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207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6.04.23 20:58
조회
849
추천
15
글자
19쪽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

DUMMY

“진! 야 임마, 진!”


“.......”


“지이이이인!!!”


“.......”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설원에 쌓인 모든 눈을 무너트릴 기세로 폭발하는 남성의 목소리에도, 당사자는 남쪽으로 기울어진 시선을 거두지 않고 가만히 침묵을 지킨다.

정확한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소녀와 여인의 경계.

아무렇게나 길러 푸석푸석한 먹색 머리카락이 눈바람에 휘날리고, 그 아래 드러난 피부는 주변 풍경에 완벽히 동화될 수 있을 정도로 하얗고 투명하다. 그러나 그녀의 날카로운 눈매가 품고 있는 깊은 어둠의 눈동자만큼은, 그 어떤 색도 거부한다는 듯 또렷하게 빛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 자식, 내가 사라지기 전에 말하고 가라 했지!”


결국 남자는 그녀의 대답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건물 잔해 위에 앉아있던 그림자를 발견해내는 데 성공한다. 그녀는 남자가 유적처럼 파묻힌 잔해 위로 낑낑거리며 거구를 끌고 올라오고 나서야 그를 향해 먹색 시선을 돌리더니. 작게 입을 벌려 그의 이름을 불러준다.


“.......안녕, 질렌스키.”


“안녕-은 무슨, 너 찾는다고 이 주변을 30분은 뒤집고 다녔구만!”


불만을 내뱉으며 수염에 붙은 눈을 털어내는 후덕한 인상의 기사. 그의 너저분한 수염은 턱 아래까지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굵은 눈송이는 가슴팍까지 흘러내려 그의 가슴을 적신다. 그러나 그는 그 차가움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듯, 작은 몸서리조차 치지 않는다.

이는 그가 눈의 축복을 받은 토종 니에브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눈의 사도이자, 스스로 악마라 칭하는 변덕의 귀재이기도 한 플로닉스. 그의 축복 아래에 놓인 니에브공국의 겨울은 다른 국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고 혹독하다. 눈이 내리지 않는 날이 드물고, 봄이 되어도 제대로 녹지 않는 땅 때문에 농작물도 키워내기 힘들다. 심지어는 겨울이 아닌 한여름에도 눈이 내리기도 한다.

바로 지금처럼.

이런 환경과 축복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니에브공국의 사람들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추위와 눈에 대한 내성이 강하다. 숲에서의 카나반인들처럼 춥고 눈이 내리는 날에 오히려 활동력이 더 올라갈 정도였다. 때문에 질렌스키는 살을 에는 눈바람과 추위 속에서도 얇은 셔츠 하나만으로 설원을 헤집고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진’도 마찬가지였다. 장식이나 무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얇은 흰 드레스 하나만이 그녀가 걸치고 있는 전부였으니까.


“나는 왜?”


질렌스키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다시 남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진. 그런 그녀의 무심함에 질렌스키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육중한 엉덩이를 그녀 맞은편에 내려놓는다.


“왜겠냐, 그 녀석이 찾는다.”


질렌스키가 말한 ‘그 녀석’이, 다름 아닌 그의 동생이자 니에브공국의 검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진은 노골적으로 미간을 구긴다.


“.......그러니까 왜?”


“카나반이 마즈다힐을 점령했다고 한다.”


다시 돌아오는 진의 시선. 그 끝에 눈송이와 함께 서려 있던 놀라움이 빠르게 녹아내리고, 납득의 고갯짓이 이어진다.


“역시.......”


“ ‘역시’라니, 알고 있었냐?”


질렌스키의 물음에 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덕분에 눈바람이 그녀의 드레스를 허벅지까지 들춰냈지만, 그 얇고 하얀 살결에서 느껴지는 것은 욕정이 아닌 신비로움뿐이었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어. 역겨운 피비린내를 덮는, 아주 익숙한 향기가.......”

눈의 은총보다 차가운 무표정을 씹으며 말끝을 흐리는 진의 보랏빛 입술. 질렌스키는 수많은 남자들이 미소를 피우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한 그 입술을 올려다보면서 잠시 회상에 빠져든다. 그의 침묵이 길어지자, 진이 먼저 그를 내려다본다.

“왜 그래?”


“아, 아니, 정말로 닮았다 싶어서.”


“.......닮아?”


“왜, 저번에도 말했잖아. 내가 처음 동맹협상 때문에 대공이랑 같이 욘에 갔을 때, 거기서 만났던 카나반의 명예검성. 그 남자랑 너랑 진짜 닮았다니까.”


“.......나보고 남자랑 닮았다는 거야?”


“그런 말이 아니라, 마치 남매, 아니, 오히려 쌍둥이 같다고 할까....... 느낌이....... 어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답답한 듯 삐죽한 머리를 벅벅 긁어대는 질렌스키를 향해 진은 비웃음이 섞인 한숨을 내뱉는다. 평생 무의 길만 걸어온 그가 말주변이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여기서 더 재촉하거나 질책할 생각은 없었다.


“카나반과 제국 사이의 일로 당신 동생이 날 찾는다는 건, 이제 우리도 눈의 축복을 벗어날 때가 왔다고 생각하는 걸까.”


“글쎄, 우리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진 않지. 북쪽도 신경 써야 하니까. 그렇기에 기사도 마법사도 아닌 네가 더더욱 필요한 거고.”


“애초에 이 전쟁을 단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가벼운 발걸음으로 깡충깡충 폐허를 내려오는 진. 특이하게도, 하얀 눈과 비슷하게 하얀 그녀의 발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토종 니에브인일지라도 이런 날에 신발도 없이 돌아다닌다는 건 상식에서 벗어난 일. 그러나 질렌스키는 그녀의 ‘신발’을 대신해주는 존재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놈은 어디 있지?”


“레오말이야?”

진과 눈과 눈을 마주칠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접근하면 언제나 어느 순간 나타나 그를 위협하던 존재. 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 질렌스키는 반가우면서도 의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문은, 진의 단 한마디로 인해 박살 나고 만다.

“아까부터 거기 있었는데?”


폐허의 바로 아래에서, 눈이 내려앉는 소리보다도 고요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하얀 그림자. 동시에 시릴 정도로 새파란 눈동자가 반짝이고, 커다랗게 피어나는 하품의 입김과 함께 날카로운 아랫송곳니 두 개가 쌓인 눈을 꿰뚫는다. 나름 덩치엔 자신이 있는 질렌스키였지만, 자기 몸 크기의 절반이 넘는 송곳니가 곁을 지나갈 때면 숨을 삼킬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깨끗한 털 그 자체가 보호색이 되어 몸을 감추고 있었기에, 질렌스키가 이 압도적인 덩치의 ‘고대야수’를 눈치채지 못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야수는 자신의 검은 코를 쓰다듬어주는 진의 손길이 가려운지, 그르렁거리며 그녀의 몸과 눈바닥에 수염을 비비기 시작한다. 덕분에 진은 낮아진 높이의 얼굴을 타고 야수의 목 뒤로 올라설 수 있었다.


“태워줄까?”


그녀는 가능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언제나 저렇게 묻는다. 동시에 노골적으로 경계의 색이 짙어지는 야수의 그르렁거림과 주인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듯 휘적휘적 주변을 휩쓸기 시작하는 육중한 꼬리. 저거에 잘못 맞기라도 했다가는 아무리 기사일지라도 전신의 뼈가 부러져 나가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질렌스키는 정중하게 고개를 젓는다.


“사양하지. 죽더라도 전장에서 죽고 싶거든.”


“현명한 선택이야.”


한쪽으로 걸터앉은 채 야수의 목덜미를 가볍게 두드리는 진. 그러자 ‘레오’는 짧게 한번 숨을 들여 마시더니, 몸을 일으켜 거대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하얀색으로 뒤덮인 설원에서도 독보적인 하얀색의 움직임.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질렌스키는 긴장이 풀린 숨을 내뱉으며 뒤늦게 발자국을 뒤따르기 시작한다.




“.......또 같은 악몽을 꾸겠네.”


물론, 이 안전거리 덕분에 질렌스키는 야수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며 속삭이는 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





“아, 어서 오세요, 총리님!”


“오랜만입니다, 폐하. 살아생전에 제국의 땅에서 이런 인사를 드릴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만.”


“하핫!”

환하게 웃는 로빈과 악수를 나누며, 마누앙은 익숙하지 못한 집무실의 풍경을 천천히 눈동자에 담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국의 2군단장, 스이바노 브란트의 명패가 걸려있던 이 집무실은 이제 ‘붉은 나무 왕’의 임시거처가 되어있었다.

“대표의원님들도 모두 오셨나요?”


“예. 몇 분은 아직도 불편하신 모양입니다만, 어쨌든 역사적인 순간임에는 확실하니 되도록 모두 참석하시는 방향으로 지침을 내렸습니다.”


“.......그 ‘불편하신 분들’은, 역시 귀족파와 시민당 의원들이시겠죠?”


“잘 알고 계시는 군요. 그리고 저도 절반쯤은 그에 포함됩니다.”


“하하.......”


커다란 잔소리의 폭풍을 예고하는 총리의 시선을 애써 회피하며 웃어 보이는 로빈. 하지만 마누앙을 군용 전술판을 개조한 접대용 탁자로 안내하자마자 그가 꺼낸 내용은, 로빈의 예상과는 다소 다른 방향이었다.


“상황보고에 앞서, 의원들보다 제가 먼저 여쭤보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일단 이 전투보고서의 내용 말입니다만.”


“.......네, 전투보고서.”


역시 마누앙이다. 자신이 가장 불편해할 내용을 가장 먼저 짚어내었으니.


“스이바노 브란트가 계획했던 ‘피의 축복’이 갑자기 폭주하여 그 기능을 상실했다-라는 부분. 정말로 보고서상의 내용이 전부입니까?”


“예, 그렇게 밖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 노인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절대 의심의 여지를 줄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로빈은 지나와 함께 몇 번이나 연습했던 대로 굳건한 표정을 지으며 단언했지만, 역시나 세월에서 묻어나오는 날카로움을 피할 수는 없었다.


“.......원정군과 어떻게 말을 맞추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제가 납득할 수 있는 것이든,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든. 적어도 저에게는 진실을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앉아있는 총리 자리인 겁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폐하. 이 보고서의 내용이, 정말로 전투에 있었던 전부입니까?”


“예, 전부입니다.”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로빈은 선택을 했다. 그날 있었던 일, 그날 ‘친구’가 자신을 위해 했던 그 일을, 다른 사람의 심판에 맡기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잠시 로빈의 검붉은 눈동자를 응시하던 총리는, 결국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받는다.


“알겠습니다. 이 내용에 대해선 이 이상 묻지 않도록 하지요. 다만 다른 의원들도 저처럼 쉽게 납득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크게 걱정은 하지 않겠습니다만, 사병들의 입단속도 철저하게 해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적의 지원군이라 명시된 남부의 군세, 정말로 블라고슬로바의 군대가 맞습니까? 이게 정말이라면 동맹의 근간을 뒤흔드는 중대한 사안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정곡을 찌르고 들어오는 마누앙의 혀. 이에 로빈은 대답하기에 앞서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아직 이번 일은 블라고슬로바 측에 항의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총리님을 비롯하여 의회 분들과 의논을 해보고 싶어서요. 도시연합이라는 블라고슬로바의 특성상, 친제국적 성향의 영주 한 명이 변심한 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보고서엔 엘라론 경이 보충병을 이끌고 충돌하자마자 군을 물렀다고 나와 있습니다만, 군세가 적은 편도 아니었는데 어째서 퇴각했을까요?”


“아시잖아요, 로즈엄마가 전장에서 어떻게 싸우는지....... 게다가 로즈 때문에 감정이 격해진 상황이라 엄청 날뛰셨거든요.”


내용은 농담에 가까웠지만, 로빈의 표정만큼은 그보다 더 진지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그뿐이라면 다행입니다만......, 블라고슬로바 내부에 또 다른 개입세력이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됩니다. 국론이 분열된 것이라면, 블라고슬로바와의 동맹구축에 대하여 진지한 재검토가 필요하겠지요.”


“네, 일단 그 점은 회의를 거친 후에 결론을 내도록 하죠. 공식적인 항의로 가닥이 잡히면, 제가 개인적으로 먼저 접촉할 수도 있고요.”




“로~비인! 태하 보급관이 하누랑 맥주를-......., 아, 총리님.”


강화복만 입고서 왼쪽 겨드랑이로는 커다란 맥주통을, 오른손으로는 보급대로부터 직접 ‘갈취’한 하누를 비롯해 수많은 안주가 쌓여있는 상자를 들고 집무실을 문을 박차며 들어선 지나. 그러나 그녀는 자신보다 한발 빨리 남편을 찾아온 총리의 존재를 알아채고 급격하게 태도를 바꿔 고개를 숙인다. 계속해서 굳어있던 총리의 입가도 그런 왕비의 모습을 보고는 다소 풀어질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나이트 마제스티.”


“앗, 네, 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민 총리. 그리고 왕비는 그 악수를 받아들이기 위해 맥주통을 바닥으로 내팽개치고 안주 상자를 다가선 로빈에게 떠넘긴다. 동시에 데굴데굴 요란하게 굴러가려는 맥주통을 붙잡기 위해 그녀는 발로 그것을 찍어눌러야 했다.


“.......전장과는 동떨어진 무른 몸이기에 이런 종이로밖에 왕비님의 업적을 맞이할 수 없음을 용서하십시오.”


“아, 아뇨! 제가 업적은 무슨....... 헤헤.”


이 남자가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었기에, 지나는 어찌 반응해야 할지를 몰라 머리를 긁적이고만 있었다. 로빈 또한 뿌듯하고 자랑스러움에 가슴이 절로 펴지고는 있었지만, 한편으론 마누앙의 과한 표현에 살짝 의문이 드는 중이었다.


“.......왕비님의 고조부이시자 공화국 선대 검성이신 한센님께는 큰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누앙의 점잖은 목소리. 그 목소리가 의외의 이름을 품자, 로빈과 지나는 동시에 총리의 숙인 머리를 바라본다.

“저뿐만이 아닙니다. 공화국 전체가 대전쟁으로부터 그분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희생을 강요했고, 그분은 그 희생을 안으면서도 꿋꿋이 모든 걸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섭정을 맡게 된 ‘그 일’ 때도, 그분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만 계셨습니다.”


“.......”


붙잡은 총리와 왕비의 손에서 어색한 떨림이 사라진다.


“처음엔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손녀딸의 시신을 안고 왕실에서 걸어 나오는 그를 보고 공화국의 종말을 예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피를 토하고 싶은 그 심정에도, 모든 것을 삼킨 채 방관의 죄를 지켜만 보고 계셨습니다. 저는 겁쟁이였을 지도 모릅니다만, 그분께서는 아니셨습니다. 그에게 있어 침묵이란, 다른 그 무엇보다도 힘든 인내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총리님.......”


지나는 고개를 들라 말하고 싶었으나, 총리의 손은 그녀를 놓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그분께서는 거대한 유산을 공화국에 남겨주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유산은 마침내 만개하여 공화국에 새로운 영광과 빛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저는 그분께 직접 드리지 못했던 감사의 말을, 그 유산에게라도 전하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새로운 공화국의 새로운 ‘흐름’이시여.”


이 남자가, 이 자존심 강한 노인이.

이토록 깊게 허리를 숙이고 존경을 표한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이 사람은, ‘공화국을 위해’라는 한 마디로 치장된 죄책감을 품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옥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삼키고만 있었던 한 ‘기사’의 죽음은, 그에게 있어 그런 죄의 무게가 영원히 붙들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때문에 마누앙은 그 기사가 남긴 유산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바치고 나서도 새로운 축복으로서 이 땅에 내려진 그의 이름을 향해, 조금이나마 자신의 방관과 비겁함을 참회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가 두려워 직접 하지 못했던 감사의 인사를, 조금이나마 대신 전할 수 있으니까.


로빈은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자신은 언제나 충분하다 말해왔지만, 그녀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고 있음은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자신을 포기하려 했고, 다급하기도 했으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증명해냈다. 그녀의 이름이 품고 있는 가치를, 그 이름이 거쳐 온 모든 세월과 영혼들을 증명해냈다. 총리는 그것을 축복하고 그에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로빈은 손을 뻗어, 총리의 손을 맞잡고 있지 않은 지나의 왼손을 부드럽게 붙잡는다. 그에 지나는 로빈을 바라본다. 그 샛노란 눈동자에 눈물은 맺혀있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유약한 흐름의 잔재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





“그럼, 지금 성에 본국에서 온 높으신 분들이?”


“그렇다니까, 축하연이라도 열 생각인지, 보급도 빵빵하게 들어왔더라고.”


“으음....... 술과 안주냐, 아니면 높으신 분들 접대를 위한 작업이냐....... 근무 나온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네.”


“근무로 꿀빨다가 술만 먹으면 되는 거지. 하핫!”


마즈다성 북동문에 마련된 임시검문소. 물론 외곽지역에 대한 모든 수색과 녹화작업을 위한 사전작업이 끝난 뒤였기 때문에 근무를 서는 베르달 용사들에게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승리를 과시하듯 활짝 열려있는 성문이야말로 이런 분위기를 대변해주는 가장 대표적인 요소였으니까.


“음? 잠깐, 저건 뭐야?”


그러나 이런 느슨함도 베르달 용사들 특유의 좋은 시력까지는 뒤덮지 못한 모양이었다. 동기의 말에 맞은편에 있던 용사도 곧바로 성 밖을 향해 눈을 돌렸고 그 또한 저 멀리서 다가오는 작은 그림자 하나를 식별할 수 있었다.


“말.......인가. 누가 타고 있는 거 같은데?”


“일단 보고해. 수색 모두 끝났다더니, 저건 어디서 기어 나온 거야?”


검문소가 갑자기 분주해진다. 한 명이 보고를 올리는 사이 맞은편의 용사는 기다란 창을 들고 접근하는 그림자를 경계한다. 대기조가 검문소로 집합할 때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뭐야, 무슨 일인데?”


“아, 대장!”


대기조를 이끌고 검문소에 나타난 자는 다름 아닌 ‘늑대의 딸’ 올리. 어색한 옷을 입고, 얼굴도 모르는 자들의 축하 인사를 받느니 차라리 외곽근무를 서겠다는 그녀의 의지 덕분이었다. 그러나 아직 의수조차 제대로 수리되지 않았기에, 영락없는 외팔이 신세인 그녀였다.


“.......물러나 있어.”

승리를 즐기던 다른 부하들과 마찬가지로 다소 풀어져 있던 올리의 표정이 빠르게 식는다. 그녀의 명령에 따라 무장한 용사들은 성문 아래로 물러났고, 오직 그녀의 그림자만이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에 정면으로 맞서게 된다.

“........하!”


그리고 마침내 말 위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게 되자 터져 나온 올리의 첫 반응은, 다름 아닌 실소였다. 모든 부하들은 그런 올리의 반응에 의아한 듯했지만, 결국 말의 그림자가 바로 앞에 다가올 때까지도 그녀로부터 명령은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멈춰서는 말.

올리와 마주치는 시선.


잠시 침묵을 주고받던 그 둘 사이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먼저 흘러나온다.




“내 이름은 쥬넨 니바르토. 카나반 공화국에 투항하기 위해 왔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8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변수의 굴레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43 (막간) 하나의 밤하늘, 세 개의 달빛 +11 16.08.29 623 14 15쪽
242 (22막) 세 개의 오만 (14) +10 16.08.24 576 13 16쪽
241 (22막) 세 개의 오만 (13) +9 16.08.19 450 13 26쪽
240 (22막) 세 개의 오만 (12) +6 16.08.14 495 9 18쪽
239 (22막) 세 개의 오만 (11) +10 16.08.09 599 11 17쪽
238 (22막) 세 개의 오만 (10) +6 16.08.05 608 13 14쪽
237 (22막) 세 개의 오만 (9) +6 16.07.30 578 14 15쪽
236 (22막) 세 개의 오만 (8) +8 16.07.26 534 11 24쪽
235 (22막) 세 개의 오만 (7) +8 16.07.20 639 13 19쪽
234 (22막) 세 개의 오만 (6) +7 16.07.15 679 12 21쪽
233 (22막) 세 개의 오만 (5) +8 16.07.10 686 13 22쪽
232 (22막) 세 개의 오만 (4) +6 16.07.05 635 14 18쪽
231 (22막) 세 개의 오만 (3) +9 16.06.30 576 12 18쪽
230 (22막) 세 개의 오만 (2) +6 16.06.25 651 13 18쪽
229 (22막) 세 개의 오만 (1) +6 16.06.20 730 15 16쪽
228 (막간) 현실을 마주하며 +4 16.06.15 750 16 16쪽
227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0) +10 16.06.10 729 14 21쪽
226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9) +8 16.06.05 730 12 16쪽
225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8) +4 16.05.30 698 15 19쪽
224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7) +6 16.05.25 724 11 19쪽
223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6) +4 16.05.20 955 10 22쪽
222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5) +5 16.05.14 777 12 18쪽
221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4) +2 16.05.09 703 13 15쪽
220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3) +6 16.05.04 1,028 12 18쪽
219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2) +4 16.04.28 742 16 17쪽
»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 +8 16.04.23 850 15 19쪽
217 (막간) 필요없는 증명. 필요한 증명. +10 16.04.18 739 18 13쪽
216 (20막) 증명 (9) +4 16.04.13 698 18 16쪽
215 (20막) 증명 (8) +8 16.04.08 670 20 16쪽
214 (20막) 증명 (7) +11 16.04.02 735 14 16쪽
213 (20막) 증명 (6) +10 16.03.28 783 13 15쪽
212 (20막) 증명 (5) +8 16.03.23 813 17 24쪽
211 (20막) 증명 (4) +8 16.03.18 948 16 23쪽
210 (20막) 증명 (3) +10 16.03.12 813 17 20쪽
209 (20막) 증명 (2) +10 16.03.07 887 20 19쪽
208 (20막) 증명 (1) +10 16.03.02 763 18 18쪽
207 (막간) 지평선으로 향하는 한걸음을 지켜보는 사람들 +8 16.02.26 810 19 17쪽
206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0) +8 16.02.21 911 24 21쪽
205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9) +10 16.02.16 1,033 20 22쪽
204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8) +6 16.02.11 809 17 28쪽
203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7) +6 16.02.06 765 19 21쪽
202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6) +6 16.02.01 828 17 22쪽
201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5) +10 16.01.27 820 17 17쪽
200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4) +10 16.01.22 965 16 18쪽
199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3) +8 16.01.17 707 20 18쪽
198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2) +10 16.01.12 773 20 19쪽
197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 +8 16.01.07 792 21 13쪽
196 (막간) 언젠가 +4 16.01.02 947 22 16쪽
19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2) +8 15.12.28 799 25 23쪽
19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1) +6 15.12.23 933 24 1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