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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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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6.06.30 19:08
조회
575
추천
12
글자
18쪽

(22막) 세 개의 오만 (3)

DUMMY

“뭐어?” “약혼자아?”


벤과 렌의 똑같은 얼굴이 똑같은 방식으로 뒤틀린다. 진은 이런 그들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도리어 뻔뻔한 얼굴로 창백한 뺨을 긁는다.


“뭐, 문제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검성의 약혼자라니, 니에브의 검성이라면.......”


“무혈의 권성(拳聖), 쉔즈톤 브론스키.”


담담하게 약혼자의 이름을 말하는 진. 잠시 정적에 빠져드는 병실 아래로 벤의 깊은 한숨이 스며든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자. 그런데 검성의 약혼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멋대로 남의 나라에 쳐들어와서 잠재적 동맹국의 검성과 지휘관을 죽이겠다고? 네 행동이 국제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고민이란 걸 해보긴 한 거야?”


“허락이라면 받았는데?”


“허락?”

더욱 깊게 파이는 벤의 주름들.

“무슨 허락? 누구한테?”


“브론한테.”


브론이라는 이름이 ‘브론스키’의 별칭이라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다만 벤이 이해하지 못한 것은, ‘브론스키’가 이 여인에게 해줬다는 허락의 본질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니에브 공국의 검성이, 네가 다른 나라의 검성과 검성의 양자를 죽이는 걸 허락했다는 뜻이야?”


“으음, 정확히는, 내가 옳다고 판단한 거라면 뭘 해도 봐주겠다고 했지.”


“뭔가 이야기가 처음으로 돌아온 것 같은데, 그럼 네가 왜 우릴 죽이는 걸 옳다고 판단했는지 알 수 있을까?”


벤의 침착한 질문에 진은 귀찮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고, 렌은 흥미롭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의자를 끌어온다. 고도와 보르케는 비교적 멀찍한 병실입구의 근처에서, 하지만 대화소리를 확실히 잡아낼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방금 말했다시피, 나는 ‘울부짖는 숲’의 드루이드야. 왜, 어떻게-라고는 묻지 말아줘. 네가 마법사고 네가 기사인 거랑 마찬가지니까.”

벤에게, 그리고 렌에게. 마지막으로 다시 중간지점으로 되돌아오는 진의 목소리.

“너희들도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 악몽의 빈도가 잦아졌어. 특히 카나반이 마즈다힐을 점령한 뒤로는 매일 땀에 젖은 채로 침대에서 일어나야 했지. 그래서 어떻게든 도움을 받기 위해, 별로 가본 적도, 가는 걸 좋아하지도 않는 영계, ‘리벨리움의 바다’에 찾아가봤어. 하지만 예상대로, ‘평범한 드루이드’가 아닌 나를 반기는 존재는 별로 없더라고. 먼저 알아채고 말을 걸어준 건 호기심 넘치는 달의 사도 라후드엘정도? 나머지 년놈들은 한낱 드루이드에게 관심을 보이기엔 너무도 고귀하셨나봐.”

무표정 아래 감춰진 날 선 적의. 벤은 어째서 진이 ‘리벨리움의 바다’에 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 하나가 거칠게 나를 불러 세웠어. 전에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목소리였으니까, 곧바로 나를 다른 누군가로 착각했다는 걸 알았지. 그녀는 그 착각에 대해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나서 내 이야기와 고민을 들어줬어. 내 악몽에 대한 묘사가 끝날 때쯤, 그녀가 이렇게 얘기하더라. ‘너의 악몽 속에 나오는 목소리 중 하나를 만나보았다. 그리고 그 ’마법사‘에겐 축복을 내릴 수가 없었다.’라고.”


“.......”


마치 ‘그녀’의 목소리를 흉내 내려는 듯, 과장된 손짓과 떨리는 목소리로 크게 재연을 하는 진. 그러나 벤은 어째선지, 진의 흉내가 전혀 이질적이지 않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녀가 이어서 말하길, 반도에서 자기가 축복을 내릴 수 없는 존재는 없다고 했어. 악마국의 신봉자라도, 심지어 악마 그 자체에도 축복을 내릴 수 있다고. 근데, 딱 두 가지, 자신이 축복을 내릴 수 없는 경우가 있데. 하나는 대상자가 ‘거짓된 주인’이 아닌 경우,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먹색 눈동자를 차례로 마주하는 진의 시선.

“.......완벽한 영혼이 아닌 경우.”


“완벽한 영혼.......?”


진의 마지막 말을 되씹으며 벤은 천천히 턱을 매만진다. 그것이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에 직면했을 때 나오는 버릇임을 고도는 잘 알고 있었다.


“네 말대로, 우리가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걸 단순히 우연이라곤 볼 수 없어. 다른 사람들이 보면 쌍둥이라는 단어로 정의를 내릴 수 있겠지만, 우리가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건 부모라는 무의미한 개념이 아니잖아? 직접 만난 적이 없었으면서도 어릴 때부터 줄곧 느껴온 지루한 유대감. 악몽 속에서 튀어나오는 내 얼굴들이 진짜로 내 얼굴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기까진 얼마 안 걸렸지.”


“.......즉, 우리는 서로에게 자신의 조각을 조금씩 빼앗긴 상태의, 완벽하지 못한 공백의 영혼이라는 거야?”


“역시 마법사라 그런지 이해도 눈치도 빠르네. 우리 셋 다 각자 기사, 마법사, 드루이드의 피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평범한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조각들이 하나씩 빠져있지. 그게 뭔지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겠지만.”


“근데 그게 왜 네가 우릴 죽여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 건데?”


날카로운 벤의 침투에 줄곧 듣기만 하던 렌도 ‘맞아맞아’라며 맞장구를 친다.


“반도에서 떠나는 모든 목소리들은 무조건 영계와 명계를 거치게 되어있지. ‘그녀’가 말하길, 만약 내가 악몽 속에서 나를 괴롭히는 존재들을 영계로 보내준다면, 그 영혼으로부터 부족한 나의 ‘조각’을 채워주겠다고 했어. 그것으로 나는 완벽한 영혼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그리고 그 조각으로부터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뭐어? 씨발, 사도라는 년이 인간계에 그따구로 간섭을 해도 되는 거야? 좆같은 년 이름이 뭐야?”


“그녀는-”


진은 렌의 격한 반응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대답을 위해 입술을 움직였지만, 그녀의 말은 벤의 목소리에 의해 가로막히고 만다.


“숲의 사도, 세뮈엘.”

어떻게 알았냐는 듯, 놀란 얼굴로 벤을 바라보는 진. 벤은 그런 그녀를 향해 한숨을 쉬며 이마를 쓸어 넘긴다.

“악연이 좀 있거든.”


“잠깐, 세뮈엘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참다못한 고도가 결국 침대로 다가온다.

“세뮈엘님이 왜 너를, 아니, 너희를....... 말이 안 되잖아. 너는 붉은 나무의 검성인데.”


“바로 그 점이야.”

단 한마디로, 진은 다시금 모두의 시선을 잡아끄는 데 성공한다.

“우리가 공유하는 공통점 중의 하나로, 모두 검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게 있지. 나는 검성의 약혼자, 너는 검성의 양아들. 우리는 어디까지나 주변인이지. 그런데 벤, 너는 달라. 너는 직접 검성이 되어버렸어. 심지어 기사가 아닌데도.”


“명예직일 뿐이야.”


“정말로 그럴까? 네가 이 붉은 나무의 나라에서 가지고 있는, 그리고 가지게 될 영향력이, 정말로 ‘명예직’에 그칠 거라 생각해? 네가 줄곧 입에 달고 다니는 ‘동맹’이라는 개념, 과연 네가 없었어도 이루어졌을까?”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너는 우리 셋이 공유하고 있었던, 공유해야 했던 무언의 법칙마저도 깨트려버렸어. 우리는 그걸 변수, 또는 오류라고 부르지. 둘 중 뭐라고 불리든지 간에, 흐름의 법칙을 지배하는 자들에겐 좋지 않게 보일 수밖에 없어.”


“숲의 사도가 나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이 세상의 오류가 되는 거야? 앞뒤가 안 맞잖아. 애초에 내가 오류라면, 너희들은 뭔데? 무언의 법칙이라고? 그딴 게 어딨어? 나는....... 크흑!”


“벤!”


고도가 다급하게 벤의 곁으로 다가선다. 격앙된 목소리와 몸짓 탓인지, 잊고 있었던 통증이 무릎을 타고 올라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광경을 바라보는 진의 얼굴은 여전히 북쪽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사도와 인간은 직접적으로 인간계에 간섭하지 않는다-. 이 불문율은 각각 카나반과 아실레마라는 이름을 빌린, 세뮈엘과 아펜타우스가 직접 깨트려버렸어. 렌, 너는 숲의 사도가 이런 식으로 간섭해도 되는 거냐고 물었지? 반대로, 이런 식으로까지 그녀가 간섭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있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게 무슨 개소리야?”


질척한 미소의 끝에 피어나는 노골적인 적의. 그런 렌의 미소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진의 싸늘함.


“숲의 사도 세뮈엘은, 불문율을 깨트리면서까지 붉은 나무의 승리를 원했어. 그랬던 그녀가 벤의 죽음을 원하고 있다면, 그게 무슨 뜻인지는 분명한 거잖아?”


벤의 고통이 멎는다. 동시에, 회복마법을 주입하던 고도의 손짓도 정지한다.

둘의 시선은, 동시에 진을 향하고 있었다.


“그 말은.......”


간신히 뗀 입술 사이로 흐르는 고도의 신음같은 목소리.

병실을 가득 채운 의문의 숨통을 끊으며,

진이 한숨을 내쉰다.



“세뮈엘은 저 녀석이 검성으로 있는 한, 카나반은 이 전쟁에서 절대로 승리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거야.”





==============





“블라고슬로바에 선전포고라니요?!”

본래 이스누시아 침공에 대한 마지막 검토로 진행될 예정이었던 정기회의. 하지만 로빈이 새로운 안건이랍시고 들고 온 내용을 보자마자, 란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고성을 터트린다.

“블라고슬로바는 동맹국이잖습니까?! 이번 마즈다힐 침공 당시 개입했다던 블라고슬로바군도 와르헨스톡 시장의 독단적인 선택이었지요! 우린 이에 정식으로 항의하고, 와르헨스톡이 배상하도록 협상을 했어야-”


“란다 경, 동봉된 문서를 봐주세요.”


“.......예?”

차분한 로빈의 요청에 한풀 누그러진 란다. 그는 왕의 요구에 따라, 자신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종이 한 장을 펼쳐볼 수 있었다.

“.......이건.......?”


“우릴 공격하라는 블라고슬로바 중앙정부의 명령서입니다. 수신지는 물론 와르헨스톡이고요. 물론 낙인도 제대로 찍혀있습니다. 정보부의 분석결과, 조작된 문서가 아닌 정식명령서라고 하더군요.”


“.......!”


회의실은 순식간에 의원들의 동요와 수군거림으로 웅성대기 시작한다. 미리 로빈으로부터 통보받지 못했기 때문에 당황한 것은 왕당파의 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가장 먼저 로빈에게 질문을 한 것도 왕당파대표인 오로메였다.


“폐하, 하지만 일방적으로 선전포고를 하기 전에 먼저 블라고슬로바 중앙정부의 해명을 들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개입을 제외하고는 그들은 여태까지 우리와 제국간의 전쟁에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들이 진정 우리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제국과 협력하려고 했다면, 베르달이 침공당할 당시가 우리의 동부국경을 파고들 최적의 시기였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릴 도와주지도 않았죠.”


란다의 반박에 오로메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대로, 블라고슬로바는 동맹이라는 협력체계에 발을 들여놓았을 뿐, 여태까지 대외적으로 행동을 내보인 적이 없었으니까.


“물론 곧바로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닥친 과제는 이스누시아를 점령하는 것. 하지만 이 과정 중에 블라고슬로바 중앙정부로 해명을 요청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해명을 요청하는 건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노출되는 거고, 그렇게 된다면 그들이 곧바로 태도를 바꾸어 우리의 뒤를 노릴 수도 있으니까요.”


“.......일단은 이스누시아를 점령, 전력을 강화시킨 다음에 블라고슬로바를 압박하시겠다는 거군요.”


아델의 정리에 로빈은 고개를 끄덕인다.


“네 맞습니다. 그 전까지는, 이 명령서의 존재를 모르는 척하면서 와르헨스톡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연기를 해야겠죠.”


“폐하, 하지만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블라고슬로바가 곧바로 뒤를 노리고 쳐들어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최대한 신속하게 이스누시아를 잡아먹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여러분들의 협조가 필수적이에요. 아직 시민당과 귀족당 간의 이스누시아 지역 채굴권, 병기수주권 등의 협의가 마무리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협의는 이스누시아를 점령한 뒤에 조율할 수 있잖아요? 국익을 위해, 지금은 잠시 의견다툼을 접어두고 신속한 파병을 할 수 있도록 모두가 협력해야 합니다.”


“으음.......”


귀족당의 대표 란다와 시민당의 대표 아델의 눈이 마주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한때 같은 이름을 지녔었음을 의미하는 붉은 눈동자. 주변 의원들의 온갖 의견과 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서로 다른 곳만을 바라보고 있던 그들의 눈동자가 무언의 동의로 귀결된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란다였다.


“알겠습니다. 논의는 뒤로 미루도록 하지요.”


“시민당도 동의합니다. 이스누시아의 점령을 최우선적인 과제로 두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굳건함을 유지하고 있어야할 자리임에도 로빈은 미소가 피어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이렇게 아름답게 의회의 분위기가 이어지는 것이 얼마만이던가. 서로를 비난하는 눈빛과 손가락, 그리고 고성은 온데간데없이, 모두가 분주하게 파병안건의 마무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는 반대합니다.”


오로메의 목소리가 더욱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고가 멈춰버린 로빈을 대신하여 입술을 연 란다였다. 하지만 그 또한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동시에 그의 당황은 이 안건에 대하여 다른 의견이 있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메가, 왕당파대표의 오로메가 로빈의 의견에 반하고 나섰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폐하께서도, 그리고 의원 여러분께서도 당연히 우리가 곧바로 이스누시아를 점령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계시는데, 예, 물론 객관적인 전력에서 우리가 우위에 있다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사태로 인해 공격이 막히고 시간이 지체된다면, 그리고 그 틈을 이용해서 블라고슬로바가 움직인다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모두가 오로메에게서만큼은 기대하지 않고 있었던 말이었다.


“단순히 객관적인 전력 차이가 아닙니다. 이스누시아 방위군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도리어 우리를 도발하여 시간을 끌려고 수작을 부렸지 않습니까?”


“역으로, 만약 그게 우릴 끌어들이기 위한 고도의 농간이었다면요?”


한숨을 쉬며 이마를 감싸는 란다.


“하아, 오로메 경-”


“예, 물론 저는 군사전문가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카나반 공화국의 의원으로서, 그리고 대표귀족의 가주로서, 모두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폐하, 그리고 의원여러분, 이 안건에 대해서는 조금 더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로메 경, 지금은 신중해야 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 신중했다가는 발목을 잡혀요.”

충격에서 회복한 로빈이 겨우 입을 열었다.

“지금 저희의 태도를 만용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절대로 만용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을 알고 있고, 적군에 있는 모든 지휘관과 기사에 대한 분석도 마쳤어요. 이스누시아가 우릴 막을 수 있는 요소는 단 하나도 없어요!”


“이 성의 주인이었던 사람도 폐하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었겠죠.”


“상황이 다릅니다!”

로빈도,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의원들도,

왕과 왕당파대표가 의회에서 언쟁을 벌이는 광경을 보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로빈의 고성을 마지막으로 어색한 침묵에 빠져든 회의장. 그 침묵의 끝에서, 로빈은 한숨과 함께 곁에 서있던 마누앙을 올려다보며 말을 맺는다.

“.......완벽한 동의를 구하지 못했으니, 투표로 안건을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총리님, 부탁합니다.”


“예.”









“아놔, 도대체 무슨 생각이시지?!”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거칠게 셔츠의 단추를 풀어헤치는 로빈. 그의 얼굴은 분노보다는 당혹감으로 붉게 젖어있었다.


“뭐, 어쨌든 파병일자는 잡혔잖아.”


로빈과 함께 들어온 지나가 의자 뒤로 다가와 그의 검붉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지만, 로빈의 목소리는 차분해지질 않는다.


“통과되냐 안 되냐가 문제가 아니잖아! 왕당파의 대표가 의회에서 나한테 등을 돌렸다는 거 자체가 문제라고. 다른 의원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뭐어, 어쩌면 사전에 자기한테 조금의 언질도 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일지도 모르지.”


“.......아무리 왕당파대표라도 그런 걸 아무렇게나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리고 그렇게 속이 좁으신 분은 아니야.”


“욕을 하는 거야, 칭찬을 하는 거야?”


주름이 생긴다며 구겨진 로빈의 미간을 억지로 피는 지나. 로빈은 그런 지나의 두 손을 잡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간다.


“그러실 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문제지.”


“그럼 불러서 물어보던가.”


“곧바로 부르면 남들 보기에 문책하는 모양새가 될 거 아냐. 조금 시간을 기다려보고. 오로메 경이 먼저 찾아올 수도 있으니까.”


“하여튼 착해빠져갖고.”


지나는 어린아이가 흙을 가지고 놀 듯, 왕의 얼굴을 마구 주물러댄다. 그 장난은 결국 거꾸로 입술을 겹치는 키스로 끝이 났고, 로빈은 마침내 차분해진 얼굴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내가 너를 믿듯이, 모두가 너와 나를 믿어줬으면 좋을 텐데.”


“하! 난 남들의 믿음 따윈 필요 없그든여? 난 단 한 사람의 믿음, 그리고 그 한 사람의 말이면 충분해.”


“뭐야? 그게 누구야? 어떤 놈이야?”


“글쎄에, 누굴까아?”


그대로 의자 위를 폴짝 뛰어넘어 로빈의 품으로 안기는 지나. 그 무게감에 로빈은 비명을 내질렀지만, 죽인다는 왕비의 협박에 그대로 남은 신음을 삼켜야 했다.


“.......부탁해, 나의 기사님.”


“.......맡겨줘, 나의 왕.”





로빈과 지나의 향기로운 키스가 끝난 뒤, 사흘 후.



마즈다성의 성문이 활짝 열리고,

남색의 물결이 동쪽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한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9

  • 작성자
    Lv.86 네모구름
    작성일
    16.06.30 19:36
    No. 1

    오늘도 재밋게 보고 갑니다. 예전에 세뮈엘이 로빈에게 벤을 믿지 말라는 식의 말을 했었는데. 그 떡밥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세뮈엘이 꼭 인간의 편이라고 생각되지도 않네요. 한편으론 누군가 거짓말을 하는건지 생각하게 되는군요.
    뭣이 중한지 궁금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7.03 17:38
    No. 2

    구름님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모든 건 태도에서 비롯되어있죠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evolutio..
    작성일
    16.07.01 12:02
    No. 3

    이제 셋의 연관성은 나왔고 각각 불완전한 상태에서도 마법사 기사 드루이드로 활동하던 즉 모든 방면에 완벽했을 안전한 영혼의 정체가 무엇이였을지 그리고 왜 나누어졌는지 어떻게 벤은 흐름을 역행했는지..

    아직 풀어야할게 산더미군요ㅠ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7.03 17:38
    No. 4

    에볼루션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사실 무언가가 결여된 것이 저 셋만의 특징은 아닐텐데 말이죠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evolutio..
    작성일
    16.07.01 12:03
    No. 5

    안전한 영혼이 아니라 완전한 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6 네모구름
    작성일
    16.07.03 00:19
    No. 6

    요새 라루사님과 불의검님이 안보이네요. 바쁘신가.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7.03 17:39
    No. 7

    그러게 말입니다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니푸르
    작성일
    16.07.05 16:02
    No. 8

    벤은 울컥하겠네요. 검성 하고 싶어서 하는것도 아니고 지금 때려쳐도 미련없는데ㅎㅎ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7.05 20:05
    No. 9

    그러게 말입니다 ㅠ
    라루사님 항상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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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막) 세 개의 오만 (3) +9 16.06.30 576 12 18쪽
230 (22막) 세 개의 오만 (2) +6 16.06.25 651 13 18쪽
229 (22막) 세 개의 오만 (1) +6 16.06.20 729 15 16쪽
228 (막간) 현실을 마주하며 +4 16.06.15 750 16 16쪽
227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0) +10 16.06.10 729 14 21쪽
226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9) +8 16.06.05 730 12 16쪽
225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8) +4 16.05.30 698 15 19쪽
224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7) +6 16.05.25 724 11 19쪽
223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6) +4 16.05.20 955 10 22쪽
222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5) +5 16.05.14 777 12 18쪽
221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4) +2 16.05.09 703 13 15쪽
220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3) +6 16.05.04 1,027 12 18쪽
219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2) +4 16.04.28 741 16 17쪽
218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 +8 16.04.23 849 15 19쪽
217 (막간) 필요없는 증명. 필요한 증명. +10 16.04.18 739 18 13쪽
216 (20막) 증명 (9) +4 16.04.13 698 18 16쪽
215 (20막) 증명 (8) +8 16.04.08 670 20 16쪽
214 (20막) 증명 (7) +11 16.04.02 735 14 16쪽
213 (20막) 증명 (6) +10 16.03.28 782 13 15쪽
212 (20막) 증명 (5) +8 16.03.23 813 17 24쪽
211 (20막) 증명 (4) +8 16.03.18 947 16 23쪽
210 (20막) 증명 (3) +10 16.03.12 813 17 20쪽
209 (20막) 증명 (2) +10 16.03.07 887 20 19쪽
208 (20막) 증명 (1) +10 16.03.02 763 18 18쪽
207 (막간) 지평선으로 향하는 한걸음을 지켜보는 사람들 +8 16.02.26 810 19 17쪽
206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0) +8 16.02.21 910 24 21쪽
205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9) +10 16.02.16 1,033 20 22쪽
204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8) +6 16.02.11 809 17 28쪽
203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7) +6 16.02.06 764 19 21쪽
202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6) +6 16.02.01 828 17 22쪽
201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5) +10 16.01.27 820 17 17쪽
200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4) +10 16.01.22 965 16 18쪽
199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3) +8 16.01.17 706 20 18쪽
198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2) +10 16.01.12 773 20 19쪽
197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 +8 16.01.07 792 21 13쪽
196 (막간) 언젠가 +4 16.01.02 946 22 16쪽
19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2) +8 15.12.28 799 25 23쪽
19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1) +6 15.12.23 933 2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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