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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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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3,319

작성
16.03.02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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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글자
18쪽

(20막) 증명 (1)

DUMMY

의미 없는 살육과 전투가 어디 있겠냐마는, 몇 주 동안이나 고착되어있는 전선을 바라보는 옥스토브라카의 영주, 반즈 스트라토스의 눈동자는 이미 회의감과 의문으로 무겁게 젖어있었다. 브린타이나왕국내전 당시 영지를 지키다 전사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그녀가 영주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국왕인 론크리스의 배려 덕분.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병을 이끌어 동부전선에 참전한 그녀였지만, 전쟁의 양상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크게 어긋나있었다.


“!”


숲을 둘러보느라 잠시 집중력이 흐트러진 순간, 그 방심을 놓치지 않고 검은 제복의 제국병사 하나가 그녀의 목을 향해 창을 찔러 넣는다. 그 창끝은 피를 머금는 데 성공했으나, 반즈의 목에 남은 것은 실선이나 다름없는 얇은 생채기뿐. 그녀는 그대로 창목을 끌어당겨 함께 끌려온 제국병사의 얼굴을 주먹으로 짓뭉개버린다. 그러나 안구가 함몰되고 치아가 우수수 떨어지는 그 광경에도 반즈는 희열을 느낄 수가 없었다.

고작 일반병사에 불과함에도 이들은 기사에게 덤비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처음엔 모두가 이런 그들을 무모하고 오만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직접 그들과 맞붙어본 왕국의 기사들은 점차 제국 3군단의 병사들에 대해 다른 평가를 지니게 되었다. 적 기사를 상대하지 않았음에도 늘어가기 시작하는 온몸의 상처가 ‘불편한 사실’ 하나를 상기시켜주고 있었으니까.


“놈들이 물러간다!”


누군가의 외침대로, 숲의 그림자를 대신하여 잔뜩 짙게 대지를 물들이고 있던 먹색의 물결이 외곽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겉으로 보면 침략을 막아낸 왕국군의 훌륭한 승리. 그러나 기쁨의 환호성을 내지르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이미 그들이 수십 번이나 반복해서 봐온 광경이었으니까.


“오늘도 멋지게 이겼네.”


후퇴하는 제국군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반즈의 귓가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들어온다. 그 주인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돌아서는 그녀의 얼굴은 당혹함이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다, 단장, 아니, 검성님!”


“안녕, 스트라토스. 오늘도 고생이 많아.”


“화, 황공합니다! 이곳엔 어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미소의 검성’ 디미르 트리스탄테의 등장은 반즈로서도 감히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여인보다도 얇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푸른 눈동자 아래로 검성명에 걸맞은 매혹적인 ‘미소’를 달고 나타난 디미르는, 제복이나 갑옷은커녕 왜소한 몸집이 그대로 드러나는 헐렁한 민무늬 셔츠 하나만을 입고 자신의 장창 ‘콴탈루엘의 눈물’을 꼬나든 채였다. 회색빛의 창날에 아직 영혼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반즈는 그가 전투 내내 어딘가에서 제국군을 상대로 장난을 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조만간 우리 왕께서 동부전선에 시찰을 나오실 거야. 뭐 사전조사 겸사겸사해서 와본 건데, 보고서랑 크게 다르지 않네.”


“.......그렇습니까.......”

검성의 등장과 국왕의 시찰. 그러나 반즈는 이 사실만으로 일상이 뒤틀릴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신이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는 건 그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전장에서 죽어 나가는 병사들과 기사들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거대하면서도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이 전쟁을 휘감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검성님. 주제넘은 짓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감히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뭔데?”


“놈들이 어째서 우릴 격파하고 들어오지 않는 겁니까?”


디미르가 다소 놀란 듯한 눈으로 반즈를 돌아본다. 왕국의 자랑스러운 군인이자 장교, 거기에 영주인 사람이 내뱉은 말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패배의식이 짙었던 탓이리라. 그러나 그는 반즈 스트라토스라는 여자가 얼마나 자긍심이 높은 기사인지 알고 있었기에, 곧바로 그 질문의 의중을 꿰뚫을 수 있었다.


“제국이 의도적으로 간만보고 있다는 뜻이야?”


“날이 갈수록 전투 후에 남아있는 아군의 시체만 늘어갑니다. 적의 병사들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잘 훈련이 되어있고, 두려움이나 망설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놈들은 기사를 동원하여 전력을 다해 공격해 들어오지 않습니다. 저뿐만이 아닙니다. 지휘관 모두가 지금 저희가 흘리고 있는 피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디미르는 살짝 웃는다. 왕국군의 최고지휘관이자 검성에게 이 정도로 솔직한 의견을 낼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다른 이가 들었다면 군법을 내세워 그녀에게 사형에 가까운 처벌을 내릴 것을 주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디미르는 반즈가 어떤 생각으로, 그리고 어떤 심정으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는지 잘 알고 있었다.


“3군단이 어째서 전력으로 이쪽을 치고 들어오지 않는지 궁금하다면, 이 전쟁이 시작된 이유부터 생각해봐야겠지.”


“.......”


“곤란해할 거 없어. 우리 영감탱이가 멋대로 밀약을 맺은 대가라는 건 모두 알고 있잖아?”


과거였다면, 아무리 혈육일지라도 ‘오열’을 향해 영감탱이라 비하한 디미르의 발언에 경악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왕국의 기사들에게 ‘오열’은 암묵적으로 금기시되어있는 반역자의 이름. 오히려 영감탱이라는 표현이 자비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허나, 그 밀약은 애초에 당시 수뇌부의 생존을 위해 일종의 군사적 속국을 제안한 것이었잖습니까. 일방적으로 협약이 깨진 것에 분노하여 전쟁을 시작한 것이라면 마땅히 얻고자 하는 바가 있기 마련일 텐데, 저런 미지근한 태도라니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바로 그 부분이야! 밀약을 통해 그들이 얻고자 했던 것. 그게 과연 뭐였을까?”


인자한 미소로 갑작스럽게 다가서는 디미르. 반즈는 예상치 못한 그의 반응에 한걸음 물러나며 말을 더듬는다.


“그, 그야....... 우리 브린타이나를 이용하여 대(對)제국동맹의 기틀을 뒤흔들려는-”


“맞아. 근데 이상하지 않아? 만약 정말로 제국을 위한 선택이었다면, 어째서 본국이 아닌, 3군단장 카이우스 드레브냑과 단독협상을 한 걸까?”


“.......!”


손에 피를 묻히고 아군을 향해 고함을 내지르는 것에 머물러 있던 반즈의 시야가 순식간에 크게 확장되기 시작한다.


“놈들은 눈치를 보고 있는 거야. 3군단장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 그 일의 뒤처리를 위해서 ‘수습하는 척’을 하고 있을 뿐이지. 전쟁이 장기화되고 소모전의 양상으로 가고 있으니, 머지않아 저쪽에서 뭐라도 얻기 위해 먼저 협상안을 내놓을걸? 뭐어, 물론 그 협상안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남쪽에서 신나게 싸우고 있는 카나반과 연계해서 우리도 치고 들어갈지는 우리 여왕님께 달려 있지만.”


라고 말하며 웃어버리는 디미르였지만, 사실 그가 모든 진실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선대 검성 블라르 트리스탄테가 본국이 아닌 3군단장 카이우스와 밀약을 맺은 이유.

그것은 바로 카나반이 제국의 좌검성, ‘붉은 장미’를 잡아낸 덕분이었다.

‘오열’은 좌검성의 공백이 곧 제국 내 군단장들 사이의 눈치싸움으로 번지리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기회를 틈타 독주체제를 굳히려는 우검성에 맞서 군단장들은 저마다 ‘계기’가 필요해질 것이고, 블라르는 그 조급함이라는 미끼를 이용하여 카이우스라는 이름의 거대한 외부세력을 끌어들였다. 결론적으로, 오열은 분열된 국론을 통일할 수단과, 지나치게 검성에 의존하는 지휘체계를 갈아엎을 수단으로 각각 제국3군단과 자기 자신을 이용한 것이다.


“검성님, 만약....... 폐하께서 3군단에 대항하여 정식으로 반격하기를 선택하신다면.......”


“아, 그때는 뭐.......”


일상 같은 전투에 지쳐 모두의 한숨이 숲을 내리깔고 있을 때, 후방에서 하나의 거대한 군세가 모습을 드러낸다. 나무로 빼곡한 숲의 풍경으로도 가릴 수 없는 위용과, 그 위용의 선봉에서 나부끼고 있는 깃발의 문양은 반즈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영광의 휘장. 붉게 피어있는 꽃이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의미하는지, 과거 그 소속이었던 그녀는 커다랗게 빛을 빨아들이는 눈동자로 깨달음을 대신한다.


디미르는, 깜짝 선물을 꺼내놓는 아버지와도 같은 미소를 지으며

반즈의 목덜미로 흐르는 핏줄기를 친히 닦아주고 입술을 열었다.



“진짜 ‘시작’이겠지.”






========================





외견으로는 소년이나 다름없는 왜소한 체격이지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암흑의 눈동자가 어느 정도의 세월을 담고 있는지 알고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년은, 언덕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작은 둔덕 위에서 한 손엔 책을, 한 손엔 군용수통을 들고서 평원의 공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리운 냄새야.”


굳이 코를 벌름거리지 않아도 소년은 고향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과거 이곳을 물들이고 있었던 짙은 녹음의 기운은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지만, 그보다도 더욱 진한 고향의 비린내가 그의 향수를 자극했으니까.


[오랜만이군, 동생아.]


그러나 소년은 한가하게 책을 펼칠 수 없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이 고향의 냄새만큼이나 아득한 목소리 하나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붉게 일렁이는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소년은 아득히 먼 과거 속,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길 즐겼던 한 존재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누구 맘대로 동생이래? 하도 오래 인간이랑 쳐살다보니 시간개념이 병신 되셨나?”


악의가 있는 듯 없는 듯, 애매한 소년의 검은 혓바닥 덕분에 붉은 그림자 사이로 낮은 웃음이 흘러나온다.


[시대가 바뀌었지. ‘변수의 굴레’가 씌워지기 전, 너의 시대에는 모두가 평등한 목소리였겠지만, 네가 자리를 비운 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 모두가 너를 잊고 있었지. 모두가 숲의 나라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꼈음에도 그 정체를 바로 깨닫지 못한 것도 무리가 아니야.]


“하아, 씨발 이럴 줄 알았어. 그 좆같은 해골바가지 때문에 다 망쳤어.”


소년이 말하는 ‘해골바가지’가 과거 카나반의 그랜드마스터‘였던’ 인간이고, 그의 계략이 휘말려 소년이 자신의 마력을 노출시킨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 누가 알고 있을까. 그러나 붉은 그림자는, 마치 그의 시간 모두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낮게 웃으며 소년에게 다가선다.


[진정한 목소리, 바하이트의 시간이 왔다. 거짓된 주인과 거짓된 주인의 부모라는 오명을 씻고, 진정한 영혼의 인도자로서 이 땅에 군림할 때가 왔다. 나의, 우리의 형제여. 너도 새로운 역사의 그림자로 이 땅에 서보지 않겠는가.]


“세뮈엘과 라이펠, 발카지스한테도 그렇게 말해보시지? 아, 그 새끼들이랑은 이미 신나게 싸우고 계시던가? 케테르의 도마뱀 새끼들한테 허락은 받으셨겠지?”


소년의 비웃음에 순간 멈칫하는 붉은 그림자.


[........‘침묵’과 ‘회색’은 신경 쓸 거 없다. 그들은 인간이면서도 거짓을 숭배하는 자들. 에일로피아의 목소리가 끊긴 이상, 용이 깨어날 일은 없어.]


“아, 그러셔.”


그림자가 드리우는 그림자. 그러나 그에 신경 쓰지 않고 소년은 준비해온 책을 무릎 위에 펼친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음유시인들의 가사가 기록된 장서였다.


[모든 것에 초연한 듯, 처음부터 공백을 고집하고 있던 네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이유가 있지 않던가? 먼저 금기를 깨트린 것은 세뮈엘이다. 나는 그에 정당하게 대응했을 뿐. 앞으로 이 평원에서 일어날 일도, 그 연장선에 지나지 않-]


“ ‘의도라는 어둠에 물든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사도를,

더 이상 사도라 부를 수 있을까.

단지 사도였다는 이유만으로 달고 다니는 저 영광이라는 이름의 날개,

저 추잡한 날개를,

언젠가 반드시 찢어버려야 할 것이다.

그 일은 악마의 몫이 아니다.

그 누구보다도 날개를 갈망했으면서도 혐오했던

우리 인간들의 몫이다.’


이 새끼들은 가끔 재밌는 소리를 한단 말이야. 안 그래?”


[.......]


낄낄 웃으며 침묵하는 그림자를 향해 수통을 내미는 소년. 물론 그림자가 그 호의를 받아들일 일은 없었기에, 그는 다시 수통을 끌어와 깊은 차향을 음미하며 목으로 넘긴다.


“나보고 여기에 왜 왔냐고? 세뮈엘 그 년이 먼저 시작한 거라고? 내가 너 개수작 부리고 있는 거 모를 줄 알았냐? 그렇게 니 머리 믿고 깝치다가, 언젠가 훅 가는 수가 있어.”


[이미 피할 수 없다. 우리가 이들을 주인으로서 창조한 이유. 나는 그 태초의 직무를 되살리기 위해 그들을 만들어낸 ‘피’의 이름을 선택했다. 이들의 역사는 나의 이름으로 시작하여 나의 이름으로 맺어질 것이다. 흐름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동생아, 너 역시도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 들어가는 한낱 물방울일 뿐.]


“하하하하하, 그래, 씨발 뭐 우리끼리 침 튀겨봤자 뭐가 나오겠냐. 근데 이거 하나만 기억해 둬.”

암흑보다 시커먼 소년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인다. 그의 눈은, 주변 평원을 감싸고 있는 모든 분위기를 빨아들이려는 듯 즐겁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부터 여기서 일어나는 일. 그게 어떤 방향으로 끝나든, 니 새끼가 말하는 그 소용돌이를 뒤흔들 파동이 될 테니까.”







“이야....... 이거, 듣던 것보다 훨씬.......”


카나반 왕실참모 레이쇼 중위의 흐려지는 말끝에 어떤 평가가 생략되어 있는지,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모든 이들은 알고 있었다.

진입로나 마찬가지인 북쪽과 남쪽의 계곡을 제외하고는 끝을 짐작할 수 없는 지평선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평야. 그리고 그 평야 전체를 집어삼킬 기세로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고 있는 마즈다성. 카나반의 수도 ‘회색도시’ 아르다르가 도시의 규모에 맞춰 구역을 확장시킬 수 있는 조립식성벽이라면, 그에 비해 마즈다성은 마치 인류의 기원부터 변함없이 이곳에 존재해왔던 것처럼 끔찍할 정도로 평면적인 모습이었다. 성벽의 한쪽 면을 한눈에 담기에도 힘든 규모였지만, 이러한 단조로움 덕분에 전체적인 성벽의 구조가 팔각형을 넘지 않으리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지나치게 거대한 크기 탓에 오히려 수비에 애로사항이 있을 것이란 정보가 마침내 납득이 가는 순간. 그러나 동시에, 카나반의 참모들은 수비의 애로사항을 훌쩍 뛰어넘는 공격의 애로사항을 깨닫게 된다.


“성벽 한번 더럽게 높네.”


굳이 왕의 말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40m는 족히 되어 보이는 검은 성벽과, 그 성벽 위에서 반짝이고 있는 온갖 수성병기. 그중에서도 자연스럽게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이미 한번 함포용으로 개조되어 아르바티앙을 폐허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었던 ‘농축화마력탄사출장치’였다. 배치된 숫자가 많지는 않았으나 그 위력을 알고 있는 카나반군에겐 더할 나위 없는 위협. 진지구축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우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새어 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작계를 다시 짤까요?”


이번 공격에 있어 참모진 중 가장 자신감이 넘쳤던 카논조차도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에, 크라트와 로빈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강한 화력의 저항은 처음부터 예상했던 바, 처음 작계대로 공격한다.”


“맞아요. 여기까지 와서 우리가 흔들리면 병사들은 어떡하겠습니까.”


무엇을 향한 자신감이자 무엇을 향한 미소일까. ‘베르달의 늑대’ 크라트는 여태까지 상대했던 벽 중 가장 드높은 성을 바라보면서도 느슨함을 놓지 않고 있는 왕을 힐끗 돌아본다.


“그런데 왕, 너야말로 여기까지 와도 괜찮은 건가? 슬슬 멋대로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해 본국에서 뭐라 말이 나왔을 텐데.”


“아아, 그건 걱정 마세요. 통합군의 일부가 보충대로 합류했잖아요? 저도 지금은 어엿한 한 명의 지휘관으로서 참전한 겁니다.”


“.......무책임하다 욕먹어도 할 말은 없겠군.”


“총리님만 믿고 가는 거죠, 뭐. 하핫.”


“경험에 따라 조언하겠는데, 그를 너무 믿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에이, 형제끼리 사이좋으면서 또 그러신다.”


“그게 무슨-”


크라트의 말은 이어지지 못한다. 모든 참모들과 지휘관, 기사들은 물론이고 병사들의 시선까지 사로잡는 움직임이 성벽 위를 물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도시 안으로 스며드는 모든 햇빛을 차단할 기세로 검게 번지기 시작하는 악의의 물결. 그 검은 파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저쪽도 격한 환영을 준비 하나 본데요?”


“독이 올랐겠지. 아직도 로즈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는 걸 보니, 놈도 일단 한 번은 부딪쳐볼 심산인가.”


“솔직히 원하던 바에요. 로즈를 잡아가 놓고 마치 인질로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처럼 굴고 있는 거, 마음에 안 들었으니까.”


대열 곳곳에서 배치 완료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솟아오른다. 그와 함께, 용사들의 전의 또한 평원 전체로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평생을 지키고 막아내는 데에만 바쳐왔던 자들의 갈증. 살짝이나마 그 꿀맛 같은 냉수의 향을 맡아버린 그들이었기에, 승리에 대한 목마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드높아져 있다.


“공화국 역사상 첫 침공. 역사상 첫 원정승. 자아, 여러분.”


그리고 단단한 요새를 향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는 붉은 나무의 미소.

이 순간이야말로,

처음 자신이 예고했던 대로 마침내 ‘붉은 나무가 왔다’라고 선언하는 순간임을

그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제 새로운 역사를 하나 더 만들어봅시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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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22막) 세 개의 오만 (14) +10 16.08.24 576 13 16쪽
241 (22막) 세 개의 오만 (13) +9 16.08.19 450 13 26쪽
240 (22막) 세 개의 오만 (12) +6 16.08.14 495 9 18쪽
239 (22막) 세 개의 오만 (11) +10 16.08.09 599 11 17쪽
238 (22막) 세 개의 오만 (10) +6 16.08.05 608 13 14쪽
237 (22막) 세 개의 오만 (9) +6 16.07.30 578 14 15쪽
236 (22막) 세 개의 오만 (8) +8 16.07.26 534 11 24쪽
235 (22막) 세 개의 오만 (7) +8 16.07.20 639 13 19쪽
234 (22막) 세 개의 오만 (6) +7 16.07.15 679 12 21쪽
233 (22막) 세 개의 오만 (5) +8 16.07.10 686 13 22쪽
232 (22막) 세 개의 오만 (4) +6 16.07.05 635 14 18쪽
231 (22막) 세 개의 오만 (3) +9 16.06.30 576 12 18쪽
230 (22막) 세 개의 오만 (2) +6 16.06.25 651 13 18쪽
229 (22막) 세 개의 오만 (1) +6 16.06.20 730 15 16쪽
228 (막간) 현실을 마주하며 +4 16.06.15 750 16 16쪽
227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0) +10 16.06.10 729 14 21쪽
226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9) +8 16.06.05 730 12 16쪽
225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8) +4 16.05.30 698 15 19쪽
224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7) +6 16.05.25 724 11 19쪽
223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6) +4 16.05.20 955 10 22쪽
222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5) +5 16.05.14 777 12 18쪽
221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4) +2 16.05.09 703 13 15쪽
220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3) +6 16.05.04 1,028 12 18쪽
219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2) +4 16.04.28 742 16 17쪽
218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 +8 16.04.23 850 15 19쪽
217 (막간) 필요없는 증명. 필요한 증명. +10 16.04.18 739 18 13쪽
216 (20막) 증명 (9) +4 16.04.13 698 18 16쪽
215 (20막) 증명 (8) +8 16.04.08 670 20 16쪽
214 (20막) 증명 (7) +11 16.04.02 735 14 16쪽
213 (20막) 증명 (6) +10 16.03.28 783 13 15쪽
212 (20막) 증명 (5) +8 16.03.23 813 17 24쪽
211 (20막) 증명 (4) +8 16.03.18 948 16 23쪽
210 (20막) 증명 (3) +10 16.03.12 813 17 20쪽
209 (20막) 증명 (2) +10 16.03.07 887 20 19쪽
» (20막) 증명 (1) +10 16.03.02 764 18 18쪽
207 (막간) 지평선으로 향하는 한걸음을 지켜보는 사람들 +8 16.02.26 810 19 17쪽
206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0) +8 16.02.21 911 24 21쪽
205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9) +10 16.02.16 1,033 20 22쪽
204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8) +6 16.02.11 809 17 28쪽
203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7) +6 16.02.06 765 19 21쪽
202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6) +6 16.02.01 828 17 22쪽
201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5) +10 16.01.27 820 17 17쪽
200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4) +10 16.01.22 965 16 18쪽
199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3) +8 16.01.17 707 20 18쪽
198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2) +10 16.01.12 773 20 19쪽
197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 +8 16.01.07 792 21 13쪽
196 (막간) 언젠가 +4 16.01.02 947 22 16쪽
19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2) +8 15.12.28 799 25 23쪽
19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1) +6 15.12.23 933 2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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