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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215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6.04.08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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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
추천
20
글자
16쪽

(20막) 증명 (8)

DUMMY

물론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적국 영주의 딸을, 그것도 군단장이 직접 납치했을 때부터 모두가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대비책을 세워보고, 작전을 구상해보고, 변수를 계산해보았지만, 명확한 답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아이의 아버지인 ‘늑대’는 왕과 왕비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만일의 경우, 로즈를 위해 대의를 그르치는 일은 없게 해달라.’ 라고.


아이가 자신에게, 그리고 아이의 엄마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늑대’의 당부. 지나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며 웃었지만, 실제로 급박한 상황이 닥쳤을 때 자신이 단호하게 행동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선 확신할 수가 없었다.

만약 더 시간이 있었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스이바노 브란트가 로즈를 인질로 내세워 이쪽을 압박했더라면,

유약한 정신에게 사전경고를 내릴 틈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날 기미 없이 정신을 파고드는 비명소리와 드높은 전장의 함성, 도시 전체에 번져있는 역겨운 냄새는 지나에게 사고의 여유를 앗아가 버렸다.


그리고 제국의 2군단장 스이바노 브란트에게는, 그 ‘잠깐의 틈’으로 충분했다.


“.......”


먼 곳의 소녀에게 집중되어있던 지나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의 현실로 향한다. 익숙하지만, 익숙하기에 불편한 감각이 그녀의 미간을 깊은 굴곡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쳇.”


혀를 차며 재빨리 지나의 옆구리에 박혀있는 단검을 뽑아내려하는 브란트. 심장을 노린 일격이었지만 카나반 왕비의 본능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단단한 근육과 영력에 사로잡힌 단검은 좀처럼 주인의 손으로 돌아오려 하질 않는다.

이제 ‘움직이면 늑대의 딸을 죽이겠다’와 같은 협박으론 그녀가 동요하지 않으리란 사실을 브란트는 알고 있다. 처음부터 오직 이 짧은 순간만을 위해 숨겨두었던 소녀의 존재다. 자신의 오른팔과, 군단장으로서의 명예, 그리고 군인으로서의 생명과 도시의 모든 생명을 모두 희생하여 이 ‘짧은 틈’을 만들어냈다. 징계는 물론이고 파면까지 각오해야 할 일을 저질렀지만, 후회는 없었다. 모든 것은 단 하나, 2군단의 생존을 위해서였으니까.


그리고 결착을 위한 무기는, 단검으로 끝나지 않는다.


팔이 잘려나간 단면을 휘둘러 지나의 얼굴로 피를 흩뿌리는 브란트. 그에 샛노란 눈동자가 붉은 빛에 잠식당했지만, 그럼에도 지나는 눈을 감지 않고 흑도를 내리찍는다. 그러나 흑도의 불길한 악의가 관통한 것은 2군단장의 목이 아닌 속이 드러난 포장도로였다. 그는 어느새 지나의 그림자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오른팔을 줍고 있었다.


“이곳이 다른 전장, 평소의 당신과 나였다면 그 단검이 벗어난 순간 승패는 결정 났겠지.”

늘어진 살로 출렁이는 턱을 흔들며 브란트가 살의로 기름진 미소를 지어 보인다.

“하지만 지금 이 땅은 당신에겐 너무도 불친절해.”


지나의 얼굴로 피를 흩뿌렸던 그의 팔에서 스멀스멀 붉은 마력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마치 생물체처럼 일렁이던 마력은 먹잇감이라도 찾은 듯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오른팔을 탐하더니, 서서히 뼈를 붙이고, 근육을 잇고, 피의 흐름과 피부마저 집어삼킨다. 신경이 다시 이어지는 그 끔찍한 고통에 브란트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는 끝까지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스스로 단검을 뽑아낸 지나의 얼굴은 잔뜩 굳은 상태였다.

오른쪽 옆구리를 파고든 단검의 깊이는 그리 치명적인 건 아니다. 그러나 그 작은 틈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의 양은 분명 이질적이었다. 마치 도시 전체가 그녀의 피를 원하고 있는 듯, 지나가 서있는 땅이 게걸스럽게 그녀의 피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제 그녀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는 브란트는, 그녀의 이성을 뒤흔들기 위한 마지막 수단을 꺼내든다.


“쥬넨! 그 꼬마를 죽여라!”


“!”


지나의 입가와 눈썹이 동시에 뒤틀린다. 그러나 소녀와 자신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비릿한 군단장의 미소와 축복받은 도시뿐만이 아니었다.

‘왕비’이자 국왕의 대리기사로서 지금 자신이 신경써야할 상대와 무게.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묻어두고, 눈앞의 목표를 쟁취하는 데에 모든 집중력을 쏟아야한다. 지나는 출혈이 멈추지 않는 상처에서 손을 거두고, 조용히 심호흡을 하며 흑도를 고쳐 잡는다.


그러나 변수는, 카나반의 태양이나 제국 2군단장이 아닌 전혀 다른 방향에서 튀어나온다.


“쥬넨!”


독촉이 담긴 댄 스파인의 목소리.

그 또한 다른 장군들과 마찬가지로 충혈된 눈으로 부하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기병대를 지휘하느라 도시 외곽에 있었던 쥬넨은 아직 붉게 물들지 않은, 본래의 먹색 빛으로 전장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붙들린 채 평화롭게 숨을 쉬고 있는,

아주 작은,

꽃잎의 흔적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


그는 군인이자 기사다.

아무리 태어난 고향과 본래의 이름에 등을 돌렸을지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군인이자 기사로서, 방금 자신에게 내려온 명령에 대한 심각한 혼란에 빠져있었다.

명예와 힘.

기사의 피를 타고난 자로서 마땅히 누려야할 이들을 찾기 위해 이 땅, 이 제국에 발을 놓았다. 그리고 그 선택을 만족시켜주듯, 이들은 과거의 이름이 아닌,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파괴적인 본능과 힘의 추구를 인정하고 그 기회를 보장해주었다. 이곳에서, ‘쥬넨’이라는 기사는 완성될 수 있을 것이라, 그렇게 생각했다.


“쥬넨!!”


다시 한 번 반복되는 댄의 외침에 쥬넨은 고개를 들어 건물 아래 펼쳐진 참상을 바라본다.

피에 중독된 눈으로 야수처럼 달려드는 기사와 병사들. 생존이라는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지휘관. 그리고 그에 맞서, 태양처럼 빛나는 눈으로 지옥의 품에 파고든 ‘기사’ 한 명.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모른 채 붉은 지옥에서 가녀리게 떨리고 있는 아이의 숨결.


“.......이것이 이 시대 기사의 모습인가.”

그 정경을 향해, 쥬넨은 자신의 검 아래 숨 쉬고 있는 소녀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기사의 영광인가. 고귀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진창에서 몸부림치는 이게 결국 기사가 걷는 길인가........ 승리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작은 기회일지라도 바로 그 승리를 위해서라면 죄없는 영혼과 정의를 집어삼키는 것이 당연한 세계였나.......”


“쥬네엔! 군단장님의 명령이다!”


머리를 뒤흔드는 영력의 고함에 쥬넨은 무의식적으로 검을 치켜든다. 그 시퍼런 연철의 끝으로 무방비한 소녀의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 한때 아군이었던 자들의 목을 꿰뚫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었던 그의 검끝이 흔들리고 있었다.


“명령이다!! 쥬넨!!”


하지만

그는 여기서 모든 가능성을 끝낼 수 없었다.

저 아래에서, 아무런 말도 표정도 없이 자신과 눈을 마주하는 샛노란 눈동자야말로,

이 순간 그가 ‘인간’임을 포기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


쥬넨은 소녀의 하얀 목덜미를 향해 그대로 검을 내리꽂는다.



“-!”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파열음.

쥬넨은 순간 붉은 그림자가 덮쳐온 것으로 착각했지만, 피로 얼룩진 그 정체는 그에게도 익숙한 인물이었다.


“남의 귀여운 동생한테 뭔 개짓거리야.”


의수를 희생하여 검의 궤적을 빗겨내는 데 성공한 올리였지만, 완벽하게 걷어내지 못한 쥬넨의 검은 대신 그녀의 허벅지를 꿰뚫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있어 그 고통은 상당히 미세하고 부가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전신은 온갖 상처와 그 상처들이 만들어낸 붉은 얼룩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쥬넨이 그녀의 정체를 붉은 그림자로 착각한 이유였다.

쥬넨이 올리의 허벅지살을 베어내며 바깥으로 검을 빼는 것과 동시에 올리의 월도가 그의 가슴팍으로 날아든다. 그리 위협적인 영력이 아니었기에 그는 손등으로 그 공격을 쳐낼 수 있었지만, 곧바로 올리의 목적이 자신의 생명을 거두는 게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미안하지만, 약속했거든.”


희미한 미소와 함께 반파된 의수로 로즈를 껴안는 올리. 그녀는 그대로 도약하여 자신이 올라왔던 건물의 골목 쪽으로 동생의 머리를 감싼 채 추락한다. 쥬넨 또한 곧바로 둘을 추격하기 위해 도약했고, 결국 옥상 위엔 붉은 흔적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지나의 시선이 브란트에게 돌아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자, 2차전 해야지?”


흑도의 불길로 상처를 지져내며, 새빨간 혀끝을 깨물어 보이는 카나반의 여왕. 브란트는 잘렸던 팔의 감각이 되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걸쭉하게 웃으며 그에 대답한다.


“이제 시작 아닌가? 핫핫.”





=======================





“젠장, 블라고슬로바라니.......”


달려드는 병사의 얼굴에 검을 찔러 넣으며 로빈이 혀를 찬다.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대제국동맹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태도가 걱정되긴 했었지만, 이런 식으로, 이런 시기에 갑자기 뒤통수를 칠 줄은 상상하지도 못한 것이다. 카나반군이 남겨둔 공성탑을 이용하여 성벽을 침범하기 시작한 그들을 맞이해야 하는 인원은 로빈을 비롯한 근위대 몇 명뿐. 그마저도 근위대장인 드렌턴은 활짝 열린 성문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기 때문에 성벽 위는 로빈이 직접 지휘를 담당해야 했다.


“네반! 우측에 비어있어! 아예 공성탑에 올라가서 버텨봐! 토리에도 마찬가지고!”


“옛!” “옛!”


비록 소수이긴 하나 그들 하나하나가 카나반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들. 몰려드는 적들을 맞이하여 훌륭하게 버텨내고는 있었지만, 성벽 위에 있는 모두가 이 기세가 오래가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물러날 수는 없다. 이곳을 내준다면, 수천의 군세에게 아군의 후방을 내어주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이럴 때 이 새끼는 도대체 어디 간 거야.......”


다급하게 모습을 감춘 친구의 얼굴을 떠올려보는 로빈. 그러나 또 다른 블라고슬로바 병사가 공성탑으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는 생각하는 걸 접을 수밖에 없었다.






성문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활짝 열린 성문으로 몰려드는 적만 수백 명. 널찍한 성문 탓에 한꺼번에 상대해야하는 적은 십여 명이 넘는다. 그런 상황에서 꿋꿋이 성문을 지키고 있는 그림자는 단둘뿐.


“우랴앗!”


무식하게 대검을 휘두르는 드렌턴의 기세에 눌려 블라고슬로바의 병사들은 좀처럼 접근하질 못한다. 스치기만 해도 검압에 살갗이 잘려나갔으니, 저 대검에 정통으로 맞기라도 한다면 성문 아래의 벽은 온통 붉게 물들 것이 뻔하다. 하지만 우직한 덩치의 기사보다도 더욱 블라고슬로바 병사와 기사들의 신경을 거스르는 존재는 따로 있었다.


“.......”


거한의 기사 뒤에서, 가만히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소녀.

무기를 들고 있기는커녕, 은빛의 머리칼과 하얗게 휘날리는 드레스 때문에 처음엔 그 소녀에 대한 어떠한 의식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드렌턴을 공략하기 위해 세 명의 기사가 한꺼번에 움직였던 순간, 대검의 사각지대를 파고든 기사의 목을 너무도 쉽게 부러트리는 소녀의 모습을 보며 모두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피거품을 무는 기사의 시체를 그대로 이쪽을 향해 내던지던 그 소녀에게선 그 어떠한 적의도, 영력도 느낄 수가 없었으니까.

대검을 휘두르는 기사와, 존재감이 없는 소녀.

이 미묘한 조합이 만들어내는 위협은 효과적으로 적의 진입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음은 드렌턴도, 블라고슬로바군도 알고 있었다. 흐르는 땀을 감추기 위해 노력하고는 있었지만,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더욱 무겁게 팔을 짓누르는 피곤의 속도는 드렌턴도 피할 수 없었다.


“이놈은 도대체 어딜 간 거야.......”


심호흡과 함께 단단한 어깨 위로 대검을 올려놓는 드렌턴. 로빈과 마찬가지로 그의 한탄은, 작은 소녀와 함께 이곳을 지켜 달라 부탁하고는 사라져버린 누군가를 향해있었다.







“흐음.”



모두의 원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사자인 벤은 안쪽의 전투, 바깥쪽의 전투 모두와 동떨어진 곳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성벽의 그림자가 드리운 배수로. 도시의 모든 하수가 모여드는 그곳 위에서 벤은 아무런 표정도 감상도 없이 가만히 발아래 흐르고 있는 붉은 물결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안 될걸.]



그리고 하수도의 그림자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소년의 목소리. 일렁이던 검은 빛은 서서히 벤의 맞은편에서 형상을 잡기 시작했지만, 벤은 그 형체가 완성되기도 전에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거 뭣대로 남의 생각 좀 읽지 말지? 아무튼, 기다리고 있었어.”


“.......기다리고 있었다고? 나를?”


완전한 인간의 형체를 갖추자마자 불편한 표정으로 검은 혓바닥을 씹어보는 데로.


“안 될 거라며?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있다는 거잖아? 그리고 왜 너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벤은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당당한 표정으로 악마를 올려다본다. 그에 절망의 군주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들고 있던 책의 모서리로 벤의 정수리를 내리꽂는다.


“내가 미쳤다고 니 새끼를 왜? 부탁하려면 세뮈엘 그 년한테나 가서 빌어보시지?”


“알잖아. 난 세뮈엘의 축복을 받지 않았어. 아니, 받지 못했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자, 잘 들어봐.”

짧은 신음과 함께 굳어있던 무릎을 펴고 일어서는 벤. 그는 곧바로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악마의 어깨 위로 팔을 두르며 도시를 향해 몸을 돌려놓는다.

“이 역겨운 냄새. 게걸스러운 축복. 숲의 가호를 받은 인간들이 질식해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


“그들 모두가 다른 존재에 압사당하고 있어. 너와 계약한 계약자도 저기 어딘가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지. ‘그’의 권능이, 너의 잔향을 쉽게 몰아내고 있다고?”


“.......그래서?”


퉁명스럽게 되묻은 악마를 향해, 벤은 희미한 비웃음을 머금고 먹색 눈동자를 빛낸다.


“이미 절망이 만연한 세계라 네 역할이 없었기 때문에 사라졌다면, 어째서 피가 가득한 세계에 피의 군주는 아직도 남아있을까? 그도 세뮈엘처럼, 오직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하는 걸까?”


“나보고 알량한 자존심싸움이나 하라는 거냐?”


“알량한 자존심은 상관 안하시는 분이 왜 내 코딱지로 소환당하셔?”


“나는 니 새끼의 코딱지로 소환된 게 아니라-”


“맞아. 거기에 섞여있던 내 피에 응답한 거지.”

벤의 느긋한 목소리에 벌떡 일어나 책을 휘두르려던 악마의 팔이 정지한다.

“고민해봤어. 왜일까. 왜 내 피에 네가 응답한 걸까. 그것도 역사에서 사라지기를 자처한 네가 말이야. 이미 네 역할이 필요 없는 세계에, 어째서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그리고 다른 악마들은, 어째서 네 등장에 불쾌해하고 있을까.”


“.......”


“뭐 알다시피 답은 내지 못했어. 그런데, 한 가지 가설만큼은 생각할 수 있었지.”

마치 담배를 꺼내드는 듯한 무심함으로, 자신의 로브 속에 손을 집어넣는 벤. 하지만 그의 손가락에 딸려 나온 것은 담배도 성냥도 아닌, 시퍼렇게 날이 서있는 단검이었다.

“ ‘안 될걸’이라고 했지? 한번 실험해보지 뭐.”


벤이 운동이라곤 해본 적 없는 자신의 하얀 팔을 하수구 위로 내민다. 그리고는, 그 하얗고 부드러운 도화지 위에 단검으로 붉은 낙서를 한줄, 깊게 그어버린다.


새빨간 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방울져 떨어지는 온기.

그 흔적은 조금씩 흙바닥 위에 웅덩이를 이루더니, 마치 미지의 힘에 이끌리듯 그대로 하수구를 향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그럴 줄 알았어.”




그리고 벤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눈앞의 악마를 바라본다.

정확히는,

자신의 피가 하수구에 섞여 들어가는 광경.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악마의 얼굴을 바라본다.


악마는 표정이 없었다.

반응도 없었다.

하지만 그 얼굴만큼은,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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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막간) 하나의 밤하늘, 세 개의 달빛 +11 16.08.29 623 14 15쪽
242 (22막) 세 개의 오만 (14) +10 16.08.24 576 13 16쪽
241 (22막) 세 개의 오만 (13) +9 16.08.19 450 13 26쪽
240 (22막) 세 개의 오만 (12) +6 16.08.14 495 9 18쪽
239 (22막) 세 개의 오만 (11) +10 16.08.09 599 11 17쪽
238 (22막) 세 개의 오만 (10) +6 16.08.05 608 13 14쪽
237 (22막) 세 개의 오만 (9) +6 16.07.30 578 14 15쪽
236 (22막) 세 개의 오만 (8) +8 16.07.26 534 11 24쪽
235 (22막) 세 개의 오만 (7) +8 16.07.20 639 13 19쪽
234 (22막) 세 개의 오만 (6) +7 16.07.15 679 12 21쪽
233 (22막) 세 개의 오만 (5) +8 16.07.10 686 13 22쪽
232 (22막) 세 개의 오만 (4) +6 16.07.05 635 14 18쪽
231 (22막) 세 개의 오만 (3) +9 16.06.30 576 12 18쪽
230 (22막) 세 개의 오만 (2) +6 16.06.25 651 13 18쪽
229 (22막) 세 개의 오만 (1) +6 16.06.20 730 15 16쪽
228 (막간) 현실을 마주하며 +4 16.06.15 750 16 16쪽
227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0) +10 16.06.10 729 14 21쪽
226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9) +8 16.06.05 730 12 16쪽
225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8) +4 16.05.30 698 15 19쪽
224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7) +6 16.05.25 724 11 19쪽
223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6) +4 16.05.20 955 10 22쪽
222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5) +5 16.05.14 777 12 18쪽
221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4) +2 16.05.09 703 13 15쪽
220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3) +6 16.05.04 1,028 12 18쪽
219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2) +4 16.04.28 742 16 17쪽
218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 +8 16.04.23 850 15 19쪽
217 (막간) 필요없는 증명. 필요한 증명. +10 16.04.18 739 18 13쪽
216 (20막) 증명 (9) +4 16.04.13 698 18 16쪽
» (20막) 증명 (8) +8 16.04.08 671 20 16쪽
214 (20막) 증명 (7) +11 16.04.02 735 14 16쪽
213 (20막) 증명 (6) +10 16.03.28 783 13 15쪽
212 (20막) 증명 (5) +8 16.03.23 813 17 24쪽
211 (20막) 증명 (4) +8 16.03.18 948 16 23쪽
210 (20막) 증명 (3) +10 16.03.12 813 17 20쪽
209 (20막) 증명 (2) +10 16.03.07 887 20 19쪽
208 (20막) 증명 (1) +10 16.03.02 764 18 18쪽
207 (막간) 지평선으로 향하는 한걸음을 지켜보는 사람들 +8 16.02.26 810 19 17쪽
206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0) +8 16.02.21 911 24 21쪽
205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9) +10 16.02.16 1,033 20 22쪽
204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8) +6 16.02.11 809 17 28쪽
203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7) +6 16.02.06 765 19 21쪽
202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6) +6 16.02.01 828 17 22쪽
201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5) +10 16.01.27 820 17 17쪽
200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4) +10 16.01.22 965 16 18쪽
199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3) +8 16.01.17 707 20 18쪽
198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2) +10 16.01.12 773 20 19쪽
197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 +8 16.01.07 792 21 13쪽
196 (막간) 언젠가 +4 16.01.02 947 22 16쪽
19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2) +8 15.12.28 799 25 23쪽
19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1) +6 15.12.23 933 2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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