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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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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6.02.01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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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7
추천
17
글자
22쪽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6)

DUMMY

“건방지게 치고 들어오는군.”

전장의 풍경이 어렴풋이 눈 아래 내리깔리는 자그마한 언덕 위. 제국2군단의 최고령 장군이자 요격군사령관인 에밀리오 달라무는 90년 세월의 흔적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매끈한 뺨을 쓰다듬으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는다.

“군단의 정예병이라는 놈들이 이렇게 쉽게 중앙돌파를 허용해? 요새 이상한 잡놈들이 지휘관으로 들어오니까 병사들도 수준이 아주 낮아졌어.”


혼잣말에 가까운 어투였지만, 사실 그의 혀가 누굴 향하고 있는지 에밀리오의 곁에 있는 장교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의 표정이 불안으로 물드는 와중에도 그 장본인인 댄 스파인은 여유롭게 전장을 내려다보고만 있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사령관님, 기병대의 쥬넨 대령이 다시 전문을 보내왔습니다. 적은 기병전력이 취약할 게 분명하니, 이쪽이 먼저 예비대를 움직여 적 기병을 유도하면 자신이 직접 격파해보겠-”


“개소리 지껄이지 말라고 전해! 어디서 카나반 잡놈이 오만하게 끼어들려고 들어? 델핀 드리브달이 아니었으면 지휘관은커녕 화장실 청소나 하고 있을 놈이!”

묵직한 영력이 담긴 그의 분노에 통신병은 결국 허리를 숙인 채 그의 곁을 벗어난다. 이번에도 장교들은 헛기침을 하며 힐끗 댄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과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인 듯, 느긋함을 놓지 않고 있었다. 에밀리오는 그런 댄의 반응 또한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짧은 욕설과 함께 댄의 방향으로 탁, 침을 뱉으며 목소리를 높인다.

“적 중앙군의 선봉이 누구인가?”


“보고에 따르면 카나반의 왕비로 추측되는 인물이라 합니다.”


“왕비? 그 아뮤르 한센의 손녀딸? 그런 년 정도라면 라코르 부부의 선에서 정리가능하지 않나? 걔들은 뭐하고 있는데 저런 년 하나 안 잡고 질질 끌고 있는 거야?”


“아직 추가적인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조금 기다리시면 바로-”



“그들에게선 더 이상 보고를 기대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자신과 작전장교의 대화 사이로 끼어드는 목소리에 에밀리오는 잔뜩 미간을 구긴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과, 그 내용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뜻이지, 댄 장군?”


장군이라는 직책으로 그를 부르는 것 자체가 치욕스러웠는지, 에밀리오의 미소는 어색함으로 떨리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미트라블루스의 이름을 받긴 했지만, 아뮤르라는 핏줄을 무시하셔서는 안 됩니다. 대전쟁 당시 아뮤르 한센도 처음 두각을 드러내기 전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평범한 국립기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그를 200년 동안 ‘흐름’의 이름으로 남게 해준 것은, 다름 아닌 단순한 계기였습니다. 제국의 침략에 맞서 국가, 그리고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이 평범했던 기사를 ‘흐름의 검성’으로 만들었지요.”


“카나반 훈련소에서나 배우는 시시콜콜한 이야기 말고, 요점을 말하시오.”


불편함을 넘어 적의까지 느껴지는 에밀리오의 표정. 댄은 그런 에밀리오와 주변의 참모진을 둘러보며 구릿빛 피부와 붉은 눈동자가 돋보이는 미소를 짓는다.


“만약, 200년의 세월을 거쳐 새로운 ‘아뮤르의 피’가 각성을 준비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단순한 계기’가 우리가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내가 그 제물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인가?”


덤덤해진 목소리와는 달리 숨길 수 없는 분노가 에밀리오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그 어마어마한 크기와 농도의 영력에 참모진은 물론이고 전방에서 대기하던 기사들까지도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고, 그가 자신의 무기인 철퇴를 꺼내들었을 땐 아무도 말리기는커녕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저 한 가지 가능성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그 싹을 잘라내는 일이야말로 지금 저희가, 아니, 에밀리오 장군님이 하셔야 할 일이기도 하니.”


에밀리오의 적의에도 댄은 여유를 잃지 않고 허리를 숙인다. 어디까지나 사령관은 에밀리오, 자신은 부사령관의 자격으로 이곳에 왔음을 스스로 상기라도 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에밀리오는 크게 혀를 차며 철퇴의 방향을 전방으로 돌린다.


“혼자서 무식하게 중앙을 파고들면 포위해서 섬멸하면 그뿐! 오만한 계집의 면상에 핏자국을 남겨주지!”



“장군님! 적의 예비대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에밀리오의 호탕한 선언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교 하나가 다급한 표정으로 지휘부를 찾아온다. 하지만 장교의 다급함과는 달리, 보고를 받은 에밀리오의 얼굴은 비웃음만이 가득했다.


“예상보다 느리군. 이제야 돌파해온 중앙군이 위급하다는 걸 느낀 건가?”


“아, 아닙니다! 놈들이 향한 곳은 중앙군의 후미가 아닙니다! 본대를 빠져나와 아군의 좌익을 향해 크게 우회 중입니다!”


“.......뭐?”


사령관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진다.

양익의 도움 없이 홀로 돌파해온 중앙군은 결국 고립될 수밖에 없다. 그런 그들의 안정성을 위해 후미를 받치고 지원을 해주는 것이 지금 상황에서 예비대가 행해야 할 최선의 역할일 터. 그런데 중앙군을 방치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우회기동을 한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관측병의 보고에 따르면, 그 예비대를 지휘하는 적장이 카나반의 국왕, 로빈슨 미트라블루스 본인이라고 합니다!”


“뭣?!”

평상심을 유지하고 있던 댄조차도 이번만큼은 크게 동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그 보고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겠지? 전달하는 너와 그 관측병 모두 목이 떨어질 수도 있는 내용이다! 확실한가?!”


댄의 위협이 실린 재촉. 그러나 통신장교의 표정은 굳건하다.


“관측병들이 처음 배치돼서 교육받는 게 적국의 주요 인물들의 외견과 특이사항입니다. 제 명예와 모든 부하들의 목숨을 걸고 단언합니다. 아주 똑같이 생긴 대역이 아니라면, 국왕본인이 맞습니다.”


댄은 무심코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빠진다. 한 국가의 수장이 원정군, 그것도 적국의 영토에 남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적인데, 일군의 지휘를 맡아 전선에 나왔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 전투에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필시 다른 노림수가 있는 책략일 터.

댄은 빠르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사고를 접어두고 에밀리오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곳엔 자신과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사령관이 입술을 씹고 있었다.


“에밀리오 장군님, 적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유가 있으니 이런 행동을 저질렀을 겁니다. 분명 매력적인 먹잇감이긴 합니다만,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군단장께 연락을 드려서 지금이라도 모든 군단의 전력을 동원하심이.......”


“나도 바보가 아니오. 그 정도는 알고 있어. 하지만 국왕이라니.......”

짜증 섞인 대답을 하면서도 감탄을 숨기지 않는 에밀리오. 혼란이 가득했던 그의 눈매는 차츰 눈앞의 상황을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마침내 그 끝에서 되살아난 것은 사냥꾼으로서의 눈빛이었다.

“부부가 동반으로 겁을 잃었나 보군. 무슨 수작인지는 몰라도, 왕의 목을 따버린다면 마즈다힐을 넘어서 베르달, 그리고 카나반 전체를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어. 2군단의 부활을 위한 제물로 이만한 것도 없겠지.”


“하지만 장군-”


“쥬넨 대령에게 연락해라! 당장 기병대를 이끌고 아군의 좌익을 우회하여 접근하는 적의 예비대를 박살 내라고! 목표는 물론 붉은 나무의 목이다!”


댄은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 자신의 목소리를 묵살하며 통신장교에게 명령을 내리는 에밀리오의 곁으로 다가선다.


“먼저 기병대를 움직이면 적 기병대에게 고스란히 기회를 내주는 꼴이 됩니다! 아군 좌익은 측면이 공격당한다 해도 충분히 버틸 수 있습니다! 장군, 명령을 재고해 주십시오!”


“카나반 왕의 목을 베어서 군단기에 꽂아버리면 모든 게 해결될 거요.”


에밀리오의 자신감에도 일리는 있다.

이렇게 개방된 지형에서 매복 따위의 다른 수작을 부릴 수는 없을 것이다. 보병중심의 예비대를 제압하는 데 기병대만큼 좋은 수단이 없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하지만 댄은, 그 모든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직접 군을 이끌고 나온 ‘붉은 나무’의 의중을 꿰뚫지 못하고 있음이 너무도 불쾌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 적어도 기병대의 절반은 남겨주십시오! 예비대를 상대하는데 기병대 모두가 필요하진 않을 겁니다. 기병대 일부와, 좌익의 협공이면 충분합니다.”


“.......”

끝까지 자신을 만류하는 적국 출신의 장군을 향하는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지만, 에밀리오는 잠깐의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 방향성은 댄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소 빗겨나가 있었다.

“뭐, 하긴. 이번 전투에서 가장 커다란 업적이 될 수 있는 전투를 카나반 출신의 장교에게 맡길 수는 없겠지. 다시 명령한다. 쥬넨 대령은 대기하고, 나우베르 중령이 3개 대대를 이끈다.”


“옛!”


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의 심기는 여전히 불편한 상태였다. 물론 그 불편한 심기가 사령관의 노골적인 차별 발언으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적을 요격하라는 군단장의 명령과, 그곳에 자신과 쥬넨을 배치시킨 의도를 여전히 이해할 수 없음이 불편했고, 그에 맞서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등장을 보인 카나반 국왕의 알 수 없는 의도도 불편했다.




“전쟁을 이곳에서 끝내겠다.”



그리고

사령관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에밀리오의 자신감도 불편할 뿐이었다.








“3개 대대만을?”


“예, 댄 장군님이 그렇게 간언했다고 하십니다.”


“.......댄 장군이.......”


카나반 국왕의 등장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에 놀랄 틈도 없이 내려온 명령. 하지만 쥬넨은 댄의 이름이 나온 순간 겸허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물론 전군을 투입하여 왕을 사로잡고픈 에밀리오의 욕망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쥬넨 또한 이 ‘알 수 없는 의도’에 잔뜩 경계심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걱정은, 다시금 자신을 대신하여 출동하는 부관에게 향한다.


“나우베르 중령. 비록 보병뿐이라고 해도 베르달군을 얕봐서는 안 된다. 그들은 기병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잘 알고 있-”


“제가 알아서 합니다, 대령님.”


또다.

또다시 이 차가운 시선과 목소리.

기사로서의 생명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제국으로 왔건만 이 시선과 목소리는 계급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쫓아다닌다. 그러나 쥬넨은 이에 화를 내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댄 덕분에 자신이 생각했던 최악의 대접만큼은 피할 수 있었으니, 그것에 만족하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면 된다.


“.......카나반의 왕이라.......”


하지만, 절반에 가까운 인원을 데리고 달려나가는 부하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한 번쯤은 검을 쥐고 대면하고 싶었던 그 욕심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





“폐하! 적의 기병대가 접근합니다!”


“오, 빠르네! 숫자는?”


“.......천......, 천 명 정도인 것 같습니다.”


“아, 전부는 못 끌었나? 뭐 할 수 없지.”


지휘관이라고는 하지만, 로빈은 얼굴만을 비추고 가끔 통신병들의 보고를 들을 뿐, 근위대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전부였다. 오랜만에 직접 검을 잡아보고 싶다는 그의 요청을 단박에 거절한 근위대장, 드렌턴 덕분이었다. 왕을 대신하여 전장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것 또한 근위기사들, 그중에서도 특히 셰르 시즈키치와 유진 가슈펠라르의 활약이 돋보이고 있었다.


“아저씨, 아저씨도 솔직히 근질근질하지? 근위대장으로 복직하기 싫다고 했던 것도 이럴 때 가만히 내 옆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니까 그랬던 거 아냐?”


“헛소리하지 마라. 우리 왕께선 내가 눈을 떼면 또 말썽이나 피우시겠지.”


그러나 거대한 대검을 이리저리 매만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로빈의 말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던 모양. 드렌턴은 삐죽삐죽 솟아오른 자신의 고슴도치 수염을 어루만지며 전선을 향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하긴, 좀 있다 할 일이 있으니 지금은 좀 쉬고 계셔. 리즈한테 연락은 왔어?”


“그래, 준비는 다 됐다. 하지만 쥬넨 그 새끼, 눈치가 여간 빠른 게 아닌데, 잘 될까?”


“아, 걱정 마. 아마 저기 오고 있는 건 쥬넨 경이 아닐 테니까.”


“.......뭐?”


겹겹이 둘러싼 병사들과 전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후덥지근해지기 시작한 대열. 이미 모든 제복을 벗고 복장을 베르달군의 가죽전투복과 똑같이 맞추어놓았기에 로빈의 존재감은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거대한 덩치에 그보다도 거대한 대검을 어깨에 올려놓고 있는 드렌턴의 존재는 독보적이었다. 때문에 그가 놀란 얼굴로 로빈을 바라보자, 근처에 있던 베르달의 용사들도 깜짝 놀라며 덩달아 로빈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로빈은 그에 개의치 않고, 어깨를 으쓱하며 저 멀리 흙바람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적군을 향해 손가락을 세운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았는데, 같은 카나반 출신의 기사를 지휘관으로 보낼 리 없잖아. 아무리 ‘붉은 장미의 검성’ 아래에서 활약했다고 해도 아직 그를 의심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확신하냐?”


“확신은 못 하지. 근데 저 에밀리오라는 장군이 꽤나 고집불통이란 걸 엘라에게서 들었으니까. 자긍심 높은 제국기사의 특성상, 그런 꼴은 못 볼 거 같거든.”


“흐음.”


완벽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일정의 동의를 품은 채 드렌턴은 고개를 끄덕인다.

적군의 좌익을 감싼 채 우회하여 등장한 로빈의 예비대. 이들의 움직임은 표면적으로는 제국군 좌익의 협공을 위한 모양새가 된다. 하지만 전투력에 자신이 있는 제국군 좌익의 지휘관은 전선을 넓히지 않고 정면으로 압박에 맞서기를 선택했고, 그 선택은 지지부진한 예비대의 돌파력을 통해 옳았음이 입증되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 장소에 베르달군을 잘 알고 있는 지휘관이 있었다면, 분명 커다란 위화감을 느꼈을 것이다.

고립되기 일보 직전인 중앙군을 보조하지 않고 측면으로 우회한 예비대라면, 그 위험성을 감수한 만큼 적극적으로 좌익을 무너트리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 카나반 예비대에게서 그런 분위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전선을 유지하고만 있는, 말 그대로 싸움하는 시늉만 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제국 좌익의 지휘관은 이들의 위험성이 없다고 판단, 기병대 투입의 재고를 요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가로막은 것이 바로 카나반 국왕, 로빈의 존재. 현장 지휘관은 물론이고 총사령관조차 그 존재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의욕이 가득한 얼굴로 다가서는 기병대와, 그 기병대와 함께 군단의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겠다는 기대에 부푼 제국군 좌익의 지휘관들.

기병대와의 충돌까지 불과 몇 백 미터.

그들 모두의 기대에 반하여, 로빈의 영력이 실린 목소리가 베르달군 전체에 메아리친다.



“지금이다!!”



곳곳에 배치된 통신병들을 통해 로빈의 신호는 빠른 공명이 되어 용사들에게 하달된다. 그리고 그의 신호에, 베르달의 예비대는 믿을 수 없는 긴밀함으로 신속하게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갑작스런 움직임에 제국군 좌익의 지휘관들은 전선을 밀어붙이려 했지만, 이미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베르달군을 뚫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뭐야 저건?”



당황한 건 기병대의 선두에서 그들을 이끌고 있는 나우베르 중령도 마찬가지였다. 진형구축이 빠르긴 했지만, 평지에서 기병대의 충돌점을 예상하고 간격을 벌려 양쪽에서 압박한다는 전술은 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를 당황케 만든 건 그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이런 진형을 구축했다는 점이었다.

기병대를 피해 병력을 갈라놓는 진법은 당장의 피해를 줄이기엔 좋지만, 빠져나간 기병대의 2차 행동에 취약해진다는 단점이 있다. 게다가 지금 예비대의 위치는 카나반군의 우익에 맞닿아 그들 아군의 움직임마저 봉쇄하고 있는 상태. 이대로 기병대가 빠져나가 적의 본대나 후미를 공격한다면 카나반군으로선 막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지금 와서 기병대로 맞불을 놓는다고 해도 이미 늦은 상태이니까.


“마법사들은 보호막을 전개하라! 이대로 돌파한다!”


때문에 나우베르가 돌파를 재촉하는 데 망설임은 없었다.

이미 양옆으로 갈라진 베르달군은 저마다 바닥에 숨겨두었던 장창과 가시방패로 방어진을 구축한 상태다. 물론 이들을 직접 타격해도 커다란 피해는 줄 수 있겠지만, 나우베르는 2차 행동을 통한 더욱 커다란 전술적 이점을 본능적으로 짚어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장교로서의 훌륭한 사고는, 한 가지 기묘한 사실을 짚어내지 못한다.


충돌직전임에도,

베르달군으로부터 그 어떤 저지력이 보이질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화살도, 볼트도, 총탄도, 공격마법도, 마력지뢰도,

마법사들이 전개한 보호막이 무색할 정도로 베르달군에게선 그 어떤 반응도 되돌아오질 않는다. 애초에 처음부터 이런 화력지원이 일체 없었기에 제국군 좌익과의 대치도 지지부진했던 것이다.


그들이 통상적인 장비를 대신하여 준비한 것이 무엇인지,

제국군 기병대는 그들이 벌린 틈으로 돌입하는 순간 깨닫게 된다.



“당겨!”



익숙한 왕의 목소리에, 방패와 장창 속에 숨어있던 수많은 베르달의 용사들이 실전으로 다져진 근육을 앞세워 교전 동안 바닥에 묻어두었던 거대한 쇠사슬을 끌어올린다. 순식간에, 그것도 특유의 단결력으로 단번에 양옆에서 당긴 쇠사슬은, 그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공간에서 그 거대하고 검은 몸체를 드러낸다. 팽팽하게 당겨진 묵직한 저지선. 그러나 문제는, 그 저지선의 정체가 ‘방어용’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


제국 기병대가 통과해야 할 쇠사슬의 중앙부에는 온갖 날카로운 날붙이와, 의도적으로 거칠게 제작된 갈고리와 철조망이 촘촘하게 매달려 있었다. 날들은 돌진해온 말들의 다리를 그들의 속도를 역으로 이용하여 잘라내기 시작했고, 낙마한 병사들과 속도를 죽이지 못한 후속대 또한 비슷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낙마하여 머리가 터져버린 자,

잘려나간 손과 발을 붙잡고 신음하는 자,

뒤따라온 아군의 말발굽에 배가 터져버린 자.

말라붙었던 대지가 순식간에 붉은 습기를 머금기 시작한다.

모든 것을 뚫어낼 기세로 돌진하던 선두가 주춤한 탓에 기병대의 본진은 혼란에 빠져버린다. 일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빈 공간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지만 그들 또한 선두와 마찬가지로 쇠사슬의 희생양이 되었고, 일부는 정체된 구간을 피하여 측면으로 빠져 태세를 정비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잠자코 있던 양쪽의 베르달군이 어느새 부채꼴로 전선을 넓힌 채 다가오고 있었음을 깨달아야 했다.

일정한 결집력과 돌파력을 유지했다면 이런 방패벽정도는 쉽게 돌파했을 터, 그러나 쇠사슬로 저지당한 선두와 중앙 덕분에 측면으로 빠져나간 기병대는 이미 속도를 잃은 뒤였다. 선두의 상황을 알지 못한 채 명령받은 대로 앞으로만 전진하려는 기병대의 본대와, 베르달군으로부터 포위되는 것을 막기 위해 뒤로 물러나려는 선두와 측면의 기병대가 얽히며 혼란은 깊어져갔고, 드렌턴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병대의 한복판으로 파고들어 특유의 대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한다. 어느새 예비대의 후방에서 튀어나와 포위진을 구축하며 활을 쏴대는 카나반 왕녀의 특무저격대 또한 제국기병대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물러나라! 물러나! 뒤로 빠지란 말이닷!”


말을 잃었음에도 간신히 쇠사슬에 당하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던 나우베르 중령. 그가 벌렸던 간격을 좁히며 치고 들어오는 베르달 병사들을 베어 넘기며 소리를 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이미 혼란에 묻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명만큼은, 그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네가 대장이냐?”


생각지도 못한 거리에서 들려오는 태평한 목소리. 나우베르는 급하게 기병도를 휘둘렀지만, 그의 무기는 그 어떠한 살도 베지 못한 채 허공을 가로지른다. 그는 곧바로 자세를 고쳐 잡고 눈앞에 나타난 얇은 눈매의 기사를 향해 적의를 불태운다.

빠르게 들어가는 연격.

그러나 셰르는 다양한 각도로 파고드는 나우베르의 기병도를 모두 막아내는 데 성공한다. 어째서 그가 반격을 하지 않는지 나우베르의 머릿속에 살짝 의문이 꽃피려는 순간, 그는 기척을 숨긴 채 자신의 배후에서 접근하는 또 다른 그림자를 눈치챌 수 있었다.

물론 이미 때는 늦었고, 새로운 그림자의 검이 자신의 가슴을 꿰뚫고 튀어나와 있었지만.


“또 또 내 거 뺏어가네?”


“뭘 또 뺏어간데? 하여튼 시즈키치 남자들 쪼잔하긴.”


제국기사의 가슴에서 검을 뽑아내는 유진을 향해 불만 섞인 목소리를 내뱉는 셰르.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유진의 귀여운 미소와, 지휘관을 잃은 데 분노하여 달려드는 제국의 병사들이었다.






“뭐어, 이 정도면 됐나?”


혼란과는 멀찍이 떨어진 병사들의 품속.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로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린다. 특별히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린 건 아니었지만,




그림자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카나반의 기병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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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22막) 세 개의 오만 (6) +7 16.07.15 679 12 21쪽
233 (22막) 세 개의 오만 (5) +8 16.07.10 685 13 22쪽
232 (22막) 세 개의 오만 (4) +6 16.07.05 634 14 18쪽
231 (22막) 세 개의 오만 (3) +9 16.06.30 575 12 18쪽
230 (22막) 세 개의 오만 (2) +6 16.06.25 651 13 18쪽
229 (22막) 세 개의 오만 (1) +6 16.06.20 729 15 16쪽
228 (막간) 현실을 마주하며 +4 16.06.15 750 16 16쪽
227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0) +10 16.06.10 729 14 21쪽
226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9) +8 16.06.05 730 12 16쪽
225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8) +4 16.05.30 698 15 19쪽
224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7) +6 16.05.25 724 11 19쪽
223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6) +4 16.05.20 955 10 22쪽
222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5) +5 16.05.14 777 12 18쪽
221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4) +2 16.05.09 703 13 15쪽
220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3) +6 16.05.04 1,027 12 18쪽
219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2) +4 16.04.28 741 16 17쪽
218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 +8 16.04.23 849 15 19쪽
217 (막간) 필요없는 증명. 필요한 증명. +10 16.04.18 739 18 13쪽
216 (20막) 증명 (9) +4 16.04.13 698 18 16쪽
215 (20막) 증명 (8) +8 16.04.08 670 20 16쪽
214 (20막) 증명 (7) +11 16.04.02 735 14 16쪽
213 (20막) 증명 (6) +10 16.03.28 782 13 15쪽
212 (20막) 증명 (5) +8 16.03.23 813 17 24쪽
211 (20막) 증명 (4) +8 16.03.18 947 16 23쪽
210 (20막) 증명 (3) +10 16.03.12 813 17 20쪽
209 (20막) 증명 (2) +10 16.03.07 887 20 19쪽
208 (20막) 증명 (1) +10 16.03.02 763 18 18쪽
207 (막간) 지평선으로 향하는 한걸음을 지켜보는 사람들 +8 16.02.26 810 19 17쪽
206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0) +8 16.02.21 910 24 21쪽
205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9) +10 16.02.16 1,033 20 22쪽
204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8) +6 16.02.11 809 17 28쪽
203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7) +6 16.02.06 764 19 21쪽
»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6) +6 16.02.01 828 17 22쪽
201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5) +10 16.01.27 820 17 17쪽
200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4) +10 16.01.22 965 16 18쪽
199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3) +8 16.01.17 706 20 18쪽
198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2) +10 16.01.12 773 20 19쪽
197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 +8 16.01.07 792 21 13쪽
196 (막간) 언젠가 +4 16.01.02 946 22 16쪽
19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2) +8 15.12.28 799 25 23쪽
19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1) +6 15.12.23 933 2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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