라놓는다. 당황한 리즈가 이번에는 반대편 단검으로 후두부를 노렸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으하하, 상처와 피! 이게 얼마 만인지!”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비명이 아닌 환호. 광적으로까지 들리는 뒤틀린 그의 폭소에 리즈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난다. 남자가 벌레라도 물린 듯 단검으로 찔린 옆구리를 벅벅 긁으며 리즈를 향해 뒤돌아섰고, 그 사이 리즈의 손짓에 따라 남은 대원들은 재빨리 먼지와 피비린내의 초소를 벗어날 수 있었다.

“계집, 이름이 뭐냐?”


“알아서 뭐하게?”


“이 땅에서 피를 흘린 카나반 최초의 기사가 될 테니 내가 기꺼이 기억해주마!”


“고맙지만 지금 피를 흘리고 있는 건 댁이거든요. 그리고 남의 이름을 묻기 전에 본인의 이름부터 밝혀야 하는 거 아닌가? 기본적인 예의가 있어야지. 뭐 하긴, 딱 봐도 인기 없어 보이긴 하네.”


양 손의 단검들을 빙글 돌리며 다시 한 번 전투태세를 다잡는 리즈. 남자는 유쾌하게 웃으며 핏물이 뚝뚝 흐르는 철퇴를 어깨 위로 올려놓는다.


“내 이름은 어윈 아이언하트! 곧바로 네 작은 머리를 터트려줄 사람이니 기억해 둬라!”


“난 엘리자베스. 네 거시기에 단검을 박아줄 사람이지.”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리즈는 단검 하나를 투척한다. 아무리 어윈일지라도 그곳만큼은 어쩔 수 없었는지 손등으로 단검을 막아내었고, 그 한쪽 손의 공백이야말로 리즈가 노리고 있던 부분이었다.


“흐음!”

뚫지 못한다면, 최대한 찢는다. 어윈의 왼쪽 가슴팍에서부터 어깨까지 붉은 선이 이어지고, 이내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한다. 찌르기가 아닌 베기로 작전을 바꾼 리즈의 날카로운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 상처는 치명상이라고 볼 수가 없었고, 도리어 어윈의 미소만 더욱 짙게 해준다.

“날 과다출혈로 쓰러트리려면 이보다 백만 배는 더 많이 만들어야 할 거다!”


순식간에 몸을 뒤틀어 철퇴를 휘두르는 어윈. 추가공격을 준비하던 리즈는 상상을 뛰어넘는 그의 민첩함에 단검 위로 철퇴를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큭-!”


마른 나무 두 그루를 박살내며 나가떨어지면서도 리즈는 간신히 균형을 잡고 일어선다. 이런 정면승부엔 그다지 경험이 없는 그녀였지만, 눈앞의 상대가 자신에게는 벅찬 존재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도망칠 수도 없다. 이 남자가 얼마나 빠르게 추격해올 수 있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충분한 시간을 끌어주지 못하고 벗어나 버리면 기사가 아닌 부하들이 먼저 꼬리가 잡힐 게 분명했으니까.


“뭐냐, 벌써 기가 죽은 거냐? 좀 더 놀아보자고!”


다행히 어윈의 사고는 그의 근육만큼 두텁지는 않은 모양. 리즈가 부하들의 도주를 위해 시간을 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문제는, 이런 야수를 상대로 자신이 얼마나 시간을 끌 수 있는가-.


“대장!”


하지만 그런 그녀의 고민은, 뒤쪽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로 인해 와르르 무너진다.


“뭐야?! 너희들 왜 돌아왔어?!”


“도망치십쇼! 여긴 저희가 맡겠습니다!”


섬광탄과 연막탄, 신호탄까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어윈의 시야를 방해하며 나타난 저격특무대원들.


“야이 병신들아! 내가 뭐 때문에-”


“제발 이번만큼은 우리 말 좀 들어요! 당신은 이런 외딴곳에서 죽을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사람이 아니니까!”


이미 가장 가까운 곳에서 활을 쏘고 있던 대원 하나가 어윈의 손에 붙들려 처참하게 짓이겨지고 있었다. 리즈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로막으며, 대원은 소총을 들어 리즈의 가슴을 겨누었다.


“.......지금 무슨-”


“빨리 가십쇼! 안 그럼 진짜로 쏴버릴 겁니다!”


“.......”


“빨리!”


두 번째 비명. 그러나 리즈를 향하고 있는 대원의 눈동자에 흔들림은 보이지 않는다. 정말로 이 이상 지체했다간 방아쇠를 당길 기세였다. 그러나 리즈는 그의 표정과, 그의 행동에 어떤 각오가 깃들어 있는지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


입술이 찢어질 정도로 세게 깨물면서, 왕녀는 그대로 뒤돌아 대원의 총구로부터 벗어난다. 그제야 만족한 듯 소총을 내려놓는 대원. 어느새 거대한 짐승의 그림자는 네 번째 영혼을 삼키는 중이었고, 비명을 향해 뒤돌아서는 그의 목소리가 작게 기도를 읊는다.


“숲의 가호가 함께하길, 미트라블루스.”




=================




“척후들이 공격을 받아?”


“예, 엘리자베스 왕녀의 저격특무대도 물론이고, 올리와 듀라 경 또한 습격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올리와 듀라 경은 별 피해 없이 퇴각한 모양입니다만, 특무대원들은.......”


말끝을 흐리는 카논. 보고를 받던 지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왕녀는, 리즈는 괜찮아?”


“네, 경미한 타박상뿐입니다만....... 심적으로 많이 괴로운 모양입니다.”


“.......그래? 다행이다.......”


“다행이 아니다.”

안도의 한숨으로 회의를 끝낼 크라트가 아니었다.

“다름 아닌 척후가 매복을 당했다는 건 놈들에게 우리의 움직임이 읽히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곳은 적지, 전술적으로 우리가 불리할 수밖에 없어. 놈들이 마음만 먹었다면 척후가 아닌 본대에도 타격을 줄 수 있었을 거다.”


“그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우리가 경계할 수 있도록 척후를 대상으로 삼았을까, 그게 문제군요.”


지나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이는 크라트.


“비어있는 국경과 초소. 이제는 척후에 대한 매복까지. 놈들은 점점 더 알 수 없는 행동들만 하고 있다. 이것이 정말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발악인지, 아니면 우리의 방심과 의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수작인지 구분해야 해.”


“어쨌든 척후가 당한 지금, 본대를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어요. 날이 밝을 때까지 경계를 유지하며 기다릴 수밖엔.”


“.......어째 점점 말리는 기분이군.”


크라트의 마지막 신음엔 모두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지휘천막의 입구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 좀 놔봐.”

경비병의 제지를 꿰뚫고 천막으로 들어서는 리즈.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등장한 왕녀는 대뜸 크라트에게 다가가 전술지도 위로 주먹을 내리꽂는다.

“나 나갈 거야. 나머지 대원들 어디 있어?”


“.......”


그러나 ‘늑대’는 대답 없이, 굳건하고 푸른 눈빛으로 가만히 리즈의 양팔을 바라본다. 억지로 풀어헤친 붕대 아래로 시퍼렇게 물든 왕녀의 팔뚝이 그의 눈에 들어왔고, 그 시선을 알아챈 리즈는 남아있던 붕대마저 완전히 풀어 던지며 입술을 열었다.


“괜찮아. 안 아파. 애들 어딨어?”


“.......그들은 척후임무를 마치고 휴식 중이다. 그리고 왕녀, 네 상관으로서 말하는데, 오늘 밤엔 경계작전 외에 그 어떤 정찰임무나 공격도 없을 거다.”


“아, 됐어. 나 혼자라도 나갈 거야.”


망설임 없이 돌아서는 왕녀.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찬란하게 빛나는 한 쌍의 샛노란 태양이었다.


“리즈, 잘 들어. 네가 부하들에게 각별했다는 건 알아. 하지만 분노만으로 이렇게 나서는 건 그들을 기리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네가 지금 해야 할 건 병실에 앉아 차분하게 보고서를 쓰는 거야.”


“언니, 하지만-”


“넌 여기 카나반 왕녀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근위기사이자 장교로서 와있어. 나도 대장님도 네 직속상관이고. 군인이라면 군인답게 행동해. 네가 어리광을 부릴수록 피해를 받는 건 아직 살아있는 네 부하들이야.”


“.......나 때문에 죽었어.”

자신을 응시하는 지나의 표정만큼이나 싸늘하게 굳어가는 리즈의 얼굴.

“내가 좀 더 신중했으면, 그 짐승을 조금 더 일찍 눈치챘으면.......”


“짐승.......?”


지나는 왕녀의 얼굴을 가슴에 안으며 그녀가 내뱉은 단어를 되새긴다.


“응, 짐승. 그 새끼 하나한테 죄다 당했어.”


“한 명?”


지나와 카논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실상 지금이 당사자로부터 듣는 최초의 보고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접하는 냄새였어. 분명 짐승인데, 짐승이 아니야. 그래서 방심했어. 그래서......., 그래서 나 때문에 모두가.......”


“.......리즈.......”


지휘관으로서 부하를 잃는다는 상황은 기사들에겐 언제나, 그리고 필연적으로 찾아올 수밖에 없는 일이다. 단지 리즈에겐 그 상황이 너무도 갑작스럽게 찾아왔을 뿐.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인해 지나치게 무거운 짐을 안아야 하는 상황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지나였기에, 그녀는 진심이 담긴 온기로 왕녀를 안아줄 수 있었다. 이 아이는 아직 어리다. 신분이나 지위를 벗어나, 혼신을 다해 부딪쳐왔던 일에 처음으로 절망을 느끼고 있는 거다. 물론 이를 통해 이 아이가 기사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더욱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지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짐승이란 자, 누군지는 알아냈나?”


리즈의 어깨가 진정되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크라트가 입을 연다. 그에 지나의 가슴을 벗어나 다시 떠오른 왕녀의 검붉은 눈동자는 크게 일렁였다.


“어윈. 자기를 어윈이라고 했어. 내가 꼭 찾아서 죽여 버릴 거야.”


힘찬 그녀의 다짐과는 반대로,

순식간에 얼어붙는 지휘천막의 공기.


“.......어윈? 어윈 아이언하트?”


“응, 맞아, 분명 그런 이름이었어. 언니, 누군지 알아?”


리즈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깊은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는 지나. 카논 또한 그와 같은 반응을 보였고, 이들이 왜 이러는지 모르는 리즈는 비교적 멀쩡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크라트를 향해 눈동자를 빛낸다.


“.......왕녀.”


“응?”


늑대의 희미한 미소와 한숨.

그 끝에서, 크라트는 마침내 진상을 깨닫는다.

이 원정대에 포함된 기사라면, 아니 일반병사라도 알고 있어야 할 그 이름. 하지만 이런 왕녀라면,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이해가 간다.




“넌 적의 최고사령관과 싸우고 온 거다.”





=====================





“이야~ 이게 누구야? 오랜만인걸?”


“안녕하세요.”


벤은 그의 또 다른 이름에 걸맞게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벌리는 디미르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다. 웬만해선 애정 넘치는 그의 포옹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가 쉽게 뿌리칠 수 있는 인물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연인 사이를 연상시킬 정도로 진한 포옹과 뺨의 입맞춤을 한 뒤에야, 디미르는 벤이 목발을 짚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뭐야, 이거? 다쳤어?”


“네, 좀....... 별 건 아니에요.”


“.......별 거 아니라고?”


역시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희미한 미소. 벤은 대화의 방향을 바꿔야 할 때임을 직감한다.


“3군단이랑 상황은 어때요?”


“뭐어, 똑같지. 밀고 당기고........ 그나저나 너 혼자 왔어? 병사들은?”


“다른 곳에서 대기 중이에요.”


“다른 곳이라니? 어디?”


서늘한 숲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비좁은 천막. 두 국가의 검성과 검성이 맞대고 있기엔 너무도 초라한 곳이었지만, 벤은 태평하게 디미르가 내미는 수통을 받아든다.


“그냥 남쪽이요.”


“왜 우리랑 합류하지 않고?”


“합류하면 어떡하실 건데요?”


디미르가 씨익 웃는다. 벤도 그에 지지 않고 얕게 웃는다. 이 순간, 둘은 더 이상의 대화가 필요 없을 정도로 서로의 의중을 간파할 수 있었다.


“독자적으로 움직이시겠다?”


“뭐어, 브린타이나 쪽이 좀 더 전장의 정보를 공유해주신다면 같이 싸우지 않을 이유는 없지만요.”


“정보? 무슨 정보? 지형이랑 병력분포, 다 알려 줬잖아?”


“가장 중요한 게 하나 빠져있더라고요.”

수통을 내려놓는 벤. 그의 먹색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난다.

“브린타이나의 작전계획.”


“야야, 작계라고 할 게 뭐 있어? 그냥 같이 싸우면 되는 거지.”


“그냥 싸우면 된다....... 근데 그런 것 치고는 꽤나 오랫동안 서로 간만 보고 있는 거 같네요.”


“간만 보다니, 우리 왕이 들으면 꽤나 화낼걸? 지금까지 사상자만 몇인데!”


“어쨌든 총력전은 아니잖아요. 이쪽도, 저쪽도.”


“.......그랬나?”


저렇게 뻔뻔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은 반도 내에 그리 많지 않으리라. 벤은 수통을 다시 되돌려주며 살짝 감사의 고개를 끄덕인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뭐든지.”


다시금 여유롭게 두 팔을 벌리며 응수하는 디미르. 벤은 그 방심이라는 틈을 놓치지 않는다.


“혹시 최근에, 제국 내부로부터 3군단의 정보를 공유하겠다는 움직임이 있지 않았나요?”


만약 디미르가 아니었다면, 마치 내부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듯한 이런 벤의 질문에 대해 흠칫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디미르는 자신의 미소에 조금의 흔들림도 내보이질 않았다.


“아니? 만약 그런 게 있었다면 이렇게 당하기만 하면서 싸우고 있진 않았겠지?”


“그런 게 있으니까 오히려 눈치를 보고 있는 건 아니고요?”


“근데 갑자기 그건 왜? 혹시, 카나반엔 그런 게 있었어?”


“아뇨, 우린 2군단이랑 치고받느라 바빠서.”

음흉한 미소를 공유하는 두 검성.

하지만 이 짧은 눈치싸움으로부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은 벤이었다. 그에겐 진이 가져다준 현장의 ‘정보’가 있었고, 동시에 쥬넨 니바르토가 가지고 온 ‘진실’이 있었으니까.

그는 그저, 그 모든 정보와 진실을 끼워 맞추기 위해 디미르의 반응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인사는 드렸으니, 이만 가볼게요.”


“잉, 벌써? 저녁이라도 하고 가지? 크리스랑 인사도 하고.”


“아니 괜찮아요.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다시 한 번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짧은 신음과 함께 목발을 짚고 천막입구로 나서는 벤. 디미르는 미소를 씹으며 잠시 그의 뒷모습을 감상하다가, 벤의 그림자가 밖에 걸칠 때쯤 갑자기 그를 불러 세운다.


“저기, ‘변수’! 우리랑 합류하지도 않을 거면 여기 왜 온 거야?”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본심을 물어버리는 ‘미소의 검성’. 벤은, 그런 미소를 향해 잠시 목발을 멈추고, 특유의 어색한 미소를 머금는다.




“원래 구경꾼이 싸움을 더 크게 만드는 법이잖아요.”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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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8

  • 작성자
    Lv.86 네모구름
    작성일
    16.07.10 20:50
    No. 1

    음 숨겨진 검성인가요..? 정주행 한번 다시 해야하나 ㅜ 제국의 검성들 이름이 기억이 안나네요. 검성 둘이고 그 중 하나가 장미였고, 하나는 저번에 고도랑 함께 싸웠던거 같은데 가물가물하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7.13 19:48
    No. 2

    네모구름님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최고사령관이라는 용어때문에 혼란을 드린 것 같네요 ㅠㅠ
    이스누시아 방위군의 최고사령관이란 뜻이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evolutio..
    작성일
    16.07.11 09:51
    No. 3

    가라 프로문제유발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7.13 19:49
    No. 4

    에볼루션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반길 수 없는 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니푸르
    작성일
    16.07.14 20:06
    No. 5

    대놓고 싸움판 키우러 왔다고 말하네요ㅋㅋㅋ
    재미있게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7.15 20:22
    No. 6

    벤이 잘 하는 일이죠 :)
    라루사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4 주정
    작성일
    16.07.19 10:41
    No. 7

    너무 재미있군요. 오랜만에 와서 댓글 남깁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7.20 20:29
    No. 8

    주정님 오랜만입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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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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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막간) 하나의 밤하늘, 세 개의 달빛 +11 16.08.29 623 14 15쪽
242 (22막) 세 개의 오만 (14) +10 16.08.24 576 13 16쪽
241 (22막) 세 개의 오만 (13) +9 16.08.19 450 13 26쪽
240 (22막) 세 개의 오만 (12) +6 16.08.14 494 9 18쪽
239 (22막) 세 개의 오만 (11) +10 16.08.09 599 11 17쪽
238 (22막) 세 개의 오만 (10) +6 16.08.05 608 13 14쪽
237 (22막) 세 개의 오만 (9) +6 16.07.30 578 14 15쪽
236 (22막) 세 개의 오만 (8) +8 16.07.26 534 11 24쪽
235 (22막) 세 개의 오만 (7) +8 16.07.20 639 13 19쪽
234 (22막) 세 개의 오만 (6) +7 16.07.15 679 12 21쪽
» (22막) 세 개의 오만 (5) +8 16.07.10 686 13 22쪽
232 (22막) 세 개의 오만 (4) +6 16.07.05 634 14 18쪽
231 (22막) 세 개의 오만 (3) +9 16.06.30 576 12 18쪽
230 (22막) 세 개의 오만 (2) +6 16.06.25 651 13 18쪽
229 (22막) 세 개의 오만 (1) +6 16.06.20 730 15 16쪽
228 (막간) 현실을 마주하며 +4 16.06.15 750 16 16쪽
227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0) +10 16.06.10 729 14 21쪽
226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9) +8 16.06.05 730 12 16쪽
225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8) +4 16.05.30 698 15 19쪽
224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7) +6 16.05.25 724 11 19쪽
223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6) +4 16.05.20 955 10 22쪽
222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5) +5 16.05.14 777 12 18쪽
221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4) +2 16.05.09 703 13 15쪽
220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3) +6 16.05.04 1,028 12 18쪽
219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2) +4 16.04.28 741 16 17쪽
218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 +8 16.04.23 849 15 19쪽
217 (막간) 필요없는 증명. 필요한 증명. +10 16.04.18 739 18 13쪽
216 (20막) 증명 (9) +4 16.04.13 698 18 16쪽
215 (20막) 증명 (8) +8 16.04.08 670 20 16쪽
214 (20막) 증명 (7) +11 16.04.02 735 14 16쪽
213 (20막) 증명 (6) +10 16.03.28 783 13 15쪽
212 (20막) 증명 (5) +8 16.03.23 813 17 24쪽
211 (20막) 증명 (4) +8 16.03.18 948 16 23쪽
210 (20막) 증명 (3) +10 16.03.12 813 17 20쪽
209 (20막) 증명 (2) +10 16.03.07 887 20 19쪽
208 (20막) 증명 (1) +10 16.03.02 763 18 18쪽
207 (막간) 지평선으로 향하는 한걸음을 지켜보는 사람들 +8 16.02.26 810 19 17쪽
206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0) +8 16.02.21 911 24 21쪽
205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9) +10 16.02.16 1,033 20 22쪽
204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8) +6 16.02.11 809 17 28쪽
203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7) +6 16.02.06 765 19 21쪽
202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6) +6 16.02.01 828 17 22쪽
201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5) +10 16.01.27 820 17 17쪽
200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4) +10 16.01.22 965 16 18쪽
199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3) +8 16.01.17 707 20 18쪽
198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2) +10 16.01.12 773 20 19쪽
197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 +8 16.01.07 792 21 13쪽
196 (막간) 언젠가 +4 16.01.02 947 22 16쪽
19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2) +8 15.12.28 799 25 23쪽
19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1) +6 15.12.23 933 2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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