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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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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17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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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3)

DUMMY

“점령한 거점들을 중심으로 전진기지의 구축을 완료했고, 공병과 마법사들을 동원하여 주변의 지뢰를 제거한 뒤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보급로도 깔끔하다. 바로 작전을 수행해도 될 정도지만, 한 번쯤은 적의 반응을 보고 움직이는 것이 좋아. 이건 나도, 참모진도 동의한 사항이다.”


로빈은 크라트의 짤막한 보고에 대답 없이, 조심스럽게 고개만을 끄덕이며 망루 아래 펼쳐져 있는 대지를 바라본다. 공화국에선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그 광활함에 매료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선조들은 구경조차 못 해본 풍경 위에 직접 발을 딛고 서있다는 사실이 감동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의 검붉은 눈은, 대지를 품고 있는 저 먼 곳의 지평선, 그리고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해 상황은요?”


“생각보다 전초기지들의 방비가 단단해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지만, 왕비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기지들 간의 통신을 교란시켜준 덕분에 각개 격파할 수 있었다. 재편이 필요하거나 전투력에 영향을 끼칠 정도의 손실은 아니야.”


“적의 움직임은?”


“마즈다힐 전역에 퍼져있던 군단의 세력들을 결집시키고 있는 모양이다. 전선을 넓힌 상태에서 지금처럼 조금씩 갉아 먹히는 것보다는 단번에 우리를 제압하겠다는 생각이겠지. 내가 군단장이라도 같은 판단을 내렸을 거다.”


“엘라는요?”


“.......”

모든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할 기세였던 크라트도 순간 침묵을 끌어당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로빈은 그를 재촉하지 않는다. 잠시 후 크라트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보고서를 들고 있던 손을 아래로 늘어트린다.

“.......그녀가 나의 아내이고, 모두가 그녀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군법을 거스른 자는 처벌받아야 마땅하다. 가치 있는 전력이라는 이유로 편의를 봐주기 시작하면 군율은 빠르게 무너진다. 모범이 되지 못하고 존경받지 못하는 기사는 베르달에, 그리고 카나반에 필요 없다.”


“엘라의 구금에 대해 뭐라 할 생각은 없어요. 이번 원정에 그녀의 전투력이 분명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저 또한 언젠가는 그녀의 무법성을 통제해야 할 때가 올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제가 묻고 싶은 건, ‘그녀는 어떠냐?’ 이거입니다.”


“어떠냐니.......? 그녀의 몸 상태 말인가?”


“몸과 마음. 둘 모두요.”


바람을 만끽하던 로빈의 얼굴이 마침내 베르달의 늑대를 향해 뒤돌아선다. 그가 지금 품고 있는 것이 왕으로서의 얼굴인지, 아니면 군인으로서의 얼굴인지 크라트는 감히 판단할 수 없었지만, 로빈이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는 예측할 수 있었다.


“.......엘라론은 달라졌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감옥의 철창을 뜯어버리고 다시 뛰쳐나갔겠지.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있어. 그것만큼은 나의 이름을 걸고 보장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란 보장은 못 하시겠죠.”


“.......”


크라트의 침묵이 의미하는 바는 오직 하나, 로빈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음이다.


“사실 지나의 전투보고서를 받고 저도 좀 의문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지금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자면, 제국의 2군단장이 대장님의 따님을 납치하여 도발을 해왔고 우린 그에 반응하여 역으로 선제공격을 했다- 라는 거잖아요? 우리가 이렇게 빠르게 움직인 게 적의 예상을 뒤엎은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칼은 저쪽이 쥐고 있습니다. 바로 ‘로즈’라는 이름의 칼이요.”


“.......하고 싶은 말이 뭔가?”


불편한 기색이 넘쳐나는 크라트의 어투에 계단 옆에 서있던 드렌턴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난다. 그는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풀고 몸을 비틀어 등에 짊어지고 있던 대검을 노출시켰지만, 크라트는 로빈을 향한 시린 눈동자를 거두지 않는다.


“대장님, 적은 어째서 로즈를 ‘인질’로 사용하지 않는 걸까요?”

인질이라는 단어에 반응하여 크라트의 눈썹이 씰룩인다. 야성미 넘치는 수염 덕분에 그의 표정을 완벽하게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굳게 다문 입가로 모여드는 신음은 그의 미간만큼이나 구겨져 있었다.

“이곳을 책임지고 있던 웬델이라는 기사가 마구잡이로 날뛰던 엘라를 제압할 수 있었던 것도 로즈라는 존재를 인질로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만약 정말로, 2군단장이 우리가 먼저 움직이기 전에 ‘늑대의 딸을 죽이겠다’라고 협박했다면,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었을까요?”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물었다.”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며 한걸음 다가서는 크라트를 막아서기 위해 드렌턴이 마침내 육중한 몸을 움직였지만, 곧 로빈의 손짓에 의해 저지당한다.


“.......대장님, 로즈는, 이미 인질로서의 가치가 사라진 게 아닐까요?”


“그 아이가 죽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두터운 보고서를 쥔 채로 탁자를 내려치는 베르달의 늑대. 그에 보고서들은 그의 주먹 안에서 뭉개지거나 찢어져 버렸고, 나무로 만든 사각형의 탁자는 결대로 박살 나며 망루 바닥을 어지럽힌다. 늑대를 잘 알고 있는 드렌턴조차 움찔할 정도의 영력폭풍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이상하지 않습니까? 역사상 처음으로 마즈다힐이 침공당하는 와중에도 2군단장은 우리에게 로즈에 대한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질 않고 있어요. 그 아이의 이름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꽤나 많은 근심을 줄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우린 이 반응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인질 따위는 필요 없을 정도로 자신만만하거나,

아니면 이미 로즈가 인질로서의 가치를 상실했거나.”


“.......”


크라트는 시퍼런 두 눈을 불태운다. 그러나 그의 입은 침묵을 씹고 있었다.

남편이자 아버지가 아닌, ‘지휘관’으로서의 늑대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최악의 예측일 뿐이에요. 계속 잠잠하다가,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나서야 인질이라는 패를 꺼내들 수도 있겠죠. 2군단장, 스이바노 브란트라는 남자를 정확히 정의내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엘라도 이 사실을 완벽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기 전까진, 징계가 풀리더라도 그녀를 전선에 복귀시킬 수 없어요.”

왕으로서, 그리고 지휘관으로서 내릴 수 있는 가장 현명한 판단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크라트는 좀처럼 구겨진 얼굴을 펼 수가 없었다.

“본국에선 제가 아직도 베르달에 있는 걸로 되어있습니다. 이곳의 총사령관은 어디까지나 대장님이에요. 그러니까 부디, 총사령관으로서의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로빈은 크라트에게 일종의 자극을 주입한 셈이었다. 만약 그가 엘라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면 이런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엘라는 통제되지 못했고, 모두의 예상대로 위험을 초래했다. 결과적으로는 엘라와 지나, 두 명의 기사만으로 대대급의 전초기지를 무력화시켰다는 성과를 이루어냈지만, 어디까지나 지나의 빠른 상황판단과 이곳 지휘관의 욕심, 오만함에 따른 운이었을 뿐.

만약 모든 전초기지들이 유기적으로 연합하여 엘라의 광기에 대처했다면 상황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로빈은, 크라트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상황과, 그 상황을 지배하는 변수를 통제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런 로빈의 저의를 크라트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엘라를 통한 죄책감과, 로즈를 향한 분노, 그 모든 것이 뒤섞인 마지막 심술을 계단을 내려가는 로빈의 뒤로 흘리고 만다.


“.......만약 로즈가 잘못된다면, 나와 엘라가 너희에게 했던 약속 또한 위태로워질 수 있다. 그건 이해해주길 바란다.”


“예, 물론입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저도 지나도 최선을 다할 테니까요.”


오늘 지었던 그 어떤 표정보다도 밝게 계단을 내려가는 로빈. 하지만 그의 그림자는, 그 어떤 것보다도 무겁게 발걸음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




급조된 감옥은 어색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다. 마음만 먹으면 손가락으로도 박살 낼 수 있는 널빤지가 창문을 가로막고 있었고, 거대한 틈의 철창은 당장이라도 휘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모양만을 유지한 채였다. 때문에 그 초라한 구속을 받아들이고 있는 여인은 어렵지 않게 철창 밖으로 다가온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머나, 우리 귀여운 따님이 웬일이래?”


환한 미소와는 달리, 엘라의 상태는 처참하다. 반투명하던 잠옷은 적군의 피로 인해 검붉은 드레스가 되어버렸고, 그것은 그녀의 찬란한 머리카락과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씻을 물이나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고 그대로 수감된 것은 그녀가 받아들인 죄의 무게를 의미하고 있었기에, 올리는 무거운 표정으로 가만히 의자를 끌어다 자신의 ‘어머니’와 철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다.


“.......”

다시 한 번, 올리는 엘라를 가만히 지켜본다. 그녀의 흐트러진 미소와, 그보다 더욱 처참한 차림새, 그리고 그녀의 눈가에 얼룩져있는 눈물자국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 끝에서 나온 올리의 감상은, 엘라의 겉모습보다 더욱 커다란 광경을 향해있었다.

“.......용케도 가만히 묶여있네.”


“아아, 이거? 네 아버지가 진심으로 화를 내더라고. 힘없는 부인이 뭘 어쩌겠어, 깨갱하고 있어야지, 안 그래?”


의미 없는 미소와 웃음소리. 이미 말라붙어 가루가 되어 떨어지는 생명의 흔적들을 보며 올리는 얼굴을 굳힌다.


“결과적으로- 라는 말은 듣지 않겠어. 당신 때문에 아버지가 욕을 봤고, 그것만으로도 화낼 이유는 충분하지만 난 그러지 않을 거야. 단지,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


“뭔데?”


의자에 앉아있음에도 올리의 육중한 덩치는 어머니를 꼬마 아이처럼 만들기에 충분하다. 때문에 그녀는, 이 질문을 꺼내기에 앞서 두 호흡이나 망설여야 했다.


“.......당신, 아버지를 사랑해?”


“물론이지. 그러니까 내가 이러고 있는 거잖아.”


망설임 없는 대답.

올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두 호흡을 쉰다.


“그럼, 당신은 나를 사랑할 수 있어?”


“.......응?”


목소리가 닿지 않았을 리는 없다. 엘라의 반응은, 분명 그 의도를 읽지 못한 것일 터.


“나는 아버지를 존경해. 그리고 가족으로서의 최소한의 사랑 또한 같이 품고 있어. 하지만 내 삶의 가족이란 구성에서 어머니는 언제나 빠져있었어. 내 인생에 없는 존재. 나에게 핏줄만을 남기고 떠난 존재였으니까. 그러니까 모성애 같은 건 나는 잘 몰라. 그래서 묻는 거야. 당신은 아버지를 사랑해. 그리고 로즈 또한 그에 못지않게 사랑하겠지. 그러면, 나라는 ‘딸’은, 당신에게 있어 무슨 존재지?”


“.......”


“아버지는 로즈가 사라진 것에 분노했어. 그리고 당신과 슬픔을 공유하고, 당신을 위해 국경을 넘었어. 비록 지금은 화를 내면서 당신을 이곳에 몰아넣었지만, 그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그리고 로즈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런데 말이지, 난 이렇게 한번 묻고 싶어.

만약, 적의 손에 납치된 게 로즈가 아닌 나였더라도, 아버지는 이렇게 국경을 넘어줬을까? 그리고, 당신은 나를 위해 그렇게 피를 묻혀주었을까?”


“.......”


엘라는 미소를 거두고 침묵한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올리는, 천천히 자신의 의수를 쓰다듬기 시작한다.


“당신에 대해 악감정은 없어. 내 팔을 자른 것도 어디까지나 기사 대 기사의 싸움에서 비롯된 거였으니까. 하지만 당신이 아버지와 결혼한 뒤로 많은 것이 뒤틀리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져. 귀여운 로즈는 나를 포함한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아버지는 냉정을 잃었어. 나 또한 한시라도 빨리 그 아이를 제국의 품에서 꺼내오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불편한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나라면 어땠을까-’하고 말이야. 그러니까 다시 묻겠어.”

올리가 의수에서 벗어나 고개를 든다. 그 눈동자는, 그 아비와 똑같은 한기를 품고 있었다.

“나는, 크라트 니바르토와 엘라론 니바르토의 가족이야?”


올리를 향해 언제나 능글맞은 태도를 유지해왔던 엘라도 표정을 거두고 그녀를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대답에 대해 무게감을 느끼거나 할 성격은 아니었지만, 눈앞에 있는 아이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이의 딸이며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이의 언니라는 사실은 분명했으니까.

그러나 엘라의 입술은, 생각보다 빠르고 가볍게 움직인다.


“.......너는 스스로 그 질문이 유치하다고 생각했기에 여태까지 속으로만 품어왔겠지. 당연히 아버지한텐 꺼내지도 못했을 거고.”


“.......”


“그 생각이 맞아. 유치해. 그리고 무의미해. 질투라도 하는 거니? 나 참, 어린애도 아니고.......”


“.......”


“솔직하게 말할 게. 만약 납치된 게 로즈가 아닌 너였다면, 나는 이렇게 피칠갑을 하면서 뛰어다니진 않았을 거야.”

엘라의 웃음에, 올리는 미동조차 않는다.

예상했던 것일까, 아니면 반대일까.

“하지만 이것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철창 사이는 벌어져 있다.

그렇기에, 엘라의 손이 쉽게 올리의 턱으로 뻗어 나올 수 있었다.




“만약 너였다면, 지금 여기에 갇혀있는 건 내가 아니라 네 아비였을 거야. 그리고 나와 로즈는 검을 쥐고 적의 머리를 향해 욕지거릴 내뱉고 있었겠지.”


“.......”


“차이는 간단해. 로즈는 울지만, 너는 울지 않잖아. 로즈는 믿을 수 없지만, 늑대의 딸은 믿을 수 있잖아. 그렇기에 크라트도, 나도 믿고 있는 거야. 너는 엄마라는 존재가 없는 가족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였겠지만, 나에겐 가족이란 것 자체가 두렵고 생소한 거였어. 하지만 크라트는 그런 나에게 가족을 주었고, 나는 그거에 너무나 감사해.”


“.......”


“그러니까 올리, 부탁할게.”


미소의 끝자락에서 다시금 눈물이 흘러내린다. 피로 얼룩진 엘라의 손은 자신의 눈물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딸’의 뺨을 쓰다듬고 있었다.




“.......동생을 구해줘.......”




올리는 엘라의 손길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원위치로 돌려놓는다. 뒤돌아서는 그녀의 발걸음에 망설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감옥을 나서기 직전, 등을 돌린 채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서도,

망설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알았어, 엄마.”





==================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역사상 최초로 적의 침략을 허용한 지금,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꺼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대응으로는 본국에서 태업이라 의심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거침없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쥬넨을 향해, 브란트는 커다란 배를 뒤뚱거리며 귀찮다는 듯 혀를 찬다. 물론 그의 반응은 정말로 ‘귀찮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회의장 안에 있는 다른 지휘관들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시선을 쥬넨에게 모으고 있었다.


“당신 입에서 ‘역사상’이라는 말이 나오지 좀 어색하군, 쥬넨 대령. 아 틀린 말은 아닌가? 당신네 고향 카나반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제국을 침범한 것이니.”


“진심입니까? 지금 유치하게 그런 싸움을 하고 싶습니까, 에밀리오 장군님?”


“자네야말로 아직 우리 제국군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네만? 언제부터 우리가 인질 따위를 써서 적과 협상했지? 딱 카나반 수준의 발상이로구만.”


쥬넨이 자리에서 일어나 열을 올리려는 순간,


“아아, 협상하려는 건 맞아.”


군단장 스이바노 브란트의 목소리가 모든 지휘관들의 이성을 붙들고 만다.


“구, 군단장님? 협상이라니요? 설마 저 베르달 촌놈들에게 허리를 굽히려는 생각은 아니시지요?!”


“어휴, 거참. 왜 그리 다들 극단적으로 생각해? 인질은 우리에게 있다고? 우리가 우위에 있다는 뜻이잖아? 이걸 이용해서 수없이 많은 전략적 이점을 챙길 수 있어. 놈들도 그걸 아니까 우리가 생각하기 전에 빠르게 틈을 찌르고 들어온 거고. 내 말 틀리나?”


“.......”


쥬넨과 대립했던 에밀리오를 포함하여 마음에 들지 않은 눈치가 몇몇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입 밖으로 그 불만을 내뱉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 그쪽 이름이 뭐랬지? 아 맞다, 에밀리오. 그래, 에밀리오의 말도 일리가 있지. 선빵 맞은 상태에서 갑자기 인질을 내세우면 쫄아서 어버버하는 티가 확 나잖아? 명색이 최전방, 최정예 제국 2군단인데, 쪽팔린 것도 정도가 있지, 안 그래?”

걸쭉한 브란트의 미소에 동조하는 지휘관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에밀리오의 입장을 핵심을 짚어 정리해놓긴 했지만, 그 어투나 내용에서 명예나 존경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근데 이왕 데리고 있는 인질을 안 쓰기는 뭐하고. 아 물론 자네들을 믿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니야. 설마 우리가 저따위 잡군한테 지지는 않겠지. 근데 위에서 엄청 쪼아대고 있어서. 뭔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거든. 알다시피 본국에서 우리 2군단을 보는 시선이 그리 곱지만은 않잖아.”


바로 곁에 있는 쥬넨과 가장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댄, 그리고 그들을 포함한 모든 지휘관과 영관급 장교들이 불편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군단의 명예와 미래가 걸려있는 가장 중요한 지휘관회의에서 군단장이 이런 태도라니, 참을 수 없는 의구심이 서서히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계책이라도 있으십니까?”


대표로 입을 연 자는 역시 2군단 최고령 장군인 에밀리오 달라무. 90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주름 없는 얼굴이야말로 그가 어떤 수준의 기사인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요소.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브란트라는 상관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뭐 계책까지는 아니고.......”


히죽 웃으며 뒤룩뒤룩 살찐 다리를 의자 위에 올려놓는 브란트.

가벼웠던 그의 웃음이, 어느새 싸늘하게 회의장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이걸로, 꽤나 귀한 목숨을 교환할 수 있을 거 같아.”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시간이 모자라서 검수도 못하고 올립니다.

새벽에 다시 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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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막간) 하나의 밤하늘, 세 개의 달빛 +11 16.08.29 623 14 15쪽
242 (22막) 세 개의 오만 (14) +10 16.08.24 576 13 16쪽
241 (22막) 세 개의 오만 (13) +9 16.08.19 450 13 26쪽
240 (22막) 세 개의 오만 (12) +6 16.08.14 494 9 18쪽
239 (22막) 세 개의 오만 (11) +10 16.08.09 599 11 17쪽
238 (22막) 세 개의 오만 (10) +6 16.08.05 608 13 14쪽
237 (22막) 세 개의 오만 (9) +6 16.07.30 578 14 15쪽
236 (22막) 세 개의 오만 (8) +8 16.07.26 534 11 24쪽
235 (22막) 세 개의 오만 (7) +8 16.07.20 639 13 19쪽
234 (22막) 세 개의 오만 (6) +7 16.07.15 679 12 21쪽
233 (22막) 세 개의 오만 (5) +8 16.07.10 685 13 22쪽
232 (22막) 세 개의 오만 (4) +6 16.07.05 634 14 18쪽
231 (22막) 세 개의 오만 (3) +9 16.06.30 576 12 18쪽
230 (22막) 세 개의 오만 (2) +6 16.06.25 651 13 18쪽
229 (22막) 세 개의 오만 (1) +6 16.06.20 730 15 16쪽
228 (막간) 현실을 마주하며 +4 16.06.15 750 16 16쪽
227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0) +10 16.06.10 729 14 21쪽
226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9) +8 16.06.05 730 12 16쪽
225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8) +4 16.05.30 698 15 19쪽
224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7) +6 16.05.25 724 11 19쪽
223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6) +4 16.05.20 955 10 22쪽
222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5) +5 16.05.14 777 12 18쪽
221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4) +2 16.05.09 703 13 15쪽
220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3) +6 16.05.04 1,027 12 18쪽
219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2) +4 16.04.28 741 16 17쪽
218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 +8 16.04.23 849 15 19쪽
217 (막간) 필요없는 증명. 필요한 증명. +10 16.04.18 739 18 13쪽
216 (20막) 증명 (9) +4 16.04.13 698 18 16쪽
215 (20막) 증명 (8) +8 16.04.08 670 20 16쪽
214 (20막) 증명 (7) +11 16.04.02 735 14 16쪽
213 (20막) 증명 (6) +10 16.03.28 783 13 15쪽
212 (20막) 증명 (5) +8 16.03.23 813 17 24쪽
211 (20막) 증명 (4) +8 16.03.18 947 16 23쪽
210 (20막) 증명 (3) +10 16.03.12 813 17 20쪽
209 (20막) 증명 (2) +10 16.03.07 887 20 19쪽
208 (20막) 증명 (1) +10 16.03.02 763 18 18쪽
207 (막간) 지평선으로 향하는 한걸음을 지켜보는 사람들 +8 16.02.26 810 19 17쪽
206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0) +8 16.02.21 910 24 21쪽
205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9) +10 16.02.16 1,033 20 22쪽
204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8) +6 16.02.11 809 17 28쪽
203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7) +6 16.02.06 765 19 21쪽
202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6) +6 16.02.01 828 17 22쪽
201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5) +10 16.01.27 820 17 17쪽
200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4) +10 16.01.22 965 16 18쪽
»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3) +8 16.01.17 707 20 18쪽
198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2) +10 16.01.12 773 20 19쪽
197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 +8 16.01.07 792 21 13쪽
196 (막간) 언젠가 +4 16.01.02 946 22 16쪽
195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2) +8 15.12.28 799 25 23쪽
19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1) +6 15.12.23 933 2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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