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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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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5.04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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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3)

DUMMY

불편한 시선이 오고가는 가운데 오직 하나의 표정만이 아무런 감흥 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무심한 시선의 주인공이야말로 이 모든 처참한 분위기의 원흉이었다는 점이다.

엇갈린 채 묶여있는 팔 전체를 감싸고 있는 금속수갑. 그 가운데에서 흘러내린 사슬은 양 발목을 구속한 족쇄와 연결되어 팽팽하게 죄인의 자유를 억압한다. 그리고 그의 왼쪽에는 당장이라도 대검을 휘두를 준비가 되어있는 드렌턴이, 오른쪽에는 흑도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지나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죄수’ 주변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쥬넨 니바르토. 당신은 반역죄인으로서 국민과 군부의 엄중한 심판을 받아 그 죄를 치름이 마땅하나, 현재 공화국이 처한 특수한 상황과 모든 동맹의 이익을 위하여 먼저 군지휘관들과 의회 앞에서 변호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죄인이 가진 ‘니바르토’라는 이름 때문에 총리는 이 ‘재판’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대신 그 역할을 받게 된 오로메는 감정을 배제한 차분한 목소리로 시작을 알렸지만, 돌아오는 것은 죄인의 죄인답지 않은 날선 웃음이었다.


“변호? 전 변호를 하기 위해 투항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한 짓에 대해 변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조국을 배신했고, 한때 제 동료였던 자들과 제 부하였던 자들, 저를 믿었던 모든 자들에게 검을 휘둘렀습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즉결심판으로 당신의 목을 베어도 불만은 없겠군?”


죄수를 중심에 두고 반원형으로 앉아있는 의원들. 그 가운데에서 눈을 빛내고 있던 란다가 노골적인 적의를 흩뿌리며 쥬넨을 노려본다.


“그냥 죽고 싶었다면 자결을 했겠지요. 뭐어, 아무것도 듣지 않고 굳이 제 목을 베겠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여러분들은 거대한 기회를 놓치는 겁니다.”


“그 잘난 ‘정보’말이지.”


쥬넨이 아직 목숨을 부지한 채 이곳에 서있을 수 있었던 이유. 란다는 그 이유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흔든다. 죄인의 입에서 그 어떤 정보가 흘러나오든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정숙하여 주십시오, 란다 경. 죄인이 제공하겠다고 약속한 정보들은 모두 향후 동맹의 군사작전에 관련된 사항들로 예상되기에, 혼선을 막기 위해 질문과 그 정보에 대한 판단은 지휘관들께서 담당하시겠습니다. 크라트 경?”


“.......”

정식으로 권한을 넘겨받은 크라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의원들의 앞으로 나아간다. 평소와 다름없는 가죽갑옷과 흔들림 없는 몸짓이었지만, 조카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의 싸늘함만큼은 평소보다 더욱 짙게 ‘늑대’의 무표정을 돋우고 있었다. 이런 무표정이야말로 같은 ‘니바르토’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의 형이 마주하지 못했던 시선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이유. 그리고 그 메마른 반응은 죄인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우리 공화국은 죄인이 가담했던 제국의 2군단을 물리치고 이곳, 마즈다성을 중심으로 마즈다힐 전역을 점령한 상태다. 이런 정황상, 네 투항은 제국2군단의 해체와 관련된 패전의 책임을 떠안기 두려워 내린 도피성의 결정일 가능성이 높겠지. 죄인이 공화국과 동맹에게 제공할 수 있는 정보는 죄인이 직접 몸담았던 2군단의 내부사항 수준일 터. 이미 사라진 적에 대한 정보는 우리에게 그다지 영양가가 높지 못하다고 생각된다만.”


이어질 거래와 협상에 있어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크라트의 선공. 그러나 쥬넨은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일지 미리 예상하고 있었기에 숙부의 협박에 지지 않는다.


“저는 2군단에서 제가 기사로서 추구하고 싶었던 바를 절반 정도 이뤘습니다. 2군단이 남든 해체되든, 더 이상 저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다시 조국에서 나머지 반의 기사도를 완성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기 위해, 좀 더 큰 그림을 위한 기회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


“뻔뻔하군. 이미 한번 등을 돌렸던 조국을 위해 검을 들고 싶다는 뜻인가? 네 혀에서 진정성을 느낄 사람이 과연 이 안에 얼마나 있을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제공하는 정보에도 제 진정성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그때 제 목을 베셔도 상관없습니다. 선택은 당신들의 몫이니까요.”


“.......”

크라트는 잠시 조카에게서 서늘한 시선을 거두고 끝자리에 앉아있는 로빈과 벤을 슬쩍 바라본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로빈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고, 크라트는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다시 입을 연다.

“그렇다면 카나반의 모든 군지휘관을 대신하여 묻겠다. 네가 목숨을 내놓고 가져온 정보란 게 구체적으로 뭔가?”


“아실레마제국 3군단과 군단장 ‘은빛의 사선’ 카이우스 드레브냑을 무너트릴 수 있는 정보입니다.”


쥬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회의실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한다.

제국의 3군단이라 함은, 다름 아닌 현재 브린타이나왕국과 동부국경에서 교전을 벌이고 있는 세력. 카나반과는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세력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동맹’이라는 커다란 틀에서 바라본다면 분명 당장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임에는 틀림없다.


“.......3군단을 무너트린다-라. 그 진위는 둘째 치고, 2군단의 부관에 불과했던 네가 어떻게 그런 정보를 갖고 있을 수 있나?”


“전 단순한 부관이 아니었습니다. 이 꽉 막힌 ‘나무의 나라’와는 달리, 제국은 ‘기사’로서의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훌륭하게 이용해주었으니까요.”


“하! 아직도 제국에 대한 충심을 거두지 못한 걸로 보이는군!”


격노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란다. 그에 동조하여 의원과 몇몇의 군인이 격하게 쥬넨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오로메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그들을 진정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크라트가 중앙으로 나서 약간의 영력과 손짓으로 강제적인 침묵을 이끌어야 했다.


“3군단의 편제와 배치상황, 세부적인 전투력 등은 이미 브린타이나 정보부에서 파악 중이다. 만약 네가 그런 정보로 우릴 현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제가 모든 비난과 목숨을 각오하고 가져온 겁니다. 그런 가벼운 것들과 비교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그의 처지와, 그가 서있는 장소에 걸맞지 않은 당당한 자신감. 크라트는 호기심과 의심이 뒤섞인 얼굴로 한걸음, 조카를 향해 크게 다가선다.


“듣고 있다.”


“제국의 군부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유기적인 단체가 아닙니다. 철저하게 독립적인, 동시에 경쟁적인 구조입니다. 특히 그 절반의 균형을 이루던 ‘붉은 장미의 검성’이 무너진 후, 그녀를 대신하여 좌검성직을 차지하기 위한 군단장들의 암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시작부터 그 경쟁에서 도태된 2군단은 카나반을 상대로 생존을 위한 최후의 발악을 해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두가 알고 있겠죠.”


“요점만 말해라. 지금 그게 3군단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그들도 내부에 ‘적’이 있다는 겁니다.”


순식간에 가라앉는 회의장의 분위기. 란다를 포함한 귀족파 의원들도 이 순간만큼은 조용히 쥬넨의 다음 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침묵은 의외의 인물로부터 깨져버린다.


“잠시만요.”

자연스럽게 집중되는 시선. 그러나 벤은 아랑곳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목을 가다듬는다.

“아마도 지금부터 논의될 내용들은 향후 작전에 영향을 끼칠 군사기밀에 해당되는 것 같네요. 죄송하지만 비취인가가 되지 않은 의원님들께선 잠시 자리를 비워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검성! 의회에 정보를 은폐할 속셈이오?!”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반박의 목소리를 터트린 이는 란다 가슈펠라르였다. 하지만 벤은 오히려 그런 란다를 향해 어처구니없다는 듯 어깨를 씰룩인다.


“지금은 청문회가 아닙니다. 의원님들이 이곳에 계신 건 어디까지나 저와 로비-, 아니, 폐하의 배려 덕분이죠.”


“하지만-”


“군사기밀보호법 2조 1항에 의하면 국가안위에 대한 중대한 군사기밀은 오직 1급비밀취급인가를 받은 영관급 이상의 지휘관에 한하여 취급이 가능하다고 명시되어있습니다. 비록 지금 당장 우리와 대적하고 있지는 않지만 제국3군단은 분명 공화국안보에 있어서 거대한 위협. 죄송한데 이 이상의 허가는 해드리기 어렵습니다. 오로메 경과 아델 경도 동의해주시겠지요?”


“예.”


“알겠습니다.”


란다와는 달리 오로메와 아델은 쉽게 지금 상황을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녀들의 지시에 따라 모든 왕당파의원들과 시민당의원들이 의원들이 회의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결국 란다도 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들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숨 쉬는 소리조차 희미해진 회의실. 마지막으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벤은 천천히 남아있는 얼굴들을 눈에 담으며 자리를 벗어나 죄수를 향해 다가선다.


“자, 그럼 쥬넨.”


마주치는 두 시선.

한쪽은 순수한 여유로움이, 한쪽은 여유로 치장된 적의가 치솟고 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벤은 얇은 미소를 짓는다.


“여기에 온 지이인~짜 이유를 들어보도록 하죠.”




==========================




“끝날 생각을 안 하네.”


물방울이 송글송글 잔을 적실 정도로 차갑게 식힌 맥주. 그 톡 쏘는 한 모금을 크게 목으로 넘기고 나서 셰르는 기분 좋게 입술의 거품을 닦아낸다.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와 파병 이후 처음으로 짧게 자른 갈색머리는 여전히 매서운 느낌을 주고 있었지만, 그의 복장은 남색 근위대복이 아닌 검정 셔츠와 반바지뿐이었다. 본래 축하연이 예정되어있었던 만큼 전투에서 공을 세운 모든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포상휴가가 내려온 상태였던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쥬넨 니바르토니까.”


그리고 셰르의 바로 곁에서 와인을 홀짝이는 유진 또한 군복을 벗고 가벼운 원피스 차림으로 한적한 바람을 만끽하고 있었다. 별다른 장식이나 무늬는 없었지만, 워낙 굴곡이 뚜렷한 몸매의 유진이었기에 그것만으로 지나가는 많은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평소 그녀가 자신의 큰 가슴에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던 걸 생각해본다면 꽤나 이례적인 차림새.

그들이 사복으로 중앙성채 앞 긴 의자에 앉아 축하연에 쓰일 예정이었던 술을 축내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왕비가 왕실참모진을 포함한 모든 기사들에게 한턱을 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쥬넨의 등장으로 축하연은 물론이고 왕비의 약속까지도 무기한 보류될 수밖에 없었고, 갈 곳을 잃은 근위기사 둘은 공짜 술로 서로를 위로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둘과 한 몸처럼 붙어 다니던 왕녀 리즈도 엄마를 만나러 간다는 이유로 자리를 비운 상태. 영락없이 둘뿐인 밤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떡할래? 그냥 숙소로 돌아가?”


어느새 절반이 비어버린 잔을 내리는 셰르. 하지만 유진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아니, 그냥 여기서 좀 더 있자. 바람도 좋잖아.”


이놈의 소녀감성. 셰르는 피식 웃어버린다.

처음 만났을 때, 서로의 가문을 들먹이며 비난을 주고받던 소년소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 바득바득 죽일 기세로 대들던 소녀는 어느새 성숙한 여인이자 훌륭한 군인이 되어 옆에서 와인을 홀짝이고 있다. 가문 이름에 대한 맹목적인 분노로 얼룩져 있던 그때의 소녀와, 피바람이 불던 전장에서 감성에 젖어있던 그녀, 둘 중 어떤 것이 유진 가슈펠라르의 본모습일지는, 셰르에겐 고민해볼 필요도 없는 문제.

성채 앞의 대로는 얼마 전까지 시체와 전투의 흔적이 선명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깔끔하고 한산했다. 하늘의 어둠이 짙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길가를 나다니던 그림자는 점차 줄어갔고, 둘을 알아보고 경례를 하는 병사들의 웃음도 희미해져 간다. 셰르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기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유진의 손가락을 잡는다. 돌아오는 것은 소녀의 티를 벗지 못한 작은 웃음.


“뭐, 왜?”


그녀의 미소가 머쓱했는지, 셰르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애꿎은 맥주를 빨아들인다. 그러나 유진의 미소는 색을 더해갈 뿐.


“너, 아직 한 번도 나한테 말 안 한 거 알아?”


“뭘?”


“뭐일 거 같은데?”


와인으로 붉게 반짝이는 입술. 적당한 높이의 콧날 위로 반짝이는 새빨간 눈동자. 그리고 도시의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황금빛의 머리칼. 전형적인 가슈펠라르의 이름이 지배하고 있는 유진의 얼굴이었지만, 셰르에게 그 이름은 더 이상 배척과 환멸의 대상이 아니었다. 적어도, 유진이라는 존재에 한해서는.


“.......뭐, 굳이 말로 해야 돼?”


“헤헤, 부끄럽나봐?”


“부끄럽긴 무슨-!”


“하여튼 시즈키치 남자들은.”


쿡쿡 웃는 유진의 뺨에 차가운 맥주잔을 들이미는 셰르. 그 짓궂음에 유진은 꺄아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손가락을 잡고 있는 셰르의 손을 잡아당긴다.

빠르게 좁혀진 간격.

그 위로 아찔하게 흐르는 맥주향과 와인향. 두 색다른 알콜의 잔향이 뒤섞이려는 순간-


“유진?”


익숙하면서도 생각지 못한 목소리가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유진은 화들짝 놀라며 셰르의 가슴을 밀쳐낸다.


“오라버니?”


“유진 맞구나! 오랜만이다!”


그녀와 같이 새빨간 눈동자. 그녀와 같이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머리카락.

셰르는 성채에서 나온 그 남자의 정체를 빠르게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랬기에,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죄송해요, 오신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아냐, 복무 중이니까 어쩔 수 없지. 휴가라도 받았어? 이런 곳에서 어쩐 일이야?”


“네, 왕비님께서 회식하자고 하셔서 기다리는 중이었어요.”


해맑게 웃으며 동생과 포옹을 나누는 란다 가슈펠라르. 그러나 순수하게 혈육과의 재회가 반가운 그와는 달리, 유진의 얼굴엔 절반의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오빠는 쉽게 그 원인을 간파해낸다.


“.......저분은?”


마침내 자신에게 붉은 시선이 꽂히자, 셰르는 맥주잔을 내려놓고 일어나 정중한 몸짓으로 허리를 숙인다.


“셰르 시즈키치라고 합니다. 동생분과는 훈련소 동기입니다.”


유진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란다의 얼굴이 굳는다.

그러나 셰르는 여기서 ‘시즈키치’라는 이름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이름에 대한 자부심 따위가 아니었다. 언젠가는 부딪쳐야 할 벽이 다소 이르게 다가왔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시즈키치?”


“예. 말단 가원이라 들어본 적은 없으실 겁니다, 란다 경.”


“.......”


재회의 기쁨도 잠시, 란다는 굳게 입술을 다물고 천천히 셰르와 동생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다. 이미 어둠이 내리깔린 대로.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기 직전, 자신과 셰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보지 못했기를 유진은 간절히 속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셰르는 너무도 당당한 태도와 표정으로 란다의 앞에 오른손을 내민다.


“유진에게는 많은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각자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역사와 오해 때문에 미리 인사를 드리지 못한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신세라.”

힐끗 셰르가 내민 손을 내려다보는 란다의 새빨간 눈동자.

“구체적으로 어떤 신세를 졌다는 거지?”


“물론 같은 근위기사이자 동기로서 많은 가르침을 받은 거죠.”

셰르는 대답이 없음에도 비어있는 오른손을 내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뭐 다른 생각이라도 하셨습니까?”


“.......”

겉보기에도 황망한 유진의 눈동자와는 달리 서로를 훑는 셰르와 란다의 시선엔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그 오묘한 분위기의 끝에서, 란다는 마침내 셰르의 악수를 받아들이며 동생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아마 오늘 회식은 어려울 거다. 대신 그간 소식도 주고받을 겸, 이 오라비한테 시간 좀 내줬으면 좋겠구나.”


“다, 당연하죠, 오라버니! 묵고 계신 곳을 알려주시면 제가 내일-”


“아니, 지금 바로.”


미소가 스며든 입술에서 나온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란다의 목소리. 그에 유진은 흠칫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예. 근위대장님께 신고하고 바로 찾아뵙도록 할게요.”


“그래.”


피부가 하얗게 바랠 정도로 서로의 감정을 주고받던 손을 놓고, 빠르게 셰르를 지나쳐가는 란다. 그러나 셰르는 그런 란다의 뒷모습을 바라보지도 않는다. 그의 찢어진 눈은 오직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유진에게 고정되어있었으니까.


“괜찮으니까, 오빠한테 가봐. 괜히 나 때문에 네가 혼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셰르, 나는-”


“괜찮다니까.”


그녀가 사과를 하려고 했다는 사실과, 그 사과가 무슨 내용을 품고 있는지 셰르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완벽하게 이곳을 벗어나지 않은 란다의 그림자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유진의 손도 잡아주지 않고서 깔끔하게 맥주잔을 향해 돌아선다. 유진은 그런 셰르의 미소를 향해 미련이 남은 표정이었지만, 결국 그를 남겨두고 드렌턴을 찾기 위해 성채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도심으로 이어지는 대로의 중앙. 조명조차 없는 그 어둑한 도시의 그림자 속에서,

란다는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한 그림자를 향해 조용히 속삭인다.




“저 셰르 시즈키치라는 놈, 자세히 조사해봐.”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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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22막) 세 개의 오만 (14) +10 16.08.24 576 13 16쪽
241 (22막) 세 개의 오만 (13) +9 16.08.19 450 13 26쪽
240 (22막) 세 개의 오만 (12) +6 16.08.14 494 9 18쪽
239 (22막) 세 개의 오만 (11) +10 16.08.09 599 11 17쪽
238 (22막) 세 개의 오만 (10) +6 16.08.05 608 13 14쪽
237 (22막) 세 개의 오만 (9) +6 16.07.30 578 14 15쪽
236 (22막) 세 개의 오만 (8) +8 16.07.26 534 11 24쪽
235 (22막) 세 개의 오만 (7) +8 16.07.20 639 13 19쪽
234 (22막) 세 개의 오만 (6) +7 16.07.15 679 12 21쪽
233 (22막) 세 개의 오만 (5) +8 16.07.10 685 13 22쪽
232 (22막) 세 개의 오만 (4) +6 16.07.05 634 14 18쪽
231 (22막) 세 개의 오만 (3) +9 16.06.30 576 12 18쪽
230 (22막) 세 개의 오만 (2) +6 16.06.25 651 13 18쪽
229 (22막) 세 개의 오만 (1) +6 16.06.20 730 15 16쪽
228 (막간) 현실을 마주하며 +4 16.06.15 750 16 16쪽
227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0) +10 16.06.10 729 14 21쪽
226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9) +8 16.06.05 730 12 16쪽
225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8) +4 16.05.30 698 15 19쪽
224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7) +6 16.05.25 724 11 19쪽
223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6) +4 16.05.20 955 10 22쪽
222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5) +5 16.05.14 777 12 18쪽
221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4) +2 16.05.09 703 13 15쪽
»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3) +6 16.05.04 1,028 12 18쪽
219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2) +4 16.04.28 741 16 17쪽
218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 +8 16.04.23 849 15 19쪽
217 (막간) 필요없는 증명. 필요한 증명. +10 16.04.18 739 18 13쪽
216 (20막) 증명 (9) +4 16.04.13 698 18 16쪽
215 (20막) 증명 (8) +8 16.04.08 670 20 16쪽
214 (20막) 증명 (7) +11 16.04.02 735 14 16쪽
213 (20막) 증명 (6) +10 16.03.28 783 13 15쪽
212 (20막) 증명 (5) +8 16.03.23 813 17 24쪽
211 (20막) 증명 (4) +8 16.03.18 947 16 23쪽
210 (20막) 증명 (3) +10 16.03.12 813 17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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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6) +6 16.02.01 828 17 22쪽
201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5) +10 16.01.27 820 17 17쪽
200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4) +10 16.01.22 965 16 18쪽
199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3) +8 16.01.17 707 20 18쪽
198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2) +10 16.01.12 773 20 19쪽
197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 +8 16.01.07 792 21 13쪽
196 (막간) 언젠가 +4 16.01.02 946 22 16쪽
19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2) +8 15.12.28 799 25 23쪽
19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1) +6 15.12.23 933 2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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