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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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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3,319

작성
16.01.22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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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글자
18쪽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4)

DUMMY

엄폐물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황량한 평야. 밤이라 해도 구름이 달의 얼굴을 뒤덮지 않는 이상 이런 개활지를 뚫고 적진을 정찰하는 일은 자살행위에 가깝다. 하지만 이곳, 마즈다힐에서 훈련을 받고 복무해온 제국 2군단의 병사들은 어떻게 이런 평야 위를 말이나 차량의 도움 없이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


검게 칠한 얼굴과 무기. 거의 맨몸이나 다름없는 가벼운 차림새.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피부와 옷을 흙색으로 위장한 그들은 마치 거미처럼 낮은 자세로 포복하여 베르달군이 점령 중인 전초기지를 향해 접근 중이었다. 달빛이 위로 스칠 때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고,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나서야 산개하여 이동한다. 성벽 위에서 쉴 새 없이 평야를 뒤흔들고 있는 탐조등의 불빛도 그들을 식별해낼 수 없었음은 물론이었다.


“흐읍!”


선두에서 나아가던 병사의 움직임이 멈추고, 무거운 신음이 그의 등과 그림자를 따라 흘러내린다. 뒤따르던 병사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집중되었고, 동시에 그들 모두가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한 순간이었다.


“비명을 참다니. 그건 칭찬해주고 싶네.”

신음을 흘렸던 병사의 몸이 허공으로 솟아오른다. 아니, 솟아오른 것처럼 보였다. 달빛이 그림자와 어둠을 거두고 나서야 제국병사들은 그의 몸을 꿰뚫고 있는 거대한 곡도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흙과 잡초로 위장한 구덩이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 여기사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다 죽이진 마.”


여기사의 느긋한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사방의 구덩이에서 그림자들이 솟아나오기 시작한다. 제국병사들은 곧바로 무기를 꺼내 기습을 맞이하려 했지만, 이미 배가 넘는 숫자에 둘러싸인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탐조등조차 외면하는 짧은 비명이 이어지고, 오래 지나지 않아 기지 밖은 다시금 평화와 어둠에 물든다. 자신의 몸에 묻은 흙과 곡도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구덩이에서 빠져나온 여기사는, 자신이 개입할 여지도 없이 끝나버린 전투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병사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좋아, 이제부터 몇 가지 물어볼 건데, 성실하게만 대답하면 아프게는 하지 않을게.”


무기를 강탈당한 채 포박당한 제국병사의 위로 거대한 미소를 드리우는 여기사. 그녀는 곡도를 허리춤에 돌려놓고, 천천히 반항의 시선을 불태우고 있는 병사의 머리 위로 손을 뻗는다. 그 순간, 제국군 병사는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오른손의 표면이 차가운 금속으로 빛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전혀 움직임이 없다고요?”


올리가 적의 척후병을 사로잡았다는 소식에 잠을 거두고 회의실로 찾아온 로빈. 새벽이라는 시간 덕분에 산발한 머리는 물론이고 무거운 눈꺼풀 또한 숨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크라트가 전해준 적병의 심문내용은, 반쯤 꿈속에서 헤매고 있던 로빈의 사고를 빠릿하게 치켜세워준다.


“그래. 군을 결집시켜놓고 그 어떤 군사행동도 보이질 않고 있다고 한다. 포로의 말을 완벽하게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침공 이후로 반격은커녕 성명조차 내질 않고 있는 걸 보면 군사행동이 없다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


“이건....... 마치 우리가 먼저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는 거 같네요.”


“ ‘같은’게 아니다. 노골적으로 기다리고 있는 거야. 역사상 처음으로 침공을 허락했다는 상징적인 불명예 따위엔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의지다. 이곳은 어디까지나 놈들의 안방이자 영역. 언제 움직이고, 어디로 움직이는 게 전술적으로 이득일지 꿰뚫고 있는 쪽은 우리가 아닌 그들이다.”


“하지만 우린 마주 기다려줄 수가 없죠.”


“바로 그거다.”


숲을 벗어나 전술교본에도 실려 있지 않은 지역에서 작전과 전투를 수행해야 하는 베르달군. 그리고 그들이 뚫고 들어가야 하는 상대는 다름 아닌 수 세기에 걸쳐 베르달을 괴롭혀온 아실레마제국의 2군단이다.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마음이 급해야 하는 것은 국경을 빼앗긴 제국군이고, 여유로워야 할 쪽은 카나반군. 하지만 실상은 그와 정반대였다.

일단 이번 침공의 주원인이었던 로즈의 납치. 그 납치로 인해 베르달 전역이 들썩일 때도, 그리고 기습적인 침공으로 인해 국경을 빼앗긴 지금도 주범인 제국 측에선 인질에 대하여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전쟁명분이자 전쟁의 목적인 로즈에 대해 협상은커녕 협박조차 하지 않고 있는 제국의 반응에 카나반군은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정체’가 계속된다면 기습공격으로써 협상의 주도권을 가져오자는 카나반 왕비의 계책도 그 의미가 옅어질 수밖에 없다. 최악의 경우, 제국 측에서 ‘처음부터 인질 따윈 없었다’라는 식으로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마즈다힐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슬슬 본국에서 청문회를 준비할 겁니다. 발이 묶이기 전에 최대한 성과를 내야 해요. 만약 이대로 발이 묶이고, ‘주목적’조차 이루지 못한다면......, 다음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로빈이 어렵게 내뱉은 ‘주목적’이란 단어가 무엇을, 누구의 생사를 의미하는지 크라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제국측 언론에서 반격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자국 2군단의 무능함을 대서특필하고 있다고 들었다. 초조함을 떠나서 이번 전투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건 놈들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여기선 먼저 움직이는 쪽이 등을 내주고 시작하는 꼴이 된다. 놈들도 그걸 알고 있으니 인질에 대한 내용도, 반격에 대한 의지도 보이질 않고 있는 거지.”


“.......로즈에 대해 조금의 언급도 없는 적. 무턱대고 나아가기엔 역시 불안합니다만.......”


“하지만 선택권이 없다. 왕, 슬슬 결단을 내려야 한다.”


크라트의 싸늘한 목소리에, 회의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드렌턴도, 그를 따라 잠옷 차림으로 따라나선 지나도, 문밖에서 조용히 안쪽의 내용을 엿듣고 있던 올리도 로빈의 입술에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

많은 이들의 운명을 결정하기엔 너무도 어둡고 조용한 시간.


그러나 로빈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모든 지휘관들을 소집해주세요.”





=====================





“들어오시오.”


차분한 총리의 허락과 함께 왕의 집무실로 얼굴을 내민 자는 가슈펠라르 가문과 귀족파의 대표, 란다 가슈펠라르. 그의 불편한 얼굴은 이미 집무실에 모여 있는 다른 얼굴들을 확인하고 더욱 선명하게 구겨진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로메 경, 그리고 아델.”


“좋은 아침이에요.” “어서 오세요.”


전혀 반갑지 않은 란다의 얼굴과 어투에도 오로메와 아델은 밝은 미소로 그를 맞이해준다. 란다의 얼굴이 어두운 이유는, 그가 마누앙으로부터 찻잔을 받는 동시에 열리는 그의 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좋아요, 마침내 시작되었군요. 공화국 사상 초유의 침략전쟁. 이 전쟁의 끝이 공화국에게 파멸을 가져다줄 것 같은 불안은 저만 느끼고 있는 겁니까?”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지금 그 잘잘못을 따지는 건 영양가가 없겠지요.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이 전쟁이 가져다줄 다양한 형태의 손익을 계산하고 그에 대처하기 위함입니다.”


차분한 오로메의 목소리였지만, 란다의 입술은 뜨거운 찻잔만큼이나 식을 기세가 보이지 않는다.


“손익? 이런 침략전쟁에 무슨 익이 있단 말씀입니까? 베르달 영애가 납치당해서, 그 보복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 이게 한 국가의 수장으로서 내릴 결정입니까? 제가 볼 때 폐하는 이미 베르달이 아닌 마즈다힐에 나가계실 겁니다. 전쟁에서 이기면 자신의 공로, 패하면 베르달의 실책으로 몰아갈 생각이시겠죠. 총리께서 아침회의 전에 각 대표들을 이렇게 몰래 부르신 것도 회의에서의 협조를 사주하기 위함이 아니십니까? 죄송하지만 귀족파는 이런 폐하의 독단적인 전쟁에 찬동할 생각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자리, 굉장히 불편하군요.”


“뭔가 오해하고 계시는군, 란다 경. 이 자리는 제가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보기 드문 마누앙의 느긋한 미소에, 란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고 접대용 탁자 주변을 둘러본다.


“접니다.”


그런 그의 의문에 답해준 눈동자는 다름 아닌 아델이었다.


“.......시민당대표께서?”


“네. 오로메 경께서 이 자리를 멋지게 포장해주시긴 했지만, 실은 제가 오늘 제출할 예정이었던 법안에 대해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이렇게 모시게 되었습니다.”


란다는 그제야 자신의 자리 앞에 놓여있는 종이 한 장을 눈치챌 수 있었다. 총리는 이미 읽은 듯 왕의 책상 위에 종이를 내려놓은 상태였고, 오로메는 아직 손에 들고 있는 채였다. 그들의 눈치를 잠시 살펴본 란다는 곧바로 마른 헛기침과 동시에 종이를 펼쳐보았다.

그러나 그의 이성은, 법안의 제목만을 본 것만으로 뒤틀리고 만다.


“.......뭡니까, 이게.......?”


“보시는 대로, 귀족들의-”


“아니, 그 뜻을 묻는 게 아닙니다. 지금 이걸 법안으로 제출하겠다고요? 폐하가 안 계신 지금? 제정신이십니까? 오로메 경! 지금 이걸 보고도 그렇게 잠잠히 계시는 겁니까?”


“일단 내용을 끝까지 읽어보시죠.”


뜨겁다 못해 끓어 넘치려는 란다의 목소리를 가라앉히는 오로메의 침착함. 그에 란다는 미간을 구긴 채, 다시 종이의 내용을 향해 새빨간 시선을 옮겨놓는다.


“.......”


“어때요, 란다 경에게도, 귀족파에게도 그리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요?”


모든 내용을 담은 란다의 눈동자가 다시 떠오르자마자 그를 반기는 아델의 아름다운 미소. 그러나 란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기대를 무너트린다.


“.......대표님, 아니, 아델. 당신은 당신의 할아버지, 윌리안 가슈펠라르가 어떤 마지막을 맞이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됐는지 잊은 건 아니겠지.......?”


“여기서 란다님이 할아버님의 이야기를 꺼내다니 재미있네요. 왜 그걸 보시고 가장 먼저 그를 떠올리셨죠?”


“.......진심으로 그 이유를 묻는 건가? 폐하가 부재하신 사이, 섭정인 총리의 손을 빌려 이런 법안을 통과시키면,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볼지 뻔히 보이지 않나?”


“세상의 눈이라........ 당신이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잖아요, 란다 경. 지금 당신이 독점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 귀족파의 위계질서가, 다시금 힘싸움으로 번질 거 같아 두려우신 거 아닌가요?”


“독점이라니 무슨 소리! 나는 어디까지나 정당한-”


“후계자라고, 할아버님이 감옥에서 말씀해주시던가요?”



시선과

공기.


모든 것이 얼어붙는다.


아델의 느슨한 목소리에 란다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의 미소를 바라본다. 물론, 그의 표정은 지금 자신이 들은 목소리의 진위여부를 파악하기 위한 혼란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그,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요? 제가 이곳, 아르다르에 오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뭐일 거 같나요?”


“.......”


“바로 할아버지를 감시하는 거였어요.”


“.......!”


란다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린다. 대부업을 도맡았던 말단시절, 골목에서 채무자의 습격을 받아 목에 검이 스쳤을 때에도 흔들리지 않던 그의 눈동자가 격하게 방황하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때에,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에게 가장 어두운 그림자를 들켰다. 다른 일이었다면 빠르게 변명거리를 만들어냈을 그의 머리도 곤혹감에 젖어 표류하는 중이었다.

반역자와의 내통- 이라는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


그러나 아델은, 아직 비우지도 않은 그의 찻잔에 새로운 향을 따라주면서 싱긋 웃어 보인다.


“걱정 마세요. 그걸 트집 잡아서 란다 경을 몰아세울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지금 들고 계신 그 법안이, 란다 경을 진창 속에 버려두었던 사람의 이상과는 다른 방향이란 걸, 꼭 알려드리고 싶네요.”


이보다도 친절한 협박이 있을까.

하지만 충격에서 벗어난 란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빠르게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는 것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윌리안과는 그저 친척 사이이기에, 예의상 몇 번 방문을 했던 것뿐입니다. 다만 그게 좋게 보이지는 않다는 걸 알고 있으니 몰래 했던 것이고, 다른 의미는 없었습니다. 그걸 빌미로 나를 몰아세우진 못할 겁니다.”


“아 거참, 알았으니까, 그 법안. 어떻게 보시나요?”


확실히 공기는 달라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모두의 시선에서 경멸이나 의심을 느낄 수 없었지만, 란다는 그것들보다 더한 압박감이 자신의 목을 옥죄고 있다는 사실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는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종이의 내용을 탐독한다.


“.......오로메 경은 이 법안에 찬성하십니까?”


“왕당파의 대표로서가 아닌, 한 명의 귀족으로서는 분명히 매혹적인 내용입니다. 다만 란다 경이 우려하신 것처럼 잘못된 방향으로 비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명확한 협의가 이루어져야겠지요.”


“총리님은......., 총리님은 어떠십니까? 만약 폐하가 계셨다면, 그는 이를 용인해줬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저야 내용을 중재하고 통과시키는 일을 맡았을 뿐, 귀족의 시선으로는 바라보지 못합니다만. 폐하께선 흔쾌히 법안을 받아들이셨을 겁니다. 이번 전투에서 승리를 하든 패배를 하든, 이와 비슷한 맥락의 법안은 언젠가 부활하게 될 테니까요.”


“.......”


란다의 새빨간 시선이 마지막으로 다시금 같은 색의 아델을 향한다.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아름다운 미소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표정이나 그 미소에서 압박감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지만, 란다는 그녀의 존재감이 어느덧 커다랗게 자신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끝내 받아들여야 했다.






====================





“요격이라니, 아~주 자신만만하네. 매~우 건방져.”


중얼중얼거리며 혀끝을 씹고 있는 자신의 ‘기사’를 다소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로빈. 하지만 그런 그녀의 행동이 전투에 몰입하기 위한 준비동작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를 만류하진 않는다. 자신 또한, 본심은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숲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대지. 언덕이라 부를 수 있는 얇은 굴곡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특이점도 없는 그곳은, 바로 ‘마즈다힐’이라고 불리는 제국 남서부 지역의 가장자리로 통하는 알리에메르 평원이었다. 교역로와는 거리가 먼 탓에 도로는 제대로 정비되어있지도 않고, 듬성듬성 보이는 초소와 성터 말고는 인간의 손길을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생명의 흔적도 과거 이곳을 지나갔던 ‘붉은 장미’에 의해 모조리 뿌리 뽑힌, 그야말로 사막과도 같이 황폐한 개활지.

그 평야의 중심을 가운데에 두고, 두 인간의 무리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쪽은 암흑의 물결처럼 일렁이는 검은 제국군의 파도.

한쪽은 깊은 바다처럼 꿈틀거리는 남색 공화국군의 파도.

굳이 그들이 높게 치켜세우고 있는 깃발을 보지 않아도, 어느 쪽이 침략자이고 어느 쪽이 방어자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여기까지 요격이라니....... 우릴 얕보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걸까요?”


“둘 모두겠지.”


로빈과 마찬가지로, 크라트의 목소리 또한 그리 밝지 않았다.

보통 수비를 하는 입장에선 지형적인 이점과, 보급의 이점을 살리기 위해 수성을 하거나 최대한 보급로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요격을 진행한다. 하지만 이곳은 아직 마즈다힐로 들어서기도 전인 진입로. 이렇게 본진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요격을 나왔다는 사실이 카나반군의 입장에선 영 불편할 수밖에.


“뭘 노리고 있는 거죠? 규모를 보니 그리 작진 않은데.......”


“우리를 시험하고 싶은 모양이지. 매복 따윈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지형이다. 오로지 힘과 힘의 대결. 그걸 가늠하고 싶은 걸지도. 숲을 벗어난 베르달군이 어느 정도인지, 놈들로선 계산해놓을 필요가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2군단으로선 숲을 벗어난 베르달군을 처음 상대해보는 거네요?”


“그래.”


“저는 이미 알고 있는데 말이죠.”


크라트가 슬쩍 왕의 얼굴을 돌아본다. 그는 이미 이쪽을 보면서 느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직 이 왕이 풋내기였던 시절, 베르메스 평원에서 윌리안 가슈펠라르의 군대와 맞서 싸웠을 때, 그의 곁에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크라트와 베르달의 용사들이었다. 그때 있었던 자신의 동료들이, 지금은 자신의 연인으로, 가장 믿음직스러운 근위병으로 함께 하고 있다.

비록, 가장 큰 짐을 나누어 짊어졌던 친구의 얼굴은 곁에 없었지만.


로빈은 이곳에 있는 모두를 믿고 있었기에, 제국의 영토 속에서, 제국의 군대를 앞에 두었음에도,

그의 얼굴에 의심과 근심은 보이지 않는다.


“자, 그럼 왕. 중앙군의 선봉은 누구로 세울 건가?”


답을 알고 있음에도 크라트는 로빈에게 묻는다. 그리고 로빈 또한 그가 답을 알고 있음에도 묻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붉은 나무는,

크게 웃으며 자신의 기사를 향해 얼굴을 돌린다.





“이런 싸움에선 기선제압이 중요한 거 알고 있지?”


“어머, 나를 뭘로 보고?”


‘기사’는 생긋 웃으며, 자신의 새빨간 혀끝을 깨물며 귀엽게 웃어 보인다.

말의 옆구리를 살짝 건드려 모든 군의 선두로 나아가는 그녀. 미소의 끝에서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는, 로빈의 뒤에 있는 3만의 군대보다도 더욱 든든하게 그의 가슴을 울린다.




“박살 내고 올게♥”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0회네요.

여기까지 함께해주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부디 앞으로도 함께할 수 있기를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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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막간) 하나의 밤하늘, 세 개의 달빛 +11 16.08.29 623 14 15쪽
242 (22막) 세 개의 오만 (14) +10 16.08.24 576 13 16쪽
241 (22막) 세 개의 오만 (13) +9 16.08.19 450 13 26쪽
240 (22막) 세 개의 오만 (12) +6 16.08.14 494 9 18쪽
239 (22막) 세 개의 오만 (11) +10 16.08.09 598 11 17쪽
238 (22막) 세 개의 오만 (10) +6 16.08.05 608 13 14쪽
237 (22막) 세 개의 오만 (9) +6 16.07.30 578 14 15쪽
236 (22막) 세 개의 오만 (8) +8 16.07.26 534 11 24쪽
235 (22막) 세 개의 오만 (7) +8 16.07.20 639 13 19쪽
234 (22막) 세 개의 오만 (6) +7 16.07.15 678 12 21쪽
233 (22막) 세 개의 오만 (5) +8 16.07.10 685 13 22쪽
232 (22막) 세 개의 오만 (4) +6 16.07.05 634 14 18쪽
231 (22막) 세 개의 오만 (3) +9 16.06.30 575 12 18쪽
230 (22막) 세 개의 오만 (2) +6 16.06.25 651 13 18쪽
229 (22막) 세 개의 오만 (1) +6 16.06.20 729 15 16쪽
228 (막간) 현실을 마주하며 +4 16.06.15 750 16 16쪽
227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0) +10 16.06.10 729 14 21쪽
226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9) +8 16.06.05 730 12 16쪽
225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8) +4 16.05.30 698 15 19쪽
224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7) +6 16.05.25 724 11 19쪽
223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6) +4 16.05.20 955 10 22쪽
222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5) +5 16.05.14 776 12 18쪽
221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4) +2 16.05.09 703 13 15쪽
220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3) +6 16.05.04 1,027 12 18쪽
219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2) +4 16.04.28 741 16 17쪽
218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 +8 16.04.23 849 15 19쪽
217 (막간) 필요없는 증명. 필요한 증명. +10 16.04.18 739 18 13쪽
216 (20막) 증명 (9) +4 16.04.13 698 18 16쪽
215 (20막) 증명 (8) +8 16.04.08 670 20 16쪽
214 (20막) 증명 (7) +11 16.04.02 734 14 16쪽
213 (20막) 증명 (6) +10 16.03.28 782 13 15쪽
212 (20막) 증명 (5) +8 16.03.23 812 17 24쪽
211 (20막) 증명 (4) +8 16.03.18 947 16 23쪽
210 (20막) 증명 (3) +10 16.03.12 813 17 20쪽
209 (20막) 증명 (2) +10 16.03.07 887 20 19쪽
208 (20막) 증명 (1) +10 16.03.02 763 18 18쪽
207 (막간) 지평선으로 향하는 한걸음을 지켜보는 사람들 +8 16.02.26 810 19 17쪽
206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0) +8 16.02.21 910 24 21쪽
205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9) +10 16.02.16 1,033 20 22쪽
204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8) +6 16.02.11 809 17 28쪽
203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7) +6 16.02.06 764 19 21쪽
202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6) +6 16.02.01 827 17 22쪽
201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5) +10 16.01.27 820 17 17쪽
»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4) +10 16.01.22 965 16 18쪽
199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3) +8 16.01.17 706 20 18쪽
198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2) +10 16.01.12 773 20 19쪽
197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 +8 16.01.07 792 21 13쪽
196 (막간) 언젠가 +4 16.01.02 946 22 16쪽
19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2) +8 15.12.28 799 25 23쪽
19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1) +6 15.12.23 933 2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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