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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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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2.28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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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2)

DUMMY

언제나 그렇듯 침착한 얼굴이다.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은, 실로 무미건조한 입가와 허무함을 품은 눈동자다. 그러나 그를 오랫동안 봐왔던 자들이라면, 지금 그가 어느 정도의 ‘감정’을 씹고 있는지 대강 눈치를 챌 수 있다. 고도 또한 그 ‘자들’ 중의 하나였다.

먹색 시선에 흔들림이 없고, 다문 입술 사이로는 작은 숨소리조차 새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어깨 위로 느껴지는 그의 손가락엔 묘한 힘이 깃들어있다. 틀림없이,

벤은 분노하고 있었다.


“또 그 같잖은 나뭇가지야? 네가 할 줄 아는 건 그거밖에 없냐?”


“.......”


렌의 조롱을 향해 벤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건너편 건물의 옥상이라고는 해도 서로의 표정까지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기 때문에, 벤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건물을 휘감으며 올라왔던 나무줄기들을 자신의 곁으로 불러 모으고 있었다.


“어-이, 사령관님? 지금 이런 데서 여자한테 잘난 체할 여유는 없을 텐데? 네 소중한 병사들이 죽어나가고 있다고?”


렌의 지저분한 웃음과 가벼운 웃음은 쉬지 않고 계속된다. 그러나 그는 좀처럼 창을 앞세우고 달려들 틈을 찾아내질 못하는 중이었다. 마치 날카로운 검날처럼 이쪽을 향해 적의를 흔들고 있는 수많은 나무줄기들은, 렌이 이전에 경험했던 무력한 위협과는 거리가 멀었다.


“.......얼굴과 목소리 말고는 접점이 없다고 생각했어.”

간신히 들려오는 벤의 낮은 목소리.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어. 네가 뭔 짓을 하든, 뭔 선택을 하든, 뭔 지랄을 하든.”


줄기에서 또 다른 줄기가 솟아나고, 그 솟아나온 줄기에서 새로운 가지가 돋아난다. 마치 생명이 만개하는 듯한 몽환적인 광경이었지만, 그 날카로운 가지 하나하나에 치명적인 독의 기운이 서려있다는 것을 렌은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이어지는 벤의 목소리에 담긴 독기만큼은 이르지 못했다.



“근데 넌 선을 넘었어.”



“어휴, 무서워라. 근데 도대체 뭔 상관이야? 네가 그년의 뭐라도 돼? 임자 있는 몸이라고 손을 안 대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 아랫도리는 더 단단해졌을 텐데 말이야.”


고도는 순간 벤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흔들림 없는 그 표정과, 눈동자를 올려다본다.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고도는 자신의 몸과 정신에 남아있는 불결함조차 잊은 채 벤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얇은 입술에서 흘러나온 그의 대답은-


“내 멘티다.”


“.......”


고도는 반사적으로 납득의 고개를 끄덕였다.



“멘티? 그게 뭐야? 한마디로 네 거라는 거냐? 그러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자기가 못 먹을 거 남 주기는 아깝다- 뭐 그런 거냐?”


“꺼져. 목을 뒤틀어버리기 전에.”


“네~네~.”


렌은 웃는다. 그러나 그가 벤을 향해 달려드는 일은 없었다. 벤의 위협에 겁을 먹은 건 아니었지만, 그 또한 자신의 주변을 향해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는 불길한 기운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가벼운 도약으로 반대편 건물을 향해 등을 돌린다. 마지막 순간 살짝 돌아보는 그 미소를 향해 벤은 끝까지 먹색 눈동자를 놓지 않고 있었다.



“괜찮아?”


“아, 응.”

벤의 시선이 너무도 확고했기에, 고도는 그의 목소리가 자신을 향해있었다는 사실을 한 발짝 늦게 알아차리고 만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네 마력 탐지하는 거야 일도 아니지.”

슬쩍 고도에게서 벗어나 건물 아래로 향하는 벤의 시선.

“문제는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거지만.”


곳곳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대지. 달콤한 마력의 향을 맡고 몰려든 사냥꾼들이 하나둘 거대하고 역겨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리 낮은 건물은 아니었지만, 외벽을 오르는 것은 수많은 팔을 가진 템피드들에겐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건물을 감싸고 있던 나무줄기들이 그들의 접근을 저지하는 중이었지만 속도를 늦추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경량화 걸었지?”


“어? 어.......응.”


“꽉 잡아.”

사방에 퍼져있던 줄기들이 순식간에 하나의 거대한 밧줄처럼 얽히기 시작한다. 그 밧줄은 그대로 벤과 고도가 있는 옥상의 가장자리에서 솟구쳐 올라, 둘을 등에 업고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광장 쪽을 향해 뻗쳐나간다. 상상을 초월하는 그 방식과 속도에 고도는 균형을 잃고 떨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경량화 마법이 걸린 그녀의 몸은 벤의 빈약한 팔로 붙들 수 있을 정도로 가벼웠기에 그들은 무사히 지상으로 발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가자.”


물론 생명을 가지고 이 도시 안에 있는 이상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꽤나 많은 마력을 소모했음에도 벤이 쉴 틈도 없이 고도의 손을 잡아끌어야하는 이유였다.


고도는 별 대답 없이, 가만히 그의 차가운 손에 이끌려 따라갈 뿐이었다.








“상황은요?”


무사히 재회한 것에 대한 반가움을 표할 시간도 없었다. 벤은 광범위한 통신마력의 대가로 수많은 벌레들을 상대하느라 지쳐있는 오캄푸스의 뒤통수를 향해 ‘지휘관’으로서의 목소리를 내었고, 망자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의 공허한 눈동자는, 곧바로 지휘관의 그림자와 함께 나타난 소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무사하셨군요.”


“네, 뭐. 덕분에요.”


혹자는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향해 이렇게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고도를 이기적인 썅년이라 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캄푸스는 그녀의 심기가 불편한 이유가 다른 곳에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만약 상황이 여유로웠다면 그 틈을 파고들었겠지만, 벤은 틈을 주지 않는다.


“토우칸 대군과 카니아 경, 그 외 지휘관들 보고는 어때요?”


“기사나 사병들의 피해는 양호합니다. 문제는 마법사들인데, 마력에 대한 전파가 되기 전에 당황해서 마법을 난사한 자들은 모두 당했다고 봐도 될 정도입니다.”


“피해정도는요?”


“2에서 3할.”


탄식에 가까운 벤의 한숨.

오캄푸스의 통신 덕분에 태세를 재정비하고 합류한 뒤로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지만, 전 도시에 걸친 괴물들의 기습은 역시나 뼈아픈 손실이었다.

2할에 가까운 마법사전력의 이탈.

벤이 그려놨던 거대한 그림에 흠집이 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벤이 통합군의 새로운 방어진지로 삼은 남문에는 남색 제복의 군인들만 모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야이 씨발새끼들아! 내가 봤다고! 하얀 제복 놈이 내 부하한테 칼질하는 거!”


“그러니까 그놈한테 가서 따져. 내가 그랬냐고? 왜 나한테 지랄인데? 앙?”


괴물들을 피해 합류한 브린타이나 군과 곳곳에서 마찰이 빚어지고 있었다. 벤이 전달한 내용도 내용이지만, 실제로 브린타이나 병사와 기사들이 혼란을 틈타 카나반군을 공격했다는 증언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벌레들의 공격이 계속 이어지는 와중에도 서로 무기를 들이대며 으르렁거리는 주둔지의 풍경을 보며, 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제가 성급하게 판단했네요. 무작정 브린타이나군을 믿지 말라고 한 탓에 병사들의 반감이 더 커진 거 같아요.”


“어쩔 수 없지요. 만약 검성께서 그렇게 명령을 내리지 않으셨다면 일부 불순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브린타이나 인간들에 의해 피해가 더욱 커졌을 겁니다.”


“브린타이나가 저 벌레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들도 저 벌레들에 의해 커다란 타격을 받고 있으니까요. 그나마 우린 빠른 판단으로 결집해서 이 정도였지, 아직 브린타이나군은 도시 곳곳에 흩어져서 벌레들의 먹이가 되고 있을 겁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왕국군은 오직 살기 위해 흘러들어온 것뿐일 테죠.”


“.......그 미친 새끼는 지 부하들이나 지휘할 것이지 엉뚱한 데에.......”


“예?”


“아아, 아닙니다.”


누군가를 향한 욕지거리를 주워 담으며, 벤은 화염마법에 휩싸인 주둔지를 크게 둘러본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적을 맞이하여 충격에 휩싸인 병사와 기사들. 동료가 산채로 잡아먹히는 광경을 두고 도망쳐 나와야 했던 마법사들의 흐느낌과 한숨. 당장이라도 서로 목을 물어뜯을 기세로 맞부딪치는 남색병사들과 흰색병사들.


‘실패’라는 단어가, 벤의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실패’는, 절대로 ‘마지막’을 의미하는 단어는 아니었다.


“병사들을 수습해서 남쪽진입로로 후퇴합시다. 거기서 로쿠베 경과 합류해야 하니.”


“도시를 포기하시는 겁니까?”


“애초부터 놈들은 오스타이나를 점령하거나 침략의 전초기지로 써먹을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군사실험을 위한 실험장이었어요. 그리고 만족할만한 결과를 냈으니, 우리도 빠르게 그에 대처할 방법을 찾아야겠죠.”


“이대로 물러나시면 브린타이나로서는 제국3군단의 위세를 꺾기 어려워질 겁니다. 게다가 오늘 여기 있었던 브린타이나군과 카나반과의 충돌도 국제적인 문제로 불거질 수 있어요. 많은 논란만 남긴 채 뭔가 성과를 내지 못하고 돌아가는 형식이 되어버린다면, 결국엔 통합군의 존재가치 자체에 의심을 품은 자들이 생겨납니다.”


“물러나지 않습니다.”


단호한 벤의 목소리에 아집은 담겨있지 않다. 오캄푸스는 보이지 않는 미소를 품고 그런 검성을 돌아보았다.


망자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 검성의 탈을 쓰고 있는 마법사는,

절대로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상대를 놓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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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또 전쟁입니까? 시찰의 의미가 의심스럽다 했더니 결국 폐하께선 또 일을 저지르시는군요!”

마누앙이 개정선언을 하기도 전에 란다의 분노어린 외침이 먼저 회의실을 때려버린다. 오로메를 비롯한 왕당파 귀족들의 미간이 구겨진 것은 물론이었지만, 란다의 목소리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비어있는 상석을 향해 다시금 날을 세운다.

“마즈다힐 침략이라니요?! 언제부터 우리가 침략행위를 하는 강도집단이 되었습니까? 이래서야 제국과 하는 짓이 똑같지 않습니까?! 게다가 의회의 동의도 없이 군을 움직인 것은 분명한 독재행위! 당장 군을 물리고, 관계자를 법정에 소환해야 할 것입니다!”


“란다 가슈펠라르 경에게 발언권을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그를 막아서는 것에 의미가 없음을 알았기에 마누앙은 결국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바뀐 병역법에, 끝나질 않는 전시증세까지. 국민들의 신음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무작정 일만 벌이는 걸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뭘 위한 군 개편이었습니까? 아직 팔루뎀건이 마무리되지도 않았는데, 계속 이러다가는 국가재정이 파탄 날 것입니다!”


“도발은 제국이 먼저 자행했습니다. 보고서를 읽으셨다면 아실 텐데요. 베르달의 영주 크라트 니바르토의 영애가 납치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상관없는 안건을 이 일에 끌어들이지 마세요, 란다 경. 통합군은 침략을 위해 만들어진 군대가 아닙니다. 검성을 비롯하여 전력의 대부분이 팔루뎀으로 파견되어있는 상태인데, 여기서 왜 통합군과 군비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까?”


잔뜩 격앙된 란다와는 달리, 오로메의 목소리는 특유의 차분함과 여유가 잔뜩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지적으로도 란다의 입술은 멈출 수가 없었다.


“왕당파야말로 은근슬쩍 묻어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미 나이트 마제스티는 물론이고 폐하까지 베르달에 계시지 않습니까! 폐하가 시찰을 한 다음 날에 우연히 크라트 경의 딸이 납치되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의회의 동의 없이 군을 움직이려는 핑계가 아닙니까?!”


“근거가 없는 낭설은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곳은 의회이지, 언론사가 아닙니다.”

결국 보다 못한 마누앙이 중재에 나선다. 그러나 자리에 앉는 란다의 얼굴에 조급함은 깃들어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가 노렸던 것은 왕당파의 설득이 아니었으니까.

우연찮게도, 마누앙의 시선 또한 란다의 의중과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시민당의 의견을 들어보겠습니다.”


언제나 양립만 해오던 공화국의회에 이런 마누앙의 목소리는 분명 색다른 광경이었다.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귀족파와 왕당파. 그런 양당을 모두 감싸고 있는 형태로 바깥쪽에 위치한 시민당의 의석은 온갖 시민단체의 의장, 상인과 농민은 물론이고 상이군인단체의 대표까지도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대표들’을 ‘대표’하는 한 여인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민당대표 아델은 당황하지 않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 시선들과 정면으로 마주한다. 가슈펠라르 가문의 피가 섞인 여인들의 아름다움. 그 속설에 대한 진위여부는 언제나 아르다르 시민들의 화두에 오르내리지만, 아델의 앞에선 그 누구도 그 속설을 부정하지 못한다.

깔끔하게 선이 정돈된 흰색 셔츠와 그 셔츠를 감싸는 검은색 정장. 그 진부함도 아델의 빛을 죽이기엔 무리였다. 새빨간 눈동자는 모든 이성을 빨아들일 기세로 매혹적이게 빛나고, 말끔하게 묶어 올린 황금빛의 머리카락은 태양이 시기할 정도로 눈부시다. 그녀가 일어난 것만으로도 귀족파와 왕당파 간의 포화로 고조되던 의회의 분위기가 차분해질 정도였다.


“우선, 법적으로만 따져서 이번 공격행위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공화국에서 배제되어야 할 것은 전쟁범죄이지, 자국민의 이익과 안녕을 위한 군사행동이 아니니까요. 폐하께서 직접 보내신 보고서를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의회의 동의가 없이 군을 움직인 것은 현장지휘관으로서 선조치후보고를 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전시의 작전우선권은 어디까지나 현장지휘관에게 있습니다. 폐하로부터 통솔권을 부여받은 나이트 마제스티께서 ‘현장지휘관’으로서 전략전술을 판단하셨고, 베르달 지휘관이 그에 동의해서 시작된 군사작전입니다. 단순히 폐하의 독재행위로 치부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뒤틀리는 란다의 눈썹과, 얇게 이어지는 오로메의 한숨.

“다만-.”

그러나 아델의 말은 끝나지 않는다.

“통합군 재편으로 인한 군비확충과 전시증세로 인해 민생이 흉흉해진 것 또한 사실입니다. 늘어나는 가계부채와 세금을 견딜 수가 없어 중립국인 욘으로 망명을 신청한 시민들의 숫자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습니다. 그리고 이건 개개인뿐만이 아니라 기업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이번 달만 해도 세 개의 기업이 욘의 주정부에게 기업이전의 가능 여부를 문의했다고 합니다. 이런 사태가 이어진다면 공화국경제에 큰 타격이 될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런 세수와 국고 확보를 위한 팔루뎀 양도였습니다. 지금 당장이야 여러가지 지출이 부담스럽겠지만, 팔루뎀일대가 완벽하게 공화국으로 편입된다면 장기적으로 상당한 이득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곧바로 오로메의 반박이 이어진다. 란다가 뒤이어 판에 끼어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이미 대립양상은 오로메와 아델이 가져간 뒤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팔루뎀의 교역권을 욘에게 양도한 거죠? 만약 브린타이나와 우리 공화국의 협력관계가 고착되더라도 팔루뎀이야 말로 양국 간 교역의 중심지가 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건....... 삼자협상과정에서 나온 안건이라.......”


오로메가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팔루뎀의 교역권은 로빈과 론크리스 국왕, 그리고 욘의 대통령 사이에서 이루어진 비밀협상의 결과물이었으니까. 그 협상의 주체였던 로빈조차도 어째서 욘이 팔루뎀의 교역권을 원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자신이 정답을 내어놓을 수 있겠는가.


“물론 팔루뎀을 양도받은 업적은 훌륭합니다. 다만 그 과정과 결과물을 논의함에 있어 우리 시민당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었으면 합니다. 이번 마즈다힐 침공건도 마찬가집니다. 단순한 보복이 아닌, 이번 침공으로서 우리 공화국에 오는 이득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번 일로 하여금 제국과의 대치상태나 제국3군단의 움직임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그 모든 정보를 함께 공유하고, 함께 논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경건하고 딱딱한 자세를 고수하고 있는 귀족들과는 달리, 시민당의 의원들은 아델이 자리에 앉자마자 거친 박수와 환호성을 내뱉는다. 마누앙이 곧바로 정중하게 자제를 요청했지만, 그들의 소란스러운 웃음소리는 그 뒤로 한참이나 이어진다. 몇몇 귀족들은 그들의 유쾌함에 함께 웃었고, 몇몇 귀족들은 이 자리에 맞지 않은 경박함이라며 혀를 찬다.


의회의 분위기는, 분명히 바뀌고 있었다.







“대표님! 대표님!”


“네?”


점심식사를 위해 대합실로 내려서던 아델을 불러 세우는 시민당 의원. 아델은 호탕하게 계단을 내려오는 청년의 이름이 율리우스 반달이며, 그가 대기업의 후계자답지 않은 지역봉사와 노동자들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통해 의원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대표님. 이야, 말 잘하시던데요?”


시민당의 의원들 중에 손꼽힐 정도로 거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 반달이지만, 그의 차림새는 같은 대열에 앉아있던 농부대표와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수수하고 차분했다. 굳이 차이점을 뽑자면, 군인처럼 장대한 기골의 몸집이 눈에 띄는 정도였다.


“아니에요. 저야 아직 한참 부족하죠. 당원 여러분께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생긋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아델. 반달은 크게 웃으며 뒤통수를 벅벅 긁어보지만,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기엔 무리가 있었다. 대합실로 내려오는 계단 위로는 이미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감한 시민당 의원 몇몇이 흥미롭게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그, 대표님........”


“네?”


눈부신 미소. 차마 마주할 수 없어 반달의 고개는 자꾸만 돌아가려고 한다.


“그....... 저, 지금 혹시, 아직 식사 안 하셨으면 같이....... 그러니까 둘이 식사나 하지 않으실래요?”


결국 계단 위에서 장난기 가득한 휘파람소리와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평소였다면 그런 그들을 향해 주먹질을 해보이며 웃었겠지만, 반달은 긴장으로 인해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아....... 죄송해요. 선약이 있어서.......”


꾸벅 머리를 숙이며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아델.


“그, 아, 괜찮습니다, 하하. 선약이 있으시다니, 어쩔 수 없죠. 하하하.......”


애써 웃는 반달과,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탄식을 내뱉는 의원들. 그 의원들의 대부분이 반달과 같은 경험을 했던지라, 그들의 안타까움엔 진심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정말 죄송해요. 부디 다음에 다른 의원분들이랑 같이 식사자리를 만들어 볼게요.”


“아, 예, 옛! 알겠습니다! 그럼 식사 맛있게 하세요!”


아기고양이라도 만지는 듯 조심스럽게 아델의 손을 붙잡고 악수를 한 뒤에, 터덜터덜 동료들이 있는 계단 위로 올라가는 반달. 의원들은 그런 반달을 웃음과 손바닥으로 반갑게 맞이해준다. 또 다른 동지의 탄생이었으니까.


아델은 미소를 풀지 않고, 천천히 대합실을 지나 본궁의 입구를 빠져나간다.

그녀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근위병 외엔 아무도 보이지 않는 별관. 그중에서도 나무들과 꽃이 어우러져 있는 뒤쪽의 작은 정원이었다.



“오셨습니까.”


그곳에서 반갑게 아델을 맞이한 이는, 다름 아닌 마누앙이었다.


“아, 오늘은 볼라뇽 샐러드시네요? 그거 맛있죠?”


“추천하셔서 한 번 사봤습니다. 맛있군요.”

정원에 식탁이 있을 리 만무하다. 마누앙은 허리 높이의 화단에 앉아, 무릎 위로 식당에서 파는 도시락을 올려놓은 상태였다. 아델은 거리낌 없이 그런 그의 곁에 앉아 똑같이 도시락을 꺼내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이들이 이와 같은 점심시간을 이미 수없이 반복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로빈 외엔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란다 경의 악의적인 공격을 잘 흘려넘기면서도 중심쟁점을 잘 파악해주셨더군요. 덕분에 다음 논의 때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다행이에요. 오로메님이 당황하시는 거 보고 잘못하고 있는지 걱정했거든요.”


“오로메 경은 아군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란다 경이 당신의 아군도 아니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아델 양께서는 중립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언제나 제3의 목소리. 그것을 잊지 않으시면 됩니다.”


“네, 알고 있어요. 여기서 지겹게 들어왔으니깐.”


닭고기를 입안 가득 물고 있긴 하지만 역시나 해맑은 미소다. 비록 쌓여가는 피곤과 바쁜 일정 때문에 눈 밑의 그늘은 짙어진 상태였으나, 그녀가 어느 때보다도 생기가 넘치고 있다는 사실을 마누앙은 쉽게 느낄 수 있었다.


“흐음, 그나저나. 폐하와 지나 언니는 괜찮은 걸까요.......? 로즈도 걱정되긴 하지만, 여왕의 몸으로 전장에 선다니.......”


“그들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델 양에게만 말씀드리는 거지만, 이 모든 일은 그들에게 있어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목소리? 수단?”


동그랗게 눈을 뜨며 총리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아델. 그에 마누앙은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내려놓고,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을 올려다본다.


“잊기 쉽지만, 본궁에 있는 모두가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폐하도, 여왕도, 검성도, 루디도, 저도, 그리고 당신도.”


“.......”


“잃어버린 목소리는 되찾을 수 없지요. 하지만 새로운 목소리는 언제나 과거를 되찾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그렇기에 모두가 앞을 향해 움직입니다. 폐하와 여왕은, 여왕의 아랫배에 새겨져 있는 상처와 그곳에서 잃어버린 목소리를 되찾고자 앞으로 나아갑니다. 검성은 자신의 가슴 속에서 잃어버린 목소리를 위해, 그리고 폐하라는 목소리를 위해 앞으로 나아갑니다. 당신은 가슈펠라르 저택의 정원에서 잃어버린 한 목소리를 위해 눈물을 털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아델, 저는 무슨 목소리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거 같습니까?”


“.......글.......쎄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아델은 멍하니 입술을 움직인다. 순간 총리의 마른 입가에서 미소를 본 것 같지만, 기분 탓이겠지.


“제 시간은 끝나갑니다. 무능한 남편으로서의 시간이 끝났고, 무능한 아비로서의 시간은 끝났습니다. 그때의 목소리를 되찾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제 모든 시간이 끝나기 전에 되찾아야 할 목소리가 하나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 확신을 갖게 된 것은, 아뮤르 한센의 마지막을 부럽다고 느낀 순간이었지요.”


“네.......?”


수많은 경험과 조언을 갖기 위해 마련된 ‘점심시간’. 여태까지 그로부터 수많은 가르침과 지적을 받아왔지만, 이번만큼은 그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기에 아델의 젓가락은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한다.


마누앙이 하늘로부터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델을 바라본다.

당의 대표라는 직위와 정장이라는 시간을 입고 있긴 하지만, 역시 아직은 여린 소녀의 빛이 남아있는 아델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가 되찾아야 할 목소리가


그곳에 있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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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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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막간) 하나의 밤하늘, 세 개의 달빛 +11 16.08.29 623 14 15쪽
242 (22막) 세 개의 오만 (14) +10 16.08.24 578 13 16쪽
241 (22막) 세 개의 오만 (13) +9 16.08.19 450 13 26쪽
240 (22막) 세 개의 오만 (12) +6 16.08.14 497 9 18쪽
239 (22막) 세 개의 오만 (11) +10 16.08.09 599 11 17쪽
238 (22막) 세 개의 오만 (10) +6 16.08.05 608 13 14쪽
237 (22막) 세 개의 오만 (9) +6 16.07.30 578 14 15쪽
236 (22막) 세 개의 오만 (8) +8 16.07.26 534 11 24쪽
235 (22막) 세 개의 오만 (7) +8 16.07.20 639 13 19쪽
234 (22막) 세 개의 오만 (6) +7 16.07.15 680 12 21쪽
233 (22막) 세 개의 오만 (5) +8 16.07.10 686 13 22쪽
232 (22막) 세 개의 오만 (4) +6 16.07.05 636 14 18쪽
231 (22막) 세 개의 오만 (3) +9 16.06.30 576 12 18쪽
230 (22막) 세 개의 오만 (2) +6 16.06.25 651 13 18쪽
229 (22막) 세 개의 오만 (1) +6 16.06.20 730 15 16쪽
228 (막간) 현실을 마주하며 +4 16.06.15 751 16 16쪽
227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0) +10 16.06.10 731 14 21쪽
226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9) +8 16.06.05 731 12 16쪽
225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8) +4 16.05.30 699 15 19쪽
224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7) +6 16.05.25 724 11 19쪽
223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6) +4 16.05.20 956 10 22쪽
222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5) +5 16.05.14 777 12 18쪽
221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4) +2 16.05.09 703 13 15쪽
220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3) +6 16.05.04 1,029 12 18쪽
219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2) +4 16.04.28 743 16 17쪽
218 (21막) 악몽을 마주하며 (1) +8 16.04.23 851 15 19쪽
217 (막간) 필요없는 증명. 필요한 증명. +10 16.04.18 740 18 13쪽
216 (20막) 증명 (9) +4 16.04.13 700 18 16쪽
215 (20막) 증명 (8) +8 16.04.08 672 20 16쪽
214 (20막) 증명 (7) +11 16.04.02 735 14 16쪽
213 (20막) 증명 (6) +10 16.03.28 785 13 15쪽
212 (20막) 증명 (5) +8 16.03.23 813 17 24쪽
211 (20막) 증명 (4) +8 16.03.18 948 16 23쪽
210 (20막) 증명 (3) +10 16.03.12 813 17 20쪽
209 (20막) 증명 (2) +10 16.03.07 887 20 19쪽
208 (20막) 증명 (1) +10 16.03.02 766 18 18쪽
207 (막간) 지평선으로 향하는 한걸음을 지켜보는 사람들 +8 16.02.26 810 19 17쪽
206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0) +8 16.02.21 912 24 21쪽
205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9) +10 16.02.16 1,033 20 22쪽
204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8) +6 16.02.11 810 17 28쪽
203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7) +6 16.02.06 766 19 21쪽
202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6) +6 16.02.01 828 17 22쪽
201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5) +10 16.01.27 822 17 17쪽
200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4) +10 16.01.22 965 16 18쪽
199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3) +8 16.01.17 707 20 18쪽
198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2) +10 16.01.12 774 20 19쪽
197 (19막) 너의 색으로 물드는 지평선 (1) +8 16.01.07 794 21 13쪽
196 (막간) 언젠가 +4 16.01.02 948 22 16쪽
»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2) +8 15.12.28 800 25 23쪽
194 (18막) 우리가 다시 목소리를 품기 위해서 (11) +6 15.12.23 934 2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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